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백유미에게 무슨 사고가 생길 때마다, 곽승재가 가장 먼저 의심하는 사람은 늘 고은서였다.“곽승재, 이혼하자. 지금 바로.”고은서는 더 이상 이 바보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백유미랑 함께 영원히 살면서 서로 해 끼치지 말고 그저 두 사람끼리만 갇혀 있어!”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자극을 받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이혼 얘기로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계속 그 말을 꺼내는 거지?”“그래서 협박당했어?”곽승재는 비웃으며 차갑게 말했다.“웃기는군! 내일 이혼 서류에 서명할 거야! 당장이라도 하고 싶다면 내가 기꺼이 해줄게!”말을 마치자마자 곽승재는 서류를 던지고 문을 세게 닫으며 나가버렸다.고은서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편안하게 큰 침대에 몸을 뉘었다.곽승재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이혼에 동의했고 이제 그녀는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은서는 핸드폰을 켜 이 좋은 소식을 박지연과 나누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이 올린 ‘자신을 사랑해야 삶이 아름다워지는 법’이라는 내용의 SNS 게시물이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받은 것을 발견했다.게시물을 확인해보니 친구들과 주인혁 외에도 민시후가 ‘좋아요'를 눌렀고 댓글까지 남겼다.[다시 돌아온 거 축하해요.]민시후가 말한 ‘돌아온다'는 것은 고은서가 곽승재가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때로 돌아왔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의 빈정거림에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곧 박지연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지만 그쪽에서 먼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안 그래도 막 너한테 연락하려던 참인데 네가 먼저 걸어왔네. 우리 정말 뭔가 통하는 것 같아.”“통하긴 뭐가 통해? 아침에 네가 메시지로 늦게 연락할 거라며, 하루 종일 연락 기다렸는데 너 끝내 전화 안 했잖아!”고은서는 아침에 급히 명운으로 가야 했기에 박지연에게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이후 주인혁과 그들의 바비큐 파티에 참석하면서
“왜 말이 없어. 곽승재가 어젯밤에 다른 여자랑 있었다는 사실에 속상해하고 있는 거야?”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에 빠진 것 같은 고은서의 모습을 보고 박지연이 야유를 보내자 고은서가 박지연을 흘겨보았다.“네 생각에는 5성급 호텔에서 그렇게 공교롭게 그런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일반적으로 봤을 때 그런 경우가 드물지.”박지연이 대답했다.“백유미가 다친 게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수상한 건 확실하지만 곽승재가 이미 원인을 조사해 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상한 점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백유미가 사건을 빈틈없이 처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그러니 지금 더 파고들어도 별다른 성과가 없을 것이고 설사 이상한 점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곽승재는 고은서가 다른 이유로 그런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고은서가 자신을 잊지 못해서 이 일에 끈질기게 매달린다고 여길 것이다.어차피 다쳐서 아픈 건 백유미이고 곽승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고은서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백유미의 꿍꿍이도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기분 처지게 하는 말은 하지 말자. 너한테 전해줄 소식이 있어!”고은서는 한껏 가뿐해진 말투로 말했다.“무슨 소식?”“곽승재가 이혼서류에 사인했어. 할머니한테 소식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내일 당장 이혼서류를 접수하고 이혼할 수 있어.”박지연이 놀랐다.“곽승재가 정말 그렇게 하겠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가 어른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거야?”고은서가 웃으며 얘기했다.“곽승재는 처음부터 나한테 토를 달고 싶었던 거야. 이번에 백유미가 그렇게 심하게 다치고 나서 곽승재의 생각에 더 끌다가는 내가 백유미를 다치게 하는 일을 더 많이 할까 봐 두려웠겠지.”“잠깐!”박지연이 고은서의 말에서 포인트를 잡고 말했다.“곽승재는 네가 백유미를 다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미친 거 아니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대? 너는 복수할 게 있으면 당장에 하는 성격이잖아. 절대 이렇게 돌
“너는 눈에 렌즈가 달렸어? 얼굴이 이렇게 작게 나왔는데도 그걸 또 봤어?”박지연이 말했다.“잘생긴 얼굴이 떡하니 보이잖아. 거기다가 너를 보는 그 눈빛이, 음, 빛이 나네.”“빛이 나기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고은서는 다시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주인혁은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절반만 나왔는데도 잘생긴 미모가 돋보였고 그녀에게로 향하는 시선까지 티가 났다. 맑고 순수한 그 시선에는 부드러운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두 번째 사진에 이렇게 푸짐한 해산물과 술은 사진 속 그 남자랑 같이 먹은 거야?”박지연이 물었다.“그 남자랑 아니고 그 사람들이랑, 다섯, 여섯 명 정도 돼.”고은서가 정정했다.“그리고 그 남자는 너도 봤던 사람이야. 저번에 우리 쇼핑하러 갔을 때 슈트를 사는 걸 내가 도와줬던 사람 말이야. 주인혁이라고 해.”“그 사람이라고? 두 사람 정말 인연이네.”박지연이 또 물었다.“그럼 곽승재가 비꼬아서 말했다는 사람이 이 사람이야?”“맞아.”“이혼하는 것도 두 사람이 싸우고 난 다음 곽승재가 동의한 거고?”“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고은서가 되물었다. “내 생각에는 이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박지연이 제 생각을 말했다.“곽승재도 네가 올린 인스타의 사진을 본 거야.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술집으로 간 거지. 그리고 네가 주인혁이랑 같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시원치 않아서 비꼬는 말을 했고 너를 데리고 온 거야. 데리고 와서 네가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너는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또 이혼에 대해서 말하니까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동의한 거지.”박지연의 말을 듣고 고은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일단 첫 번째, 곽승재는 인스타를 보지 않아. 전에 내가 업로드를 많이 하고 가끔 태그도 했지만 한 번도 답장을 한 적이 없어. 어떨 때는 귀찮다고 말하면서 이런 것들을 볼 여유가 없대. 그리고 두 번째, 곽승재가 술집에 오게 된 것은 술자리가 있었던 거야. 곽승재가 차에서 내릴 때 곁
“네, 도련님은 일찍 회사로 가셨습니다.”고은서는 바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고은서는 이미숙을 피해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혼합의서에 사인했어? 오전에 접수하러 갈 수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빠, 시간 없어.”“접수하러 갈 시간이 없다고 해도 사인할 시간은 있을 거 아니야?”고은서가 다급하게 말했다.“지금 어디 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곽승재는 순순히 대답했다.“회사 사무실.”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 고은서는 식탁으로 돌아갔고 이미숙이 거기 없는 거로 봐서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저번에 할머니께서 이혼 소식을 알게 된 게 이미숙이 얘기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아무도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고은서는 아침을 먹은 후 차를 몰고 GS 그룹으로 갔다. 그녀는 아무런 방해 없이 대표 사무실까지 갔다. 문을 두드리고 곽승재의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고은서는 사무실 안에 익숙한 사람이 두 분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녀의 삼촌인 고국성과 외숙모인 단은숙이었다. 고은서의 눈꺼풀이 떨려왔다.설마 곽승재가 그들을 불러서 그녀가 이혼하려는 걸 막으려는 건가? 아니면 외숙모가 지난밤에 있었던 결혼에 대한 안좋은 소식들을 듣고 일부러 삼촌과 함께 와서 상황을 살피려는 걸까? 고은서가 문을 두드리는 것을 듣고 삼촌과 외숙모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은서야, 이 시간에 승재를 찾으러 온 거니?”표정과 말투로 봐서 곽승재가 이혼에 대해 그들에게 얘기를 안 한듯했다. 고은서는 살짝 안도했다.“볼일이 좀 있어서 왔어요.”고은서가 물었다.“삼촌, 외숙모, 왜 여기 있어요?”“우리 조카사위한테 감사 인사를 하려고 왔지.”외숙모가 말했다.“저번에 승재 덕에 FY 그룹의 대표를 만날 수 있었어. 그래서 오늘 승재한테 선물을 주려고 온 거야. 온 김에 점심에
곽승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단은숙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은서야, 승재한테 무슨 사인을 받는 거야?”조은서는 아무 핑계나 찾아서 둘러댔다.“이 사람 차에 보험을 하나 들어줬어요. 본인이 사인해야 한대요.”“그래?”단은숙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지금에 와서 무슨 보험을 든다는 거야, 전에 안 했어?”“자동차 상해 보험을 하나 더 하는 거예요. 저번에 차를 타고 가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빼먹은 보험이 있더라고요. 보험회사에서 전액 보상을 해주지 않아서 이번 기회에 더 들었어요.”고은서는 표정 변화 없이 술술 말했고 단은숙은 친절한 말투로 곽승재에게 물었다.“조카사위, 얘 말이 맞아?”고은서는 외숙모가 이런 일까지 곽승재에게 확인하려 할 줄 몰랐다. 박지연의 말이 문득 생각 난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가 쌀쌀하게 그녀를 흘겨보았지만,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네.”고은서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박지연이 넘겨짚은 것이었다. 곽승재는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조카사위, 차를 운전할 때는 조심해야 해. 보험을 여러 가지 드는 것도 필요하지.”단은숙은 관심 어린 말투로 말하며 웃었다. 외숙모가 완전히 믿는 것을 본 고은서는 마음 놓고 물었다.“사인한 보험서류는 어디 있어?”곽승재는 아무 표정 없이 사무실 책상 쪽으로 눈짓했다. 조은서는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고 책상 위에는 정말 서류 폴더가 놓여있었다. 펼쳐보니 이혼합의서라고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감격의 물결이 요동쳤고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정말 쉽지 않았던 과정이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드디어 이혼합의서를 손에 넣었다. 고은서는 서류를 품 안에 꼭 안았다.“삼촌, 외숙모, 얘기 계속하세요. 저는 더 시간 뺏지 않을게요.”이렇게 말하고 바로 떠나려던 고은서는 곽승석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삼촌, 외숙모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오전에 회
단은숙은 파일을 등 뒤로 숨기고 말했다.“우리 집 차도 보험 더 들어야 하는데, 네 것도 좀 보게 줘봐."“그러지 말고 제가 좀 있다 차 보험 하시는 분 소개해드릴 테니까 그분이랑 연락해봐요. 외숙모,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고은서가 말도 채 끝내지 못했는데 단은숙은 단번에 그녀를 밀치더니 파일을 열어보았다.고은서는 바로 파일을 빼앗으려 했지만 50킬로도 채 되지 않는 몸으로 외숙모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단은숙은 그 틈을 타 단단한 등으로 고은서를 막아내며 빠르게 파일을 열어보았다.그리고 그 문서를 제대로 보고 난 단은숙은 바로 고은서를 향해 소리쳤다.“고은서, 이게 뭐야!”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비서와 비서실 다른 직원들도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그러니 당연히 고국성도 이상함을 느끼고 파일을 채갔다.문서를 읽던 고국성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고은서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손바닥에 고은서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으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그때 언제 왔는지도 모를 곽승재가 고국성의 손을 막아내고 단호하게 말했다.“삼촌, 말로 해요, 손대지 말고.”곽승재의 등장에 고국성은 마지못해 손을 거두고 눈을 번뜩이며 열이 올라 빨개진 얼굴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승재 사무실로 가있어!”고은서가 삼촌과 외숙모에게 이끌려 곽승재 사무실로 가자 곽승재는 나지막하게 옆에 있던 비서한테 분부했다.“회의는 부대표님한테 먼저 진행하라고 해요, 난 좀 있다 갈게요.”“네, 대표님.”비서가 나가자 곽승재도 앞서간 고은서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곽승재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어른답게 엄숙한 표정을 짓고 고은서와 곽승재를 향해 묻고 있었다.“이 이혼서류는 무슨 뜻이야, 누가 이혼하자고 한 거야!”말이 없는 곽승재에 고은서가 담담히 인정했다.“제가 말했어요.”“너!”순간 열 받은 고국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올리려 하자 단은숙이 그를 끌어앉혔다.“은서야,
남편까지 동의하자 단은숙은 단호하게 고은서를 끌고 나갔다.“승재야, 이혼은 생각도 하지 마. 은서가 충동적으로 한 말일 거야, 우리가 가서 잘 타이를게.”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고국성이 한마디 더 덧붙이자 곽승재는 짜증만 부리는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삼촌, 억지로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할머니 아니었으면 이혼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거예요.”“절대 억지 아니지, 억지일 리가 없잖아.”고국성이 다급하게 부정을 했다.“고 여사님이 우리 은서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여사님을 봐서라도 우리 은서 한 번만 봐줘.”말을 마친 고국성도 발버둥 치는 고은서를 같이 밀며 방을 나섰고 곽승재는 쓰레기통에 던져진 종이 쪼가리를 한번 보더니 주름 하나 없는 정장을 쓸어내리고는 회의실로 들어갔다....차 안의 분위기는 엄숙하기 그지없었다.화를 눌러 참는듯한 얼굴의 고국성과 단은숙은 고은서가 도망가는 걸 막으려고 표정을 굳히고 그녀의 양옆을 지키고 앉았다.한편 고은서는 이혼합의서까지 다 받아냈었는데 반응할 시간도 없이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모든 일이 수포가 되자 우울해져 있었다.지금 상황을 보니 삼촌과 외숙모는 절대 그녀의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고은서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엄마와 함께 살았고 삼촌은 도시에 따로 살았기에 가끔 만나 밥을 먹을 때도 어른들끼리 일 얘기를 하느라 고국성도 고은서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아서 둘 사이가 그리 가깝진 못했다.하지만 고국성은 어쨌든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또 고 씨 집안의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그에게 모르는 사람한테 대하는 것처럼 아무 상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일단은 할아버지도 곧 이혼 사실을 알게 되실 테니 그 관문부터 넘어야 했다.이혼합의서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에게 다시 한번 사인을 받아내야 할 것 같았다.생각 정리를 마친 고은서는 창문에 기대어 잠든 척을 했다.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차는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고 고은서는 바로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단은숙에 의해 팔
“이혼?”이혼이란 두 글자에 고준석도 놀라긴 한 건지 손에 든 찻잔마저 미끄러질 뻔했다.“할아버지, 조심해요!”그때 고은서 얼른 그 찻잔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할아버지의 가슴을 쓸어주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줬다.“뭐 인제 와서 효도하는 척이야. 정말 할아버지 화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이런 바보 같은 짓 좀 그만해!”“조용히 해.”화가 나서 씩씩대는 단은숙의 말을 막은 고국성이 고준석을 향해 말했다.“아버지도 이제 더는 은서 봐주시면 안 돼요.”“오늘 저희들이 마침 승재 찾아갔다가 이 사람이 이혼합의서를 빨리 봤으니까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혼하는 것도 모를 뻔했다니까요.”“은서야, 네 삼촌이랑 외숙모 말이 다 사실이냐?”고준석이 표정을 굳히고 묻자 고은서는 서러웠는지 코를 먹으며 대답했다.“할아버지, 사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봐 계속 못 했던 말이었어요...”“왜 이혼을 하고 싶은 거냐?”전에 고은서가 장난스레 이혼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승재와 싸우고 나서 그런 줄로만 알고 그냥 넘겼는데 이혼합의서까지 받아낸 걸 보니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고준석은 다시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다들 왜 이혼을 하고 싶냐 물어대는 탓에 대답하는 것도 귀찮기만 했던 고은서지만 존경하는 할아버지께는 그 이유를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았다.“할아버지, 저랑 승재 오빠는 결혼 초기부터 행복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 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냥 결혼에 묶여있는 건 둘에게 다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이만 끝내고 싶은 거예요.”“세상에 천생연분이 어딨어?! 옛날 사람들은 얼굴 한 번 못 봐도 잘만 살잖아!”그때 단은숙이 화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그리고 결혼할 때도 네가 울며불며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한 거잖아. 그래놓고 인제 와서 힘들다고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그래요, 제가 결혼하자고 한 거 맞아요. 그래서 저는 이 결혼이 불행해도 참고 살아야 하나요? 삼촌이랑 숙모는 잘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