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환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허리를 굽혔다.“그럴 리가. 아니야. 네가 날 버릴 리가 없잖아. 너 거짓말하는 거지? 나 안 믿어!”태환은 미친 듯 소리쳤다.그 순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은 얼른 다가와 태환을 붙잡았다. 경호원 몇 명한테 눌려 바닥에 엎드려 있는 태환의 모습은 참 보기 추했으나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이제 나는 태환과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나중에 소연한테 들은 바로는, 태환이 청아를 사기죄와 재산 침해죄로 고소했다고 한다. 청아가 뱃속의 아이를 내세워 애원했지만, 태환은 선처해주지 않았다.그 뒤로 청아는 엄마한테 달려가 감옥 가기 싫다고 구해달라고 애원했지만, 태환이 청아의 진짜 얼굴을 까발린 덕에,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안 엄마는 가차 없이 청아를 집에서 내쫓았다.청아는 엄마가 몰인정하게 나오자 칼을 들고 찾아가 미친 듯이 엄마를 찔렀는데, 집안 일을 도와주던 가사도우미가 제때 나타나 막은 덕에 급소를 피해 손만 찔렸다.놀란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청아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더니 눈물을 흘리며 내 이름을 연신 불러댔고, 청아도 버둥대다가 그 자리에서 유산했다.나는 이 이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내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뒤, 나와 시현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시현은 약속대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심지어 내가 모르는 사이 결혼 준비를 혼자 묵묵히 마쳤다.나를 아껴주고 존중해주는 시현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많은 감동을 받았다.물론 애초에 시현과의 결혼을 결심한 건 아빠가 남겨준 재산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시현이 얼마나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알아 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나도 점점 시현을 좋아하게 되었다.결혼식 날, 메이크업룸에서 화장을 받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와 서태환이었다.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엄마는 내가 저를 쫓아낼까 봐 얼른 말했다.“희원아, 엄마는 너한테 사과하러 온 거야.
나는 어렵게 한 신부 화장이 번질까 봐 애써 눈시울에 고인 눈물을 꾹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빠는 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죽은 거예요. 아빠가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심장약은 항상 선반 위에 있었는데, 엄마가 실수로 그걸 버렸잖아요. 그러고 퇴근하고 돌아올 때 새 약을 사 오겠다고 했으면서 화투 치러 갔잖아요.”“그날 할머니가 마침 심장마비를 일으켜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아서 아빠가 근처 약국으로 약 사러 간 거예요. 그러다가 하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에 부딪혀서...”엄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헛소리하지 마! 나 때문일 리가 없잖아. 네 아빠를 죽인 건 너야.”나는 목소리를 한껏 가라앉혔다.“언제까지 자신을 속일 건데요? 할머니가 그동안 왜 엄마를 만나주지도 않았겠어요? 엄마가 너무 나약헤서, 책임감 없이 자기가 저지를 죄를 남한테 덮어씌운 거잖아요.”“그런데 아예 없는 일까지 만들어 내서 자기 잘못을 나한테 덮어씌우고,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줄은 몰랐네요.”“엄마, 나 정말 엄마 딸 맞아요?”엄마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했다.“미안해. 미안해... 다 엄마가 잘못했어...”옆에 있던 태환도 따라서 사과했다.“희원아, 어머님도 나도 정말 잘못했어. 우리 한 번만 용서해줘. 응? 다시 돌아가자. 네 드레스도, 우리 신혼집도 다 준비했어. 너만 나랑 같이 돌아가면 바로 결혼식 올리자...”“닥쳐! 남의 결혼식에 찾아와서 내 아내를 빼돌리려고?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시현이 마침 나타나 태환의 앞에서 나를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태환이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껴안았을 때처럼.시시가각 변하는 태환의 표정을 보니 너무 우스웠다.“여보, 난 관계없는 사람들이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는 거 싫어.”시현은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겠다는 듯 웃으며 내 콧등을 쓸어내렸다.“우리 마누라 말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말을 마친 시현은 경호원을 불러와 서태환
“너무 그렇게 쪼잔하게 굴지 마. 우리 엄마도 네가 아들 낳으면 그때 혼인신고 하라고 했잖아. 그때 가서 결혼식 올리고 혼인신고 하면 딱이잖아.”“응.”덤덤한 대답 끝에 나는 남친과의 모든 SNS를 삭제하고 새 게시물을 하나 올렸다.[신랑 구합니다. 저랑 결혼하실 분 있나요?]...남친 서태환의 답장이 그중에서 가장 빨랐다.[우희원, 너 미쳤어? 그냥 결혼 좀 한 거 가지고 꼭 그렇게 삐딱하게 굴어야겠어?][설마 게시물 하나 올렸다고 내가 질투할 것 같아? 웃기지 마. 경고하는데, 괜한 트집 잡지 마. 청아 곤란하게 하지도 말고.]얼마 뒤, 주청아는 서태환과 함께 게시물을 하나 올렸다.[언니, 오빠는 그저 우리 아이를 합법적으로 낳으려고 하는 것뿐이야. 나 언니한테서 오빠 안 뺏어. 앞으로 오빠랑 언니가 결혼하면, 내 아이도 언니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잖아.]엄마는 나를 사리 분별 못 한다고 욕했다.[고생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졌잖아. 청아가 너를 이렇게 도와주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뭐 하는 거니?]그 아래 태환의 친구들까지 맞장구쳤다.[청아 씨와 자매면서, 태환 형이 누구랑 결혼하든 다 한집 식구 아니에요? 월, 수, 금은 청아 씨, 화, 목, 토는 희원 씨가 형 차지하면 되겠네요.]모든 사람은 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그걸 한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더니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고였다.그러다가 가득 찬 눈물은 끝내 내 턱을 타고 핸드폰 액정으로 떨어졌다.잘못한 건 분명 저들이면서. 뻔뻔하게 나를 비난하는 꼴이 우스웠다.이런 사람을 위해 슬퍼할 가치도 없었다.나는 힘껏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댓글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댓글 하나를 발견했다.[내가 네 신랑 해도 돼?]성시현이 단 댓글이었다.나와 성시현은 함께 자랐다.대학 졸업 후 나는 A시에 남고 시현은 해외로 연수를 떠났다. 대학 때 내가 태환과 만나기 시작한 뒤로 늘 나를 피하던 터라, 지금껏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내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전화를 끊자마자 엄마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너한테 남겨준 사파이어 목걸이 어디 있어?”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엄마는 언짢은 듯 미간을 팍 구겼다.“너 태도가 그게 뭐야? 동생이 그 목걸이가 예쁘다고 이틀 정도 갖고 놀겠다는데. 얼른 가서 가져와. 쪼잔하게 굴지 말고.”양동생 주청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됐어요, 엄마. 언니는 나를 친동생으로 인정한 적 없잖아요. 언니가 싫다면 됐어요. 저도 강요하기 싫어요.”“쟤 따위가 감히 널 인정한다, 안 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어? 그 목걸이는 내 남편이자 네 아빠의 것이야. 오늘은 엄마가 대신 나서서 그 목걸이를 네게 줄게.”엄마는 청아를 꼭 끌어안으며 나를 엄격하게 노려봤다.“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사람 불러 네 방 뒤지게 할 거야.”나는 멍하니 엄마를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차라리 우는 게 그것보다는 더 예뻤을 거다.나한테 그렇게 자애롭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항상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다그치는 모습으로 변했다.하지만 나는 곧 이곳을 영영 떠난다.더 이상 의미 없는 논쟁을 벌이기 싫어, 나는 묵묵히 보석함에서 사파이어 목걸이를 꺼내 건넸다.그제야 엄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진작 이럴 것이지. 청아는 네 동생이야. 언니가 돼서 동생한테 양보할 줄도 알아야지.”엄마가 떠나자 청아는 내가 보는 앞에서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언니, 엄마가 너무 나를 편애한다고 원망하지 마. 이 목걸이는 내가 해야 더 예뻐. 태환 오빠도 나와 더 어울리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내 걸 영원히 가질 수 없어.”원하는 바를 이루고 득의양양해하는 청아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런 사람은 상대해주면 끝이 없으니까.나는 가방을 챙겨 청아가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아! 언니, 왜 밀어?”청아는 갑자기 내 앞에 뛰어오더니 내가 밀친 것처럼 비틀거리며 계단 위로 넘어졌다.
청아를 달랜 뒤, 태환은 그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내가 너를 속이고 결혼하고 애 낳은 것 때문에 네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러면 나한테 풀어. 사전에 미리 말 못 한 건 나니까. 청아는 해치지 마. 청아 몸도 안 좋아. 이미 충분히 불쌍하다고. 그저 엄마가 될 기회를 달라고 나한테 부탁한 게 잘못됐어? 왜 네 화풀이 상대가 돼야 하는데?”태환은 나를 삿대질하며 으름장을 놨다.“오늘 반드시 청아한테 사과해.”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난 뭘 잘못했는데? 난 잘못한 게 있어?”시뻘게진 내 눈에 태환은 흠칫 놀랐다.“됐어요, 태환 오빠. 내가 물론 계단에서 떨어져 죽을뻔했지만, 난 언니를 탓하지 않아요. 사과도 필요 없어요. 오빠는 앞으로 언니랑 결혼도 해야 하잖아요. 나 때문에 두 사람 싸우는 거 싫어요.”태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청아를 안쓰럽게 바라봤다.“청아야, 넌 너무 철이 들어 가끔 마음이 아파.”이윽고 태환은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결국엔 네가 청아를 질투해서, 청아가 너보다 잘 지내는 게 보기 싫은 거잖아. 오늘은 청아가 대신 사정하니까 사과 안 해도 그냥 넘어갈게. 앞으로 또다시 청아를 해치면 절대 가만두지 않아.”태환은 청아를 안아 들더니 떠나기 전 실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넌 네 동생 발끝도 못 따라가.”조용한 거실에 순간 나 혼자 남았다.나는 멍하니 창밖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얼굴을 가친 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이번이 마지막이다.내가 서태환을 위해 우는 건 이번으로 끝이다.그날 오후, 태환은 또 SNS에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한꺼번에 사진 9장이나 올렸는데, 9개 각도에서 찍은 신혼집 사진이었다.[여기 있는 모든 방, 모든 가구, 모든 장식품은 내가 신중하게 선택하고 배치한 거야. 우리 아기에게 따뜻하고 안락한 집을 주고 싶어서.]그 아래에 축하를 보내는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나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중고라는 단어에 마음이 찔렸는지, 태환은 나에게 수십통도 넘는 전화를 걸어왔다.그러다가 내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를 보내왔다.나는 그 문자들도 모두 무시했다.열흘 뒤면, 나와 시현의 결혼식이다.이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다.남은 며칠 동안, 나는 그래도 이런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청아가 내 아버지의 유골함을 떨어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유골이 바닥에 널브러졌는데도 청아는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이 고양이더러 위에 오줌까지 싸게 했다. 그러고는 히죽거리며 나를 바라봤다.“언니, 이것 봐. 유골함을 고양이 모래로 쓸 수도 있어.”그 순간, 마음속에 눌러 참았던 슬픔과 분노가 펑, 하고 폭발했다.나는 두말없이 문 옆에 세워 뒀던 야구 방망이를 번쩍 들어 청아를 향해 휘둘렀다.청아는 한 대 맞고는 새하얗게 질린 채 울며 달려 나갔다.“우희원, 너 뭐 하는 짓이야! 감히 동생을 때려?”엄마가 나타나자, 청아는 구원자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된 얼굴로 엄마 뒤에 숨으며 흐느꼈다.“엄마, 무서워요. 언니가 저 죽이려고 해요.”엄마는 청아가 병아리라도 되는 양 앞에 막아선 채 나를 향해 호통쳤다.“네가 평소에 네 동생 괴롭힐 때는 그냥 애들끼리 다투는 거겠지 하고 참았어. 그런데 이번엔 너무하잖아!”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내 엄마인데 항상 내 반대편에 서서 피도 섞이지 않은 양녀를 보호하곤 한다.세상에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나는 눈물이 글썽해서 엄마를 바라봤다.“쟤가 아빠 유골함을 부쉈어. 그건 아빠야! 내 아빠라고! 왜? 왜 그랬어?”‘분명 참고 양보했는데, 왜 아빠가 남겨준 마지막 그리움마저 망치려 들어?’‘왜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청아는 황급히 무릎 꿇고 설명했다.“엄마, 잘못했어요. 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흑흑흑... 미안해요, 엄마. 언니가 저 용서하지 않는다면, 저 그냥 죽을게요.”청아는 서럽게 엉엉 울었다.“주청아, 어디서 가식...”짝!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의 손바닥이 내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그만해! 고작 유골이잖아. 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중요해? 또 한 번만 청아 괴롭히면 그땐 쫓아낼 줄 알아.”그 뺨 한 대에 나의 마지막 미련까지 완전히 날려 버렸다.‘차라리 잘 됐어. 이러면 미련 따위 없이 떠날 수 있겠네.’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엄마를 본 체도 하지 않고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아낸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엄마도 나를 귀찮게 생각하고 주청아도 내 방을 차지했는데, 내 자리도 없는 집에서 사느니 차라리 나가는 게 나았다.나는 간단히 옷 몇 벌만 챙겼다. 그 나머지 엄마가 사준 물건이다든가, 서태환이 준 고가의 선물은 챙기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에 그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도 챙기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나는 우물쭈물하는 성격이 아니다.이왕 가는 거 깔끔하게 떠날 생각이었다.내가 캐리어를 끌고 내려왔을 때, 엄마는 청아에게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작 몇 마디 한 거 가지고 가출해? 옹졸하기는. 차라리 잘 됐어. 네가 나가서 살면 집안도 조용해지겠지. 태환과 결혼할 때 다시 돌아와.”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엄마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나는 엄마한테 결혼 상대를 바꿨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내 결혼식이 열흘 뒤라는 건 더더욱 말할 생각이 없다.엄마는 이제 내가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니까.나는 엄마나 주청아 그리고 서태환이 내 결혼식을 망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콜택시를 부르고 차를 기다리는 사이, 태환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우희원, 캐리어는 왜 들고 있어?”“나가서 살려고.”태환은 내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갑자기 왜 나가 살겠다는
나는 뻔뻔스러운 두 사람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나더러 쟤한테 사과하라고? 꿈도 야무지네.”그때 마침 내가 부른 택시가 도착해, 이 한마디만 남긴 채 나는 미련 없이 집을 떠났다.호텔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은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도,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어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엄마가 나에게 문자를 하기 전까지는.[희원아, 오늘 엄마 생일인데 집에 들렀다 가. 원래 너는 부르고 싶지도 않았는데, 청아가 하도 사정해서 부르는 거야. 청아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해.]엄마의 생일은 나도 당연히 잊지 않았다.하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일주일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장소를 빌리고 선물을 준비해 마음에 드는 생일 파티를 열어주지 않을 거다.물론 오늘도 가지 않을 거고.그곳은 내 집이 아니고, 그 사람도 이젠 내 엄마가 아니다.점심시간이 되어갈 때쯤, 내가 한창 맛난 음식을 즐기고 있을 때 엄마는 내가 나타나지 않으니 참지 못하고 문자를 보내왔다.[왜 아직도 안 와? 태환도 왔는데. 딸이 아직도 안 오는 게 말이 돼? 올해에 생일 선물 안 준비한 것도 탓하지 않았는데, 아직도 뺨 한 대 때린 거로 꽁해 있을 거야?][너도 좀 청아처럼 착하고 너그러워져.]그 문자를 보는 내내, 내 입가에는 냉소가 걸렸다.‘이게 친엄마가 할 말인가?’‘밥맛 떨어지게.’나는 엄마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해 버렸다.하지만 잠깐 조용한가 싶더니 태환이 전화를 걸어왔다.[너 어디야? 아직도 삐졌어? 당장 와. 안 그러면 사람들이 어머님과 청아가 너를 어떻게 해서, 네가 친엄마 생일에도 안 참석하는 줄 알잖아.]태환이 전화하지 않았다면, 얼마 전 카톡 친구만 삭제하고 연락처 차단을 하지 않았다는 걸 잊을 뻔했다.나는 태환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고 아예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제야 주위가 조용해졌다.마침 식사를 마쳤을 때, 내 친구 한소연한테서 문자가 도착했다.소연은 3달 동안 프로젝트에 매진해 있었는데, 이제 겨우 끝났는지 오늘 저녁 스탠드바에서
나는 어렵게 한 신부 화장이 번질까 봐 애써 눈시울에 고인 눈물을 꾹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빠는 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죽은 거예요. 아빠가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심장약은 항상 선반 위에 있었는데, 엄마가 실수로 그걸 버렸잖아요. 그러고 퇴근하고 돌아올 때 새 약을 사 오겠다고 했으면서 화투 치러 갔잖아요.”“그날 할머니가 마침 심장마비를 일으켜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아서 아빠가 근처 약국으로 약 사러 간 거예요. 그러다가 하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에 부딪혀서...”엄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헛소리하지 마! 나 때문일 리가 없잖아. 네 아빠를 죽인 건 너야.”나는 목소리를 한껏 가라앉혔다.“언제까지 자신을 속일 건데요? 할머니가 그동안 왜 엄마를 만나주지도 않았겠어요? 엄마가 너무 나약헤서, 책임감 없이 자기가 저지를 죄를 남한테 덮어씌운 거잖아요.”“그런데 아예 없는 일까지 만들어 내서 자기 잘못을 나한테 덮어씌우고,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줄은 몰랐네요.”“엄마, 나 정말 엄마 딸 맞아요?”엄마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했다.“미안해. 미안해... 다 엄마가 잘못했어...”옆에 있던 태환도 따라서 사과했다.“희원아, 어머님도 나도 정말 잘못했어. 우리 한 번만 용서해줘. 응? 다시 돌아가자. 네 드레스도, 우리 신혼집도 다 준비했어. 너만 나랑 같이 돌아가면 바로 결혼식 올리자...”“닥쳐! 남의 결혼식에 찾아와서 내 아내를 빼돌리려고?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시현이 마침 나타나 태환의 앞에서 나를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태환이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껴안았을 때처럼.시시가각 변하는 태환의 표정을 보니 너무 우스웠다.“여보, 난 관계없는 사람들이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는 거 싫어.”시현은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겠다는 듯 웃으며 내 콧등을 쓸어내렸다.“우리 마누라 말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말을 마친 시현은 경호원을 불러와 서태환
태환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허리를 굽혔다.“그럴 리가. 아니야. 네가 날 버릴 리가 없잖아. 너 거짓말하는 거지? 나 안 믿어!”태환은 미친 듯 소리쳤다.그 순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은 얼른 다가와 태환을 붙잡았다. 경호원 몇 명한테 눌려 바닥에 엎드려 있는 태환의 모습은 참 보기 추했으나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이제 나는 태환과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나중에 소연한테 들은 바로는, 태환이 청아를 사기죄와 재산 침해죄로 고소했다고 한다. 청아가 뱃속의 아이를 내세워 애원했지만, 태환은 선처해주지 않았다.그 뒤로 청아는 엄마한테 달려가 감옥 가기 싫다고 구해달라고 애원했지만, 태환이 청아의 진짜 얼굴을 까발린 덕에,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안 엄마는 가차 없이 청아를 집에서 내쫓았다.청아는 엄마가 몰인정하게 나오자 칼을 들고 찾아가 미친 듯이 엄마를 찔렀는데, 집안 일을 도와주던 가사도우미가 제때 나타나 막은 덕에 급소를 피해 손만 찔렸다.놀란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청아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더니 눈물을 흘리며 내 이름을 연신 불러댔고, 청아도 버둥대다가 그 자리에서 유산했다.나는 이 이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내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뒤, 나와 시현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시현은 약속대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심지어 내가 모르는 사이 결혼 준비를 혼자 묵묵히 마쳤다.나를 아껴주고 존중해주는 시현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많은 감동을 받았다.물론 애초에 시현과의 결혼을 결심한 건 아빠가 남겨준 재산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시현이 얼마나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알아 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나도 점점 시현을 좋아하게 되었다.결혼식 날, 메이크업룸에서 화장을 받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와 서태환이었다.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엄마는 내가 저를 쫓아낼까 봐 얼른 말했다.“희원아, 엄마는 너한테 사과하러 온 거야.
시현, 소연 그리고 나는 스탠드바 앞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그러다가 소연은 나와 시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면서 혼자 택시 타고 가겠다고 고집 부렸다.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 술에 취한 친구를 혼자 보낼 수 없었기에 우리는 먼저 소연을 집에 바래다주었다.소연이 떠나자 차에는 나와 시현 둘만 남게 되었다.그 순간 밀폐된 공간에 야릇한 분위기가 퍼지더니 온도도 후끈 달아올랐다.그 때문인지 워낙 술에 취해 어지럽던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시현은 점점 나에게로 다가왔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희원아, 내 희원...”시현의 숨결이 나를 감싸더니 따뜻한 입술이 내 입가에 떨어졌다.내가 보물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사랑이 담긴 입맞춤이었다.나는 너무 긴장돼 손에 땀을 쥐었고, 심장은 방아를 찧듯 쿵쾅거렸다.“이게 꿈일까 봐 너무 겁나. 잠에서 깨면 모든 게 가짜일까 봐.”시현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꼭 붙였다.그 순간 시현의 두려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시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꿈 아니야. 나 계속 네 곁에 있어. 안 떠나.”시현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더 꼭 껴안았다.이번에 시현이 귀국한 건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나를 보러 온 거고.때문에 다음 날 이른 아침, 시현은 다시 해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희원아, 내가 해외 유명한 디자이너한테 부탁해서 네 드레스 주문 제작했어. 해외 일정 마치면 예쁜 드레스를 가지고 우리 예쁜 새색시 맞이하러 올게.”내 인생 첫 드레스는 태환한테서 받을 줄 알았는데, 결국엔 시현한테서 받게 될 줄이야.나는 웃으며 시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소꿉친구가 약혼자가 되다니, 왠지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고 달콤한 것 같았다.그러던 어느 하루, 내가 호텔에서 나왔을 때 로비 문 앞에 서 있는 태환과 마주쳤다. 그는 옷이 구겨져 있었고, 머리도 엉망이었으며 얼굴에 생기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품에 안더니 가볍게 취객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놀랍게도 시현이 서 있었다.“방금 어느 손으로 만졌어? 두 손 다 섰나?”시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취객을 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이윽고 시현은 차가운 신발 바닥을 취객의 손등에 올리더니 지긋이 눌러 짓밟았다. 곧이어 취객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취객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애원했다.그때 시현은 싸늘하게 한마디 툭 내던졌다.“당장 꺼져!”내 기억 속에 시현은 다정다감하고 밝은 소년이었다. 그가 화를 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어두운 얼굴을 한 모습도 처음이다.취객이 떠난 뒤, 시현은 내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내가 제때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우리 약혼녀가 괴롭힘당할 뻔했네?”‘약혼녀’라는 단어가 시현의 입에서 나오자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렸다.“어머머! 이게 누구야? 성시현이잖아? 너 왜 귀국했어? 언제 왔는데?”소연은 내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더니 깜짝 놀라며 시현을 향해 질문 세례를 날렸다.시현은 그 물음에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1시간 전에. 왜 귀국했는지 묻는다면...”시현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당연히 내 사랑하는 약혼녀가 보고 싶어서 왔지.”“약혼녀?”소연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잔뜩 흥분한 채 우리 쪽으로 바싹 다가왔다.“무슨 뜻이야? 우리 희원이가 네 청혼 받아줬어?”“희원아, 네가 말해 줘.”시현은 홍당무가 된 내 얼굴을 발견하고는 일부러 장난쳤다.나는 그런 시현을 한번 째려보고는 숨김없이 소연에게 털어놓았다.“소연아, 나 시현이랑 결혼하기로 했어.”소연은 그 말에 환호를 질렀다.“성시현, 축하한다. 겨우 희원이를 아내로 맞이하는구나. 오랫동안 짝사랑한 보람 있네!”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너 시현이 나를 좋아한 거 알았어?”소연은 손을 휘휘 저었다.“그걸 모른 건 아마 너뿐이었
나는 뻔뻔스러운 두 사람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나더러 쟤한테 사과하라고? 꿈도 야무지네.”그때 마침 내가 부른 택시가 도착해, 이 한마디만 남긴 채 나는 미련 없이 집을 떠났다.호텔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은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도,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어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엄마가 나에게 문자를 하기 전까지는.[희원아, 오늘 엄마 생일인데 집에 들렀다 가. 원래 너는 부르고 싶지도 않았는데, 청아가 하도 사정해서 부르는 거야. 청아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해.]엄마의 생일은 나도 당연히 잊지 않았다.하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일주일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장소를 빌리고 선물을 준비해 마음에 드는 생일 파티를 열어주지 않을 거다.물론 오늘도 가지 않을 거고.그곳은 내 집이 아니고, 그 사람도 이젠 내 엄마가 아니다.점심시간이 되어갈 때쯤, 내가 한창 맛난 음식을 즐기고 있을 때 엄마는 내가 나타나지 않으니 참지 못하고 문자를 보내왔다.[왜 아직도 안 와? 태환도 왔는데. 딸이 아직도 안 오는 게 말이 돼? 올해에 생일 선물 안 준비한 것도 탓하지 않았는데, 아직도 뺨 한 대 때린 거로 꽁해 있을 거야?][너도 좀 청아처럼 착하고 너그러워져.]그 문자를 보는 내내, 내 입가에는 냉소가 걸렸다.‘이게 친엄마가 할 말인가?’‘밥맛 떨어지게.’나는 엄마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해 버렸다.하지만 잠깐 조용한가 싶더니 태환이 전화를 걸어왔다.[너 어디야? 아직도 삐졌어? 당장 와. 안 그러면 사람들이 어머님과 청아가 너를 어떻게 해서, 네가 친엄마 생일에도 안 참석하는 줄 알잖아.]태환이 전화하지 않았다면, 얼마 전 카톡 친구만 삭제하고 연락처 차단을 하지 않았다는 걸 잊을 뻔했다.나는 태환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고 아예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제야 주위가 조용해졌다.마침 식사를 마쳤을 때, 내 친구 한소연한테서 문자가 도착했다.소연은 3달 동안 프로젝트에 매진해 있었는데, 이제 겨우 끝났는지 오늘 저녁 스탠드바에서
청아는 황급히 무릎 꿇고 설명했다.“엄마, 잘못했어요. 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흑흑흑... 미안해요, 엄마. 언니가 저 용서하지 않는다면, 저 그냥 죽을게요.”청아는 서럽게 엉엉 울었다.“주청아, 어디서 가식...”짝!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의 손바닥이 내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그만해! 고작 유골이잖아. 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중요해? 또 한 번만 청아 괴롭히면 그땐 쫓아낼 줄 알아.”그 뺨 한 대에 나의 마지막 미련까지 완전히 날려 버렸다.‘차라리 잘 됐어. 이러면 미련 따위 없이 떠날 수 있겠네.’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엄마를 본 체도 하지 않고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아낸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엄마도 나를 귀찮게 생각하고 주청아도 내 방을 차지했는데, 내 자리도 없는 집에서 사느니 차라리 나가는 게 나았다.나는 간단히 옷 몇 벌만 챙겼다. 그 나머지 엄마가 사준 물건이다든가, 서태환이 준 고가의 선물은 챙기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에 그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도 챙기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나는 우물쭈물하는 성격이 아니다.이왕 가는 거 깔끔하게 떠날 생각이었다.내가 캐리어를 끌고 내려왔을 때, 엄마는 청아에게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작 몇 마디 한 거 가지고 가출해? 옹졸하기는. 차라리 잘 됐어. 네가 나가서 살면 집안도 조용해지겠지. 태환과 결혼할 때 다시 돌아와.”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엄마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나는 엄마한테 결혼 상대를 바꿨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내 결혼식이 열흘 뒤라는 건 더더욱 말할 생각이 없다.엄마는 이제 내가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니까.나는 엄마나 주청아 그리고 서태환이 내 결혼식을 망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콜택시를 부르고 차를 기다리는 사이, 태환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우희원, 캐리어는 왜 들고 있어?”“나가서 살려고.”태환은 내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갑자기 왜 나가 살겠다는
나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중고라는 단어에 마음이 찔렸는지, 태환은 나에게 수십통도 넘는 전화를 걸어왔다.그러다가 내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를 보내왔다.나는 그 문자들도 모두 무시했다.열흘 뒤면, 나와 시현의 결혼식이다.이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다.남은 며칠 동안, 나는 그래도 이런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청아가 내 아버지의 유골함을 떨어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유골이 바닥에 널브러졌는데도 청아는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이 고양이더러 위에 오줌까지 싸게 했다. 그러고는 히죽거리며 나를 바라봤다.“언니, 이것 봐. 유골함을 고양이 모래로 쓸 수도 있어.”그 순간, 마음속에 눌러 참았던 슬픔과 분노가 펑, 하고 폭발했다.나는 두말없이 문 옆에 세워 뒀던 야구 방망이를 번쩍 들어 청아를 향해 휘둘렀다.청아는 한 대 맞고는 새하얗게 질린 채 울며 달려 나갔다.“우희원, 너 뭐 하는 짓이야! 감히 동생을 때려?”엄마가 나타나자, 청아는 구원자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된 얼굴로 엄마 뒤에 숨으며 흐느꼈다.“엄마, 무서워요. 언니가 저 죽이려고 해요.”엄마는 청아가 병아리라도 되는 양 앞에 막아선 채 나를 향해 호통쳤다.“네가 평소에 네 동생 괴롭힐 때는 그냥 애들끼리 다투는 거겠지 하고 참았어. 그런데 이번엔 너무하잖아!”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내 엄마인데 항상 내 반대편에 서서 피도 섞이지 않은 양녀를 보호하곤 한다.세상에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나는 눈물이 글썽해서 엄마를 바라봤다.“쟤가 아빠 유골함을 부쉈어. 그건 아빠야! 내 아빠라고! 왜? 왜 그랬어?”‘분명 참고 양보했는데, 왜 아빠가 남겨준 마지막 그리움마저 망치려 들어?’‘왜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청아를 달랜 뒤, 태환은 그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내가 너를 속이고 결혼하고 애 낳은 것 때문에 네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러면 나한테 풀어. 사전에 미리 말 못 한 건 나니까. 청아는 해치지 마. 청아 몸도 안 좋아. 이미 충분히 불쌍하다고. 그저 엄마가 될 기회를 달라고 나한테 부탁한 게 잘못됐어? 왜 네 화풀이 상대가 돼야 하는데?”태환은 나를 삿대질하며 으름장을 놨다.“오늘 반드시 청아한테 사과해.”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난 뭘 잘못했는데? 난 잘못한 게 있어?”시뻘게진 내 눈에 태환은 흠칫 놀랐다.“됐어요, 태환 오빠. 내가 물론 계단에서 떨어져 죽을뻔했지만, 난 언니를 탓하지 않아요. 사과도 필요 없어요. 오빠는 앞으로 언니랑 결혼도 해야 하잖아요. 나 때문에 두 사람 싸우는 거 싫어요.”태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청아를 안쓰럽게 바라봤다.“청아야, 넌 너무 철이 들어 가끔 마음이 아파.”이윽고 태환은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결국엔 네가 청아를 질투해서, 청아가 너보다 잘 지내는 게 보기 싫은 거잖아. 오늘은 청아가 대신 사정하니까 사과 안 해도 그냥 넘어갈게. 앞으로 또다시 청아를 해치면 절대 가만두지 않아.”태환은 청아를 안아 들더니 떠나기 전 실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넌 네 동생 발끝도 못 따라가.”조용한 거실에 순간 나 혼자 남았다.나는 멍하니 창밖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얼굴을 가친 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이번이 마지막이다.내가 서태환을 위해 우는 건 이번으로 끝이다.그날 오후, 태환은 또 SNS에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한꺼번에 사진 9장이나 올렸는데, 9개 각도에서 찍은 신혼집 사진이었다.[여기 있는 모든 방, 모든 가구, 모든 장식품은 내가 신중하게 선택하고 배치한 거야. 우리 아기에게 따뜻하고 안락한 집을 주고 싶어서.]그 아래에 축하를 보내는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전화를 끊자마자 엄마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너한테 남겨준 사파이어 목걸이 어디 있어?”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엄마는 언짢은 듯 미간을 팍 구겼다.“너 태도가 그게 뭐야? 동생이 그 목걸이가 예쁘다고 이틀 정도 갖고 놀겠다는데. 얼른 가서 가져와. 쪼잔하게 굴지 말고.”양동생 주청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됐어요, 엄마. 언니는 나를 친동생으로 인정한 적 없잖아요. 언니가 싫다면 됐어요. 저도 강요하기 싫어요.”“쟤 따위가 감히 널 인정한다, 안 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어? 그 목걸이는 내 남편이자 네 아빠의 것이야. 오늘은 엄마가 대신 나서서 그 목걸이를 네게 줄게.”엄마는 청아를 꼭 끌어안으며 나를 엄격하게 노려봤다.“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사람 불러 네 방 뒤지게 할 거야.”나는 멍하니 엄마를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차라리 우는 게 그것보다는 더 예뻤을 거다.나한테 그렇게 자애롭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항상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다그치는 모습으로 변했다.하지만 나는 곧 이곳을 영영 떠난다.더 이상 의미 없는 논쟁을 벌이기 싫어, 나는 묵묵히 보석함에서 사파이어 목걸이를 꺼내 건넸다.그제야 엄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진작 이럴 것이지. 청아는 네 동생이야. 언니가 돼서 동생한테 양보할 줄도 알아야지.”엄마가 떠나자 청아는 내가 보는 앞에서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언니, 엄마가 너무 나를 편애한다고 원망하지 마. 이 목걸이는 내가 해야 더 예뻐. 태환 오빠도 나와 더 어울리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내 걸 영원히 가질 수 없어.”원하는 바를 이루고 득의양양해하는 청아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런 사람은 상대해주면 끝이 없으니까.나는 가방을 챙겨 청아가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아! 언니, 왜 밀어?”청아는 갑자기 내 앞에 뛰어오더니 내가 밀친 것처럼 비틀거리며 계단 위로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