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백유미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미리 말해주면 협조할게.”말을 마친 고은서가 싸늘하게 덧붙였다.“양쪽에서 이득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날 속이고 양쪽에서 이득을 보려 한다면 지훈 씨는 솟아날 구멍조차 없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은 흠칫했다.‘내 생각을 눈치챘나 보네. 내가 고은서를 너무 얕봤어. 돈 많고 외로운 귀부인 타입은 아니야.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야.’통화를 마친 원지훈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범가온이 물었다.“지훈아, 믿을만한 사람이야? 네가 말했잖아. 회사에 문제 생긴 것도 그 여자 때문이라고. 또 우리를 끌어드리려는 게 결국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야?”원지훈이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며 답했다.“고은서가 미워하는 건 백유미지 우리가 아니야. 어차피 백유미 밑에서 총알받이 취급을 받으면서 백유미 눈치를 봐야 하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이 기회에 물 흐리면서 고은서랑 백유미가 싸우는 걸 보자고. 나는 그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고. 좋은 기회잖아.”말은 그럴듯했지만 범가온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하지만 백유미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 고은서가 실패하고 백유미가 우리가 도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지훈도 백유미의 수완을 잘 알고 있었다.이번 스마트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백유미는 백씨 가문의 자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쉽게 외부 자금을 유치해 프로젝트를 성사했다.만약 고은서가 정말로 백유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었다.원지훈은 담배를 비벼 끄며 결심을 굳혔다.“달콤한 보답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지.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어.”고은서 역시 원지훈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백유미를 견제할 가장 좋은 무기였다.그의 결심을 더욱 굳히기 위해 고은서는 원지훈에게 돈을 추가로 송금했다.이내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백유미도 진행하던
탁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서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고개를 들자 놀란 고은서는 자신을 덮친 사람이 모자와 마스크를 쓴 깡마른 남자임을 알아차렸다.그 옆에는 같은 복장을 한 키가 크고 마른 동료가 서 있었다.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깡마른 남자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키 큰 남자는 빠르게 방문을 닫고 동료와 함께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두 남자의 행동은 빠르고도 다급했다.고은서는 목이 조여 매우 괴로웠지만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두 남자를 공격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비상구에 다다랐을 때 고은서는 복도에서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읍! 읍!”고은서가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이미 두 남자는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벨은 이미 멈췄고 직원들이 상황을 점검하러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상함을 눈치챌 때쯤이면 나는 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겠지.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이 두 사람인가? 대체 누가 보낸 거지?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두 남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은서를 끌고 가는 것이 불편했는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테이프를 꺼내 그녀의 입을 막았다.양한겸은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피가 머리로 쏠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입이 막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은서는 지난번 서인수 일당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1층까지 내려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방법을 찾아야 해. 호텔을 벗어나면 위험해.’고은서가 머물던 층은 높지 않았고 양한겸과 신현준은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에 도달할 것이다.고은서는 매달려 있는 동안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으며 양한겸이 코너 쪽 난간으로 다가갔을 때 발끝으로 힘껏 난간을 걸었다.방심한 양한겸은 무게에 이끌려 뒤로 무게 중심이 쏠리며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었다.고은서는 어지러
그때 온몸에 흰 분말이 묻어 유령 같은 두 남자가 다시 그녀 앞에 다가왔다.“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누가 너희를 보낸 거지?”고은서가 다급하게 물었다.“여기는 호텔이야. 곳곳에 CCTV가 있어 도망치기 힘들 거야. 지금 포기하면 너희 책임을 묻지 않겠어!”“같잖은 말은 집어치워!”양한겸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돈을 받았으니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상황 파악이 됐으면 순순히 따라와.”양한겸은 말하며 고은서를 잡으려 다가왔다.“악!”“멈춰!”고은서가 다리를 들어 양한겸을 차는 동시에 위쪽 계단에서 차가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두 남자도 자연스레 빼어난 옷차림에 차가운 눈빛을 한 곽승재를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하지만 싸움 실력이 있고 두 사람이다 보니 곽승재의 출현에 두 사람은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양한겸이 위협하며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고은서에게로 주의를 돌렸다.“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신현준이 고은서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고은서도 몇 가지 호신술을 배웠기에 위급한 순간에 재빨리 몸을 아래로 굴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악!”고은서가 몸을 숙이자마자 머리 위에서 신현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곽승재가 그를 발로 차 쓰러뜨린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일으켜 자신 뒤에 숨기고 양한겸을 향해 발을 뻗었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양한겸은 곽승재의 공격을 피하며 곽승재에게 손을 뻗어 공격해 왔다.쓰러져있던 신현준도 다시 일어나 싸움에 가세했다.비록 2대 1의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이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다.곽승재의 공격은 정교하고 매서웠으며 훈련된 자의 실력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봤던 터라 그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고은서가 위층으로 올라가 도움을 청할지 고민하던 중 양한겸이 주머니에서 스프링 나이프를 꺼내 곽승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한 말로 자존심이 상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로 했다.엘리베이터가 이내 1층에 도착했다로비에 도착하자 주민기가 일행과 함께 곽승재에게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연락받고 바로 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괜찮으세요?”곽승재가 쌀쌀하게 대꾸했다.“아직 위층에 있으니 경찰서로 데려가서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어깨는 왜 그러십니까?”주민기가 곽승재의 상처를 보고 놀라 물었다.“호텔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어쩌다 이렇게 다치신 거죠?”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하기 싫다는 기색을 풍겼다.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저를 도우려다가 범인들의 칼에 베였어요.”“칼까지 썼단 말입니까?”주민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사모님, 기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을 병원으로 모셔주세요. 여기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이 상황에서 고은서도 호칭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와 함께 로비 출입구로 향하던 고은서는 밖에서 빛나는 스포츠카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고은서!”민시후였다.그는 차에 시동을 끌 여유도 없이 바로 고은서 앞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이야? 아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핸드폰은 어디 갔어?”민시후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고은서와 통화 중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급히 온 모양이었다.“나는 괜찮아. 핸드폰은 위에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곽승재가 다쳐서 일단 함께 병원에 가려던 참이야.”민시후는 그제야 곽승재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 대표, 우연이네. 여기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을 들은 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너랑 무슨 상관인데?”“쯧.”민시후는 곽승재의 다친 어깨를 보고 혀를 찼다.그는 비아냥거리는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바로 고개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녀는 바로 다시 고개를 들며 의심스럽게 물었다.“송민아도 없는데 왜 여기서 연기해?”민시후는 말없이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고은서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려 했지만 민시후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차 쪽에 몰아붙였다.“고은서, 내가 단순히 연기하는 것 같아?”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민시후의 뜬금없는 행동에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고개를 들어 보니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장난기 섞인 표정이 서려 있었다.평소에는 유혹적인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얼마간의 온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민시후, 너...”고은서가 이제 장난은 그만치라고 하려는 찰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곽승재가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운전기사도 운전석에 올라타 차에 시동을 걸었다.차가 고은서와 민시후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 고은서는 차 뒷좌석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정히 앉아 있는 곽승재의 차가운 옆모습을 보았다.“쯧. 내려서 날 상대하지도 않다니. 곽승재한테 넌 그냥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보네.”민시후가 약간 실망한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비켜!”민시후가 일부러 곽승재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고은서가 짜증 내며 그의 팔을 밀쳤다.“한가해서 이러는 거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한가하기는? 곽승재가 제 멋대로 먼저 가버린 거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고은서가 그에게 눈을 흘기며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가자. 태워준다며?”“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병원까지 꼭 가야겠어?”민시후가 옷과 손에 흰색 가루가 묻은 고은서를 불만스럽게 쳐다봤다.“지금 네 꼴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알기나 해?”‘엉망이 아닌 게 이상하지. 두 남자에게 끌려다니고 두 층이나 되는 계단을 기어오르고 소화기로 공격까지 했으니 몸이 성한 게 더 이상하지. 곽승재가 아니었다면 엉망이 아니라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지.’“됐어.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직접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
“얼른 와서 은서랑 인사하지 않고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전미자가 말했다.장순이 과일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곽승재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들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고은서를 어두운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본 뒤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 며칠 뭐하면서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병든 고양이처럼 힘이 없어 보여?”전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할머니, 제가 T 국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승재는 저를 도와주려다가 다쳤어요.”고은서가 솔직하게 말했다.“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은서를 도와주고도 은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이 있었겠네.’전미자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몰래 한숨을 쉰 후 더 이상 곽승재를 질책하지 않았다.“할머니, 저 친구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저녁은 가서 먹을게요.”곽승재가 돌아오지 않은 줄 알고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했던 고은서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고은서는 그와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다시 한번 나서 고은서를 잡으려 했다.“주방에도 다 준비했는데 먹고 가. 급한 거 아니잖아.”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안은 감사하지만 먼저 가볼게요.”전미자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은서야, 시간 나면 자주 와.”“네. 할머니, 다음에 봬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곽승재가 말하자 고은서는 싸늘한 어조가 아닌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괜찮아. 넌 좀 쉬어.”곽승재는 그 말에 다시 한층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그저 고은서가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갔다.고은서가 차키를 누르자 곽승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어깨는 이제 괜찮아졌어?”고은서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평온하게 답했다.“응, 괜찮아.”말을 마친 고은서가 운전석에 앉으려 했다.“민시후를 돌보려고 병원에 급하
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랑 이혼할 때 급해서 제때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가져왔어요.”“은서야, 이건 할머니가 너한테 준 선물이야. 그걸 돌려주면 이 할머니가 섭섭하잖니?”전미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말했다.“할머니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이건 원래 미래 손자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잖아요. 그런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이것도 저 대신 곽승재한테 전해 주세요.”지난번 곽승재가 가져갔던 브로치를 다시 돌려주려 하자 전미자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은서야, 할머니는 너와 승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승재가 또 너를 실망하게 했겠지.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날 너무 어려워하지 말렴. 이 목걸이는 손자며느리를 위한 게 아니라 너에게 준 선물이야.”전미자가 말을 이었다.“너처럼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승재와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지.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승재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네가 힘들 걸 알면서도 네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고은서는 전미자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곽승재랑 결혼한 건 제 고집이지 할머니랑 상관없는 일이었잖아요. 목걸이를 돌려드리는 것도 할머니랑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목걸이가 할머니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서예요.”“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야? 너도 1년 넘게 내 손자며느리로 살았잖니. 내가 준 선물을 돌려주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니?”그 말에 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말했다.“할머니께서 제가 주시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그래야지.”전미자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이건 승재가 네가 좋아한다고
유성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만 내가 항상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유성준이 몇 년 동안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 뜻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미안해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성준 오빠.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했어요.”고은서의 솔직한 말에 유성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살짝 쓸쓸하게 변했다.“네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겠지.”...오후, 고은서는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전미자가 생일에 선물해 준 에메랄드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그녀가 전미자를 위해 직접 조향한 캔들을 챙겨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차 속도를 늦췄다.저택의 정원 입구에는 인공 폭포와 연못이 있는 조형물이 있었고 연못에는 녹색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그때 연못 가장자리에서 한 가냘픈 소녀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는 가정부가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아가씨, 이제 들어가세요. 바람이 차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됩니다.”가정부의 호칭을 듣고 고은서는 그녀가 곽승재의 여동생 곽승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곽승재가 전에 말하길 그녀는 어떤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재발했고 약간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고 했다.‘어머니께서 귀국하셔서 전문의를 찾으러 오신 걸까?’연못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곽승연은 가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연못 속의 초록색 잎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가정부는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고은서는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갔다.“사모님.”가정부는 고은서를 보자 예전과 같은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저는 이제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이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네요.”고은서가 곽승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저러는 거예요?”가정부는 그녀가 산책하러 나왔다
이때 민시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고은서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을 내세우며 곽승재와 대립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단순히 오빠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유성준과 달리 민시후의 진심 어린 고백은 고은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하지만 고은서는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민시후, 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고은서, 그 말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고은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 국 마실 거야?”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물론이지.”박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기뻐했다.“은서야,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박지연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안 되겠어. 이 소식을 육현석에게 알려서 곽승재와 너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고은서가 박지연을 말렸다.“내가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건 육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굳이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육현석에게 알리는 것은 곽승재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백유미 일 때문에 그와 감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박지연은 당장 육현석에게 이 소식을 알려 곽승재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알았어. 말 안 할게.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고은서는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유성준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왔다.“은서야, 너 요즘 너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번 술집이나 클럽에서 마주쳤잖아. 그때마다 양옆에 여자들을 끼고 있었잖아.”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대꾸하지 않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그렇게 봐? 내가 없는 말 했어?”“아니, 틀린 말도 아니야.”민시후는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예전에 주위에 여자가 많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식일 뿐이었고 진지한 관계도 없었고 부적절한 행위도 없었어.”고은서는 믿지 않았다.“M 국에 있을 때 어떤 섹시한 여자랑 데이트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민시후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고 그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자랑스러운 일인가? 왜 저렇게 웃지?’민시후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고은서, 혹시 질투야?”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민시후의 과거 연애사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해하지 마. 그냥 네가 민아 일로 화내는 게 웃겨서 예로 든 거야.”고은서가 단호히 답했다.그러나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은서, 뭔가 걸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괜히 설명하는 거야. 평소 내가 이렇게 물었으면 넌 주먹부터 날렸을 거야.”고은서는 지금 당장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헛소리 그만해. 네 연애사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별 관심 없어.”“괜찮아. 네가 신경 쓰든 안 쓰든 모두 솔직하게 얘기해 줄게. M 국의 그 여자는 내 친구야. 그날 우리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이었는데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친구는 기다리는 게 지겨워서 몇 번 재촉했을 뿐이야. 외국은 보통 오픈 마인드 잖아. 그래서 호칭도 더 친근했을 뿐인데 우린 순수한 친구 관계였어.”민시후의 눈빛은 너무 반짝여서 고은서가 눈을 돌리며 기침했다.“이미 말했잖아. 나랑 상관없다고.”“상관있어.”민시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고은서, 나는
민시후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눈빛으로 거절하자 고은서가 설득했다.“조금 전에 뭐 좀 먹어서 배가 부르네. 네가 마셔. 버릴 순 없잖아.”민시후는 그녀를 보며 일부러 말했다.“네가 먹여주면 한 번 생각해 볼게.”고은서는 화가 난 듯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숟가락 드는 데는 아무 지장 없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고은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진짜 화내는 거 보고 싶어?”화가 난 고은서는 결국 직접 국을 다 마셔버렸다.“민아야, 이거 정말 맛있네. 어떤 사람은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아. 복이 없는 거지 뭐.”송민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고은서, 너도 정말 유치하다.”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만해. 난 그냥 병문안 온 거야. 무사한 거 봤으면 됐어. 먼저 가볼게.”송민아가 가려고 하자 고은서는 그녀를 배웅했다.복도로 나온 송민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정말 시후 오빠 포기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돼. 오빠 다친 거 너 때문이지?”송민아도 T 국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오빠 겉으로는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전에 오빠한테 감정적으로 더 상처를 주라고 말했던 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 너도 마음이 있다면 그냥 오빠 받아줘. 내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네가 민시후를 도와준다는 걸 민시후가 알면 네게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던 걸 후회하겠네.”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도와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오빠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서 난감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웃을 뿐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들어가 봐. 민준 오빠가 북성 간식들을 좀 보내줬어. 얼른 먹고 싶어서 눈에 아른거리네. 이제 그만 갈게.”고은서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무심코 말했다.“네 오빠는 널 잘 챙기네.”‘귀찮은 일도 처리해 주고 클럽까지 데리러 와주고 심지어 먹
이 사실은 전에 뛰어내리겠다고 곽승재를 협박할 때 고은서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믿지 않았다.‘지연이는 어떻게 믿게 만든 거지?’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을 숨김없이 말했고 박지연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다 말해줬다.“유전자검사는 언제 한 거야? 난 모르고 있었는데.”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속상해하는 너를 보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박지연이 답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왔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를 구하러 호수에 뛰어든 곽승재를 보며 이혼할 때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면서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었다.그러나 막상 후회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게 틀린 소리는 아니네.’이튿날, 고은서와 박지연은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아직도 거동이 불편한 민시후는 인파를 피면하기 위해 전용기로 귀국할 예정이었다.두 사람도 그와 동행했다.공항으로 가기 전에 고은서는 병원 로비에서 곽현수와 백승엽을 만났다.곽현수는 그녀를 보자마자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백승엽은 악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째려만 볼뿐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낼 용기조차 없었는지 그녀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쯧.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범죄자를 감싸는 주제에 왜 저리 거만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곽현수와 백승엽의 표정이 다 굳어졌다.뻔뻔함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잖아요.”박지연은 맞장구를 치고는 이내 민시후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곽현수를 무시한 채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민시후는 박지연이 출근하고 있는 이레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은서는 푹 쉬고 경찰서로 찾아가 T국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서 백유미의 법적 책임을 묻겠다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