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아줌마, 저는 소희의 친구예요. 소희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걱정돼서 전화 드렸어요. 지금 상태가 어떤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우리도 잘 몰라...애가 아무 말도 안 해.”소희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다가 결국 목이 메어와 말을 잇지 못했다.“아줌마...혹시 소희 남자 친구도 병원에 와 있나요?”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자 친구?”소희 어머니는 순간 당황한 듯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소희의 부모님은 그녀가 연애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이 정도로 큰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녀의 남자 친구는 곁에 없다는 사실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고가 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네가 말한 남자 친구가 누구야?”소희 어머니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다급하게 물었다.“아줌마, 이건 소희가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혹시 소희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윤지원이 통화하고 싶다고 전해주세요.”“그래, 그래. 네가 좀 설득해 봐.”소희 어머니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아줌마는 소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소희야, 네 친구 윤지원이야. 네가 얘기 좀 해보면 좋겠는데...”그 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마도 소희 어머니가 핸드폰을 소희 옆에 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소희야, 나야. 지금 휴링턴에 있어. 핸드폰이 고장 나서 네 메시지를 오늘에서야 확인했어.그러나 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나는 목이 타는 듯한 답답함을 억누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혹시 무슨 힘든 일이 있었어? 아니면...누가 널 힘들게 했어? 그 사람이...네 남자 친구야?”여전히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이번에는 소희 어머니가 다급하게 나섰다.“소희야, 대답 좀 해라! 정말 그 남자 때문이야? 울지 말고 말 좀 해봐!”그제야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할 수
“하하하...”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기괴하고 음산한 웃음소리였다. 그 순간, 그 웃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브라운!하지만 어떻게 강유형과 브라운이 같이 있는 거지? 설마, 헤르나가 말했던 배후 조종자가 정말 강유형이었던 걸까?이전에 한 번 의심했던 적이 있었던 만큼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유형은 어디 있어? 당장 전화 바꿔.”“쯧쯧, 여전히 성격이 불같네. 네가 스누커할 때처럼 말이야.”브라운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비아냥댔고 나는 그의 장난에 일일이 대응할 생각이 없었다.“브라운, 대체 무슨 속셈이야?”“말했잖아. 그냥 너랑 스누커 한판 하고 싶을 뿐이라고.”그는 여전히 시시덕거리며 말했다.“참, 오늘 경기 꽤 잘했더라. 역시!”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칭찬은 처음으로 역겨움이 느껴졌다.“나랑 한판 하고 싶으면 먼저 강유형부터 바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설령 날 납치하더라도 다시 그와 함께할 일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전화 바꾸는 것보다, 직접 와서 보는 게 어때? 네가 오면 강유형도 아주 반가워할 것 같은데?”브라운이 비꼬듯 말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그렇지, 강유형?”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오지 마. 신경 쓰지 말고 진정우에게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나는 순간 얼어붙었다.‘뭐지? 브라운과 한패가 아니었나? 왜 강유형의 목소리는 마치 납치당한 사람처럼 들리는 거지?’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브라운은 장난기 하나 없이 단도직입적이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강유형을 직접 보고 싶으면 내가 보낸 주소로 와. 그런데 만약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하늘나라로 보내서 예수님께 죄를 참회하도록 도와줄 생각이야. 마침, 네가 그를 배신한 죄도 함께 참회하면 좋겠고.”“지원아, 제발 저 말 듣지 마! 절대 오지 마!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단순히 강유형을 구하라는 게 아니라, 브라운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경고하려던 거였는데 말이다.“주소 보내.”진정우는 짧게 말하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몇 초간 서 있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카톡을 열어 주소를 전송했다.그런데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문득 마지막 대화 내용을 보게 되었다.그걸 보는 순간,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나는 얼른 채팅창을 닫아버렸다.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신지태였다. 순간적으로 콧등이 시큰해졌고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슴 한구석이 복잡해졌다.“여보세요.”“강유형이 브라운한테 잡혔다고? 확실한 거야?”신지태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후, 덧붙였다.“강유형이 분명 맞고 있었어. 그리고... 헤르나가 말하기를, 이번 일의 배후 조종자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고 했어.”“배후 조종자?”신지태의 목소리에 놀람이 섞였다.“응.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처음에는 혹시 강유형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그가 브라운한테 납치당한 걸 보면 절대 아닐 거야.”나는 한때 강유형을 의심했기에 말하면서도 마음이 찜찜했다.그가 나를 배신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해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단 한 번도 해를 가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여러 번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그런 사람을 함부로 의심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내가 너무 소인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 이건 내가 진정우한테 바로 얘기할게.”신지태의 말에서 확실히 이번 작전의 중심은 진정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제발, 최대한 빨리 강유형을 구해줘.”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브라운 같은 인간이라면 언제 어떻게 강유형을 다치게 할지 몰랐다.강유형은 희귀한 혈액형 때문에 절대 과다 출혈을 겪어서는 안 된다.“알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마. 브라운이 널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용설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놔!”그 말과 동시에, 그녀가 순식간에 달려와 두 남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나는 처음으로 용설아가 이렇게 싸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동작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묵직한 힘이 실려 있어 그 기세에 두 남자는 나를 놔두고 그녀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 광경에 압도당해 멍하니 서 있었고 순간적으로 두려움조차 잊을 정도였다.하지만 몇 초 후, 정신을 차리고 곧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 안에 있던 야구 배트를 집어 들기 위해서였다.나는 무술을 할 줄 모르지만 힘은 있었다. 게다가 용설아 혼자 두 명을 상대하게 둘 수 없었다.속에 쌓여 있던 분노 때문인지, 배트를 휘두를 때마다 힘이 실렸고 그렇게 몇 번이나 내려치자, 결국 두 남자 중 한 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그 남자는 내 손에서 야구 배트를 빼앗으려 했지만 그 순간, 용설아의 강한 발차기가 놈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그러자 그는 비틀거렸고 덕분에 나는 무기를 뺏기지 않은 채로 용설아와 힘을 합쳐 두 남자를 상대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두 남자는 우리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나가떨어졌다.“누가 보낸 놈들이야?”용설아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물었고 나는 여전히 야구 배트를 꽉 쥔 채 손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살면서 이렇게까지 사람을 세게 때려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동안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두 남자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브라운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명백했다. 그들이 나를 찾아낸 것도, 내가 강유형과 통화한 걸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입 다물고 있겠다고? 그럼 그냥 여기 못 나가겠네.”용설아가 차분히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뭐든 묶을 거 좀 찾아주세요.”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강진혁의 침실로 향했다. 집 안에
나는 바닥에 쓰러진 두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여기도 안전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용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죠. 하지만 가야 할지 말지는 진정우가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제가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나는 순간‘설아 씨는 정우의 약혼녀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그런 감정 섞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고 괜히 말하면 내가 더 초라해질 것 같았다.그때 용설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일단 안에서 기다립시다. 계속 서 있으면 피곤하잖아요?”그녀는 마치 이곳이 자신의 집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나는 바닥에 묶여 있는 두 남자를 한 번 더 바라보자 용설아가 태연하게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도망 못 가니까.”용설아가 직접 때려잡고 묶기까지 했으니 나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나는 용설아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고 그녀는 소파에 앉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여기 분위기 좋네요. 딱 봐도 여자가 꾸민 집 같은데요?”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같은 생각을 했었다.“그건 잘 모르겠어요.”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아까 강진혁의 방까지 둘러봤지만 여성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오직 화실 속의 그림들 그리고 그 그림 속의 여자는... 전부 나였다.용설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편하게 소파에 기대앉았고 나는 그녀를 따라 앉으며 말했다.“밖에 있던 놈들, 브라운이 보낸 거겠죠?”“당연하죠.”용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조금만 기다리면 정우가 와서 지원 씨 사람을 구해줄 거예요.”그녀의 태연한 말투에 나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말 속에서 마치 강유형이 내 남자라는 의미가 담긴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하지만 브라운과 엮인 일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더 이상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에게 내 입장을 설명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고 괜히 설명했다가 아직도 진정우한
용설아는 정말 할 말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마주하며 나도 미소를 지었다.“싫어요.”“준호가 마음에 안 들어요?”용설아가 태연하게 묻자 나 역시 거침없이 대답했다.“네. 싫어요. 그리고... 용준호랑 결혼하면 제가 설아 씨랑 진정우를 뭐라고 불러야 해요? 제 서열이 내려가는 거잖아요.”“하하하!”용설아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렇네요. 그건 좀 곤란하겠다.”나는 장난스레 덧붙였다.“솔직히 용씨 집안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면 차라리 설아 씨 오빠를 선택하죠. 나이 좀 많긴 하지만 돈도 많고 저보다 먼저 죽을 확률이 높잖아요. 그럼 그의 재산은 전부 내 거고 결정적으로 설아 씨랑 진정우가 저를 공손하게 대해야 할 테니까.”용설아는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좋은 생각인데요? 근데 제 올케부터 어떻게 좀 해야 할 걸요? 그리고 함소은 씨라는 관문도 넘어야 하고.”그녀는 자신의 오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장난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본론을 꺼냈다.“설아 씨,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잖아요. 굳이 이렇게 중매를 서는 이유가 뭐죠?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해요.”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럼 지원 씨는 노력이라도 해봤어요? 예를 들면 아직 진정우를 좋아하면서도 그냥 포기하는 거라면? 왜 한 번이라도 더 잡아보지 않았어요?”그녀는 너무도 당연한 듯이 물었고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럴 가치가 없어요.”그 순간, 그녀의 웃음이 점차 사라지면서 표정이 차분해졌고 한동안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지원 씨, 난 당신이 진정우를 그렇게까지 사랑한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만약 저라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날 떠났다 해도, 그딴 이유는 상관없이 끝까지 매달렸을 거예요. 절대 놓지 않죠.”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저는 용설아 씨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집
나는 의문을 품으며 다시 위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번에는 한 장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읽어 나갔다.그러다 한 페이지에서 눈길이 멈췄다. 날짜를 보니, 강진혁이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이었고 그곳에는 짧은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1,400일이 넘는 날들을 보내고 이제 돌아갈 때가 됐다.]1,400일, 정확히 4년이었다.나는 숨을 죽이며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앞의 글자가 선명하게 박혔다.[그녀는 마침내 남의 아내가 되었다.]나는 본능적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그 날짜는 바로 내가 강유형과 혼인 신고를 하려던 날이었다.그날, 우리의 신혼집에 조나연이 살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는 결국 모든 걸 내려놓고 강유형과 완전히 결별했다.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다시 페이지를 넘기려던 순간, 문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일기를 계속 볼 수 없었다. 나는 급히 일기장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 문 앞, 용설아가 먼저 나가 문을 열었더니 진정우가 이미 와 있었다.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 중 한 명의 턱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낮게 말했다.“입을 열든가, 아니면 영원히 다물고 살게 해줄게.”그 차가운 말투와 태도에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진정우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바닥에 묶여 있는 두 남자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자 진정우는 발에 힘을 주어 턱을 한 번 더 강하게 차올렸다.“크윽...!”“윽...!”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놈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면서 피가 섞인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브라운이 보낸 건 확실해.”용설아가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지원 씨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어.”진정우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나, 한국으로 돌아갈래.”그러자 진정우의 턱이 살짝 굳어졌고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입을 열었다.“좋아. 보내줄게.”그는
진정우의 눈빛이 순간 깊어지더니, 이내 용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눈썹을 올리며 마치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 당당했다. 그녀는 진정우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냥 말해. 괜히 애태우지 말고.” 용설아가 먼저 입을 열며 분위기를 압박했지만 진정우는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가고 싶으면 짐부터 챙겨.” 나는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진정우, 왜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는 거야?”용설아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거리를 두고 걸어갔다.“난 빠질게. 너희 둘이 얘기해.” 진정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오히려 나에게 반문하듯 물었다.“그럼 네 생각엔, 내가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것 같아?”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용설아만 애태우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진정우까지 말을 빙빙 돌리며 피하려 들었고 결국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면 그냥 말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내뱉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네가 어떤 사정이 있든 이제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그리고 그걸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고.”애초에 그의 사정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순간적인 호기심이었을 뿐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마저도 불필요한 감정이었다.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가슴 한쪽이 묘하게 답답했다. 혹시... 나도 모르게 그의 변명을 듣고 싶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그의 이유 따위 궁금해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더 이상 이 감정을 끌어안고 있을 이유가 없었고 나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감정의 끈을 완전히 끊어내기로 했다.심호흡을 가다듬고 뒤돌아선 나는 짐을 챙기러 가는 척하며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사실 챙길 짐 같은 건 없었다. 강유형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올 때 나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내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용설아가 울컥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진정우!”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정우를 바라보았다.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감겼고, 긴 속눈썹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침대 밖으로 내려와 있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진정우...”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믿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진정우, 진정우... 아직 말 다 못했잖아. 계속해. 좀 더 말해줘...”그러나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그의 얼굴을 애타게 쓰다듬고 코끝을 맞대고, 눈가를 스치고, 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끝내 그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맞췄지만 아무리 닿아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보며 “지원아, 장난치지 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정우야... 제발 날 버리지 마. 난 이제 너밖에 없어...”나는 끝내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이 절망은 부모님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깊고 아팠다. 어릴 적에는 '죽음'이라는 게 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지만 지금은 너무도 분명했다.이제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걸.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흔들며 울었지만, 그저 눈물만 그의 차가운 얼굴 위로 떨어질 뿐이었다.그렇게 내 정신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차가운 병실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그리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어젯밤의 어둠과 그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던 진정우의 얼굴.모든 순간들이 스치면서 몸이 경련하듯 떨려왔고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너무 아팠다.“지원아, 괜찮아? 어디 아파?”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신지태의 목소리도
“수술 실패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용설아 씨가 의사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안으로 들어가 보세요.”그 말만 남긴 채 그는 가려 했지만 용설아 씨는 여전히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대신 설명했다. “환자의 후두부 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봉합을 시도했지만 뇌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어요. 출혈 부위도 여러 군데라...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 순간, 용설아 씨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애써 몸을 가누며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면서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천천히 일으켰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병실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침대 위에는 수술복을 덮고 누워 있는 진정우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머리는 하얀 붕대에 감겨 있었다.나는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그때, 용설아가 조용히 말했다.“지원 씨,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세요. 안 그러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용설아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그녀가 나를 데리고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나는 마침내 진정우의 얼굴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평소에 그가 잠들었을 때처럼, 조용하고 평온해 보지만 지금의 이 고요함은 나를 두렵게 했다.“정우야...”용설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그의 손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용설아 씨가 다시 말했다.“정우야, 정신 차려. 지원 씨가 왔어.”그 순간, 그
“정우는...”나는 입을 열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용설아는 이미 내가 묻고 싶은 것을 아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원 씨는 그가 군인이었다는 것만 알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모르셨죠?”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극비 특수 요원이었어요. 3년 동안 국제 작전에 투입되어 전 세계를 장악하려던 거대 조직을 무너뜨렸죠.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브라운이나 헤르나는 그 조직의 잔당에 불과해요.”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정우는 임무를 마친 후 전역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신지태 씨 사건을 통해 그 조직의 잔당이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게다가, 그 조직의 남은 자들이 복수를 다짐했다고 해요. 그는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직접 정우를 건드리기 어려우니, 결국 그의 주변 사람들을 노릴 거라고 확신했어요.”용설아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그가 지원 씨와 헤어진 이유예요. 그리고 그의 진짜 정체와 배경이죠.”나는 입을 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서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혹시... 설아 씨는 그와 함께 싸운 적이 있나요?”내가 어렵게 물었지만 정작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진정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용설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그와 함께 싸운 적 없어요. 우리의 관계도 모두 거짓이었어요. 그가 그렇게 한 것도, 결국 지원 씨를 지키기 위해서였죠.”그녀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자신이 조사당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원 씨와 헤어졌어도 여전히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저와 약혼을 발표하고 사람들이 저와 함께 있다고 믿게 만들었어요.
“진정우! 진정우!”나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이 빠져, 쓰러진 진정우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진정우, 대답해! 제발 대답 좀 해봐!”용설아가 그를 안고 필사적으로 흔들며 애타게 외쳤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함께 잠을 잘 때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깨고 늘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가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브라운! 당장 구급차를 불러! 빨리!”용설아가 소리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그제야 얼어붙었던 내 머릿속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끔찍한 생각이 스쳐 가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간신히 힘을 짜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손을 짚으며 앞으로 기어가듯 움직이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강유형!”바로 신지태였다.곧이어 여러 사람이 몰려들었고 신지태가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는 내 시야를 가로막았고 그사이 진정우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풀려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겨우 입을 열어“진정우”라고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브라운은 체포되었고 강유형 역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쓰러진 진정우의 모습만이 반복해서 떠올랐다.병원 응급실 앞에서 나는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수술실의 붉은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지친 의사가 나오는 걸 보고 다급히 붙잡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 하나였다.“현재 응급처치 중입니다.”“이제 그만 묻고 그냥 기다리세요.”옆에서 용설아가 나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지만 진정우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후두부 뼈가 부서졌어요.”용설아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뭐라고요?”“정
스누커 공의 무게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뼈까지 부러뜨리진 않더라도, 제대로 맞으면 살이 움푹 팰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한 팔이 나를 감싸안았다.쿵! 쾅! 팡! 팡! 팡!사방에서 공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 공 사이에서 회전하며 휘청거렸다.그러나 나를 안고 있던 진정우는 놀랄 정도로 빠른 반응 속도로 움직이며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그의 한쪽 팔이 단단히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이끌려 쉼 없이 몸을 틀어가며 쏟아지는 공을 피해 다녔다.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눈앞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공들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어떤 것은 그의 손이나 팔로 튕겨 나갔고 어떤 것은 우리가 회전하면서 가까스로 비켜 지나갔다. 이게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이하면서도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브라운, 이제 그만해! 당장 멈추라고!”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쏟아지는 공이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공은 여전히 끝없이 날아왔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정우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숨이 가빠지고 그가 나를 안고 움직이는 속도도 처음보다 확연히 느려졌다.“퍽!”바로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며 흔들리는 걸 보았다. 진정우가 공에 맞은 것이다.“진정우!”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가 나를 안고 있는 이상, 나는 오히려 그가 회피하는 걸 방해하고 있었고 그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그에게 도움이 될 순 없어도, 적어도 짐이 되지는 않아야 했다.“조금 있으면 널 밖으로 밀어낼 거야.”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거의 속삭이듯 가까운 거리에서 들린 그의 목소리는, 우리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익숙한 온기였다.그러나 감상에 젖을 틈도
진정우가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채, 각자 앞에 스누커 공이 한 바구니씩 놓여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브라운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오늘 진정우를 인간 샌드백으로 만들 작정이었다.“브라운, 네가 진짜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1대1로 붙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남자냐?”용설아가 참지 못하고 그를 도발했다.“브라운, 이렇게까지 하면 쪽팔린 줄 알아야지. 소문이라도 나면 네 체면이 남아나겠어?”방금 상처를 치료받은 강유형도 가세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순간일수록 진정우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브라운은 더 악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비록 그와 깊은 교류는 없었지만 나는 이 남자가 철저한 미친놈라는 걸 이미 깨달았다.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그는 더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내가 남들한테 조롱당한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이제 와서 그런 게 두려울 것 같아?”역시, 브라운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이건 공정하지 않아.”용설아가 끝까지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공정하지 않다고? 그럼 너도 같이해.”브라운이 손짓하자, 용설아는 순식간에 끌려 올라갔다. 그러자 진정우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괜히 그를 자극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자극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널 도와주겠어?”용설아는 그와 나란히 서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 머릿속에는 네 글자가 떠올랐다.‘천생연분.’그녀는 브라운의 속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려고 일부러 자극한 것뿐이었다.“브라운, 이건 너랑 나 사이의 문제야.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진정우가 단호하게 말하면서 용설아가 다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맞아, 원래는 걔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어쩌겠어? 네 여자가 널 지키고 싶어 하는걸.”브라운은 비꼬듯 웃으며 혀를 찼다.“너희 둘 참 애틋하네, 그렇지? 우리 미녀 스누커 선수도 그렇게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