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도련님. 안 그래도 짧고 귀한 밤, 어서 기다리고 있는 미녀한테 가. 여기서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붙잡긴 누가 붙잡는다고 그래?”여자는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반말하며 말했다.“네가 일부러 승재 씨 유혹했으니 이쪽으로 온 거겠지. 순진한 척하지 마. 여우 같은 것.”고은서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거기 아가씨. 눈은 장식이 아니에요. 제발 눈 똑바로 떠서 보세요. 지금 누가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지.”“네 수작일 뿐이잖아! 신경 안 쓰는 척, 무관심한 척하면서 승재 씨 소유욕을 자극하는 거지. 변변치 않은 수준은 아니네.”“꺼져!”고은서가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곽승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승재 씨…”곽승재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는 금방 눈물을 글썽였다.“네 물건 챙겨서 이 호텔에서 꺼져. 다시 내 눈에 띄지 마.”곽승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피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엔가 부딪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고은서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곽승재를 맞히지는 못했다.빠르게 반응한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고은서의 기습을 피했다.하지만 그 순간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고은서는 얼른 힘주어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어깨를 돌볼 겨를도 없이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의 스피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두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해 다시 곽승재의 품에 잡혔다.“이거 놔!”화가 난 고은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곽승재는 낮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고은서,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따뜻한 곽승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고은서는 오싹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부림쳤다.“움직이지 마. 내가 무슨 짓 할지 장담 못 해.”곽승재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하려 했지만 뭔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치솟던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는 고은서를 끌어안던 힘을 서서히 풀며 물었다.“고은서, 네 눈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야?”“내가 틀린 말 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 쳤다.“유성준과 민시후가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 소유욕이 발동한 거잖아. 잊지 마.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네가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할 자격은 없어. 그리고 곽승재. 널 사랑한 적 있다고 해서 그게 내 죄는 아니야. 그걸 핑계로 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싸늘한 고은서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고 큰 눈망울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마치 그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이 순간, 곽승재는 처음으로 짙은 좌절감을 느꼈다.평생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작은 장애물 정도는 쉽게 넘기곤 했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이제 네 발로 나갈 건지 경찰 불러서 끌려 나갈 건지 네가 선택해.”고은서가 문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그녀가 경찰을 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고은서의 질책 어린 말에 곽승재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어 물며 뒤돌아 나갔다.문가에 다다르자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마음속에는 잠시나마 기대가 떠올랐다.하지만 이내 등 뒤로 들려오는 건 고은서가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곽승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늦은 밤, 육현석은 곽승재의 연락을 받았다.“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육현석은 낮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연락 온 곽승재가 신경 쓰였다.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육현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곽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뭐라고? 형수님을 자극하려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형수님이 있는 호텔에 간 거야?”육
육현석의 질문에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곽승재는 비록 고은서와 이혼했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은서는 날 많이 좋아했어. 오 년 동안의 감정을 어떻게 쉽게 잊겠어.’하여 곽승재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 했다.그러나 이혼 후에도 곽승재에 대한 고은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그를 볼 때마다 여전히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불안감이 밀려왔다.특히 유성준과 민시후가 그녀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예전에 주려 했던 선물도 꺼내 들며 사과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은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화가 난 그는 고은서에게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래서 오늘 저녁 의도적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자극하려 한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고은서가 그에게 화낼 때 그는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미묘한 기쁨을 느꼈다.하지만 방에 들어선 후, 한참 동안 기다려도 고은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곽승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이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를 방에 들일 줄 알았지만 고은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그저 고은서가 체면 때문에 오지 못할 뿐 사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언을 위해 세면기기를 빌리러 왔다는 어색한 핑계를 댔다.곽승재는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고은서를 자극하기 위해 이미언이라는 이름조차 지어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곽승재가 다른 여자를 끼고 있어서가 아니었다.또한 과일 서빙을 온 직원 덕분에 고은서가 문을 빨리 연 이유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곽승재였다.다른 사람을 돌려보낸 뒤 고은서는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향기를 맡은 순간 그는 저도 모르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내뱉었지만 잠시 생각하던 육현석은 이내 고은서의 번호를 눌렀다.“은서 씨, 주무실 준비 하고 계신가요?”육현석은 고은서가 자신을 차단할까 두려워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았다.고은서는 답하는 대신 되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다소 차가운 고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육현석은 히죽 웃으며 말을 돌렸다.“별일은 없고 그냥 요즘 지연 씨가 어떻게 지내나 해서 궁금해서요.”아니나 다를까 인내심이 생긴 고은서가 되물었다.“지연이한테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나요.”육현석이 답했다.“며칠 전부터 연락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오늘 연락해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육현석은 온전히 고은서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박지연이 평소와 다른 듯하여 고은서에게서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이유도 있었다.“무슨 일이 있긴 한데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해결된 상태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육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속으로 어떻게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돌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고은서가 물었다.“지연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혹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예요?”“형수... 아니, 은서 씨. 지연 씨는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 사이에 그런 소문은 만들지 말죠.”육현석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어차피 먹고 놀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지연 씨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렵네요.”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저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육현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옮겼다.“형이랑은 다르죠. 형은 평소에도 도도하고 엄격하고 차가워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요. 형 마음을 알 수 없다고도 하죠.”고은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육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 씨, 조금 전 형한테서
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
다정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등에서 땀이 났다.“나가서 밥 먹어.”“좋네. 같이 가자. 배고파 죽겠어.”민시후가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고은서가 살짝 피하며 말했다.“미안, 약속 있어.”민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누구랑? 하루 종일 못 봤는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민시후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가끔은 민시후가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옆에 있던 송민아의 쓸쓸한 모습을 힐끔 본 고은서는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아 씨는 시간 있대. 민아 씨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민시후가 발끈했다.“고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송민아와 파혼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 진짜 약속 있어. 먼저 갈게.”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민시후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직 집 보러 안 갔지? 내일 같이 가서 보자.”송민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고은서는 미안하면서도 난감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식당이라기보단 관광지 같았다.넓은 식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는 작은 다리와 정자들이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가득했다.얼마 가지 않아 고은서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성준을 발견했다.유성준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모습은 시크함과 더불어 온화함도 느껴졌다.“성준 오빠, 오래 기다렸죠?”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유성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회사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괜찮아요. 운전하면 금방이던데요.”“이거 받아.”유성준은 마술처럼 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내밀었다.고은서는 귀여운 인형을 건네받으면서도 정신이 멍해졌다.유성준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어릴
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
“얼른 와서 은서랑 인사하지 않고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전미자가 말했다.장순이 과일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곽승재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들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고은서를 어두운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본 뒤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 며칠 뭐하면서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병든 고양이처럼 힘이 없어 보여?”전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할머니, 제가 T 국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승재는 저를 도와주려다가 다쳤어요.”고은서가 솔직하게 말했다.“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은서를 도와주고도 은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이 있었겠네.’전미자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몰래 한숨을 쉰 후 더 이상 곽승재를 질책하지 않았다.“할머니, 저 친구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저녁은 가서 먹을게요.”곽승재가 돌아오지 않은 줄 알고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했던 고은서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고은서는 그와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다시 한번 나서 고은서를 잡으려 했다.“주방에도 다 준비했는데 먹고 가. 급한 거 아니잖아.”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안은 감사하지만 먼저 가볼게요.”전미자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은서야, 시간 나면 자주 와.”“네. 할머니, 다음에 봬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곽승재가 말하자 고은서는 싸늘한 어조가 아닌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괜찮아. 넌 좀 쉬어.”곽승재는 그 말에 다시 한층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그저 고은서가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갔다.고은서가 차키를 누르자 곽승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어깨는 이제 괜찮아졌어?”고은서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평온하게 답했다.“응, 괜찮아.”말을 마친 고은서가 운전석에 앉으려 했다.“민시후를 돌보려고 병원에 급하
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랑 이혼할 때 급해서 제때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가져왔어요.”“은서야, 이건 할머니가 너한테 준 선물이야. 그걸 돌려주면 이 할머니가 섭섭하잖니?”전미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말했다.“할머니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이건 원래 미래 손자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잖아요. 그런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이것도 저 대신 곽승재한테 전해 주세요.”지난번 곽승재가 가져갔던 브로치를 다시 돌려주려 하자 전미자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은서야, 할머니는 너와 승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승재가 또 너를 실망하게 했겠지.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날 너무 어려워하지 말렴. 이 목걸이는 손자며느리를 위한 게 아니라 너에게 준 선물이야.”전미자가 말을 이었다.“너처럼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승재와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지.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승재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네가 힘들 걸 알면서도 네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고은서는 전미자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곽승재랑 결혼한 건 제 고집이지 할머니랑 상관없는 일이었잖아요. 목걸이를 돌려드리는 것도 할머니랑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목걸이가 할머니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서예요.”“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야? 너도 1년 넘게 내 손자며느리로 살았잖니. 내가 준 선물을 돌려주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니?”그 말에 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말했다.“할머니께서 제가 주시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그래야지.”전미자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이건 승재가 네가 좋아한다고
유성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만 내가 항상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유성준이 몇 년 동안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 뜻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미안해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성준 오빠.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했어요.”고은서의 솔직한 말에 유성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살짝 쓸쓸하게 변했다.“네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겠지.”...오후, 고은서는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전미자가 생일에 선물해 준 에메랄드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그녀가 전미자를 위해 직접 조향한 캔들을 챙겨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차 속도를 늦췄다.저택의 정원 입구에는 인공 폭포와 연못이 있는 조형물이 있었고 연못에는 녹색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그때 연못 가장자리에서 한 가냘픈 소녀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는 가정부가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아가씨, 이제 들어가세요. 바람이 차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됩니다.”가정부의 호칭을 듣고 고은서는 그녀가 곽승재의 여동생 곽승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곽승재가 전에 말하길 그녀는 어떤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재발했고 약간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고 했다.‘어머니께서 귀국하셔서 전문의를 찾으러 오신 걸까?’연못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곽승연은 가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연못 속의 초록색 잎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가정부는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고은서는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갔다.“사모님.”가정부는 고은서를 보자 예전과 같은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저는 이제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이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네요.”고은서가 곽승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저러는 거예요?”가정부는 그녀가 산책하러 나왔다
이때 민시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고은서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을 내세우며 곽승재와 대립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단순히 오빠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유성준과 달리 민시후의 진심 어린 고백은 고은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하지만 고은서는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민시후, 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고은서, 그 말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고은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 국 마실 거야?”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물론이지.”박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기뻐했다.“은서야,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박지연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안 되겠어. 이 소식을 육현석에게 알려서 곽승재와 너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고은서가 박지연을 말렸다.“내가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건 육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굳이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육현석에게 알리는 것은 곽승재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백유미 일 때문에 그와 감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박지연은 당장 육현석에게 이 소식을 알려 곽승재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알았어. 말 안 할게.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고은서는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유성준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왔다.“은서야, 너 요즘 너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번 술집이나 클럽에서 마주쳤잖아. 그때마다 양옆에 여자들을 끼고 있었잖아.”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대꾸하지 않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그렇게 봐? 내가 없는 말 했어?”“아니, 틀린 말도 아니야.”민시후는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예전에 주위에 여자가 많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식일 뿐이었고 진지한 관계도 없었고 부적절한 행위도 없었어.”고은서는 믿지 않았다.“M 국에 있을 때 어떤 섹시한 여자랑 데이트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민시후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고 그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자랑스러운 일인가? 왜 저렇게 웃지?’민시후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고은서, 혹시 질투야?”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민시후의 과거 연애사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해하지 마. 그냥 네가 민아 일로 화내는 게 웃겨서 예로 든 거야.”고은서가 단호히 답했다.그러나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은서, 뭔가 걸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괜히 설명하는 거야. 평소 내가 이렇게 물었으면 넌 주먹부터 날렸을 거야.”고은서는 지금 당장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헛소리 그만해. 네 연애사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별 관심 없어.”“괜찮아. 네가 신경 쓰든 안 쓰든 모두 솔직하게 얘기해 줄게. M 국의 그 여자는 내 친구야. 그날 우리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이었는데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친구는 기다리는 게 지겨워서 몇 번 재촉했을 뿐이야. 외국은 보통 오픈 마인드 잖아. 그래서 호칭도 더 친근했을 뿐인데 우린 순수한 친구 관계였어.”민시후의 눈빛은 너무 반짝여서 고은서가 눈을 돌리며 기침했다.“이미 말했잖아. 나랑 상관없다고.”“상관있어.”민시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고은서, 나는
민시후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눈빛으로 거절하자 고은서가 설득했다.“조금 전에 뭐 좀 먹어서 배가 부르네. 네가 마셔. 버릴 순 없잖아.”민시후는 그녀를 보며 일부러 말했다.“네가 먹여주면 한 번 생각해 볼게.”고은서는 화가 난 듯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숟가락 드는 데는 아무 지장 없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고은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진짜 화내는 거 보고 싶어?”화가 난 고은서는 결국 직접 국을 다 마셔버렸다.“민아야, 이거 정말 맛있네. 어떤 사람은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아. 복이 없는 거지 뭐.”송민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고은서, 너도 정말 유치하다.”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만해. 난 그냥 병문안 온 거야. 무사한 거 봤으면 됐어. 먼저 가볼게.”송민아가 가려고 하자 고은서는 그녀를 배웅했다.복도로 나온 송민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정말 시후 오빠 포기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돼. 오빠 다친 거 너 때문이지?”송민아도 T 국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오빠 겉으로는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전에 오빠한테 감정적으로 더 상처를 주라고 말했던 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 너도 마음이 있다면 그냥 오빠 받아줘. 내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네가 민시후를 도와준다는 걸 민시후가 알면 네게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던 걸 후회하겠네.”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도와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오빠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서 난감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웃을 뿐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들어가 봐. 민준 오빠가 북성 간식들을 좀 보내줬어. 얼른 먹고 싶어서 눈에 아른거리네. 이제 그만 갈게.”고은서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무심코 말했다.“네 오빠는 널 잘 챙기네.”‘귀찮은 일도 처리해 주고 클럽까지 데리러 와주고 심지어 먹
이 사실은 전에 뛰어내리겠다고 곽승재를 협박할 때 고은서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믿지 않았다.‘지연이는 어떻게 믿게 만든 거지?’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을 숨김없이 말했고 박지연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다 말해줬다.“유전자검사는 언제 한 거야? 난 모르고 있었는데.”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속상해하는 너를 보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박지연이 답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왔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를 구하러 호수에 뛰어든 곽승재를 보며 이혼할 때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면서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었다.그러나 막상 후회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게 틀린 소리는 아니네.’이튿날, 고은서와 박지연은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아직도 거동이 불편한 민시후는 인파를 피면하기 위해 전용기로 귀국할 예정이었다.두 사람도 그와 동행했다.공항으로 가기 전에 고은서는 병원 로비에서 곽현수와 백승엽을 만났다.곽현수는 그녀를 보자마자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백승엽은 악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째려만 볼뿐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낼 용기조차 없었는지 그녀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쯧.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범죄자를 감싸는 주제에 왜 저리 거만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곽현수와 백승엽의 표정이 다 굳어졌다.뻔뻔함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잖아요.”박지연은 맞장구를 치고는 이내 민시후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곽현수를 무시한 채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민시후는 박지연이 출근하고 있는 이레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은서는 푹 쉬고 경찰서로 찾아가 T국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서 백유미의 법적 책임을 묻겠다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