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아래, 곽승재의 피부가 여느 때보다 더 하얘 보였고 넓은 어깨와 튼튼해 보이는 근육, 그리고 매끈한 몸선이 유독 눈에 띄었다.마치 명장이 직접 조각해낸 작품처럼 매혹적인 몸매였다.그는 어깨에 붕대를 두른 채 허리에는 흰 이불을 덮고 병상에 앉아 있었는데 허약한 모습이지만 나름 매력적이었다.허약함은 그의 매력을 한 층 더 가할 뿐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이런 모습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언제까지 쳐다볼 생각이야?”곽승재가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말투가 여전히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방금전처럼 차갑지는 않았다.고은서는 덤덤하게 눈길을 돌리며 애써 어색함을 감추려고 했다.‘내 탓은 아니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고.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걸 어떡해.’고은서는 곽승재 옆에 다가가서야 그가 셔츠를 완전히 벗은 게 아니라 주삿바늘을 꽂은 오른손 밑에 깔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아직도 링거를 꽤 맞아야 해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는데 셔츠는 왜 벗은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계속 입고 있어.”곽승재가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깨끗한 옷을 건네주었다.“먼저 걸치고 있지 그래?”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왼쪽 팔을 내뻗었다.튼튼한 팔이 그녀의 눈 가까이 확 들어오면서 피부결까지 선명히 보였다.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하다는 듯 물었다.“어쩌라는 거야?”“입혀주지 않고 나 혼자 어떻게 입어?”“벗는 건 혼자 할 수 있고 입는 건 혼자 할 수 없다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계속 보고 싶거든 안 입어도 괜찮아.”곽승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내가 언제 계속 더 보고 싶다고 했는데? 스스로 옷을 벗
고은서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왜 혼자야? 병원에 의사 선생님들도 있고 간호사 선생님들도 있잖아. 게다가 기사님이 계속 아래에서 대기 중이기도 하고. 아니면 주민기 씨한테 간병인 두 명 정도 모셔달라고 하든가.”“그러니까 네 마음속에서 난 주민기보다도 못하다는 거야?”곽승재가 갑자기 엉뚱한 물음을 제기하는 바람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되물었다.“주민기 씨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언제 당신을 주민기 씨랑 비겼어?”‘난 그저 간병인을 모셔달라고 주민기한테 부탁하라고 말했을 뿐인데.’“전에 바에서 술병을 대신 막아준 거 나한테 주민기였어도 막아줬을 거라고 했잖아.”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널 구하기 위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날 간병해주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잖아.”‘기억력은 좋은데 대체 저 이상한 결론은 뭘까? 너무 어이없는데.’전에 대신 술병을 막아준 건 진짜 무의식인 반응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곽승재 앞에 막아선 후였다. 행여나 곽승재가 그 일로 그녀에게 집착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주민기 같은 다른 사람이었어도 대신 막아줬을 거라고 말했는데 지금까지 그 일로 트집을 잡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곽승재, 잘 들어. 사람은 계속 변하는 거야. 전에는 당신의 안전이 항상 최우선이었던 건 맞아. 당신이 다치면 내 마음도 함께 아파왔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당신보다 내가 우선이야. 더는 당신을 위해 칼이나 술병을 막아줄 용기가 없다고. 그러니까 더는 이런 일로 날 시험하려고 하지마.”그때 이름 모를 남자가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을 때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주의를 주었었다. 사실 곽승재의 실력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치게 했다.곽승재가 다쳤을 때의 반응과 방금전 그가 한 말들을 돌이켜본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전처럼 그를 관심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속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마치 그녀가 달갑지 않아 한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말한 대로 약속 지켜야 해. 얼버무리며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고은서는 약간 기가 막혔다.‘왜 전에는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걸 몰랐을까?’“나 목말라. 물 따라줘.”곽승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고은서에게 지시를 내렸다.고은서는 화를 꾹 참고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수기에서 미온수를 받아 그에게 건네주었다.곽승재는 물컵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곽승재가 물을 먹여달라면서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 그가 정신 차리게끔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릴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물컵을 받아들었다.물을 마신 후 그는 더는 다른 요구를 제기하지 않고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고은서도 병상 옆에 의자에 앉아서 그를 지켰다. 종일 새로운 일을 인계받고 유성준을 만나고 또 방금전과 같은 사고를 당하고 나니 피곤함이 물살처럼 밀려왔다.눈을 감고 휴식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도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따뜻한 보일러 때문에 잠이 솔솔 몰려왔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의 입가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전에 이름 모를 남자가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내면서 다친 입가를 어루만져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에 고은서는 눈을 뜨기 더 싫어졌다.그러나 그 따뜻한 촉감이 입가에서부터 볼살로 이어지더니 이내 이마에서까지 느껴졌다.고은서는 약간 불편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이마를 어루만지던 동작은 이내 멈추고 그저 따뜻한 온기만 남았다.고은서가 깊이 잠들려고 할 때 그녀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이내 입가로부터 촉촉한 감각이 느껴졌다.너무 피곤한 탓에 그냥 무시하고 계속 자려고 했으나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호텔이 아닌 곽승재의 병실에 있다는 걸 감지하고 번쩍 눈을
주민기가 공손하게 답했다.“이미 성씨 집안 성아연이 지시한 일이라고 다 자백했습니다. 그리고 성아연도 이미 경찰 측에 넘겨졌고요.”고은서는 성아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멈칫했다.전에 성아연이 고준석한테 잘 보이려고 고씨 가문 저택에 찾아갔다가 쫓겨난 후로 고은서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서로 연락한 적도 없었다.‘왜 날 해치려 하는 거지?’고은서의 의문을 알아본 주민기가 입을 열었다.“사모님도 성아연 씨가 MQ 세금 문제와 큰 연관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습니다.”‘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성아연이 한 짓이 확실한 거겠지. 그저 증거가 없을 뿐이지.’“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성아연이 저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죠?”고은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일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숙모님께서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성아연 씨는 아마 사모님께서 시킨 일이라고 오해하고 사모님께 원망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 시켜서 사모님을 혼쭐을 내주려 했던 거고요.”단은숙이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린 일은 이미 유성준한테서 전해 들었는데 성아연이 그 일을 고은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할 줄은 그녀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민기 씨, 성아연을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성아연이 고은서를 해치려고 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숨까지 위협하는 일까지 꾸밀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라 그녀는 성아연을 찾아가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주민기는 곽승재의 표정을 힐끔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됩니다, 사모님. 피해자로서 자초지종을 알 권리는 항상 있는 법이니까요.”“그럼 바로 출발하죠?”“나도 같이 가.”곽승재가 갑자기 병상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필요 없어.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움직이지 말고 누워서 쉬어.”그러나 고은서는 거절했다.“상처가 심해져서 날 지금보다 더 오래 간병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확실히 이 부분을 고려했었던 그녀는 입을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찔렸다.그러나 민시후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회사에서 봐.”그녀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이미 병실 밖으로 나갔고 주민기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어제 호텔 블랙박스를 확인해 봤는데 폰을 방에 두고 오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가져오라고 할까요?”“네, 수고해주세요. 그리고 저 이젠 그쪽 대표님 아내가 아니니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주민기는 입을 꾹 다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이혼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칭을 바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못하면 곽승재 눈 밖에 나면서 다음 달 보너스까지 잃게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정말 먹고 살기 힘드네.’곽승재의 비서 자리가 겉으로는 엄청 훌륭한 직위 같아 보이지만 사실 시시각각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주민기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었다.고은서와 주민기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차 안에 앉아있었다.주민기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는 바람에 고은서 어쩔 수 없이 곽승재와 함께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곽승재는 아이패드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의사 선생님이 전에 다쳐서 푹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 왜 따라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며. 왜 갑자기 날 관심하는 건데?”‘내가 걱정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혹시 더 심하게 다치면서 내 책임이라고 트집이라도 잡을까 봐 무서워 그래.”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경찰서.곽승재가 경찰서까지 찾아온 이유를 전해 들은 책임자가 직접 마중하러 나왔다.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피해자로서 규정대로 경찰 조사에 협조했다.그녀가 조사를 끝마치고 나올 때 마침 강인한 태도로 심문을 거부하는 성아연을 보았다.“변호사가 오기 전까지 당신들의 물음에 한
“물론이죠.”상대방은 곽승재의 요구를 아주 흔쾌히 받아줬다.아직 간단한 심문 단계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대화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이를 본 성아연은 더 긴장되었다.“난 저 사람이랑 할 얘기가 없어요. 내가 시킨 일이 아니라니까요. 저는 억울하다고요! 저 사람 저를 해치려 하는 게 분명해요. 경찰로서 제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잖아요!”“곽 대표님은 법과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정직한 사업가입니다. 성아연 씨를 해칠 일도 없고요. 그저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다고 하셔서 그러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가시죠, 성아연 씨.”곽승재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성아연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다시 들어갔고 고은서와 곽승재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안에 있던 직원은 자리를 비켜주면서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심문실은 아주 깔끔했는데 책상 외에 티 테이블과 소파도 있었다.주민기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곽승재는 고은서를 끌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성아연 씨도 앉으시죠.”성아연은 곽승재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쉽게 경각심을 풀지 않았고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성아연 씨, 말해보시죠. 왜 사람 찾아 고은서를 해치려 했는지.”그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무언의 위압감이 느껴졌다.성아연은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다.“내가 지시한 일이 아니에요. 그 두 사람이 저를 모함하려고 거짓말하는 거라고요!”“계좌 이체 기록이 없다고 우리가 널 조사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새 번호로 두 사람한테 연락하고 현금으로 거래를 했다며? 그 두 사람 이미 거래장소까지 다 자백했어. 네가 아무리 모자랑 마스크를 쓰고 갔다고 해도 소용없어. 경찰들의 조사능력을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너 이젠 빠져나갈 곳이 없단 말이야.”사실 이 모든 건 주민기한테서 들은 것이다. 경찰들이 이 모든 걸 조사하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성아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내 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봐. 난 두 사람한테 그저 너에게 겁만 주라고 시켰어. 절대 널 해칠 생각은 없었어.”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때 당시 두 사람을 모습을 보아서는 나한테 겁만 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은서야, 난 진짜 너에게 겁만 주라고 했어. 그냥 너한테 쌓인 화를 풀고 싶었을 뿐이야. 요즘 더러 날 전처럼 친하게 대해주지 않은 데다가 네 할아버지랑 얘기 나누는 것조차 못하게 했잖아. 그래서 네 숙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린 게 다 네 아이디어인 줄 알고 오해했던 거야. 나도 네 숙모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성아연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사과하라면 하고 보상금도 얼마든지 줄게.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용서해준다고 했잖아.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고은서는 자신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성아연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약간 속이 불편했다.전에 그녀는 성아연을 베프라고 생각하면서 뭐든지 그녀에게 공유했었다. 비록 욕심이 많긴 했으나 다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다.특히 그녀가 곽승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서 곽승재와 백유미를 대신 욕해줄 때 감동 받기도 했다. 심지어 성아연이 그 어떤 일을 해도 다 용서해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었다.그러나 이번 생에 다시 눈을 뜬 후, 고은서는 성아연의 모든 모습이 다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면서 해치려 했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고은서는 성아연의 각종 행위가 너무 혐오스러웠으나 그녀와 인연만 끊고 살려고 했지 절대 그녀를 해치려고 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성아연은 도를 넘는 행위를 계속 지속해왔다.GS 그룹 연회에서 성아연은 일부러 그녀를 여론의 중심으로 몰아넣었고 또 MQ를 모함하기 위해 고준석을 온갖 감언이설로 홀리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이내 타깃을 단은숙으로 바꾸었다.
“네가 싫으니까!”성아연의 원망이 담긴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걸 발견했다.성아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이 말을 내뱉은 이상 더는 돌아설 길이 없었다.“내가 널 좋아해서 너랑 친구 한 줄 알아? 다 아빠가 강요한 거야! 네 할아버지가 널 제일 아낀다고 너한테만 잘해주면 할아버지가 나한테도 잘해줄 거라고 날 강요한 탓이라고!”성아연이 분노가 들끓은 눈빛으로 고은서를 쏘아보며 말했다.“같은 여자인데 왜 넌 항상 공주 대우를 받고 난 마치 하인처럼 네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건데? 무슨 일이든 네가 했다면 다들 칭찬하기 일쑤였고 난 그저 너의 배경판처럼 네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나한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내가 너보다 못난 곳이 어딘데? 능력도 너보다 차하지 않잖아. 그런데 학교에 있는 남자애들은 네 연락처를 얻기 위해 나한테 다가올 뿐 날 좋아해서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던 남자애들도 너만 보면 다 너한테로 몰려들잖아. 네가 나였어 봐. 어떤 느낌인지!”고은서는 눈을 부라리고 자신을 향해 호통치는 성아연을 보며 무슨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성아연이 자신을 이토록 미워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작 그까짓 일로 나와 우리 집안을 망치려 했던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래!”성아연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변명하고도 싶지 않았다.“고은서, 넌 네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모를 거야. 난 시시각각 널 짓밟아버리고 싶었다고. 너도 나처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혼자 고독하게 아등바등하는 걸 느껴봐야 한다고!”성아연은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네가 곽승재 때문에 자존심을 꺾을 때마다 내가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지? 너도 더는 도도한 공주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남자는 너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내가 얼마나 속 시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