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웃었다.“그래. 넌 꼭 그 생각을 유지하길 바라.”박지연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왜 얘기가 나한테로 넘어왔어? 아직 네 얘기가 끝나지 않았잖아.”“더 얘기할 게 뭐가 있어. 백유미의 목적은 승재로 하여금 내가 심보 악랄한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것이잖아. 지금 백유미가 목적을 이뤘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이 났지. 어차피 나는 승재랑 이혼할 거니까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전혀 상관없어. 됐어. 나 진짜 급해. 끊어!”박지연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고은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드레스 룸에서 옷 몇 벌을 꺼내고 또 여행용 화장품 세트를 넣은 뒤, 고은서는 캐리어를 닫고 화장실로 갔다.다행히 다친 곳이 왼손 손바닥이어서 세수하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세수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이미숙의 목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고은서가 문을 열자, 이미숙이 밖에 서 있었다.“사모님, 손이 왜 그렇습니까?”이미숙은 이상함을 눈치챘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별문제 아니에요. 아줌마 먼저 내려가 있어요. 저도 금방 내려갈게요.”“그리고 승재한테는 제 손 얘기하지 마세요.”고은서가 또 말했다.이미숙은 이해가 안 갔다.“사모님, 다치셨습니까? 왜 도련님한테 얘기하지 말라는 겁니까? 도련님께서 어젯밤에 사모님이 돌아오신 것을 안 뒤, 도련님도 돌아오셨습니다. 게다가 저한테 사모님의 상황까지 물어보셨습니다.”고은서가 대답했다.“그저 조금 까진 것뿐이에요. 지금은 이미 다 나았어요. 말할 필요가 없어요.”고은서는 곽승재의 그 어떤 관심도 필요 없었다. 그녀에게 너무 쓸데없는 것들이었다.이미숙이 내려간 뒤, 고은서는 또 자신을 한바탕 꾸몄다. 시간을 보니 이미 아홉 시 반이 되었다.외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외투를 왼손에 걸친 채, 오른손에 작은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아래층에는 곽승재가 보였으며 의외로 아직 집에 있었다. 그는 때마침 소
‘돌아오라고?’예원 별장이 정말로 고은서의 집인 것처럼 말했다.곽승재의 이런 아무 의미 없는 질문에 고은서는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바로 떠났다.주방에서 나온 이미숙은 급급히 고은서를 불렀다.“사모님, 어디 가십니까? 아직 아침도 안 드셨습니다.”“제가 시간이 빠듯해서 아침을 못 먹을 거 같아요.”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문을 나섰다.고은서는 어깨가 채 낫지 않은 데다가 손바닥까지 다쳐서 직접 운전을 하기에는 무리였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콜택시를 부르려고 한순간, 곽승재가 집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외할아버지댁까지 데려다줄게.”“아니...”“외할아버지의 얼굴도 볼 겸, 드릴 물건도 있어서 그래.”고은서가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에게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제기했다.이때 주민기는 비싼 보양식 선물 박스를 몇 개 들고나왔으며 이미숙은 그녀에게 줄 도시락을 두 통 들고 나왔다.“사모님, 아무리 시간이 급하다고 해도 아침을 안 먹으시면 안 되십니다. 이 안에 디저트들을 준비해 놨습니다. 차 안에서 배 좀 채우시기를 바랍니다.”기사님은 차를 그들의 앞에 세웠다.고은서는 재차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민기가 선물 박스와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는 것을 지켜보고는 이미숙이 주는 도시락을 건네받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예원 별장을 나섰다.차 안에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으며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기사님은 운전에 집중하느라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주민기는 이런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그는 심지어 후회되었다. 곽승재는 그더러 사물함에서 선물 박스를 조금 챙기라고 했지, 반드시 꼭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주민기는 물건만 놔두고 핑계를 대서 몸을 빼기 조금 난처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덩그러니 바보처럼 차 안에서 이 정적을 즐기게 되었다.또 한창 지났을 때, 주민기는 고은서가 주동적으로 입을 열기는 불가능하다는
곽승재가 물었다.“왜 운호 산장에 돌아가지 않은 건데?”고은서는 대답하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그러자 곽승재의 표정이 굳어지며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약을 바꿔치기 한 일이 너랑 관련이 있는지는 일단 내버려두고, 네가 아저씨를 차서 허리를 다치게 했으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가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그 말을 들은 주민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큰일 났다.곽 대표가 이렇게 말하면 둘 사이가 더 어색해질 텐데.아니나 다를까 고은서는 그 말에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병원에 오라 해서 왔건만. 꼬치꼬치 캐묻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돌아도 못 가게 하는 거야? 아주 그 자리에서 나한테 죄명을 씌워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나봐? 아저씨랑 백유미한테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주민기는 이 상황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어 운전기사에게 급히 신호를 보냈다.어서 칸막이를 내려야만 이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을 테다.칸막이가 내려가자 곽승재도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더는 참지 못했다.“고은서, 지금 이 상황에서도 네가 억울하다는 거야?”“약봉지에 네 지문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어? 아니면 약국에 가기 전에 백유미가 나타난 데에 화가 난 적도 없다고 말하는 거야?”역시 곽승재는 이미 지문 검사를 했던 것이다.“백유미는 GS그룹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야. 이사 자리에 있는 것도 그만한 실력이 있어서고. 본사에 와서 원하는 자리를 고르라고 기회를 줬는데 네가 거절했잖아. 그런데 지금 와서 또 백유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설치고. 대체 원하는 게 뭐야?”곽승재가 물었다.“그쪽이랑 거리 두는 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아는데?”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서류에 도장 찍는 걸 미루면서 애매하게 구니까 백유미가 계속해서 이런 자극적인 행동을 하는 거잖아!”“자기 몸과 생명을 걸고 장난칠 사람이 어디 있어?”“있잖아. 백
곽승재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는 고은서의 귀에 비웃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고은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떻게 된 거라뇨? 자갈이나 깨진 유리가 살 속으로 박힌 것 같은데 짚이는 군데 없어요?”의사가 고은서 대신 대답했다.곽승재는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혹시 쓰레기통 위에 있던 방화용 자갈에?”고은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그녀를 타이르듯 말했다.“아가씨, 손을 이렇게 다쳤으면 조심했어야죠.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찢어져서 얼마나 아프겠어요. 괜히 고생을 두 번 하잖아요.”“아내가 다친 줄 몰랐습니다. 내가 너무 세게 잡았어요.곽승재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의사는 고개를 들며 곽승재를 쳐다보았다.“아내라면서 다친 것도 모르셨어요?”평소 자신감 넘치던 곽 대표도 그 순간 의사의 한 마디에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는 헛기침하며 변명하듯 말했다.“당시 상황이 좀 급해서요.”“그럼 현장에 있었다는 얘기네요? 그런데도 아내가 다친 걸 몰랐어요?”의사는 더 놀란 듯 물었다.“아내가 다친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뭐가 있길래요?”곽승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은서는 그런 그를 보며 속이 시원했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곽승재 대신 해명해 주었겠지만, 지금은?잘 됐다. 이렇게 당해도 싸지.“혹시 강제로 결혼하신 건 아니죠? 평소에도 저렇게 무관심한가요?”의사는 조심스레 고은서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런 셈이죠.”비록 맞선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곽승재가 그녀와 결혼한 건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지금 진료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험담하는 겁니까?”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사에게 말했다.“환자 진료나 제대로 보시죠.”의사는 다시 한번 곽승재를 훑어보았다. 그의 큰 키와 기품 있는 외모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아가씨, 남편 고를 때 이렇게 겉만 멀쩡한 사람 말고 진짜로 잘
“됐어.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끊었다.“네가 의사라도 돼? 알면 뭐 어쩔 건데. 상처가 저절로 낫는 것도 아니고.”곽승재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고은서는 마치 온몸에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지금 상대로는 제대로 대화할 수조차 없었다.결국 곽승재는 이 주제를 접고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이거 받아.”고은서는 웃음을 터뜨렸다.“뭐야,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거야?”이전에 고은서가 그에게 ‘10만 원 한 달 패키지’ 라 조롱했던 일이 있었기에 곽승재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곽승재는 차분하게 말했다.“너희 외할아버지와 같이 지방에 동행할 시간이 없으니까 여행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할게.”고은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필요 없어. 우리 집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돈은 필요 없어.”고승아가 ‘우리 집’이라 콕 집어 말하자 곽승재는 그 사이에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속에서 불쾌함이 밀려왔지만 곽승재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면 되겠네?”그 말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잽싸게 카드를 낚아챘다.지금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혹시라도 진짜 화가 나서 따라오겠다고 하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니까.어차피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었다.곽승재는 그녀의 속내를 읽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몇십 분 후, 차는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왼손에 외투를 걸친 채 작은 가방을 들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고준석은 이미 마당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서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할아버지!”“은서야, 네가 할아버지랑 같이 해찬시에 가고 싶다고 할 줄이야. 예전에는 기후가 너무 건조하다고 싫다고 하더니.”고준석은 놀란 듯 물었다.고은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충분히 수분 보충할 스프레이랑 마스크팩도 챙겨왔다고요. 그냥 외할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어서요.”두 사람은 손을 잡고 웃으며 얘기 나누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보따리를
곽승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곧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운전기사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바쁘시면 점심은 함께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짐을 챙겨야 할 것들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셨어요.”이 말은 그야말로 ‘그만 가라’는 뜻이었다. 곽승재는 잠시 서 있다가 이내 걸음을 돌려 차 쪽으로 향했다.운전기사가 재빨리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지만 곽승재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그리고 곧 결심한 듯 다시 돌아서서 집 안으로 걸어갔다.그때 고은서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거실 테이블에 앉아 태블릿으로 해찬시의 관광지들을 보고 있었다. 고은서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보는 애교 섞인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할아버지.”곽승재가 낮은 소리로 불렀다.고준석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승재야, 아직 안 갔나?”“가보려던 참이었는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곽승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은서의 손이 제 부주의로 다쳤습니다. 이 일에 대해 사과드리려고요.”고준석은 그제야 외손녀가 손을 옷 안에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어디 다친 거야? 손 좀 보자!”고준석이 다급하게 말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째려보며 귀찮다는 듯 손에 감긴 붕대를 내보였다.“어제 실수로 작은 돌멩이에 찍혔어요.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할아버지.”고준석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넌 원래 아픈 걸 못 참잖니. 평소엔 가시 하나만 뽑아도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이렇게 붕대를 감을 정도면 얼마나 아팠겠어. 소독도 해야 하고 약도 발라야 할 텐데, 어떻게 참았대.”예전의 고은서는 사소한 상처에도 엄살을 부리곤 했다.작은 상처만 있어도 외할아버지와 도우미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야 겨우 진정했었다.곽승재는 한때 할머니에게 등 떠밀려 고은서의 집에 와서 아팠던 고은서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외할아버지는 고은서에게 용감한 아이라고 칭찬하며 약을 먹이려 했지만, 고은서는 약 한 모금을 마시자마자 쓴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뱉어냈었
기사는 뒤에서 들려오는 곽승재의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대표님, 저한테 물으신 건가요?”곽승재는 대답하지 않았다.기사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저희 집은 모든 일을 아내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도 제가 나설 필요가 없죠.”그가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았지만 곽승재는 더 이상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의사도 현장 상황을 모른 채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고은서가 백유미와 관련된 일로 화를 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무조건 그녀의 편을 들어줬다면 오히려 더 제멋대로 굴었을 거였다.게다가 고은서가 다친 것도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떠난 뒤에야 뒤늦게 알게 되어 연락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연락이 닿지 않았었다.따라서 이번 일은 자신이 잘못 처리한 게 아니라고 곽승재는 생각했다.고은서가 이번 일로 화가 나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외국으로 간다 해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곽승재는 스스로 이성적으로 정당화하려 했다.하지만 고은서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편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고은서는 외할아버지와 오춘식과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여자였기에 외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쓸 수 없었고, 전생에서 외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알 수 없었기에 더 안전하게 오춘식까지 동행하도록 했다.탑승 수속을 마친 후 세 사람은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오춘식과 외할아버지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 화면을 확인하니 전미자였다.이 시간에 왜 전화를 했을까?고은서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할머니, 무슨 일이세요?”전미자가 다정하게 물었다.“은서야, 오늘이 승재 아빠가 귀국하는 날이잖니.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밥 먹자고 약속했었잖아.”고은서는 순간 머리를 탁 쳤다. 이 중요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도 곽승재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물론,
전미자와의 통화를 마친 고은서는 탑승 시간이 다 되어 외할아버지와 오춘식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약 두 시간 후, 세 사람은 해찬시에 도착했다.시간이 늦은 터라 그들은 먼저 호텔에 묵기로 하고 다음 날 아침 외할아버지의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병원에 가기로 했다.그 후, 고은서는 외할아버지와 오춘식을 모시고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호텔로 돌아온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발견했다.식사할 때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전화뿐만 아니라 ‘도착했어?’ 라는 짧은 메시지도 와 있었다.이미 한 시간도 더 지난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굳이 답장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들고 욕실로 향했다....예원별장.곽승재는 할머니 댁에서 돌아와 거실로 들어섰다.이미숙이 다가와 물었다.“차 드릴까요, 대표님?”곽승재는 고개를 저었다.평소 집에 돌아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왠지 집 안이 허전하게 느껴졌다.“어제 차에서 가져오신 그 떡은 냉장고에 넣어놨습니다. 누구 드릴 건가요? 아니면 사모님에게 드릴까요?”이미숙이 물었다.곽승재는 떡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원래는 고은서가 외할아버지와 전미자를 위해 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일들이 꼬이면서 결국 누구에게도 주지 못한 채 잊혀졌다.고은서는 항상 섬세한 마음으로 어딜 가든 가족을 생각하며 작은 선물을 준비하곤 했다.그녀는 예전에도 그와 함께 새로운 음식점을 탐방하고 싶어 했지만 곽승재는 시간 낭비라며 매몰차게 거절하곤 했다.그래서 고은서는 늘 직접 음식을 사 와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면 함께 나누려 했지만, 곽승재는 항상 바쁜 척하며 그녀 곁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고은서의 기대에 찬 눈빛이 점점 실망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힘들었지만, 다음 날이면 고은서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다시 그의 곁을 맴돌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떡 어떻게 할까?’몇 초간 기다렸지만 고은서는
박지연의 물음을 들은 고은서는 그녀를 힐끗 째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물음 바꿔볼게. 깨어났을 때 민시후에 관해 먼저 물어봤잖아. 곽승재는 걱정되지 않았어?”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굳이 피곤하게 걱정할 필요가 있나.’그녀는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박지연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 그냥 민시후랑 곽승재 중에서 누가 더 그쪽 마음에 드는지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죠.”“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미련 남지 않았다면 민시후랑 사귀어 봐도 괜찮지 않아?”박지연이 헤헤거리며 말했다.“안 돼! 민시후랑 사귀면 안 된다고!”박지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실 밖에서 육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내 그가 병실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여긴 어쩐 일이야?”“승재 형이랑 형수님한테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당연히 보러 와야지. 지연아, 넌 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 알려줬으면 같이 왔을 텐데.”“미안, 나도 너무 급해서 미처 생각 못 했어.”비록 박지연이 자신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게 정상이긴 했지만 육현석은 저도 모르게 약간 속상했다.“형수님, 괜찮아요? 크게 다치진 않았죠?”“계속 형수님이라 부를 거면 나가요. 진짜 형수님은 다른 병실에 있으니까.”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런데 고은서 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서먹해 보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두 살 더 많은데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또 너무 오글거리잖아요. 그럼 그냥 말 놓으면서 은서라고 부를까요?”고은서는 형수님만 아니라면 호칭에 관해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그냥 형수님만 아니면 돼요.”‘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엄청 집착했는데 이젠 형수님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진저리치네. 승재 형은 대체 형수님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거야.’“은서야, 승재 형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그러니까 승재 형한테 한
고은서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러 번이고 말했는데 왜 자꾸 끼어들지 못해서 안달이나 하는 건데?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이 백유미라는 걸 믿기는 하는 거야? 원지훈을 교사한 사람도 백유미고 T국에 갑자기 나타난 저 사람들도 다 백유미가 안배한 사람들이야. 백유미는 처음부터 날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고!”고은서는 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비아냥거렸다.“믿을 리가. 백유미는 T국에 프로젝트에 관해 협상하러 온 거고 또 하필 여기에 와서 성폭행을 당했는데 당신이 믿을 리가 없지.”“믿어.”고은서의 말을 듣고 있던 곽승재의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졌다.“내가 어떻게서든 다 조사해낼게.”“곽승재, 진짜 조사하려는 거 맞아? 당신 생명의 은인이잖아.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오면서 백유미가 눈물만 흘리면 마음이 약해지면서 뭘 조사하겠다는 거야?”고은서는 날이 선 말투로 계속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그녀는 곽승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곽승재는 순간 마음이 아파왔다.“은서야, 널 해치려던 사람이 누구든 내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래. 기다릴게. 날 실망시키지만 않았으면 좋겠네.”고은서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대표님, 백유미 씨께서 깨어났습니다.”바로 이때, 그의 부하가 보고하러 왔다.“알겠어.”비웃음으로 가득한 고은서의 눈빛에 곽승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서야, 내가 다 처리하고 다시 설명해줄게.”곽승재가 나간 후 박지연이 병실로 들어왔다.“내가 알아봤는데 어젯밤에 죽은 하국 남성이 원지훈이 맞대. 듣기로는 원지훈이 먼저 백유미를 죽이려고 했는데 백유미가 정당방위를 하면서 도로 원지훈을 죽여버렸대. 그런데 백유미도 크게 다친 모양이야.”박지연은 말하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그런데 왠지 모르게 백유미가 정당방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화풀이할 겸 원지훈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 아무튼 사람은 이미 죽었고 목격자도 없는데 백유미가 뭐라 하면 뭐가 사실이 되는 거
문밖에는 곽승재가 있었다.그는 휠체어에 앉아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민시후처럼 창백한 얼굴에 검은 눈동자에는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후회, 두려움, 흥분이 한꺼번에 뒤섞인 듯한 눈빛에 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순간 두 사람 모두 다쳤다는 박지연의 말이 떠올랐다.‘민시후가 총알에 스친 거면 곽승재가 총에 맞은 건가? 지연이가 얘기하려던 게 이거였을까?’“환영하지 않으니까 내가 있는 곳 공기 더럽히지 마.”민시후는 곽승재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T 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은서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곽승재는 고은서의 행방을 알고 있음에도 민시후에게 알리지 않았다.민시후가 급히 단서를 찾아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곽승재는 이미 현장에 있었다.더욱 민시후를 화나게 했던 것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곽승재는 민시후의 핀잔에 화내지 않고 먹먹한 눈동자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녀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곽승재의 모습에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좀 쉬고 있어. 나중에 다시 올게.”“나중에 언제?”민시후가 약간 서운한 듯 물었다.고은서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은서도 다쳤으니 푹 쉬어야 해. 도움이 필요하면 간병인 붙여줄게.”“난 은서랑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민시후가 곽승재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너는 고은서랑 간병인이 비슷한 모양이지?”곽승재는 민시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입담에서 곽승재는 민시후의 상대가 아니었다.“한 시간 내로 올게.”고은서는 두 사람이 또 싸울까 봐 걱정하며 얼른 답했다.“먹고 싶은 거 있어? 좀 사다 줄까?”민시후는 고은서의 말에 기분이 풀린 듯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네가 가져다주는 거면 뭐든 좋아.”고은서가 병실을 나서자 경호원이 휠체어를 끌며 그녀를 따라왔다.복도에는 박지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서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휴식을 취하기 전 박지연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지쳐 보이는 고은서의 모습에 그녀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다시 깨어나니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고은서는 어지러움이 좀 나아진 것을 느끼고 저녁을 조금 먹은 후 민시후를 보러 가기로 했다.민시후는 병실 안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불은 그의 가슴까지 덮여 있었고 흰 붕대가 살짝 보였다.잘생긴 그의 얼굴에 평소와 같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라지고 창백한 입술이 더해지니 전체적으로 생기가 없어 보였다.그 모습을 본 고은서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의식을 잃기 전 느껴졌던 피 냄새는 민시후의 것이었을까?’고은서의 기척이 컸던 것인지 민시후가 바로 눈을 떴다.“고...”“말하지 마. 몸은 좀 어때?”고은서는 그의 앞에 가서 죄책감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민시후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며 약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아파...”“잠깐만 기다려. 의사 불러올게.”고은서가 급히 나가려 하자 민시후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가지 마. 의사가 와도 소용없어. 내 상처는 신도 못 고치니까 내 옆에 좀 더 있어줘.”‘신도 못 고친다고? 지연이 말로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고은서는 죄책감이 밀려와 미칠 것 같았다.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입을 열었다.“지금은 의술이 발달해서 총상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민시후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고은서.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슬퍼할 거야?”“아니. 민시후, 너 정말 미쳤어? 왜 나 대신 총을 맞아!”고은서가 갑자기 화내며 말했다.“너 목숨이 몇 개라도 돼? 네 가족들이 너 다쳤다는 거 알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 봤어?”잠시 멈칫한 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야?”상처가 심했던 탓에 그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다.고은서는 더 깊은 죄책감에 휩싸였다.“민시후, 난 널 좋아하지 않으니 네 마음은 받아들일
박지연은 고은서의 질문에 놀라고 있었다.‘고은서가 깨어나자마자 민시후에 관해 묻는다고?’박지연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농담을 하는 대신 진지하게 답했다.“민시후는 검사를 받고 있을 거야.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민시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녀는 평생 자책했을 것이다.“얼른 약 먹어. 조금 있다 병실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박지연은 고은서를 침대에 눕히고 약을 먹이며 이전에 계성진이 먹였던 약은 의식이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강한 수면제였고 이미 열 몇 시간 자고 깨난 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의식은 없었어.”“약에 의존성은 없겠지?”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의존성은 없지만 약간의 후유증은 있을 거야. 한동안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박지연이 고은서를 걱정하며 말했다.“그리고 다친 어깨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마른하늘에 닥친 날벼락에 억울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고은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유린당하고 유흥가에 팔려 가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지연아, 우리 지금 어디 있는 거야?”갑자기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T 국 병원이야. 경찰이 사건을 조사 중이라 며칠 동안은 귀국하기 어려울 거야.”아무리 치안이 안 좋은 나라라고 해도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다.“너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부랴부랴 달려왔지. 어제 너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돼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비행기에서 내리면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도 없고 먼저 연락해도 받지 않으니 속이 타들어 갔어. 곽승재한테는 내가 연락한 거야. 너도 연락 안 되고 민시후도 연락이 안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곽승재한테 한 거야. 은서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곽
계성진은 곽승재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희 나라 사람들 말은 믿을 수 없잖아. 내가 이 여자를 놓아주면 너희는 바로 나를 잡으려고 할 거야. 오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이 여자를 방패로 삼아야겠어.”곽승재는 재빨리 답했다.“그럼 나랑 바꿔. 내가 인질이 될게.”계성진은 비웃으며 말했다.“넌 키도 키고 보니까 몸도 좋더라. 이 여자 대신 널 쓸 필요는 없지. 내가 멍청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막지 않겠다. 밖에 있는 차 아무거나 타고 가. 은서를 다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놔주겠다.”곽승재가 이내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말을 마친 곽승재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하며 계성진과 그의 동료들이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다.계성진은 고은서를 끌고 천천히 창고 밖까지 나갔다.경찰들이 총을 들고 있었지만 계성진이 인질을 잡고 있어 누구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목이 꽉 조였던 고은서는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머리에는 여전히 총이 겨눠져 있었다.오늘 하루 너무 많은 공포를 겪은 탓인지 고은서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그녀는 질식사가 더 괴로운지 아니면 총알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게 더 괴로운지 생각하고 있었다.이내 계성진은 고은서를 데리고 차 앞까지 왔다.“악! 악! 아악!”그때 창고 안에서 백유미의 비명이 들렸다.무언가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그녀의 비명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안쪽 상황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오로지 계성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사람들은 곽승재가 데려온 사람들에 의해 모두 제압당했다.상황을 눈치챈 계성진의 얼굴에는 살기가 더 짙게 피어올랐다.그는 고은서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그녀의 턱을 쥐고 강제로 삼키게 했다. 그러면서 옆의 동료에게 차 문을 열라고 명하며 고은서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고은서!”그때 앞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바로 고은서가 기다리던 민시후였다.그는 지친 모습으로 뒤에 총을 든 현지 경찰들을 대동하고
거칠게 다가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고은서는 놀라서 옆으로 몇 걸음 피했다.벽 끝에 닿은 그녀에게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고은서는 맞더라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남자들이 경찰봉을 휘두르는 순간 고은서는 눈을 꼭 감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남은 방어용 스프레이를 그들에게 향해 필사적으로 뿌렸다.“악!”“멈춰!”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비명이 들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의 목소리였다.비록 경찰봉은 빗나갔지만 여전히 어깨를 맞은 고은서는 고통스럽게 눈을 떴다.문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서 있었다.정장을 입고 급히 어디서 달려온 듯한 모습을 한 곽승재의 얼굴에는 급박함이 드러났다.그의 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몇 명의 근육질 남자들과 몇 명의 현지 경찰들이 함께 있었다.경찰들이 오자 고은서를 공격했던 두 남자는 눈을 가리며 피하기에 바빴고 백유미에게 올라타 있던 남자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일어나 무기를 집어 들며 반격하려고 했다.“은서야!”곽승재는 고은서가 다친 걸 보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그때 백유미는 누구의 옷가지에서 칼을 빼낸 건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자기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멈춰!”곽승재의 머릿속에 갑자기 익숙한 장면들이 스치며 강한 불안과 혼란이 밀려왔다.그는 몇 걸음 달려가 칼을 걷어찼다.팅하는 소리와 함께 백유미의 손목에서 힘이 빠지며 칼이 떨어졌다.백유미가 처량하게 울부짖으며 외쳤다.“왜 막았어! 왜! 죽게 놔두지 왜 막은 거야! 승재야...”백유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몸은 온통 멍 자국과 붉은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몸은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곽승재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백유미가 자살하려 한 순간 곽승재는 강한 공포감을 느꼈다.마치 이전에 누군가가 그 앞에서 자살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지금 이 상황을 막지 않으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
비록 고은서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계심과 불신으로 가득 차 그녀를 향해 경찰봉을 휘두르며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고은서도 이를 잘 이해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돈이 있으니 그들에게 두 배의 돈을 줄 수 있다고 했다.“네가 돈이 있다고 하면 있는 거야?”그때 기름지게 다듬은 머리를 한 중년의 남자가 주차장에서 걸어왔다.경찰봉을 쥔 두 남자는 즉시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보스라고 불렀다.기름진 머리를 한 남자는 고은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국어로 말했다.“너희처럼 예쁜 여자의 말은 믿을 수 없어.”그는 날카로운 눈을 한 채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장 몇천억 내놓을 수 있으면 믿을지도 모르지.”남자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렀다.그만한 금액은 당연히 내놓을 수 없었다.카드가 있다고 해도 유동 자금이 부족해 그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웁!”백유미도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구조 신호를 보냈다.기름진 머리를 한 계성진은 잠시 안을 훔쳐보고 다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예쁜 여자일수록 수단이 범상치 않아. 이렇게 쉽게 남자들을 자기편으로 돌리잖아. 그냥 사람 하나 데려가는 간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고은서가 눈썹을 찡그렸다.‘백유미가 원지훈에게 30분을 준다고 한 게 이 남자 때문인가? 이 남자를 통해 나를 유흥가로 팔려고 한 건가?’“당신 목적도 결국 돈이죠? 몇천억은 줄 수 없지만 100억 정도는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보내드릴 수 있어요. 사람을 원하신다면 저 안에 있는 여자도 그냥 덤으로 드릴게요.”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하하하.”고은서의 말에 계성진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예쁜 아가씨, 내가 너를 데려가면 모든 남자가 당신한테 푹 빠질 거야.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놓치겠어? 돈도 사람도 다 가질 거야. 국내에서 유명한 곽씨 가문 대표 전 부인인데 그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겠어?”고은서
옆에서 손을 거들던 장정들도 그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백유미를 희롱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이내 백유미의 입에 물려있던 수건이 떨어졌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른 것으로 입이 가득 차 버렸다.남자들의 음탕한 신음과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순식간에 창고를 채웠다.모든 일든 불과 일이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은서는 구석에 숨어서 원지훈이 차버린 쇠막대기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떨리는 심장은 평온을 되찾을 수 없었다.몇 명의 남자들이 각 방향에서 백유미를 희롱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내가 원지훈을 회유하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누워있는 건 나였겠지.’백유미는 동정받을 처지가 아니었다.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비록 돈으로 매수했다고는 하나 약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또한 밖에 백유미가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뭔가 이상함이라도 눈치채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고은서는 자신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고은서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백유미의 핸드폰을 켜려고 했지만 땅에 부딪히며 떨어질 때 전원이 나가버렸다.그녀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핸드폰을 켤 수 있었지만 비밀번호에 막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의 생일, 곽승재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비밀번호는 맞지 않았다.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남자들이었기에 고은서는 소리를 내어 그들의 시선을 끌 수조차 없었고 백유미에게 비밀번호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고은서는 긴급버튼을 눌렀지만 백유미는 긴급 연락망을 따로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의 비상 번호는 해외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어떡하지?’고은서가 원지훈을 불러 도박하려고 할 때 백유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핸드폰에는 알파벳 C만 떠 있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한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핸드폰을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