성아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내 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봐. 난 두 사람한테 그저 너에게 겁만 주라고 시켰어. 절대 널 해칠 생각은 없었어.”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때 당시 두 사람을 모습을 보아서는 나한테 겁만 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은서야, 난 진짜 너에게 겁만 주라고 했어. 그냥 너한테 쌓인 화를 풀고 싶었을 뿐이야. 요즘 더러 날 전처럼 친하게 대해주지 않은 데다가 네 할아버지랑 얘기 나누는 것조차 못하게 했잖아. 그래서 네 숙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린 게 다 네 아이디어인 줄 알고 오해했던 거야. 나도 네 숙모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성아연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사과하라면 하고 보상금도 얼마든지 줄게.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용서해준다고 했잖아.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고은서는 자신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성아연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약간 속이 불편했다.전에 그녀는 성아연을 베프라고 생각하면서 뭐든지 그녀에게 공유했었다. 비록 욕심이 많긴 했으나 다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다.특히 그녀가 곽승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서 곽승재와 백유미를 대신 욕해줄 때 감동 받기도 했다. 심지어 성아연이 그 어떤 일을 해도 다 용서해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었다.그러나 이번 생에 다시 눈을 뜬 후, 고은서는 성아연의 모든 모습이 다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면서 해치려 했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고은서는 성아연의 각종 행위가 너무 혐오스러웠으나 그녀와 인연만 끊고 살려고 했지 절대 그녀를 해치려고 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성아연은 도를 넘는 행위를 계속 지속해왔다.GS 그룹 연회에서 성아연은 일부러 그녀를 여론의 중심으로 몰아넣었고 또 MQ를 모함하기 위해 고준석을 온갖 감언이설로 홀리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이내 타깃을 단은숙으로 바꾸었다.
“네가 싫으니까!”성아연의 원망이 담긴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걸 발견했다.성아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이 말을 내뱉은 이상 더는 돌아설 길이 없었다.“내가 널 좋아해서 너랑 친구 한 줄 알아? 다 아빠가 강요한 거야! 네 할아버지가 널 제일 아낀다고 너한테만 잘해주면 할아버지가 나한테도 잘해줄 거라고 날 강요한 탓이라고!”성아연이 분노가 들끓은 눈빛으로 고은서를 쏘아보며 말했다.“같은 여자인데 왜 넌 항상 공주 대우를 받고 난 마치 하인처럼 네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건데? 무슨 일이든 네가 했다면 다들 칭찬하기 일쑤였고 난 그저 너의 배경판처럼 네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나한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내가 너보다 못난 곳이 어딘데? 능력도 너보다 차하지 않잖아. 그런데 학교에 있는 남자애들은 네 연락처를 얻기 위해 나한테 다가올 뿐 날 좋아해서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던 남자애들도 너만 보면 다 너한테로 몰려들잖아. 네가 나였어 봐. 어떤 느낌인지!”고은서는 눈을 부라리고 자신을 향해 호통치는 성아연을 보며 무슨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성아연이 자신을 이토록 미워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작 그까짓 일로 나와 우리 집안을 망치려 했던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래!”성아연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변명하고도 싶지 않았다.“고은서, 넌 네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모를 거야. 난 시시각각 널 짓밟아버리고 싶었다고. 너도 나처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혼자 고독하게 아등바등하는 걸 느껴봐야 한다고!”성아연은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네가 곽승재 때문에 자존심을 꺾을 때마다 내가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지? 너도 더는 도도한 공주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남자는 너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내가 얼마나 속 시
고은서는 성아연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서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성아연이 왜 백유미랑 손을 잡고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성씨 집안도 꽤 괜찮은 집안이어서 돈이 모자랄 리는 없었다. 그 말인즉슨 금전 때문에 그녀를 해치려 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게다가 성아연이 백유미와 손을 잡았다고 해도 고은서한테서 얻은 것보다 더 얻을 수는 없었다.‘처음부터 날 싫어하면서 나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구나. 전생에 날 보러 정신병원에 단 한 번도 오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당신 인생은 당신 스스로 망친 거예요.”고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씨 집안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탐내지 않았으면 고은서한테 잘 보일 필요 없고 고은서랑 가까이 지낼 필요도 없잖아요. 그런데 고은서 곁에서 누릴 건 다 누리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고은서를 원망한다고? 너무 어이없지 않나요?”곽승재는 아주 담담하게 사실을 콕 집어 말했다.“게다가 방금전에는 고은서보다 못한 곳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쪽보다 고은서를 더 좋아하는 걸까요? 한 사람뿐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닐 거 아니예요.”성아연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곽승재가 고은서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는 걸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고은서를 위해 자신을 반박할 정도로 변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은서도 약간 놀랐다. 평소에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입 한 번 뻥긋하지 않던 사람이 자신을 위해 나서준다는 게 차마 믿기지 않았다.“고은서가 그렇게 우수해 보인다면 설마 그때 당시 결혼한 것도 고은서를 사랑해서예요?”성아연이 일부러 물었다.그녀는 곽승재가 고은서를 좋아한 적이 없고 결혼도 고은서가 강요해서 한 것이라는 걸 빤히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물음을 물어보는 건 일부러 고은서를 난감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네.”고은서가 성아연에게 닥치라고 말
기사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고은서가 호텔에 두고 온 폰도 이미 사람 시켜 가져온 상태였다.그녀는 폰을 받아들고 고장 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상처가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에 돌아가 있어. 난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고은서는 옆에 있는 곽승재에게 말했다.“내가 다 나을 때까지 날 간병해주기로 했잖아. 어딜 가려는 거야?”“그냥 외상만 입었을 뿐이잖아. 주의하면서 푹 쉬면 곧 나을 거야. 굳이 옆에서 간병해줄 필요 없는 거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고은서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곽승재를 올리 쳐다보면서 답했다.“그럼 계속 네 눈앞에 나타나도 된다는 뜻이지?”곽승재의 눈에서 약간의 기대가 보이는 듯했다.“그런 뜻은 아니야. 볼일 보고 병원으로 갈게. 약속대로 오늘 저녁까지는 간병해 줄 거야. 그런데 내일 퇴원하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갈 땐 혼자 가도록 해. 난 더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당신도 약속 지켜줬으면 좋겠어.”“고은서!”고은서가 한창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오늘은 직접 운전하지 않았는지 뒷좌석에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도 마침 ZY 그룹으로 가야 했기에 곽승재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하고는 민시후가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기사가 내려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고은서도 별다른 생각 없이 차에 올랐다.주차장을 나가면서 민시후는 백미러로 곽승재를 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네가 내 차에 오르는 걸 막지 않다니. 인내심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네.”고은서도 그의 말을 듣고 백미러로 곽승재를 보았는데 그는 차 옆에 한참 동안 서 있었는데 다쳐서일까, 약간 외로워 보였다.“경찰서에는 왜 온 거야?”고은서가 시선을 돌리고 민시후에게 물었다.“왜겠니? 당연히 네가 걱정되어서 온 거지.”민시후가 건들건들하게 말했다.고은서는 그의 속셈을 알아보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날 곽승재를
“성아연과 백아연이 어떤 사이든 이번 일을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주민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곽승재는 방금전 고은서의 무덤덤해 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분명 아무런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인데 저런 깊은 악의를 겪어야 했다니.심지어 그는 전에 성아연을 지시한 사람이 고은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전에 고은서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비난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 났다.주민기가 떠난 후, 곽승재는 육현석에게 연락했다.“여자들은 보통 어떤 선물을 좋아해?”육현석은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의심하는 말투로 물었다.“승재 형? 승재 형 맞아? 혹시 납치라도 된 건 아니지?”곽승재는 그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전에 여자 마음을 엄청 잘 안다고 잘난체하고 다녔잖아.”그러나 곽승재의 생각과 달리 육현석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전에는 내가 방법을 알려줘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잖아. 한 번 잃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번에는 안 알려줄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전에 네 아버지가 나한테 네 결혼 상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셔서 이미 괜찮은 사람 한 분이랑 얘기 나눠봤는데 널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내일쯤 시간 찾아서 네 아버지랑 얘기해 볼 생각인데, 괜찮겠어?”육현석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불만을 토로했다.“형, 그거 협박이야! 나한테 지금 부탁하는 입장이잖아. 그러면 부탁하는 사람다운 태도를 보여야지. 왜 나를 협박하고 그러는 거야!”“그럼 내일 아버지랑 얘기 나눠 보도록 할게.”곽승재가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육현석이 큰소리로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곽승재! 그래 항복할게. 도와주면 될 거 아니야.”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얼른 말해.”육현석은 심호흡을 하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육현석은 곽승재를 대신해 방법을 생각해주었다.“이름 있는 판다 기지로 가보는 건 어때? 아기 판다도 만져볼 수 있다던데. 비록 소비가 높고 시간제한도 있긴 하지만 형한텐 별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면 형수님도 판다를 보게 되어서 기뻐할 거고 형도 형수님이랑 데이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잖아. 안 그래? 어릴 적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지금 대신 이뤄주는 것과 같은데 형한테 고마워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형한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되는 거지.”곽승재는 육현석의 아이디어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평소에 만나기만 해도 기분 나빠하는 그녀가 그와 함께 나가는 걸 원하는지가 제일 큰 문제였다.“형, 내 아이디어는 여기까지야. 형수님을 어떻게 설득하는가는 형이 생각할 문제고. 그런데 또 자존심 세우면서 명령하는 식으로 말하지 마. 형수님 그런 거 질색하는 거 알지? 부드럽게 같이 가자고 설득해봐. 언젠간 받아들일지도 모르잖아.”전화를 끊은 후, 육현석은 너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형이 형수님을 관심해주면서 선물까지 준비해주려고 하다니. 너무 대견해.’육현석은 박지연에게 이 희소식을 전하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시후는 고은서와 함께 ZY 그룹으로 돌아가는 대신 단온 별장을 향했다.“여긴 왜 온 거야?”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오늘 집 보러 온다고 어제 약속했잖아. 여기 보안이 좋아서 집주인이 아니고는 거의 들어오지 못해. 미리 이사 왔으면 어제 같은 사고를 당할 일도 없었잖아.”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어젯밤에 겪은 일이 이미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여전히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저도 모르게 무서워 났다.“상대가 날 해치려고 굳게 마음을 먹거든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어이없다는 듯 툴툴거렸다.“넌 왜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냐. 친구를 사귀어도 하필 성아연처럼 종일 상대방 뒤통수를 치는 사람을 사귀냐.”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은서가 성아연에게 당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왜 입만 열면 곽승재 얘기예요? 설마 곽승재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죠?”“고은서, 너 지금 날 엿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소리 하는 거지?”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고은서를 한 대 살짝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고은서가 아주 민첩하게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민시후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는데 갑작스레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그는 순간 손을 떼는 걸 잊고 있었다.“저리 비켜!”고은서가 성가시다는 듯 그를 밀어냈다.그러나 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 앞으로 다가가면서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고은서, 내가 말했지?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선택해 봐. 한 대만 맞을래, 아니면 두 대 맞을래?”민시후는 하인을 농락하는 나쁜 부잣집 도련님처럼 고은서의 턱을 치켜올리며 물었다.“혹은 나한테 키스라도 한 번 해줄래?”“꺼져!”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의 무릎을 발로 차버렸다.민시후가 숨을 길게 들이쉬며 허리 굽혀 아픈 무릎을 어루만질 때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맞아야 할 사람은 너야.”‘진짜 병이라도 있는 건가? 자꾸 날 놀리려고 하네.’“고은서, 너 좀 여자답게 굴면 안 돼?”민시후가 그녀를 쏘아보며 호통쳤다.“나처럼 잘생긴 남자가 너한테 벽치기를 하는데 어떻게 부끄러워하며 좋아하지도 못할망정 날 발로 찰 수가 있어?”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무릎을 찬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잘생긴 민시후 씨.”“너!”민시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화난 민시후와 달리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갈 떠올린 듯 다시 입을 열었다.“민 도련님의 이런 모습을 송민아 씨가 알게 되면 어떨까요? 민 도련님을 향한 애정의 마음을 접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고은서!”민시후가 또다시 호통을 치면서 화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붙잡으려고 할 때 고은서는 영활하게 문 뒤로 숨으면서 투항했다.“그만 이젠 회사로 가자. 나 할 일이 있어.”민시후는 자신을 피하는 듯한 고은서를
“민시후가 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날 좋아하겠어? 게다가 곽승재를 엄청 싫어하잖아. 날 미워하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일인데 절대 날 좋아할 리가 없어.”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고은서의 말을 반박했다.“널 좋아하지 않는데 널 지금까지 도와줬다고? 그리고 널 좋아하지 않으면 네가 거절했다고 왜 화를 내는 이유가 뭔데?”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언제 거절했다고 그래? 민시후 나한테 고백한 적도 없어.”“고은서, 너 정말 바보 아니야? 좋아하는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민시후가 그러는 게 고백하는 거랑 마찬가지잖아!”민시후가 그녀를 잘 대해준 건 사실이다. 가끔 알아듣지 못할 의미심장한 말을 할 때도 있었으나 전에도 그렇게 장난을 많이 쳐왔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고은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지연아, 그만 말해. 나 갑자기 무서워지려고 그래. 소름 돋았어.”“...”박지연은 어이없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야?”고은서가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물었다.“어제 하마터면 납치될 뻔했다며? 육현석이 알려줘서 다행이지 나한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박지연은 그제야 고은서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말했다.“너무 갑작스레 발생한 일이기도 하고 또 오늘 종일 바쁘게 다니다 보니까 미처 너랑 말하지 못했어.”고은서가 미안해하며 대답했다.“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야? 성아연은 왜 갑자기 이런 일을 꾸민 거고? 육현석도 자세한 건 안 알려주던데.”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그러니까 고씨 집안을 망가뜨리려고 했는데 실패했고 또 그 일 때문에 네 숙모한테 시달림을 받았는데 그게 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고 널 해치려 했다는 거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박지연은 성아연이 고은서의 옛 베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몇 번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런데 왜 분명히 백유미랑 손잡고 널 해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