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의자에 누워 읽기 시작했고 아주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지원 씨는 그림보다 훨씬 예쁘네요.”막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던 참에 아주머니의 말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그림이요? 무슨 그림?”내가 물어보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강진혁 씨가 그린 그림이요. 전부 지원 씨에요. 위층 화실에 있더라고요.”아까 테라스로 올라갈 때 2층을 지나가긴 했지만 방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화실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가장 놀라운 건 강진혁이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한 집에서 지냈다. 그가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 4년 동안 배운 걸까?그리고 아주머니의 말처럼 그가 그린 그림이 전부 나라고?나는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아주머니를 바라보면서 뭔가 착각하신 게 아닐까 싶었다.외국인이라서 동양인을 모두 비슷하게 보신 게 분명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결국 밥을 몇 입 대충 먹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화실이 어느 방인지 몰랐기에 방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강진혁의 침실, 서재, 운동실, 드레스룸을 지나 마지막으로 닫혀 있는 문 앞에 섰다.그 문은 다른 방들과 달리 잠겨 있었고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 문이 바로 화실임이 분명했다.아주머니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나와 관련된 그림이 화실에 있다면 그 안이 어떨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어 잠시 고민하다가 강진혁의 생일을 입력해 봤지만 틀렸다.그의 생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강진혁이 어떤 비밀번호를 설정했을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사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예전에 함께 지낼 때도 그는 말이 적었고 나는 온통 강유형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강진혁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가 외국으로 떠난
그림 속에는 턱시도를 입은 한 남자가 나와 함께 서 있었고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행복과 달콤한 미소가 가득했다.이건 내 웨딩드레스 초상화였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이 신랑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혹시 강유형일까?예전에 그와 약혼을 준비하던 때, 강진혁이 이 그림을 그려서 우리에게 축하 선물로 주려고 했던 걸까?아니면... 이 남자가 강진혁 본인일까?솔직히 나는 후자 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였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그림이 나를 그린 것이라면 그의 마음도 충분히 드러나 보였다.만약 내가 아직도 강진혁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어리석거나 둔감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 안에서 느낀 것은 강진혁의 마음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되었다는 사실이었다.한숨을 내쉬며 방 안을 둘러보니, 이곳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숨 막힐 듯 느껴졌다.사랑받는다는 것, 특히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깊은 사랑을 받는다는 건 때로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결국 나는 빠르게 방을 나섰고 이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 후회스러워졌다. 무엇보다 이 비밀을 알아버린 것이 후회됐다.다행히 강진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았고 내가 그것을 풀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시간제 아주머니가 집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녀는 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지원 씨,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아니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나는 멍하니 대답하며 소파로 걸어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머릿속도 어지럽고 마음도 가라앉지 않았다.“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아주머니가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1층의 한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저 방은 지원 씨를 위해 준비한 방이에요. 들어가서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네, 조금만 앉아 있다가 들어갈게요.”
내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아줌마, 저는 소희의 친구예요. 소희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걱정돼서 전화 드렸어요. 지금 상태가 어떤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우리도 잘 몰라...애가 아무 말도 안 해.”소희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다가 결국 목이 메어와 말을 잇지 못했다.“아줌마...혹시 소희 남자 친구도 병원에 와 있나요?”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자 친구?”소희 어머니는 순간 당황한 듯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소희의 부모님은 그녀가 연애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이 정도로 큰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녀의 남자 친구는 곁에 없다는 사실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고가 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네가 말한 남자 친구가 누구야?”소희 어머니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다급하게 물었다.“아줌마, 이건 소희가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혹시 소희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윤지원이 통화하고 싶다고 전해주세요.”“그래, 그래. 네가 좀 설득해 봐.”소희 어머니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아줌마는 소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소희야, 네 친구 윤지원이야. 네가 얘기 좀 해보면 좋겠는데...”그 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마도 소희 어머니가 핸드폰을 소희 옆에 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소희야, 나야. 지금 휴링턴에 있어. 핸드폰이 고장 나서 네 메시지를 오늘에서야 확인했어.그러나 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나는 목이 타는 듯한 답답함을 억누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혹시 무슨 힘든 일이 있었어? 아니면...누가 널 힘들게 했어? 그 사람이...네 남자 친구야?”여전히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이번에는 소희 어머니가 다급하게 나섰다.“소희야, 대답 좀 해라! 정말 그 남자 때문이야? 울지 말고 말 좀 해봐!”그제야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할 수
“하하하...”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기괴하고 음산한 웃음소리였다. 그 순간, 그 웃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브라운!하지만 어떻게 강유형과 브라운이 같이 있는 거지? 설마, 헤르나가 말했던 배후 조종자가 정말 강유형이었던 걸까?이전에 한 번 의심했던 적이 있었던 만큼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유형은 어디 있어? 당장 전화 바꿔.”“쯧쯧, 여전히 성격이 불같네. 네가 스누커할 때처럼 말이야.”브라운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비아냥댔고 나는 그의 장난에 일일이 대응할 생각이 없었다.“브라운, 대체 무슨 속셈이야?”“말했잖아. 그냥 너랑 스누커 한판 하고 싶을 뿐이라고.”그는 여전히 시시덕거리며 말했다.“참, 오늘 경기 꽤 잘했더라. 역시!”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칭찬은 처음으로 역겨움이 느껴졌다.“나랑 한판 하고 싶으면 먼저 강유형부터 바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설령 날 납치하더라도 다시 그와 함께할 일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전화 바꾸는 것보다, 직접 와서 보는 게 어때? 네가 오면 강유형도 아주 반가워할 것 같은데?”브라운이 비꼬듯 말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그렇지, 강유형?”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오지 마. 신경 쓰지 말고 진정우에게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나는 순간 얼어붙었다.‘뭐지? 브라운과 한패가 아니었나? 왜 강유형의 목소리는 마치 납치당한 사람처럼 들리는 거지?’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브라운은 장난기 하나 없이 단도직입적이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강유형을 직접 보고 싶으면 내가 보낸 주소로 와. 그런데 만약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하늘나라로 보내서 예수님께 죄를 참회하도록 도와줄 생각이야. 마침, 네가 그를 배신한 죄도 함께 참회하면 좋겠고.”“지원아, 제발 저 말 듣지 마! 절대 오지 마!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단순히 강유형을 구하라는 게 아니라, 브라운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경고하려던 거였는데 말이다.“주소 보내.”진정우는 짧게 말하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몇 초간 서 있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카톡을 열어 주소를 전송했다.그런데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문득 마지막 대화 내용을 보게 되었다.그걸 보는 순간,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나는 얼른 채팅창을 닫아버렸다.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신지태였다. 순간적으로 콧등이 시큰해졌고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슴 한구석이 복잡해졌다.“여보세요.”“강유형이 브라운한테 잡혔다고? 확실한 거야?”신지태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후, 덧붙였다.“강유형이 분명 맞고 있었어. 그리고... 헤르나가 말하기를, 이번 일의 배후 조종자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고 했어.”“배후 조종자?”신지태의 목소리에 놀람이 섞였다.“응.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처음에는 혹시 강유형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그가 브라운한테 납치당한 걸 보면 절대 아닐 거야.”나는 한때 강유형을 의심했기에 말하면서도 마음이 찜찜했다.그가 나를 배신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해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단 한 번도 해를 가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여러 번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그런 사람을 함부로 의심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내가 너무 소인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 이건 내가 진정우한테 바로 얘기할게.”신지태의 말에서 확실히 이번 작전의 중심은 진정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제발, 최대한 빨리 강유형을 구해줘.”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브라운 같은 인간이라면 언제 어떻게 강유형을 다치게 할지 몰랐다.강유형은 희귀한 혈액형 때문에 절대 과다 출혈을 겪어서는 안 된다.“알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마. 브라운이 널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용설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놔!”그 말과 동시에, 그녀가 순식간에 달려와 두 남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나는 처음으로 용설아가 이렇게 싸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동작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묵직한 힘이 실려 있어 그 기세에 두 남자는 나를 놔두고 그녀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 광경에 압도당해 멍하니 서 있었고 순간적으로 두려움조차 잊을 정도였다.하지만 몇 초 후, 정신을 차리고 곧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 안에 있던 야구 배트를 집어 들기 위해서였다.나는 무술을 할 줄 모르지만 힘은 있었다. 게다가 용설아 혼자 두 명을 상대하게 둘 수 없었다.속에 쌓여 있던 분노 때문인지, 배트를 휘두를 때마다 힘이 실렸고 그렇게 몇 번이나 내려치자, 결국 두 남자 중 한 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그 남자는 내 손에서 야구 배트를 빼앗으려 했지만 그 순간, 용설아의 강한 발차기가 놈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그러자 그는 비틀거렸고 덕분에 나는 무기를 뺏기지 않은 채로 용설아와 힘을 합쳐 두 남자를 상대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두 남자는 우리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나가떨어졌다.“누가 보낸 놈들이야?”용설아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물었고 나는 여전히 야구 배트를 꽉 쥔 채 손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살면서 이렇게까지 사람을 세게 때려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동안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두 남자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브라운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명백했다. 그들이 나를 찾아낸 것도, 내가 강유형과 통화한 걸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입 다물고 있겠다고? 그럼 그냥 여기 못 나가겠네.”용설아가 차분히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뭐든 묶을 거 좀 찾아주세요.”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강진혁의 침실로 향했다. 집 안에
나는 바닥에 쓰러진 두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여기도 안전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용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죠. 하지만 가야 할지 말지는 진정우가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제가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나는 순간‘설아 씨는 정우의 약혼녀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그런 감정 섞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고 괜히 말하면 내가 더 초라해질 것 같았다.그때 용설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일단 안에서 기다립시다. 계속 서 있으면 피곤하잖아요?”그녀는 마치 이곳이 자신의 집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나는 바닥에 묶여 있는 두 남자를 한 번 더 바라보자 용설아가 태연하게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도망 못 가니까.”용설아가 직접 때려잡고 묶기까지 했으니 나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나는 용설아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고 그녀는 소파에 앉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여기 분위기 좋네요. 딱 봐도 여자가 꾸민 집 같은데요?”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같은 생각을 했었다.“그건 잘 모르겠어요.”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아까 강진혁의 방까지 둘러봤지만 여성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오직 화실 속의 그림들 그리고 그 그림 속의 여자는... 전부 나였다.용설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편하게 소파에 기대앉았고 나는 그녀를 따라 앉으며 말했다.“밖에 있던 놈들, 브라운이 보낸 거겠죠?”“당연하죠.”용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조금만 기다리면 정우가 와서 지원 씨 사람을 구해줄 거예요.”그녀의 태연한 말투에 나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말 속에서 마치 강유형이 내 남자라는 의미가 담긴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하지만 브라운과 엮인 일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더 이상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에게 내 입장을 설명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고 괜히 설명했다가 아직도 진정우한
용설아는 정말 할 말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마주하며 나도 미소를 지었다.“싫어요.”“준호가 마음에 안 들어요?”용설아가 태연하게 묻자 나 역시 거침없이 대답했다.“네. 싫어요. 그리고... 용준호랑 결혼하면 제가 설아 씨랑 진정우를 뭐라고 불러야 해요? 제 서열이 내려가는 거잖아요.”“하하하!”용설아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렇네요. 그건 좀 곤란하겠다.”나는 장난스레 덧붙였다.“솔직히 용씨 집안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면 차라리 설아 씨 오빠를 선택하죠. 나이 좀 많긴 하지만 돈도 많고 저보다 먼저 죽을 확률이 높잖아요. 그럼 그의 재산은 전부 내 거고 결정적으로 설아 씨랑 진정우가 저를 공손하게 대해야 할 테니까.”용설아는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좋은 생각인데요? 근데 제 올케부터 어떻게 좀 해야 할 걸요? 그리고 함소은 씨라는 관문도 넘어야 하고.”그녀는 자신의 오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장난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본론을 꺼냈다.“설아 씨,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잖아요. 굳이 이렇게 중매를 서는 이유가 뭐죠?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해요.”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럼 지원 씨는 노력이라도 해봤어요? 예를 들면 아직 진정우를 좋아하면서도 그냥 포기하는 거라면? 왜 한 번이라도 더 잡아보지 않았어요?”그녀는 너무도 당연한 듯이 물었고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럴 가치가 없어요.”그 순간, 그녀의 웃음이 점차 사라지면서 표정이 차분해졌고 한동안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지원 씨, 난 당신이 진정우를 그렇게까지 사랑한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만약 저라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날 떠났다 해도, 그딴 이유는 상관없이 끝까지 매달렸을 거예요. 절대 놓지 않죠.”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저는 용설아 씨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집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