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저쪽에서 고은서를 부르자 고은서는 전미자 곁으로 다가갔다.“오늘 밤 너와 승재는 그냥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자고 가라.” 전미자가 고은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은서야, 어제 할머니랑 함께 있기로 했잖니. 오늘은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그럴 리가요, 할머니가 귀찮다고만 하지 않으시면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게요.” 어차피 하룻밤인데 고은서에게는 어디서 자는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할머니를 자주 뵈러 오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말을 달가워하지 않으시며 약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으셨다. “오늘 오후에 승재 아빠가 또 너를 힘들게 한 거니? 할머니는 네가 예의 없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 네가 궁지에 몰려서야 그런 말을 했을 테지.” 할머니는 이렇게 고은서를 잘 이해하시는데 정말 할머니와 헤어지기 싫었다. 고은서가 말했다. “힘들게 한 건 아니에요. 저도 잘못한 부분이 있었죠.” 할머니는 더 묻지 않으시고 고은서를 방으로 데려가셨다. 장순이가 금고에서 상자를 꺼내 할머니께 건넨 후 방을 나갔다. 할머니는 상자를 열어 한 줄의 목걸이를 꺼내셨다. 목걸이는 백금으로 만들어졌고 펜던트는 물결이 아름다운 정교하게 가공된 에메랄드 원석이었다. “은서야, 원래는 너와 승재의 결혼식 날 이걸 네게 직접 걸어주려고 했었어. 안타깝구나...” 할머니는 말을 잇지 않으시고 목걸이를 고은서에게 건네셨다. “너와 승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네가 항상 행복하길 바란단다.”고은서는 감히 손을 뻗지 못했다. “할머니,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선물까지 받을 순 없어요.”“그저 물건일 뿐이야.” 할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앉아봐라. 할머니가 직접 걸어줄게.”할머니의 정성을 거절할 수 없던 고은서는 할머니 앞에 반쯤 앉아 목걸이를 받아들였다. 차가운 에메랄드가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결혼이 네 잘
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가 어느새 그녀 옆에 와서 계약서의 문제점을 짚어주고 있었다. 그의 긴 팔이 컴퓨터 화면을 가리키며 고은서의 코에 거의 닿을 정도였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서 나는 시원한 삼나무 향과 은은한 술 냄새를 맡았다. “날 쳐다보지 말고 계약서나 봐.” 곽승재는 손으로 그녀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치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듯한 행동과 말투에 고은서는 살짝 입을 삐쭉거렸지만 별다른 항의 없이 다시 계약서를 보기 시작했다. 곽승재가 지적한 문제들은 고은서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주는 듯했다. 그 문제들은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곽승재는 단번에 찾아냈다. 그가 GS 그룹을 그렇게 잘 관리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업무 능력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그 후, 곽승재의 조언에 따라 고은서는 문제 있는 부분을 표시하고 신중히 수정한 뒤 삼촌에게 보냈다. 이 모든 일을 마치고 고은서는 기지개를 켰다. 너무 피곤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내다 보니 지금은 그저 샤워하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곽승재는 그녀 옆에 앉아 있었고 여전히 그의 깊은 검은 눈에는 약간의 취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원래 고씨 가문의 사업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도와주는 것도 싫어했으면서 이번에는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고은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나서지 못하게 한 건 너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야. 이제 내가 신경 쓰는 건 당연하지, 내 가족의 사업이니까.”고은서의 말에서 곽승재는 자신과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로 돌아갔다. 고은서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하루가 지나면서 몸의 여러 자국들이 조금 나아졌지만 곽승재가 세게 눌렀던 자국들은 여전히 깊게 남아 있었다. 고은서는 속으로 욕을 하며 잠옷을 입고
고은서가 아래층으로 내려와 한참을 찾아봤지만 곽승재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회사에 일이 생겨 갔나 싶어 고은서는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주민기의 번호로 걸어봐도 역시나 전원이 꺼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고은서는 GS 그룹의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 확인했더니 해외에서 긴급한 일이 생겨 곽승재와 주민기가 출장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돌아오는 날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우연일 수가? 오늘 이혼 서류를 받기로 약속했는데 그가 출장을 가다니.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이혼을 피하려고 출장이라는 핑계를 대며 도망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한 후 고은서는 곽승재의 카톡을 차단 해제하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곽승재, 갑자기 출장을 갔다니, 설마 말을 바꾸려는 건 아니겠지? 언제 돌아와? 왜 나한테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 당장 곽승재의 답장을 받을 수 없을 테니 고은서는 할머니에게 가서 하소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순이가 말하길 할머니는 보통 오전에 기도를 드리느라 시간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혼 문제에 관해서라면 할머니는 곽승재에게 서류에 서명하라고 압박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마침 민시후에게서 전화가 와서 프로젝트 계약 건이 해결되었다고 하자 고은서는 일단 본가를 떠났다. 장순이는 고은서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불교당으로 가서 전미자에게 이를 전했다. 전미자는 고은서가 선물한 보리 묵주를 손에 들고 돌리며 말했다. “저 못난 녀석도 드디어 눈치 좀 챘구나, 이런 때에 출장을 갈 줄이야.” “할머니, 근데 보니 사모님이 많이 화난 것 같던데 이러다가 도련님과 사이가 더 나빠지면 어쩌죠?” 장순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미 이혼하려는 사이인데 더 나빠질 게 뭐 있겠어?” 할머니는 말했다. “은서의 결심이 너무 단단해서 승재의 이 방법도 통하지 않을까
민시후는 참 상대하기 어려웠고 고은서는 그와 더 얽히기 싫어 바로 물었다. “알겠어요, 언제 시간이 돼요?” 민시후가 답했다. “내일, 은서 씨한테 이틀 줄게요, 계약 관련 일들은 그동안 마무리해요.” 민시후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고 고은서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설마 일부러 내 앞에서 나를 망신 주거나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거 아니겠죠?” 민시후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미 약속했잖아요. 앞에 함정이 있어도 뛰어들어야죠.”고은서는 침묵했다.오후에 고은서는 허 교수를 찾아가 계약을 공식적으로 확인했고 이후 ZY 그룹으로 돌아가 민시후와 합류했다. “좋아요, 일 끝났으니 축하할 겸 밥이나 먹어요!” 민시후는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고은서는 정중히 사양했다. “괜찮아요. 다음에 먹으면 돼요.” “다음은 다음이고 오늘은 약속도 다 취소했으니까 당신이 가야 해요.”민시후가 말했다. “또 나를 이용해서 송민아를 따돌리려는 거예요?” 고은서가 물었다. 민시후는 차 열쇠를 집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런 거 아니예요. 다음 주면 당신도 ZY 그룹에 입사하니까 미리 환영한다는 의미로 단순히 밥 한끼 먹으려는 거예요.” 민시후가 오늘은 장난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고은서는 결국 그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민시후가 운전하는 차에 고은서는 조수석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약품 홍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은서의 전화벨이 울렸다.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온 전화인 줄 알았으나 화면을 확인하니 박지연이었다. 아마 전미자의 생일이 끝나고 그녀와 곽승재의 이혼 상황을 묻는 전화인 것 같았다. “지연아.” 고은서는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내가 맞춰볼게. 곽승재랑 아직 이혼 못 했지?” 박지연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고은서는 그 이야기를 하자마자 조금 짜증이 났다. “오늘 아침에 해외 출장을 갔어. 언제 돌아올지 몰라.”“내 예상이 딱 맞았네. 곽승재가
민시후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정말 곽승재랑 이혼하려고요? 홧김에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민시후가 두 사람의 일에 관심을 보이자 고은서는 어이가 없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은서와 민시후는 차로 1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한 T 국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고은서가 투덜거렸다.“이럴 거면 T 국에 가서 먹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요?”“그러게요.”민시후는 진지하게 물었다.“여권 가지고 왔으면 바로 T 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 살 수 있어요.”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았다. T 국 요리 식당이 멀기는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서 기분이 좋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기이한 꽃과 풀로 가득 찼고 테이블마다 울타리로 둘러싸여 작은 정원에 놀러 온 느낌이었다.주문을 마친 뒤, 민시후는 전화를 받으러 갔고 고은서는 카톡을 확인했다. 곽승재가 답장하지 않아서 전화를 걸자 받지 않았고 화가 난 고은서는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팽개쳤다. 아래층을 내려다보던 고은서는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빛으로 도배된 차량의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원지훈이었다. 원지훈은 차 열쇠를 식당 직원한테 건네면서 거만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섰고 여자한테 치근덕거렸다. 고은서는 원지훈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원지훈이 계약한 휴대폰 프로젝트는 화제성이 높았고 민시후가 일부러 떠벌렸기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문제가 많아서 곧 파산할 것이고 백유미가 투자한 돈을 날리게 되면서 고소할 것이 뻔했다.민시후가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올 때 고은서가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불빛 아래에서 더 빛나는 얼굴과 그 위로 피어난 미소는 영락없이 여우의 모습이었다.“은서 씨, 다른 남자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마요.”민시후는 애틋한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웃는 모습을 보는 남자마다 은서 씨한테 반하게 될 테니까요.”고은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민시후를 쳐다보았다.“민 도련님이 조금
고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했고 전화를 받았다.“곽승재, 오늘 이혼하기로 했으면서 왜 갑자기 출장 간 건지 설명해 봐.”“갑자기 발령받은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고 고은서가 따져 물었다.“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일이 잘 해결되면 아마 열흘에서 두 주일 정도 될 것 같아.”“두 주일?”고은서가 목청을 높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고은서를 쳐다보았다. 고은서는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고는 물었다.“설마 일부러 이혼하지 않으려고 미루는 건 아니지?”곽승재는 하루가 멀다 하게 이혼을 외치는 고은서가 짜증 났다.“고은서, 비행기 열 몇 시간 타고 도착해서 쉬지도 못하고 너한테 바로 전화했어. 나 좀 숨 쉬게 내버려 두면 안 돼?”고은서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누가 너더러 아무 말 없이 가라고 했어? 연락이 되지 않아서 숨 못 쉬고 버틴 건 나야!”“이혼하는 걸 몇 날 좀 미뤘다고 숨 못 쉬어?”곽승재는 비수 같은 말로 고은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럼 일 년 넘는 시간 동안 숨도 못 쉬고 어떻게 산 거야? 이혼은 어차피 할 거고 출장은 미룰 수 없잖아!”고은서는 화가 나서 되받아치려고 할 때, 민시후가 투덜거렸다.“언제까지 전화하는 거예요? 요리 다 식어요!”“곧 갈게요.”고은서는 눈치를 살피면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곽승재가 물었다.“지금 어디야?”고은서가 반문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방금 민시후 목소리 같았는데, 너 또 그 사람이랑 밥 먹으러 갔어?”곽승재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은서, 민시후랑 만나는 의도가 도대체 뭐야?”고은서는 물어볼 자격조차 곧 박탈당하게 될 곽승재가 우스워서 일부러 자극했다.“내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민시후는 출신, 얼굴, 몸매 하나라도 빠짐없이 너보다 나아. 몇 번 만나보니 좋은 사람 같아서 너랑 이혼하고 갈아탈 생각이야. 그러니까 빨리 귀국해서 나랑 이혼해. 서로 앞길 막지 말자고!”고은서는 곽승재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
민시후와 함께 밥을 먹었다면 민시후의 장난에 체할 것 같았다. 민시후가 고른 식당의 음식은 식재료부터 비쌌고 맛은 고급스러웠고 깔끔했다. 고은서는 천천히 음식을 맛보았고 배를 채운 뒤에 결산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실내의 방을 스쳐 지나갈 때, 문이 절반쯤 열린 방 안에서 원지훈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들어올 때는 몇 명 안 되었지만 방에는 이미 열 몇 명이 모여있었고 친구들은 앞다투어 원지훈한테 술을 권하면서 잘 보이려고 애썼다. 고은서는 여자를 품에 안고 술을 마시는 원지훈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가만히 찍었고 고은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보여주려고 했다. 밖으로 나간 고은서가 콜택시를 부르려고 하자 몸이 다부진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사모님, 댁까지 모실게요.”고은서는 사모님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 남자가 바로 곽승재가 고은서 곁에 붙여준 기사 겸 보디가드 이준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고은서는 혼자 외출했기에 이곳에 나타난 이준이 신기하기만 했다.“대표님이 데리러 오라고 하셨어요.”고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본 이준이 대답했다. 곽승재는 고은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이준을 보낸 것이다. 고은서는 갑자기 일이 있다고 간 민시후가 떠올랐다.‘설마 민시후가 갑자기 간 것도 곽승재 짓은 아니겠지? 아, 그럴 리 없어.’고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준을 돌려보낼 수 없기에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예원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열 시가 되었다. 이미숙이 물을 떠서 건네며 말했다.“사모님, 사모님 방 옆에 있는 객실을 청소했어요. 도련님이 기사 이준 씨를 집에 들이면 사모님이 외출할 때 이준 씨가 동행할 수 있으니 편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알아서 하세요.”고은서는 덤덤하게 말했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서 중요한 물건과 옷을 잘 정리해 넣었다. 고은서는 할머니와 한 약속을 지켰기에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예원 별장에서 지낼 이유가 없었다. 그래
“네, 곽승재랑 이혼할 건데 여기서 지낼 수는 없죠.”고은서가 미소를 지으면서 제안했다.“아줌마, 제가 새집을 사면 사직하고 저랑 그 집으로 함께 가요.”고은서는 원래 고씨 가문으로 돌아가 외할아버지와 같이 지내려고 했지만 ZY 그룹에 출근해야 하기에 외할아버지 댁에서 지낼 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새집을 마련했다. 고은서의 말을 들은 이미숙은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사모님, 이혼이라니 그게 무슨... 도련님과 잘 지내셨던 거 아니에요? 도련님은 사모님이 나가시는 거 아세요?”“제가 직접 말할 거예요.”고은서는 이삿짐센터 직원과 같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이미숙과 함께 잘 입지 않는 옷을 기부하거나 팔았고 나머지 옷 중에서 산 지 얼마 안 된 옷과 유독 좋아하는 옷, 그에 맞는 쥬얼리와 가방, 화장품을 캐리어에 넣었다. 하지만 다 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캐리어 여러 개를 가득 채웠기에 이삿짐센터에 신청한 것이다.두 직원이 캐리어를 들고 내려갔고 그 뒤를 따라가던 고은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결혼할 때 외할아버지는 고은서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옷, 신발, 이불 그리고 각종 생활용품을 차 두 대에 꽉 채워서 보냈지만 더 주지 못해서 마음 아파했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돈으로 쥬얼리와 금을 사두었기에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빈털터리로 내쫓기지는 않았다. 가방을 든 고은서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숙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발만 동동 굴렀다.“사모님, 도련님이 돌아온 후에 다시 얘기해 보면 안 될까요?”“아줌마, 그동안 저를 보살펴줘서 고마웠어요. 아까 제가 한 제안은 다시 생각해 보고 알려주세요.”말을 마친 고은서는 대문을 나섰고 이삿짐센터 전용 차량에 물건이 꽉 들어찼다. 이 물건들은 잠시 해성시의 어느 한 호텔로 보내질 것이다. 고은서의 외할아버지는 친구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슬퍼했기에 괜히 집에 돌아가서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은서는 마세라티를 직접 운전해서 호텔로 가려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발신자가 곽승재인 것을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곽승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의외네. 내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왜 비아냥거리며 난리야?’엘리베이터는 문이 너무 오래 열려있은 탓에 경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곽승재가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은서도 더는 그와 다투기 싫어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일이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저 참을 생각이었다.이내 곽승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서 경보 소리가 멈추고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층으로 가세요?”고은서가 곽승재랑 함께 온 여자에게 물었다.여자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자랑이라도 하는 듯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그쪽이랑 같은 층이에요.”‘나랑 같은 층이라고? 진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엘리베이터 각 면에 거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곽승재와 여자의 행동을 엿볼 수 있었다.여자는 곽승재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대표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곽승재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고 그에게 애교부리기 시작했다.“대표님, 이 호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으신데 웨이터한테 우리 룸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곽승재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하고 싶은 대로 해.”“그럼 저 와인도 같이 주문해도 될까요?”여자는 곽승재의 대답에 점점 더 담이 커졌다.“오늘 대표님 대신 운전하느라고 연회 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단 말이에요. 보상은 해줄 거죠?”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응.”그의 대답을 얻은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더 애교스러워졌다.“고마워요, 대표님.”‘우웩, 토할 것 같아.’고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린 탓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왜, 의견이라도 있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자기애가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내가 이혼까지 했던 너를 왜 좋아해?”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함께 연기하면서 이미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진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지금보다 더 많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서는 더는 사랑이란 단어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내리지 말라고 말했다.“나 혼자 들어가면 돼.”“확실해?”“응.”민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서 박지연에게 연락했다.그러나 전화가 통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이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손에는 명품백을 들고 있었고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몸매도 우월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 같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지? 내가 이 호텔에 있는 걸 알면서도 굳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성에 다른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닌데.’“은서야, 괜찮아?”전화 너머로 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답했다.“응. 너 온 닥터랑 얘기 나눠봤어? 왜 그 여자랑 함께 카페로 갔는지는 물어봤고?”“물어봤지. 다른 친구가 유혜린이 귀국한 거 알고 같이 밥 먹자고 했대. 그런데 종일 수술하면서 피곤해서 그저 같이 커피 사러 간 거라고 했어.”“그게 다야?”고은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응.”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물었다.“다친 손이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고?”“연고 가져다줬어. 병원으로 새로 개발한 건데 흉터 없애는 데 좋다면서 주던데.”“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캐물었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고은서가 되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백씨 집안 프로젝트를 산통 깨는 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고 송민준한테 부탁한 거야? 목적이 분명하잖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그냥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우리 둘 사이에 무슨 빚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 널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유지하라고 한 사람은 너잖아.”민시후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송민준도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거네.”“알아차리라지 뭐. 게다가 송민준 집안 도우미가 그런 짓을 했는데 네가 의심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아? 걔도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의무가 있잖아.”민시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이 정도로 지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그런데 그 도우미가 수상하긴 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안고 갈 생각이었으면 숨을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왜 송민아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송민준한테는 저렇게 쉽게 걸려든 거지?”민시후는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이번에는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거야. 그런데 다시는 송민준 앞에서 꼼수 부릴 생각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감히 못 건드리는 존재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제발 총명한 척 그만해줄래?”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보다는 총명하지. 게다가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면 날 찾아와서 협력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잖아.”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겸손한 것도 일종 미덕이에요.”“이미 충분히 우수해서 그 어떤 미덕도 나에겐 금상첨화일 뿐이야. 딱히 너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두 사람은 곧장 ZY 그룹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정식으로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전에 입사 활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데다가 그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