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정말 곽승재랑 이혼하려고요? 홧김에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민시후가 두 사람의 일에 관심을 보이자 고은서는 어이가 없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은서와 민시후는 차로 1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한 T 국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고은서가 투덜거렸다.“이럴 거면 T 국에 가서 먹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요?”“그러게요.”민시후는 진지하게 물었다.“여권 가지고 왔으면 바로 T 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 살 수 있어요.”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았다. T 국 요리 식당이 멀기는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서 기분이 좋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기이한 꽃과 풀로 가득 찼고 테이블마다 울타리로 둘러싸여 작은 정원에 놀러 온 느낌이었다.주문을 마친 뒤, 민시후는 전화를 받으러 갔고 고은서는 카톡을 확인했다. 곽승재가 답장하지 않아서 전화를 걸자 받지 않았고 화가 난 고은서는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팽개쳤다. 아래층을 내려다보던 고은서는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빛으로 도배된 차량의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원지훈이었다. 원지훈은 차 열쇠를 식당 직원한테 건네면서 거만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섰고 여자한테 치근덕거렸다. 고은서는 원지훈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원지훈이 계약한 휴대폰 프로젝트는 화제성이 높았고 민시후가 일부러 떠벌렸기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문제가 많아서 곧 파산할 것이고 백유미가 투자한 돈을 날리게 되면서 고소할 것이 뻔했다.민시후가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올 때 고은서가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불빛 아래에서 더 빛나는 얼굴과 그 위로 피어난 미소는 영락없이 여우의 모습이었다.“은서 씨, 다른 남자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마요.”민시후는 애틋한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웃는 모습을 보는 남자마다 은서 씨한테 반하게 될 테니까요.”고은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민시후를 쳐다보았다.“민 도련님이 조금
고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했고 전화를 받았다.“곽승재, 오늘 이혼하기로 했으면서 왜 갑자기 출장 간 건지 설명해 봐.”“갑자기 발령받은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고 고은서가 따져 물었다.“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일이 잘 해결되면 아마 열흘에서 두 주일 정도 될 것 같아.”“두 주일?”고은서가 목청을 높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고은서를 쳐다보았다. 고은서는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고는 물었다.“설마 일부러 이혼하지 않으려고 미루는 건 아니지?”곽승재는 하루가 멀다 하게 이혼을 외치는 고은서가 짜증 났다.“고은서, 비행기 열 몇 시간 타고 도착해서 쉬지도 못하고 너한테 바로 전화했어. 나 좀 숨 쉬게 내버려 두면 안 돼?”고은서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누가 너더러 아무 말 없이 가라고 했어? 연락이 되지 않아서 숨 못 쉬고 버틴 건 나야!”“이혼하는 걸 몇 날 좀 미뤘다고 숨 못 쉬어?”곽승재는 비수 같은 말로 고은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럼 일 년 넘는 시간 동안 숨도 못 쉬고 어떻게 산 거야? 이혼은 어차피 할 거고 출장은 미룰 수 없잖아!”고은서는 화가 나서 되받아치려고 할 때, 민시후가 투덜거렸다.“언제까지 전화하는 거예요? 요리 다 식어요!”“곧 갈게요.”고은서는 눈치를 살피면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곽승재가 물었다.“지금 어디야?”고은서가 반문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방금 민시후 목소리 같았는데, 너 또 그 사람이랑 밥 먹으러 갔어?”곽승재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은서, 민시후랑 만나는 의도가 도대체 뭐야?”고은서는 물어볼 자격조차 곧 박탈당하게 될 곽승재가 우스워서 일부러 자극했다.“내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민시후는 출신, 얼굴, 몸매 하나라도 빠짐없이 너보다 나아. 몇 번 만나보니 좋은 사람 같아서 너랑 이혼하고 갈아탈 생각이야. 그러니까 빨리 귀국해서 나랑 이혼해. 서로 앞길 막지 말자고!”고은서는 곽승재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
민시후와 함께 밥을 먹었다면 민시후의 장난에 체할 것 같았다. 민시후가 고른 식당의 음식은 식재료부터 비쌌고 맛은 고급스러웠고 깔끔했다. 고은서는 천천히 음식을 맛보았고 배를 채운 뒤에 결산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실내의 방을 스쳐 지나갈 때, 문이 절반쯤 열린 방 안에서 원지훈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들어올 때는 몇 명 안 되었지만 방에는 이미 열 몇 명이 모여있었고 친구들은 앞다투어 원지훈한테 술을 권하면서 잘 보이려고 애썼다. 고은서는 여자를 품에 안고 술을 마시는 원지훈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가만히 찍었고 고은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보여주려고 했다. 밖으로 나간 고은서가 콜택시를 부르려고 하자 몸이 다부진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사모님, 댁까지 모실게요.”고은서는 사모님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 남자가 바로 곽승재가 고은서 곁에 붙여준 기사 겸 보디가드 이준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고은서는 혼자 외출했기에 이곳에 나타난 이준이 신기하기만 했다.“대표님이 데리러 오라고 하셨어요.”고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본 이준이 대답했다. 곽승재는 고은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이준을 보낸 것이다. 고은서는 갑자기 일이 있다고 간 민시후가 떠올랐다.‘설마 민시후가 갑자기 간 것도 곽승재 짓은 아니겠지? 아, 그럴 리 없어.’고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준을 돌려보낼 수 없기에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예원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열 시가 되었다. 이미숙이 물을 떠서 건네며 말했다.“사모님, 사모님 방 옆에 있는 객실을 청소했어요. 도련님이 기사 이준 씨를 집에 들이면 사모님이 외출할 때 이준 씨가 동행할 수 있으니 편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알아서 하세요.”고은서는 덤덤하게 말했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서 중요한 물건과 옷을 잘 정리해 넣었다. 고은서는 할머니와 한 약속을 지켰기에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예원 별장에서 지낼 이유가 없었다. 그래
“네, 곽승재랑 이혼할 건데 여기서 지낼 수는 없죠.”고은서가 미소를 지으면서 제안했다.“아줌마, 제가 새집을 사면 사직하고 저랑 그 집으로 함께 가요.”고은서는 원래 고씨 가문으로 돌아가 외할아버지와 같이 지내려고 했지만 ZY 그룹에 출근해야 하기에 외할아버지 댁에서 지낼 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새집을 마련했다. 고은서의 말을 들은 이미숙은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사모님, 이혼이라니 그게 무슨... 도련님과 잘 지내셨던 거 아니에요? 도련님은 사모님이 나가시는 거 아세요?”“제가 직접 말할 거예요.”고은서는 이삿짐센터 직원과 같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이미숙과 함께 잘 입지 않는 옷을 기부하거나 팔았고 나머지 옷 중에서 산 지 얼마 안 된 옷과 유독 좋아하는 옷, 그에 맞는 쥬얼리와 가방, 화장품을 캐리어에 넣었다. 하지만 다 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캐리어 여러 개를 가득 채웠기에 이삿짐센터에 신청한 것이다.두 직원이 캐리어를 들고 내려갔고 그 뒤를 따라가던 고은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결혼할 때 외할아버지는 고은서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옷, 신발, 이불 그리고 각종 생활용품을 차 두 대에 꽉 채워서 보냈지만 더 주지 못해서 마음 아파했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돈으로 쥬얼리와 금을 사두었기에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빈털터리로 내쫓기지는 않았다. 가방을 든 고은서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숙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발만 동동 굴렀다.“사모님, 도련님이 돌아온 후에 다시 얘기해 보면 안 될까요?”“아줌마, 그동안 저를 보살펴줘서 고마웠어요. 아까 제가 한 제안은 다시 생각해 보고 알려주세요.”말을 마친 고은서는 대문을 나섰고 이삿짐센터 전용 차량에 물건이 꽉 들어찼다. 이 물건들은 잠시 해성시의 어느 한 호텔로 보내질 것이다. 고은서의 외할아버지는 친구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슬퍼했기에 괜히 집에 돌아가서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은서는 마세라티를 직접 운전해서 호텔로 가려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발신자가 곽승재인 것을
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두 시간 내로 다시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아까 말한 돈은 못 줘.”고은서는 곽승재의 거만한 태도가 거슬렸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안 줘도 돼. 난 돈을 좋아하지만 너랑 부부로 묶여있는 게 조건이라면 절대 안 가질 거야. 나 스스로 벌 수 있으니 굳이 네 돈을 쓰지 않아도 돼.”곽승재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며칠 전에 있었던 사고를 벌써 잊은 거야?”고은서가 잊을 리 없었다.“서인수는 잡혔으니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사고당할까 봐 무서워서 예원 별장에만 있을 수 없잖아?”“고은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두 주일 정도만 집에 있어 주면 돼.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곽승재는 한결 부드럽게 말했지만 고은서는 단호했다.“아니, 하루도 그곳에 있기 싫어.”만약 이사하기 전에 이 조건을 들었다면 며칠 동안 집에 있었겠지만 이미 집을 나와서 자유를 만끽하는데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곽승재는 냉철하고 똑똑한 상인이라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았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위자료에 대해 말할지, 아니면 고은서더러 정신 손해배상금과 고용인 월급을 내놓으라 할지 모르는 일이다. 고은서는 남의 돈을 욕심내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 생각이었다. 고은서가 단호하게 말하자 곽승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그래, 고은서 네 마음대로 해! 내가 귀국하면 그날로 이혼하는 거야. 네가 후회해도 소용없어!”곽승재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잠깐만!”곽승재의 화가 누그러들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아까 한 말 다시 한번 해줄래? 그때 가서 말 바꾸면...”뚝.고은서가 다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전화를 끊었고 휴대폰을 사무실 책상에 내리쳤다. 휴대폰 액정이 나갔고 더는 쓸 수 없는 형체가 되었다. 업무 보고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주민기는 수명을 다한 휴대폰이 안쓰러웠다.고은서의 위력은
민시후의 등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호텔로 드나드는 여자들은 고은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평범한 옷차림의 여자가 왜 이런 남자 곁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러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민시후의 차에 타기 싫었기에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서 밖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은서 씨!”민시후가 손을 흔들면서 미소를 지었다.“여기예요!”고은서는 어이가 없었고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민시후 곁으로 다가가 차에 올라탔다. 민시후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차 문을 닫아주었고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이 떠나기 전까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고은서가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민 도련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술집에 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차려입고 왔어요?”민시후가 반문했다.“이 정도는 입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꾸며도 뭐라고 하네요.”고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민 도련님, 잘 차려입은 도련님과 같이 가려니까 민망해요. 다음부터 편한 차림으로 오면 안 돼요?”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안 되죠. 비록 은서 씨는 보는 눈이 없지만 예쁘잖아요. 예쁜 여자를 만나러 가는데 응당 잘 차려입고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죠.”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쪽팔리는 것 말고는 하나도 모르겠는데요.”민시후는 고은서를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은서 씨 T예요? 다른 여자들은 남자가 신경 쓴 티가 나면 좋아하던데, 은서 씨는 어쩐지 더 싫어하네요.”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무뚝뚝하게 받아쳤다.“그렇게 생각하시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번에 우리 별로 친하지 않다면서요, 그러니까 굳이 꾸미지 않아도 돼요.”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이거 수작 부리는 건가요?”“저는 은서 씨 재능을 높게 사서 직접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왜 제 마음을 의심하세요? 제가 일말의 믿음조차 저버린 건가요?”민시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말하자
사람들이 박수치자 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은서가 테이블로 돌아왔고 민시후는 박수치면서 말했다.“조회수가 높게 나올 만했네요! 원래부터 실력자인 건 알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들어보니 더 벅차요.”고은서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그럼요!”고은서는 드럼 선생님이 특별히 아끼던 제자였다. 이때 민시후가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자, 은서 씨를 위해서 건배!”마침 술집 매니저가 고은서한테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고은서 씨 연주 잘 봤어요. 이건 가게 새 메뉴인데 고은서 씨께 드리고 싶어서요.”고은서는 칵테일 잔을 건네받고 말했다.“고마워요.”칵테일은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고 목 넘김이 부드러워서 알코올 향이 나지 않았다. 칵테일을 마신 뒤, 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민시후한테 물었다.“민 도련님, 임무도 완성했고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가봐도 될까요?”민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럼요, 같이 가요.”민시후는 고은서에게 차 열쇠를 건네면서 말했다.“난 많이 마셨으니 은서 씨가 운전해요.”고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기사님을 부르세요, 저는 콜택시를 부를 거니까요.”민시후는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은서 씨를 데려온 사람이 저니까 호텔까지 데려다주어야죠. 저는 신사다운 남자잖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말싸움하기 싫었고 빨리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차 열쇠를 가지고 민시후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호텔 앞에 도착한 뒤, 고은서는 민시후더러 기사를 불러라고 재촉하면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자 민시후도 안전벨트를 풀면서 미간을 주물렀다.“어지러워서 저도 오늘 여기서 자야겠어요.”고은서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민시후 도련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민시후는 고은서를 흘겨보더니 입을 열었다.“오해한 것 같은데, 저는 유부녀한테 관심 없어요.”고은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요즘 따라 왜 이러는 거죠?”어제 식당에 갈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고 오늘은 지나치게
사진을 확인한 백유미는 하얀 정장 차림을 한 남자가 민시후라는 것을 눈치챘다. 고은서가 민시후한테 기대서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민시후는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원수처럼 싫어했던 곽승재의 아내 고은서와 가까이 지낼 줄 몰랐다. 민시후는 곽승재의 지인들과 말도 섞지 않는 사람이었다.백유미는 예전에 고은서가 민시후의 병문안을 간 모습을 본 적이 있었고 명운과 연관된 일로 합작한 건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이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될 줄 몰랐다.‘고은서가 화가 나서 곽승재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민시후를 유혹한 거야, 아니면 민시후가 고은서를 유혹해서 곽승재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거야?’[백유미: 잘했어, 호텔 안으로 들어가지 마. 오늘 지훈 씨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백유미가 원지훈한테 문자를 보냈다. 이 사진이 곽승재 손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샅샅이 조사할 것이 분명했기에 원지훈이 찍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원지훈: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원지훈의 답장을 확인한 백유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곽승재한테 사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때가 되면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고은서가 아무리 설명해도 곽승재 마음에 단단히 꽂힌 가시가 되어 떠올릴 때마다 아플 것이다.한편, 호텔 로비로 들어간 민시후는 고은서와 같은 층에 있는 방을 잡았다. 민시후는 고은서를 부축한 채로 고은서의 방까지 들어갔고 문을 닫자마자 고은서는 팔을 뿌리쳤다.“당장 방으로 돌아가세요, 지금 기분이 상당히 나쁘거든요.”민시후는 고은서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제가 실수한 것처럼 말하네요. 은서 씨는 유부녀고 저는 솔로거든요? 따지고 보면 제가 더 손해 본 것 같은데요.”고은서를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 민 도련님 말이 다 맞아요. 위대한 솔로 민 도련님, 연기가 끝났으면 당장 나가주세요.”민시후는 소파에 눕더니 눈을 감고 말했다.“두 시간 뒤에 갈게요.”고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
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다정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등에서 땀이 났다.“나가서 밥 먹어.”“좋네. 같이 가자. 배고파 죽겠어.”민시후가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고은서가 살짝 피하며 말했다.“미안, 약속 있어.”민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누구랑? 하루 종일 못 봤는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민시후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가끔은 민시후가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옆에 있던 송민아의 쓸쓸한 모습을 힐끔 본 고은서는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아 씨는 시간 있대. 민아 씨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민시후가 발끈했다.“고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송민아와 파혼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 진짜 약속 있어. 먼저 갈게.”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민시후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직 집 보러 안 갔지? 내일 같이 가서 보자.”송민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고은서는 미안하면서도 난감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식당이라기보단 관광지 같았다.넓은 식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는 작은 다리와 정자들이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가득했다.얼마 가지 않아 고은서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성준을 발견했다.유성준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모습은 시크함과 더불어 온화함도 느껴졌다.“성준 오빠, 오래 기다렸죠?”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유성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회사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괜찮아요. 운전하면 금방이던데요.”“이거 받아.”유성준은 마술처럼 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내밀었다.고은서는 귀여운 인형을 건네받으면서도 정신이 멍해졌다.유성준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어릴
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내뱉었지만 잠시 생각하던 육현석은 이내 고은서의 번호를 눌렀다.“은서 씨, 주무실 준비 하고 계신가요?”육현석은 고은서가 자신을 차단할까 두려워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았다.고은서는 답하는 대신 되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다소 차가운 고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육현석은 히죽 웃으며 말을 돌렸다.“별일은 없고 그냥 요즘 지연 씨가 어떻게 지내나 해서 궁금해서요.”아니나 다를까 인내심이 생긴 고은서가 되물었다.“지연이한테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나요.”육현석이 답했다.“며칠 전부터 연락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오늘 연락해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육현석은 온전히 고은서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박지연이 평소와 다른 듯하여 고은서에게서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이유도 있었다.“무슨 일이 있긴 한데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해결된 상태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육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속으로 어떻게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돌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고은서가 물었다.“지연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혹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예요?”“형수... 아니, 은서 씨. 지연 씨는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 사이에 그런 소문은 만들지 말죠.”육현석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어차피 먹고 놀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지연 씨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렵네요.”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저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육현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옮겼다.“형이랑은 다르죠. 형은 평소에도 도도하고 엄격하고 차가워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요. 형 마음을 알 수 없다고도 하죠.”고은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육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 씨, 조금 전 형한테서
육현석의 질문에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곽승재는 비록 고은서와 이혼했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은서는 날 많이 좋아했어. 오 년 동안의 감정을 어떻게 쉽게 잊겠어.’하여 곽승재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 했다.그러나 이혼 후에도 곽승재에 대한 고은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그를 볼 때마다 여전히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불안감이 밀려왔다.특히 유성준과 민시후가 그녀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예전에 주려 했던 선물도 꺼내 들며 사과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은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화가 난 그는 고은서에게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래서 오늘 저녁 의도적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자극하려 한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고은서가 그에게 화낼 때 그는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미묘한 기쁨을 느꼈다.하지만 방에 들어선 후, 한참 동안 기다려도 고은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곽승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이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를 방에 들일 줄 알았지만 고은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그저 고은서가 체면 때문에 오지 못할 뿐 사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언을 위해 세면기기를 빌리러 왔다는 어색한 핑계를 댔다.곽승재는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고은서를 자극하기 위해 이미언이라는 이름조차 지어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곽승재가 다른 여자를 끼고 있어서가 아니었다.또한 과일 서빙을 온 직원 덕분에 고은서가 문을 빨리 연 이유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곽승재였다.다른 사람을 돌려보낸 뒤 고은서는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향기를 맡은 순간 그는 저도 모르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치솟던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는 고은서를 끌어안던 힘을 서서히 풀며 물었다.“고은서, 네 눈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야?”“내가 틀린 말 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 쳤다.“유성준과 민시후가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 소유욕이 발동한 거잖아. 잊지 마.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네가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할 자격은 없어. 그리고 곽승재. 널 사랑한 적 있다고 해서 그게 내 죄는 아니야. 그걸 핑계로 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싸늘한 고은서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고 큰 눈망울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마치 그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이 순간, 곽승재는 처음으로 짙은 좌절감을 느꼈다.평생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작은 장애물 정도는 쉽게 넘기곤 했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이제 네 발로 나갈 건지 경찰 불러서 끌려 나갈 건지 네가 선택해.”고은서가 문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그녀가 경찰을 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고은서의 질책 어린 말에 곽승재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어 물며 뒤돌아 나갔다.문가에 다다르자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마음속에는 잠시나마 기대가 떠올랐다.하지만 이내 등 뒤로 들려오는 건 고은서가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곽승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늦은 밤, 육현석은 곽승재의 연락을 받았다.“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육현석은 낮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연락 온 곽승재가 신경 쓰였다.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육현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곽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뭐라고? 형수님을 자극하려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형수님이 있는 호텔에 간 거야?”육
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도련님. 안 그래도 짧고 귀한 밤, 어서 기다리고 있는 미녀한테 가. 여기서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붙잡긴 누가 붙잡는다고 그래?”여자는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반말하며 말했다.“네가 일부러 승재 씨 유혹했으니 이쪽으로 온 거겠지. 순진한 척하지 마. 여우 같은 것.”고은서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거기 아가씨. 눈은 장식이 아니에요. 제발 눈 똑바로 떠서 보세요. 지금 누가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지.”“네 수작일 뿐이잖아! 신경 안 쓰는 척, 무관심한 척하면서 승재 씨 소유욕을 자극하는 거지. 변변치 않은 수준은 아니네.”“꺼져!”고은서가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곽승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승재 씨…”곽승재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는 금방 눈물을 글썽였다.“네 물건 챙겨서 이 호텔에서 꺼져. 다시 내 눈에 띄지 마.”곽승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피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엔가 부딪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고은서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곽승재를 맞히지는 못했다.빠르게 반응한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고은서의 기습을 피했다.하지만 그 순간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고은서는 얼른 힘주어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어깨를 돌볼 겨를도 없이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의 스피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두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해 다시 곽승재의 품에 잡혔다.“이거 놔!”화가 난 고은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곽승재는 낮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고은서,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따뜻한 곽승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고은서는 오싹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부림쳤다.“움직이지 마. 내가 무슨 짓 할지 장담 못 해.”곽승재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하려 했지만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