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뿐만이 아니라 억울함, 분노... 그리고 좌절감이 느껴졌다.곽승재가 말하는 새 남자가 민시후일 가능성이 있었다.‘곽승재가 나랑 민시후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는 건 내 배 속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의미하겠지?’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고은서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몇 번이고 말했다시피 전에는 내가 어리석어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지금은 그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는 것뿐이야.”“이게 네가 잘못을 바로잡는 방법이야?”곽승재는 고은서와 민시후가 함께 호텔로 들어가고 또 같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그녀 앞에 던졌다.사진 속 민시후는 그녀와 팔짱을 끼고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아주 다정해 보였다.전에 일부러 송민아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건데 이 사진들이 곽승재 손에까지 들어가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고은서는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그것 또한 잠시뿐이었다.민시후가 자신의 아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곽승재가 두 사람 사이를 철저히 조사할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이혼한다고 해놓고 번복한 사람은 당신이야. 내 탓이 아니란 말이야.”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그녀의 턱을 잡고 한기가 서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그 짧은 시간도 못 견디겠단 말이야?”고은서는 전혀 꿀리지 않고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며 답했다.“난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너!”곽승재는 이를 갈았다.“그래서 대체 누구 아이야?”“이미 속에 답이 있으면서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더 강해졌다.“네 입으로 직접 말해.”턱이 아파온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직접 말한다고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일은 이미 일어났고 어떻게 해결할지 당신 용건이나 말해.”
고은서의 입가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그때는 확실히 안 샀어. 그런데 다음날 당신이 나를 두고 출장 갔을 때, 도저히 당신을 믿을 수 없어서 지연이에게서 피임약을 받아 먹었어. 72시간 안에 먹으면 피임 효과는 있겠지만 자주 먹으면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지고 몸에 해롭다며 적당히 먹으라는 충고까지 받았어. 나도 더 이상 피임약을 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어. 믿지 못하겠다면 지연이를 불러와서 확인해 봐.”고은서는 피임약을 먹지는 않았지만 전에 피임약에 관해 찾아본 적은 있었다. 게다가 박지연도 자신을 위해 사실을 숨겨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곽승재는 구체적인 부분까지 흐트러짐 없이 일일이 다 말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자신의 추측을 의심했다. 전에 고은서는 피임약을 먹을 일이 전혀 없었기에 직접 먹어보지 않고서야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곽승재는 더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다.“나랑 아이를 가지는 건 무섭고 민시후랑 가지는 건 괜찮다는 얘기야?”고은서는 그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다 무섭긴 하지. 그런데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별로 없었어. 또 이튿날 할머니가 부르셔서 본가로 갔다가 부랴부랴 M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약 챙겨 먹는 거 까먹었어. 게다가 피임약을 먹은 지 이틀도 되지 않아서 설마설마하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곽승재는 고은서가 술에 취해 자신의 허리를 둘러안고 같이 자자고 애교 부리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그러나 고은서가 다른 남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게 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녀의 턱을 더 꽉 잡았다.“그래서 M국까지 와서 날 보살펴준 게 다 죄책감 때문이라는 거야?”“아파!”턱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썼다.곽승재는 아픔 때문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고은서를 보면서도 전혀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면 분노의 불길이 점점 더 타오르는 것 같았다.“고은서, 대체 왜 그런 거야?”고은서는 애
“마침 야간 당직 서고 있는데 네가 다친 채 병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지만, 네가 계속 자고 있어서 다시 돌아가서 당직 서다가 왔어. 그런데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박지연은 면봉을 버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혈은 되었어. 조금만 기다려, 연고 가져다줄게.”박지연이 나간 후, 고은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라 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이내 박지연이 연고를 가지고 들어와 그녀의 입술에 발라줬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갑자기 다쳐서 쓰러진 건데?”박지연이 캐물었다.“곽승재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차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어.”고은서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알려주었다.“민시후는 병원에 다녀갔어?”박지연이 답했다.“내가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이미 네가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진 후였어. 그래서인지 곽승재만 보았지 민시후는 보지 못했어...”민시후가 왔었는지는 나중에 전화를 걸어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 고은서가 가장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내 배 속에 아이는... 괜찮아?”곽승재의 태도로부터 간단히 추측해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박지연한테서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괜찮았으면 좋겠어? 아니면 안 괜찮았으면 좋겠어?”박지연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되물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있기 전에는 이 아이를 별로 가지고 싶지 않았었다.그런데 복통을 느낄 때마다 아이를 잃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그녀는 고은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지금까진 별문제 없어. 출혈 현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강하게 잘 버텨내 줘서 괜찮아. 의사 선생님 말로는 자극받지 않고 푹 쉬면 별일 없을 거래.”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지연아, 이런 일을 겪고도 내 배 속에
백유미의 이름을 들은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백유미는 왜 여기에 있는 건데?”‘분명히 구급차를 부른 거로 기억하고 있는데, 설마 나처럼 이 병원에 온 건가?’박지연의 말은 그녀의 추측을 사실로 만들었다.“우리 병원이 클럽이랑 가까우니까 구급차도 자연스레 여기로 데려온 거겠지.”“지금 백유미 상황은 어때?”고은서가 물었다.“다른 층 병실에 있는데 등이 심하게 다친 것 같아. 근육도 상하고 척수도 상해서 아마 한참 동안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다녀야 할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대체 무슨 심보지? 왜 심하게 상하면서까지 대신 막아주려 했던 거지?’“듣기로는 주민기 씨가 데려왔다던데, 수속도 주민기 씨가 하고. 설마 같은 시간 때에 같이 상한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박지연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전에 고은서는 클럽에서 있었던 일만 간단히 얘기해줬을 뿐 백유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지연도 물어본 이상 그녀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백유미가 달려와서 너 대신 쇠방망이에 맞았다는 거지? 대체 왜 그랬대?”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차라리 곽승재를 대신해 맞았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왜 굳이 날 대신해 맞은 걸까? 내가 다치면 도리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러니까. 아무리 곽승재한테 잘 보이려고 해도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곽승재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빤히 알고 있을 텐데.”박지연은 말하면서 갑자기 무언갈 떠올렸다.“혹시 백유미가 널 넘어뜨리려고 일부러 너한테 덮친 건 아닐까?”박지연의 뜻을 깨달은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그러니까 백유미가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일부러 날 구하는 것처럼 하다가 날 유산시키려 했다는 거지?”“그래야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되잖아. 설마 갑자기 선심을 써가면서 자신의 안부 따위 상관하지 않고 널 구했겠어?”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였
민시후에게 여러 번이고 연락해보았지만 잠잠무소식이었다.고은서는 그에게 할 말이 있다고 시간이 되면 병원에 들르라고 메시지를 남겼다.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박지연이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공주님, 아침 드세요.”박지연은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고은서는 박지연이 행여나 자신이 또 흥분해 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박지연을 달랬다.“나 진짜 괜찮아. 밤새 당직 서면서 힘들었을 텐데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박지연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오후에 다시 보러 올게. 너 대신 괜찮은 간병인 한 명 청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수시로 말하면 돼.”“내가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간병인까지 청할 필요 없어.”“그냥 내 말 들어.”박지연이 고집부렸다.“여자는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너도 계속 말했었잖아.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라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네네, 아름다운 미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아침 식사 후, 박지연이 청한 간병인이 도착했다.고은서는 간병인에게 일상용품 구매를 부탁한 뒤 창가에 가서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너무 오래 누워있은 탓에 몸이 뻐근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그러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어젯밤에 다친 발등이 아파왔다. 양말을 벗어보니 발등에는 큰 멍이 들어 있었다.“사모님, 발등도 다치셨어요?”바로 이때, 주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어제저녁 제때 나타난 주민기에게 은근히 고마웠다. 그래서 그를 대하는 태도도 저도 모르게 온화해졌다.“괜찮아요. 나중에 약 바르면 돼요.”주민기는 손에 있던 도시락통을 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사모님, 이건 아줌마가 사모님을 위해 끓인 죽과 디저트들이에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어제 화내면서 문을 박차고 나간 사람이 오늘 아줌마한테 이런 걸 부탁한다고?’“아줌마가 다 사모님께
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가 사인한 이혼서류를 저한테 전해주라고 안 하던가요?”“그런 명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주민기는 아주 담담해 보였다.“그럼 직접 구청으로 가겠단 뜻인가요?”고은서가 캐물었다.주민기는 여전히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의 결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느낀 적이 없는 곽승재가 흔쾌히 이혼해줄 리가 없다는 것을 고은서는 이내 깨달았다.“실장님!”고은서가 주민기에게 무언갈 부탁하려고 할 때 간병인 같은 사람 한 명이 달려오면서 그를 찾았다.“백유미 씨께서 상처가 너무 아프다면서 실수로 아침을 엎어버렸어요. 그리고 지금은 진통제를 달라고 하시는데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역시 곽승재가 아줌마한테 내 아침까지 부탁할 리가 없지. 백유미 아침을 준비하면서 겸사겸사 내 아침까지 준비한 거였네.’고은서는 헛웃음을 쳤다.방금전까지 담담하던 주민기가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간병인을 질책하기 시작했다.“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잖아요. 왜 직접 찾아오고 난리세요.”간병인이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실장님. 백유미 씨가 계속 재촉하시고 또 폰 배터리가 다 나가는 바람에 간호사한테 물어보고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요.”“볼 일이 있으시면 먼저 가보세요. 그리고 아침도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세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고은서가 오해했다는 걸 알고 황급히 설명했다.“사모님, 아침은 대표님께서 직접 아주머니한테 부탁하셔서 준비한 거예요. 게다가 다 사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거로...”“알겠으니까 더는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이런 아침을 먹겠어요.”어떤 설명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편히 쉬세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간병인과 함께 병실에서 나갔다....GS 그룹 대표 사무실.주민기는 어두운
“어제저녁에 병원은 왜 안 온 거야? 곽승재가 너한테 아이에 관해서 물어봤어?”고은서가 물었다.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화를 냈다.“나도 너 따라 병원에 가려고 했어. 그런데 곽승재가 사람 시켜서 내 차를 막아서 못 간 거라고. 내가 가서 설명하려고 할 때 어떤 눈치 없는 사람이 우리 둘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주가가 영향받을까 봐 밤새 그 일을 처리하고 왔어.”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우리 둘 소문?”“네가 직접 봐.”민시후는 폰을 고은서에게 던져주면서 말했다.폰 화면에는 “ZY 그룹 민시후가 GS 그룹 사모님을 탐내다”라는 애매한 제목을 가진 기사가 떠 있었다.밑에는 클럽에서 나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찍힌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 속 민시후는 정신을 잃은 고은서를 안고 가는 곽승재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기사를 퍼뜨린 사람은 민시후가 고은서를 빼앗으려다가 곽승재한테 맞았다면서 그의 얼굴에 있는 상처를 특별히 강조했다.더 어이가 없었던 건 전에 민시후랑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사진까지 공개가 되었다. 기사에서는 두 사람이 바람도 당당하게 피울 만큼 다정하다고 지껄였다.민시후가 제때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해성 사람들 전체가 알게 되었을 것이다.‘곽승재가 화를 낸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그리고 호텔에서 있었던 일도 민시후가 말한 게 아니라 기사를 보고 알았던 거네.’“이 기사를 퍼뜨린 사람이 누군지는 찾았어?”고은서가 물었다.클럽에서 찍힌 사진은 우연이라고 해도 호텔에서 찍힌 사진은 무려 두세 주일이나 지났는데 갑자기 함께 퍼뜨렸다는 게 너무 수상했다. 게다가 하필 곽승재가 고은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타이밍에 말이다.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아직 못 찾았어.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퍼뜨린 거라 IP 추적도 불가능해.”고은서는 이 모든 일이 백유미가 꾸민 짓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백유미도 그날 심하게 다친 탓에 이 모든 걸 혼자 했을 리는 없어. 꼭 조력자가 따로 있는 게 분명해.’“송민아한
비록 고은서도 백유미에게 함정을 파놓긴 했지만 그녀가 또 다른 일을 꾸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고은서는 자신의 자유와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간 내에 이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곽승재의 태도를 보아서는 평화롭게 이혼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이혼 소송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곽승재라는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거절했겠지만 민시후는 달랐다.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도와주는 건 되는데 계속 그 조건이야. 나랑 함께 내 혼사를 막아주는 거.”“민시후, 지금 송민아 앞에서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온 해성에 소문 날 정도로 일이 커졌는데 네 혼사까지 책임져 달라고? 지금 내가 덜 비참해 보여서 그러는 거야?”민시후는 피식 웃으면서 반박했다.“설마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와달라는 건 아니지? 곽승재가 그렇게 건드리기 쉬운 사람도 아니고 지금쯤 날 어떻게 엿먹일지 계획 중일 수도 있어.”“두 사람 내가 아니어도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잖아. 변호사 한 명만 소개해달라는데 너한텐 엄청 쉬운 일이잖아. 이번 한 번만 도와줘.”고은서는 사실을 콕 짚어 말했다.“그렇게 쉬운 일이면 네가 직접 찾을 것이지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건데.”민시후가 되물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의 부탁을 쉽게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네 혼사를 막아주는 건 못하겠지만 송민아 앞에서 연기하는 게 노력해서 계속해줄 수 있어.”“고은서, 굳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민시후는 건들건들하게 말했다.“아무튼 지금 네 배 속의 아이가 다 내 아이라고 믿는 있는 상황이잖아. 이 기회를 잡고 윈윈하면 되는 거야.”그러나 고은서는 자신이 이 일에 참여하는 순간 민씨 가문과 송씨 가문의 분노가 자신을 향해 타오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이혼만 하고 싶었을 뿐, 더 큰 곤경에 빠지고는 싶지 않았기에 단연코 거절했다.“못하겠어.”민시후도 따라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나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이 광경을 주민기는 황급히 벨을 누르며 의사를 불렀다.“의사 선생님...”...고은서의 병실로 다시 돌아간 박지연은 방금전 씩씩거리며 나가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거봐,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고은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위안했다.“화 풀고 나랑 내일 귀국할 준비 하자. 돌아가고 나서 나 밥 사줘. 그리고 SPA도 하고 싶은데 네가 쏠 거지?”박지연은 한참 동안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목매지 말고 우리 다른 남자 찾아보자. 넌 곽승재가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박지연은 평소에 이런 오글거리는 행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곽승재한테 찾아가더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알겠어.”고은서가 박지연의 등을 토닥이며 웃으면서 답했다.민시후도 어느새 백유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해보라고 사람 시켰어. 민시현한테도 원지훈 사망 사건에 관해 다시 조사하게끔 당지 경찰 측에 말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괜찮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서 큰 변화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조사해달라고 형을 귀찮게 굴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답했다.“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 데 써먹을 수 있을 때 써야지.”민시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난 네 형한테 불리워 가서 밥 먹기 싫어.”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싸움을 했다.“민시후, 비록 네 선택이기는 하지만 다신 이런 일에 끼어들지 마.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일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민시후는 이번 일로 며칠 동안 병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그녀가 보기에도 엄청 안쓰러운데 그의 가족들은 오죽할까.“네가 다치는 일이 없는 한 이건 약속 못 하겠는데.”
곽승재는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박지연은 콧방귀를 뀌면서 곽승재한테 고은서가 유산한 날 동료한테 부탁해서 그가 썼던 수건에 있던 머리카락으로 유전자검사를 했다면서 알려줬다.“고은서가 계속 마음에 못을 박는 소리를 해왔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요. 원래는 당신이 고은서의 마음을 되돌리고 두 사람이 재혼하게 되는 그날에 이 모든 걸 알려주면서 은서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진짜 구제불능인 것 같네요. 어떻게 자기 아내랑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을 이대로 놓아줄 수가 있죠? 당신은 은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박지연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고은서가 유산했을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떠올린 박지연은 지금이라도 곽승재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은서가 그 아이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애가 행복하게 클 수 있는지를 얼마나 고민해왔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백유미 그 악독한 여자가 이 모든 걸 망쳐버렸잖아요.”박지연은 말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당신이 은서를 굳게 믿었다면 굳이 이혼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이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곽승재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은서가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부터 아주 큰 착오였어. 당신은 단 한 번도 은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잖아요. 단 한 번도 은서 입장에 서서 고려해본 적이 없잖아요! 민시후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고 했죠? 그런데 민시후가 당신보다 백 배는 나아요. 적어도 은서를 웃게 하려고 노력하고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고은서가 무슨 일이 있든 항상 발 벗고 나서주잖아요.”박지연은 계속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그의 마음에 칼을 꽂았다.“고은서가 백유미한테 반격하려는 일을 민시후한테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