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는 환한 얼굴로 얼마 남지 않은 반죽을 들어 보였다.“아빠 봐요. 누나가 우리에게 고기 찐빵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식탁 위에 온통 밀가루가 흩뿌려진 것을 보니 아이들이 만든 모양이었다. 평소에 문씨 고택에서는 아이들이 집안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이 ‘염초설’ 집에서 이렇듯 음식을 만들고 있자 소남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이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면서 소남은 그동안 이런 분위기가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느끼며 반성의 마음
가짜 원아가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아 소남이 문씨 집안과 임씨 집안만 관리하면 되니 일이 생각보다는 쉬울 것 같았다.“아빠, 나와 여동생은 반드시 비밀을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훈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어차피 자신들은 가짜 엄마와 친하지 않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리면 문제없을 것이다. 부자는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헨리는 환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형, 빨리 와! 애니메이션이 곧 시작할 거야.”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소남은 주방 입구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
1시간 정도 지나자 찐빵 냄새가 집안 가득히 퍼졌다.헨리는 과일 쟁반을 든 채 소파에 앉아 코를 킁킁거리며 힘껏 숨을 들이 마셨다. 그리고는 황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맛있는 찐빵 냄새. 너무 너무 좋아요. 이제 곧 먹을 수 있나요?”그러자 원원이 웃으며 말했다.“언니, 아직 주방에서 있어서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문소남은 주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헨리가 그런 아빠를 보며 말했다.“아빠, 누나가 바쁜가 봐요. 아빠가 들어가서 좀 도와주면 안돼요?”“주방이 작아서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소남은
원아가 혼자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그릇과 젓가락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그 숫자를 세어 보고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그는 쟁반을 들고 나오며 물었다. “집에 손님이 왔다 갔어요?” 원아는 식탁을 닦다가 잠시 멈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문소남과 아이들인가요?”알렉세이가 다시 물었다.원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식탁을 닦았다. 잠시 후, 행주질을 마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아이들이 먼저 왔고, 2시간쯤 있다가 문소남이 왔어.”알렉세이는 쟁반을 식탁 위
데릭은 가짜 원아가 얼굴을 돌리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아 에런과 방을 나섰다. 에런은 문소남에게 이번 일을 보고한 후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 필요한 재료를 구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소남은 에런의 문자를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또 공포의 섬이야…….’그는 원아가 납치될 당시 사건이 간단치 않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공포의 섬은 이미 폐허가 되었기에 의심이 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헨리는 한쪽에 앉아 아빠가 특별히 준비해 준 작은 낚싯대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지하실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문소남은 눈살을 찌푸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결벽증이 있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그가 가짜 원아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피비린내가 심해졌다. 아무래도 에런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자에 묶여 있던 로라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에런이 다시 자신을 고문하러 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소남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왠지 마음이 놓였다. “소남 씨, 나를 믿죠?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소남은 지저분한 그녀
데릭은 재빠르게 로라의 옷을 갈아 입혔다.에런의 거친 손길에 그녀는 아무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데릭은 옆에서 돕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로라의 입에 알약을 집어넣었다.그녀는 누워 있던 널빤지를 힘주어 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내게 뭘 먹인 거야?”“온몸의 힘이 빠지게 하는 약이야. 걱정 마. 죽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래도 조금 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데릭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짜 원아가 힘이 빠지면 다루기도 편하고 얌전히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라
문소남은 이번 일도 M국지사에서 발생한 일처럼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지사에서도 직원들은 회사 시스템 업그레이드 복구를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상대방의 IP 주소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일 듯했다. 소남은 곧바로 송현욱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벨이 다섯 번 정도 울렸을 때 송현욱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소남은 송현욱을 깨운 것에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이었다.“혹시 IT 쪽 전문가 아는 사람 있어?”
소남의 앞에서 원아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었다.“출근하기 싫은 거예요?”소남은 그녀의 말을 겉으로는 믿는 척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원아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날부터 출근 준비를 했던 그녀가, 단순히 출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아. 하지만 아침부터 무슨 일이 생긴 거지?’소남은 속으로 궁금해하면서도 원아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원아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굳이 진실을 캐
“이건 장기적인 투자예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거고, 게다가 당신이 진행 중인 연구도 이제 상용화될 때가 됐어요.” 소남은 원아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살짝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원아가 진행한 연구는 몇 차례의 임상 실험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 후 회사의 마케팅팀이 시장 조사를 했고, 적절한 가격 조건만 맞으면 대부분의 의료 기관이 그 약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장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원아는 소남의 가까운 존재감에 살짝 혼란스러워하며 나지막이
소남은 설계 도면을 디스크에 저장한 후, 모든 자료를 서류 봉투에 넣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그는 원아도 샤워를 끝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고, 원아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서 꼼꼼하게 스킨케어를 하고 있었다.원아가 고개를 돌려 소남을 보며 말했다. “다 출력했어요?”“다 출력했어요.” 소남이 대답하며 다가 갔고 원아가 일어서자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아까 에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무슨 일이죠...” 원아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시간에 에런이 전화를
원아는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ML그룹의 입찰 이후, 소남이 이렇게 공들여 건축 설계도를 완성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설계도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이 설계도 정말 멋져요!” 원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원아는 생물제약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지금은 소남의 건축 설계도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소남 씨가 방금 내가 한 말을 듣고, 내가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안 그러면
눈이 녹으면서 날씨는 평소보다 더 쌀쌀해졌지만, 이연의 마음은 따뜻했다.예전에는 이연이 감히 송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고, 이런 일들을 처리할 결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욱의 사랑이 이연의 결심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즉,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현욱 씨...” 이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난 항상 여기 있어.” 현욱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혹시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꼭 말해줘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똑똑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 거예요.” 이연은 결심하
현욱이 그런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원아는 그가 무언가 중요한 일에 직면해 있음을 직감했다.“그렇겠죠.” 비비안도 원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2층.현욱은 소남을 찾아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소남은 현욱의 계획을 듣고 나서 얼굴이 굳어졌다.“알겠어. 앞으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이번에는 형님의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저도 이번만큼은 절대로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은 제 편에 단단히 서주기만 하면 돼요.” 현욱은 말했다.소남의 지지가 있다면, SJ그룹은 쉽게 무너지지 않
막 앉았을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는 윤수정에게서 온 것이었다. 재훈은 전화를 받지 않고, 대신 윤수정에게 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형이 확실히 모든 개인 서류들을 전부 다시 발급한 것 같아요. 그 시기가 꽤 이른 편이었는데, 그때는 우리가 이연을 경계하지 않았을 때였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이 문제를 잘 처리하실 거예요.]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재훈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송현욱과 이연... 너희 둘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내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할아버지, 지금 금고에 있는 형의 모든 개인 서류를 가지고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아마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서류들뿐일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형한테 정략결혼을 추진하실 때, 형은 이미 그때 모든 개인 서류를 다시 재발급 신청을 해서 새롭게 발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재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송상철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송상철의 얼굴은 화가 난 나머지 핏발이 부풀어 올랐고, 유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욱이 이 녀석 당장 데려와.”“예, 어르신.” 유 집사는 이번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재훈이 지난번 T그룹의 입찰사업계획서를 훔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고, 그는 그 책임을 부하에게 돌렸지만, 송상철은 여전히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재훈은 지금 자신이 직접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네 엄마는 깨어나긴 한 거야?” 송상철이 다시 물었다.“예, 깨어나셨어요.” 재훈은 거실에서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서 있었다. 송상철이 모든 질문을 끝내야만 재훈이 서재로 가서 금고를 열 수 있기 때문이었다.송재훈은 송상철의 모든 질문이 끝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