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고은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기사가 떠난 후, 그녀는 홀로 복도에 앉아 곽승재를 기다렸다.방금전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공포감이 들었다.곽승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녀를 찾으러 계단 쪽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후과가 있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대체 누가 날 해치려는 거지? 주민기와 민시후가 이미 조사하러 갔으니까 내일쯤이면 누가 보낸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얼마나 지났을까,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곽승재가 걸어 나왔다.그는 외투를 벗고 흰 셔츠 하나만 입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왔는데 어깨 쪽의 핏자국이 유독에 눈에 띄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척 처참해 보였겠지만 곽승재만은 남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병원 복도 불빛 때문에 얼굴과 오관이 더 각져 보였고 차가운 눈빛까지 더하니 마치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듯한 귀족 같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차갑던 눈빛이 약간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쓰고 있는 흰색 외투를 보자마자 이내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어깨 괜찮아?”고은서가 일어나서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환자분 가족 되시나요? 어깨가 심하게 다쳐서 상처를 꿰맸어요.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는데 혹시 상처에 감염되어서 염증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병원에서 이틀 동안은 관찰해 봐야 할 것 같아요.”곽승재와 함께 나온 의사가 고은서에게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병실.곽승재는 링거를 맞으면서 병상에 누워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고은서는 이런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는지 그의 피 묻은 셔츠를 보며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차에 갈아입을 옷 있지? 내가 가져다줄게.”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런 곽승재의 모습은 그녀도 오랜만이었다. 전에도 지금처럼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냉담하게 대했었다.오늘 일은 확실히 고은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구해준
불빛 아래, 곽승재의 피부가 여느 때보다 더 하얘 보였고 넓은 어깨와 튼튼해 보이는 근육, 그리고 매끈한 몸선이 유독 눈에 띄었다.마치 명장이 직접 조각해낸 작품처럼 매혹적인 몸매였다.그는 어깨에 붕대를 두른 채 허리에는 흰 이불을 덮고 병상에 앉아 있었는데 허약한 모습이지만 나름 매력적이었다.허약함은 그의 매력을 한 층 더 가할 뿐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이런 모습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언제까지 쳐다볼 생각이야?”곽승재가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말투가 여전히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방금전처럼 차갑지는 않았다.고은서는 덤덤하게 눈길을 돌리며 애써 어색함을 감추려고 했다.‘내 탓은 아니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고.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걸 어떡해.’고은서는 곽승재 옆에 다가가서야 그가 셔츠를 완전히 벗은 게 아니라 주삿바늘을 꽂은 오른손 밑에 깔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아직도 링거를 꽤 맞아야 해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는데 셔츠는 왜 벗은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계속 입고 있어.”곽승재가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깨끗한 옷을 건네주었다.“먼저 걸치고 있지 그래?”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왼쪽 팔을 내뻗었다.튼튼한 팔이 그녀의 눈 가까이 확 들어오면서 피부결까지 선명히 보였다.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하다는 듯 물었다.“어쩌라는 거야?”“입혀주지 않고 나 혼자 어떻게 입어?”“벗는 건 혼자 할 수 있고 입는 건 혼자 할 수 없다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계속 보고 싶거든 안 입어도 괜찮아.”곽승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내가 언제 계속 더 보고 싶다고 했는데? 스스로 옷을 벗
고은서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왜 혼자야? 병원에 의사 선생님들도 있고 간호사 선생님들도 있잖아. 게다가 기사님이 계속 아래에서 대기 중이기도 하고. 아니면 주민기 씨한테 간병인 두 명 정도 모셔달라고 하든가.”“그러니까 네 마음속에서 난 주민기보다도 못하다는 거야?”곽승재가 갑자기 엉뚱한 물음을 제기하는 바람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되물었다.“주민기 씨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언제 당신을 주민기 씨랑 비겼어?”‘난 그저 간병인을 모셔달라고 주민기한테 부탁하라고 말했을 뿐인데.’“전에 바에서 술병을 대신 막아준 거 나한테 주민기였어도 막아줬을 거라고 했잖아.”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널 구하기 위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날 간병해주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잖아.”‘기억력은 좋은데 대체 저 이상한 결론은 뭘까? 너무 어이없는데.’전에 대신 술병을 막아준 건 진짜 무의식인 반응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곽승재 앞에 막아선 후였다. 행여나 곽승재가 그 일로 그녀에게 집착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주민기 같은 다른 사람이었어도 대신 막아줬을 거라고 말했는데 지금까지 그 일로 트집을 잡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곽승재, 잘 들어. 사람은 계속 변하는 거야. 전에는 당신의 안전이 항상 최우선이었던 건 맞아. 당신이 다치면 내 마음도 함께 아파왔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당신보다 내가 우선이야. 더는 당신을 위해 칼이나 술병을 막아줄 용기가 없다고. 그러니까 더는 이런 일로 날 시험하려고 하지마.”그때 이름 모를 남자가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을 때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주의를 주었었다. 사실 곽승재의 실력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치게 했다.곽승재가 다쳤을 때의 반응과 방금전 그가 한 말들을 돌이켜본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전처럼 그를 관심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속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마치 그녀가 달갑지 않아 한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말한 대로 약속 지켜야 해. 얼버무리며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고은서는 약간 기가 막혔다.‘왜 전에는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걸 몰랐을까?’“나 목말라. 물 따라줘.”곽승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고은서에게 지시를 내렸다.고은서는 화를 꾹 참고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수기에서 미온수를 받아 그에게 건네주었다.곽승재는 물컵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곽승재가 물을 먹여달라면서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 그가 정신 차리게끔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릴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물컵을 받아들었다.물을 마신 후 그는 더는 다른 요구를 제기하지 않고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고은서도 병상 옆에 의자에 앉아서 그를 지켰다. 종일 새로운 일을 인계받고 유성준을 만나고 또 방금전과 같은 사고를 당하고 나니 피곤함이 물살처럼 밀려왔다.눈을 감고 휴식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고은서도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따뜻한 보일러 때문에 잠이 솔솔 몰려왔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의 입가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전에 이름 모를 남자가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내면서 다친 입가를 어루만져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에 고은서는 눈을 뜨기 더 싫어졌다.그러나 그 따뜻한 촉감이 입가에서부터 볼살로 이어지더니 이내 이마에서까지 느껴졌다.고은서는 약간 불편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이마를 어루만지던 동작은 이내 멈추고 그저 따뜻한 온기만 남았다.고은서가 깊이 잠들려고 할 때 그녀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이내 입가로부터 촉촉한 감각이 느껴졌다.너무 피곤한 탓에 그냥 무시하고 계속 자려고 했으나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호텔이 아닌 곽승재의 병실에 있다는 걸 감지하고 번쩍 눈을
주민기가 공손하게 답했다.“이미 성씨 집안 성아연이 지시한 일이라고 다 자백했습니다. 그리고 성아연도 이미 경찰 측에 넘겨졌고요.”고은서는 성아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멈칫했다.전에 성아연이 고준석한테 잘 보이려고 고씨 가문 저택에 찾아갔다가 쫓겨난 후로 고은서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서로 연락한 적도 없었다.‘왜 날 해치려 하는 거지?’고은서의 의문을 알아본 주민기가 입을 열었다.“사모님도 성아연 씨가 MQ 세금 문제와 큰 연관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습니다.”‘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성아연이 한 짓이 확실한 거겠지. 그저 증거가 없을 뿐이지.’“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성아연이 저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죠?”고은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일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숙모님께서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성아연 씨는 아마 사모님께서 시킨 일이라고 오해하고 사모님께 원망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 시켜서 사모님을 혼쭐을 내주려 했던 거고요.”단은숙이 성씨 집안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린 일은 이미 유성준한테서 전해 들었는데 성아연이 그 일을 고은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할 줄은 그녀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민기 씨, 성아연을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성아연이 고은서를 해치려고 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숨까지 위협하는 일까지 꾸밀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라 그녀는 성아연을 찾아가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주민기는 곽승재의 표정을 힐끔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됩니다, 사모님. 피해자로서 자초지종을 알 권리는 항상 있는 법이니까요.”“그럼 바로 출발하죠?”“나도 같이 가.”곽승재가 갑자기 병상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필요 없어.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움직이지 말고 누워서 쉬어.”그러나 고은서는 거절했다.“상처가 심해져서 날 지금보다 더 오래 간병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확실히 이 부분을 고려했었던 그녀는 입을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찔렸다.그러나 민시후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회사에서 봐.”그녀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이미 병실 밖으로 나갔고 주민기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어제 호텔 블랙박스를 확인해 봤는데 폰을 방에 두고 오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가져오라고 할까요?”“네, 수고해주세요. 그리고 저 이젠 그쪽 대표님 아내가 아니니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주민기는 입을 꾹 다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이혼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칭을 바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못하면 곽승재 눈 밖에 나면서 다음 달 보너스까지 잃게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정말 먹고 살기 힘드네.’곽승재의 비서 자리가 겉으로는 엄청 훌륭한 직위 같아 보이지만 사실 시시각각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주민기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었다.고은서와 주민기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차 안에 앉아있었다.주민기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는 바람에 고은서 어쩔 수 없이 곽승재와 함께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곽승재는 아이패드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의사 선생님이 전에 다쳐서 푹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 왜 따라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며. 왜 갑자기 날 관심하는 건데?”‘내가 걱정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혹시 더 심하게 다치면서 내 책임이라고 트집이라도 잡을까 봐 무서워 그래.”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경찰서.곽승재가 경찰서까지 찾아온 이유를 전해 들은 책임자가 직접 마중하러 나왔다.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피해자로서 규정대로 경찰 조사에 협조했다.그녀가 조사를 끝마치고 나올 때 마침 강인한 태도로 심문을 거부하는 성아연을 보았다.“변호사가 오기 전까지 당신들의 물음에 한
“물론이죠.”상대방은 곽승재의 요구를 아주 흔쾌히 받아줬다.아직 간단한 심문 단계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대화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이를 본 성아연은 더 긴장되었다.“난 저 사람이랑 할 얘기가 없어요. 내가 시킨 일이 아니라니까요. 저는 억울하다고요! 저 사람 저를 해치려 하는 게 분명해요. 경찰로서 제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잖아요!”“곽 대표님은 법과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정직한 사업가입니다. 성아연 씨를 해칠 일도 없고요. 그저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다고 하셔서 그러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가시죠, 성아연 씨.”곽승재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성아연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다시 들어갔고 고은서와 곽승재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안에 있던 직원은 자리를 비켜주면서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심문실은 아주 깔끔했는데 책상 외에 티 테이블과 소파도 있었다.주민기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곽승재는 고은서를 끌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성아연 씨도 앉으시죠.”성아연은 곽승재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쉽게 경각심을 풀지 않았고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성아연 씨, 말해보시죠. 왜 사람 찾아 고은서를 해치려 했는지.”그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무언의 위압감이 느껴졌다.성아연은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다.“내가 지시한 일이 아니에요. 그 두 사람이 저를 모함하려고 거짓말하는 거라고요!”“계좌 이체 기록이 없다고 우리가 널 조사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새 번호로 두 사람한테 연락하고 현금으로 거래를 했다며? 그 두 사람 이미 거래장소까지 다 자백했어. 네가 아무리 모자랑 마스크를 쓰고 갔다고 해도 소용없어. 경찰들의 조사능력을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너 이젠 빠져나갈 곳이 없단 말이야.”사실 이 모든 건 주민기한테서 들은 것이다. 경찰들이 이 모든 걸 조사하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성아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내 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봐. 난 두 사람한테 그저 너에게 겁만 주라고 시켰어. 절대 널 해칠 생각은 없었어.”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때 당시 두 사람을 모습을 보아서는 나한테 겁만 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은서야, 난 진짜 너에게 겁만 주라고 했어. 그냥 너한테 쌓인 화를 풀고 싶었을 뿐이야. 요즘 더러 날 전처럼 친하게 대해주지 않은 데다가 네 할아버지랑 얘기 나누는 것조차 못하게 했잖아. 그래서 네 숙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린 게 다 네 아이디어인 줄 알고 오해했던 거야. 나도 네 숙모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성아연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사과하라면 하고 보상금도 얼마든지 줄게.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용서해준다고 했잖아.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고은서는 자신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성아연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약간 속이 불편했다.전에 그녀는 성아연을 베프라고 생각하면서 뭐든지 그녀에게 공유했었다. 비록 욕심이 많긴 했으나 다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다.특히 그녀가 곽승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서 곽승재와 백유미를 대신 욕해줄 때 감동 받기도 했다. 심지어 성아연이 그 어떤 일을 해도 다 용서해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었다.그러나 이번 생에 다시 눈을 뜬 후, 고은서는 성아연의 모든 모습이 다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면서 해치려 했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고은서는 성아연의 각종 행위가 너무 혐오스러웠으나 그녀와 인연만 끊고 살려고 했지 절대 그녀를 해치려고 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성아연은 도를 넘는 행위를 계속 지속해왔다.GS 그룹 연회에서 성아연은 일부러 그녀를 여론의 중심으로 몰아넣었고 또 MQ를 모함하기 위해 고준석을 온갖 감언이설로 홀리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이내 타깃을 단은숙으로 바꾸었다.
“당연히 되지!”민시후가 이내 좋아하면서 답했다.“손에 있는 일을 다 끝내자마자 해성으로 돌아갈게.”“...”어이가 없어진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박지연한테 같이 밥 먹자고 연락했다.그러나 박지연이 처리할 일이 있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다음에 다시 약속 잡기로 했다.박지연은 오늘 온범준이 할 얘기가 있다고 조수연 병실로 올 수 없냐고 하는 전화를 받았다.“할 말은 이혼하기 전에 이미 다 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쪽이랑 할 얘기가 더는 없는데요.”박지연이 거절했다.그러자 온범준이 이레 병원 원장이 온승준이 두 병원을 바삐 오가는 걸 보고 조수연을 이레 병원으로 옮겨주겠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박지연은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직접 만나러 가든지 혹은 이레 병원에서 만나든지 두 가지 선택뿐이었다.박지연은 당연하게도 직접 만나러 가는 걸 선택했다.그녀는 가기 전에 온승준한테 연락했는데 수술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남기고 조수연이 있는 병원으로 홀로 갔다.병실로 들어가기 전에 박지연은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다음 허리를 곧게 펴고 아주 떳떳한 자태로 걸어 들어갔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온범준과 조수연은 전처럼 그녀를 향해 비아냥거리지 않았다.“지연이 왔니?”온범준이 아주 평온한 말투로 먼저 인사했다.이를 본 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온범준은 수많은 제자를 아래에 둔 교수로서 뼛속까지 오만함으로 차 넘치는 사람이었다.이혼하기 전에 조수연처럼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항시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깔보는 자태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오늘따라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아무리 그래도 어른인데 인사하면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조수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저를 왜 찾으신 거죠?”박지연도 똑같은 말투로 되물었다.조수연은 박지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온범준과 오늘 절대 화를 내
고은서는 곽승재의 좋지 못한 안색을 무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여씨 가문에서 결혼 제안을 동의했다는 건 그만큼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당신 아버지도 여시은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두 집안의 동의를 다 거친 결혼이라면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정말 여씨 가문을 괜찮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면 얼른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함정으로 가득 한 물음이었지만 고은서는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둘 다야.”곽승재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고은서, 내가 너랑 민시후 사이를 방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민시후까지 나온 이상 더 말해 보았자 일만 커질 뿐, 고은서는 너무 피곤한 탓에 곽승재와 별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나 먼저 올라갈게.”그녀는 담담하게 한 마디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곽승재는 묵묵히 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과거의 고은서라면 누군가 그에게 접근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GS그룹으로 달려가 그 사람을 어떻게서든 멀리 쫓아내려고 난동을 부렸을 것이다.‘그런데 왜 지금은 도리어 날 결혼하라고 달래는 거지? 심지어 아무렇지 않아 보여. 방금전 본가에서는 나를 걱정하며 끌어당기기까지 했잖아. 그리고 내 손을 뿌리치는 대신 순순히 내 품에 안겼었잖아.’그러나 곽승재는 자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고은서가 모든 걸 부인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며칠 후.고은서는 직원들과 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관한 일들을 의논하고 중요한 이메일 여러 개를 처리한 후 여시은 집들이 선물을 사러 갔다.‘집들이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그녀는 유명한 옥방에 가서 좋은 의미가 담긴 옥 장식품 하나를 샀다.그리고 그곳에서 정교하게 만든 영롱하고 귀엽게 생긴 옥토끼도 함께 구매했는데 곽승연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그녀가 결산을 마치고 나가려고 할 때 익숙한 사람 한 명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 나오면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곽승재는 품이 갑자기 허전해 나면서 약간 속상하긴 했으나 티 내지 않았다.“내려가자.”소란 소리를 들은 서연정과 전미자도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승재야, 무슨 일이니? 네 아버지랑 회사 일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다투기 시작한 거야?”“의견이 맞지 않아서 말다툼 좀 한 것뿐이에요.”전미자한테 걱정 끼치기 싫었던 곽승재는 아주 간결하게 답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서연정이 걱정하면서 물었다.“없어요.”곽승재는 약간 어색해하며 답하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먼저 은서를 데려다주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나 차 가지고 왔어. 힘들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할머니와 어머니랑 얘기 나눠.”고은서는 그와 거리를 두며 거절했다.“은서야, 시간도 늦었고 한데 네 차는 본가에 두고 그냥 승재 차에 가. 내일 기사한테 네 차를 가져다주라고 할게. 금방 아버지랑 싸웠는데 널 데려다주면서 바람이라도 쐬게 해.”전미자가 고은서를 달랬다.“걱정하지마. 나도 예원 별장으로 돌아갈 건데 그저 가는 김에 널 데려다주는 것뿐이야.”곽승재가 말하면서 먼저 밖으로 나갔다.“저 자식이. 고집 하나는 세 가지고.”전미자가 혀를 끌끌 차며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야, 얼른 가 봐. 사실 승재도 네가 본가로 온 걸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꺼려할까 봐 참고 돌아오지 않았던 거야.”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미자와 서연정에게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곽승재는 이미 차를 문 앞에 세우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는 약속한 대로 가는 길에 그녀한테 말을 걸지 않고 운전만 했다.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차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종일 바쁘게 보낸 탓인지 아니면 차 안의 노래가 너무 유유한 탓인지 그저 눈만 감고 휴식하려던 고은서는 어느새 진짜 잠들어버렸다.깨어났을 때 그녀는 은은한 설송향이 나는 검은 외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곽승재랑 여시은을 결혼시키려는 거야? 그런데 아주 마땅한 일이긴 하지. 여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힘과 배경으로 두 가문이 사돈을 맺게 되면 서로 아주 큰 이익을 얻게 될 거야.’“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고은서뿐이에요.”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단순한 협력이라면 저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사돈을 맺으려 하거든 꿈 깨세요.”“곽승재,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감히 나랑 대들어?”곽현수가 단단히 화난 모양이다.“사내애가 각종 기회를 이용해서 가문 기업을 더 크게 이끌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종일 사랑에 빠져있다는 게 말이 돼? 대체 언제쯤 철이 들 거야?”“철이 든다는 게 아버지께서 제안하신 결혼을 받아들이는 건가요? 결혼을 무기로 이용하려 한다는 게 하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곽승재가 반박했다.“너!”곽현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아버지까지 무시하려 드는 거야? 네가 백씨 부녀한테 한 짓들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줬잖아.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건데 왜 자꾸 나랑 맞서지 못해서 안달이나 하는 건데!”“정말 저를 위해서 생각하신다면 다신 저한테 아무와 결혼하라는 소리 하지 마세요.”곽승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백유미가 왜 그렇게 겁도 없이 흉악 무독한 짓을 저질렀겠어요.”“내가 도와준 게 뭐 어때서! 네 승엽이 아저씨가 지금까지 날 위해 해준 일이 얼만데. 큰 공로는 없어도 고생만은 수없이 많이 했어. 내가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진짜 아저씨만 도와주신 거예요?”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백유미를 해성으로 들이고 돈까지 주면서 저와 고은서 사이를 이간질하게 했잖아요.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고은서도 곽현수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왜 백유미를 도와 자신을 해치려 하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고씨 가문이 뭐가 볼 데가 있다고. 그리고 고은서한테 별 감정도 없으면서
다행히도 넘어지진 않았지만 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굳이 숨바꼭질을 하나 이기겠다고 이럴 필요가 있나? 행여나 다치기라도 하면 완전 웃음거리가 되는 거잖아. 그래도 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면서 서랍을 닫으려고 할 때 서랍 안에 있던 나무 상자 하나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 안에는 아주 익숙한 물건 하나가 있었다.보라색 크리스탈로 만든 반달 모양의 머리핀이었는데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머리핀 같은 액세서리를 하도 좋아해서 열여덟 살 생일 때 고준석이 여러 가지 크리스탈 머리핀들을 그녀에게 선물해주기 위해 특별히 디자이너를 찾기까지 했는데 그 머리핀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그런데 이것저것 바꿔 쓰면서 잃어버린 것도 많았는데 특히 반달 모양의 액세서리는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몇 년이 되었다.‘내 머리핀인가? 아니면 누가 똑같은 걸 사서 여기에 놔둔 건가? 어머니랑 할머니는 이런 색깔 모양의 액세서리를 별로 쓰지 않는데. 그리고 곽승연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해외로 가는 바람에 이런 낡은 물건을 여기에 둘 리가 없고. 하인이 머리핀을 나무 상자에 넣어서 여기에 두었다는 건 더 불가능할 텐데.’호기심이 생긴 고은서가 머리핀을 들고 확인해 봤는데 끝부분에 대문자 Q라는 문양이 박혀 있었는데 당시 디자이너한테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진짜 내 머리핀이잖아.’“고은서 씨, 여기 계셨어요?”고은서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승연이가 은서 씨를 찾고 있어요. 책상 아래 있는 작은 찬장 안에 숨으셨구나. 그래서 승연이가 찾지 못했던 거네요.”하인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은서 씨, 왜 그러세요? 뭘 보고 계시는 거예요?”‘본가에서 오랫동안 일 한 하인이라면 알지도.’고은서가 책상을 가리키며 물었다.“이 책상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도련님 책상인데요. 여기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 다 도련님 물건들이에요. 어르신께서 버리기
이어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회장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곽현수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지?’그녀는 본가에서 곽현수와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서연정과 사이가 안 좋아서 본가로 안 오나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언니, 우리 사진 찍자.”곽승연이 좋아하며 그녀를 불렀다.고은서는 곽승연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반 시간 후, 서연정이 곽승연에게 먹일 약과 물을 들고 정원으로 찾아왔다.곽승연은 별다른 불만 없이 약을 먹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기뻐하며 고은서한테 함께 숨바꼭질을 놀자고 졸랐다.고은서는 곽승연이 이리도 유치한 유희를 놀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필경 그녀에게 있어서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놀던 유희였으니까 말이다.“집에 있는 하인들이 승연이를 어린아이로 대하면서 함께 숨바꼭질을 한 적이 있는데 아마 재미를 들인 모양이야.”서연정이 대신 설명해줬다.고은서는 곽승연과 놀아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곽현수와 마주치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서연정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승연이 아빠는 어머니한테 불리워 가서 마주칠 일 없을 거야.”고은서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본가 안으로 돌아갔을 때 서연정 말대로 곽현수와 전미자가 보이지 않았다.곽승연이 평소에 이 층에서 지내면서 이 층과 삼 층에서 많이 놀곤 해서 고은서는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숨바꼭질을 할 방과 범위를 정한 다음 그들은 함께 게임을 할 하인 몇 명을 더 불렀다.“승연이를 너무 얕보지 마. 사람 찾는데 엄청 능해.”게임 시작 전에 서연정이 고은서에게 미리 말해줬다.고은서는 처음에 서연정의 말을 별로 새겨듣지 않았는데 곽승연한테 여러 번 잡힌 이후로 서연정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믿게 되었다.승부욕이 생긴 고은서는 이번엔 확실하게 꽁꽁 숨겠다고 마음먹었다.이 층에 있는 방들
그러나 바로 그때, 서연정이 곽승연이 고은서를 보고싶어 한다면서 본가로 와줄 수 없냐면서 연락이 왔다.그날 이후로 곽승연의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했는데 모처럼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그녀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곽승재는 의외로 고은서가 제인 제약에서 나올 때까지 그녀한테 말을 걸지도 않았고 미팅이 끝난 이후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아직 시간이 많았기에 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사로 데려다주기로 했다.“고은서, 곽승재가 아직도 너한테 미련 남아 있어 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고서야 제인 제약 같은 프로젝트에 직접 나설 필요가 없잖아.”송민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래?”“그렇다니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으면서도 네가 발언하러 올라갈 때부터 너한테서 시선을 뗀 적이 없다니까. 엄청 미련 담긴 눈빛으로 널 바라보고 있었어. 엄숙한 자리만 아니었으면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민시후한테 보내주는 건데.”고은서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 안 좋은 거 알잖아. 그만 약 올려.”“약 올리다니? 민시후한테 약간의 압력을 주려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종일 자신밖에 모르면서 거만하게 군다니까. 잠깐만. 그러니까 너 지금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에 함께 어머니 묘에 다녀왔어.”송민아는 멈칫하더니 자세를 바꾸며 등을 좌석에 붙이면서 말을 이어갔다.“아줌마가 거의 사십 세가 되어서 민시후를 낳아서 엄청 이뻐했거든.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나도 장례식에 갔었어. 그리고 그곳에서 민시후가 슬퍼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전엔 누구한테도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너한테 주동적으로 알려줬다는 건 널 신임하고 있다는 뜻일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너처럼 힘든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길 다 하고 그러는 거야?”송민아는 피식 웃으면서 답
응접실에 있는 곽승재를 본 송민아는 고은서를 힐끗 보았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녀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민시후가 전에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직접 책임질 거라고 했는데 사실이었네.’곽승재는 제인 제약 응접실에서도 분망하게 주민기가 건네주는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고 매니저님, 오셨어요? 회의실 이미 다 준비되었으니까 먼저 들어가 계세요.”제인 제약의 직원이 고은서한테 인사하며 말했다.곽승재도 고 매니저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아직 근무 상태에 빠져 있어서인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차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은서를 본 그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고 매니저님.”주민기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다시 삼키고 제인 제약 직원을 따라 그녀를 고 매니저라고 불렀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송민아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고은서 씨!”문을 들어서려던 순간 여시은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의실로 들여보내고 의아해하며 여시은을 향해 물었다.“시은 씨도 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참여했나요?”여시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저 이런 방면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그저 아빠가 곧 GS그룹이랑 협력하게 되는데 미리 곽 대표님 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해서 따라온 것뿐이에요.”여시은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저도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작성해서 곽 대표님한테 봐달라고 했는데 오후에 시간이 없으시다고 하는 바람에 직접 이곳으로 가져온 거예요.”‘민시후가 전에 여씨 가문이랑 GS그룹이 협력한다고 알려줬었는데 순리롭게 진행된 모양이네.’“곽승재 저기 있으니까 얼른 가봐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은서 씨, 혹시 토요일에 시간 되나요? 제가 해성에서 집을 마련해서 토요일에 집들이하려고 하는데 은서 씨도 초대하고
민시후는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경고하는데 날 넘보지 마. 나 당신 매부가 될 생각 없어. 그리고 얼른 고은서한테 나랑 송민아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약혼도 그저 해본 소리라고 설명해줘.”“그만해.”고은서가 민시후를 쏘아보며 말했다.그녀는 단 한 번도 그와 송민아 사이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아마 송민아가 그에게 미련이 남아있을까 봐 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꾸지람 소리에도 화내지 않고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알겠어. 네 말 들을게. 안 말하면 되지?”방금전까지만 해도 껄렁대던 그가 갑자기 처음 보는 온순한 모습으로 변하는 바람에 송민아와 송민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은서도 할 말을 잃었다.저녁 식사는 예상 밖으로 평화롭게 끝났다.민시후는 시도 때도 없이 남친처럼 고은서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도중에 민시후는 손 씻으러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고 송민아도 마침 웨이터를 부르러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룸 안에 송민준과 고은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송민준은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은서 씨, 시후가 여자애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이에요. 은서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네요.”고은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민아 때문에 지금까지 사귀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민아가 내려놓겠다고 말한 이상 더는 시후한테 집착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고집이 세긴 하지만 마음씨는 착한 애예요.”“민아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민시후랑 더 깊이 알아가려고 그러는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마침 민시후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송 대표님, 요즘 해성에서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이젠 해성으로 들어오려고 결정 내린 거야?”민시후가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그저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어서 시도해보려 한 것뿐이야. 해성으로 들어오려거든 아직 너무 이르잖아.”송민준이 웃으면서 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