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뭐라고?”나는 웃음이 나왔다.그러자 진소영이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언니, 이 수술에 돈이 많이 들지 않나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가슴이 철컥 내려앉았다. 돈 문제로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아니. 많이 들지 않아. 그리고 돈 걱정하지 마. 너희 오빠는 이제 새 직장에서 일하는 기술 엔지니어야. 월급도 많고.”진소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 사이의 신뢰는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진다고 한다.나는 손을 들어 진소영의 검고 부드러운 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너를 맡을 의사는 내 친구의 선배야. 아주 유능한 사람이야. 걱정하지 말고 네 몸만 잘 챙기면 돼. 수술이 끝나면 넌 바로 다시 건강을 되찾을 거야.”“언니. 정말 고마워요.”진소영의 눈동자가 반짝였다.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래.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네 오빠도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좋아할 리가 없겠지.”진소영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언니와 오빠의 사랑은 정말 달콤해요. 마치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요.”그녀가 읽는 연애 소설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너도 건강을 되찾으면 달콤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야.”진소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모든 소녀는 봄날을 꿈꾸기 마련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반복해서 읽는 연애 소설도 없을 것이다.진소영이 계속 짐을 싸는 동안 나는 진정우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그는 방에도 없었고 마당을 나가 봐도 없었다.‘도대체 어디에 간 걸까?’궁금해하며 나는 마당을 나와 달빛 아래서 그를 찾았다. 그리고 멀리 강가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비록 밤이었지만 나는 그의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예전에 나는 강유형의 차 소리와 발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고 이제는 진정우의 모습도 멀리서 알아볼 수 있었다.한 사람을 좋아할 정도로
진정우와 나는 호숫가에 나란히 서서 불어오는 바람과 물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하지만 잠시 서 있다 보니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왜 그래?”진정우가 나를 보고 물었다.“앉을 데가 필요해. 서 있자니 다리가 아파.”나는 솔직히 말했다.진정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내 허리를 감싸안아 올렸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과 함께 그는 나를 안고 근처에 있는 큰 돌로 걸어갔다.진정우가 자주 나를 안거나 들어 올리곤 해서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나는 일부러 부끄러운 척하며 말했다.“난 스스로 걸을 수 있는데.”“다리가 아프다며... 어떻게 걸어?”그의 말에 나는 혀를 살짝 내밀며 입을 다물었다.그는 돌에 나를 내려놓고 자신도 옆에 앉았다. 내가 옆으로 바짝 붙으려 하자 그는 긴 팔로 나를 끌어당겨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이건 또 뭐지?’의문이 스치자마자 그는 내 귀에 낮게 속삭였다.“돌이 차가워.”이보다 더 세심한 남자 친구가 있을까?아마 남에게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진정우가 최고다.“고마워. 정우 씨.”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키스했다.하지만 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은한 담배 향이 내 숨결에 섞여 들어왔고 그 순간 키스하던 나의 몸도 멈췄다.진정우가 담배를 피운 거였다.그가 혼자 강가에 온 건 아마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나 보다.내가 키스를 멈추자 그도 무언가를 느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론 안 필게. 오늘이 마지막이야.”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밤보다도 더 깊고 어두웠다.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난 담배 피우는 거 신경 안 써. 다만 너무 많이는 피우지 마. 몸에 안 좋으니까.”그렇게 말하는데도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부모님의 사고가 떠올랐다.“정우 씨는 지금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나와 함께해줘.”평생은 길다고 하지만 그와 함께라면 기대하게
진정우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잡았다.“정말 그런 거야?”“왜 아니라고 생각하지?”그가 내게 되물었다.예전에 아줌마가 했던 말이 떠올라 말하려던 순간 멀리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전화가 계속 와요!”진소영이 뛰어오는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심장이 약해서 뛰면 안 되었다.“알았어. 내가 갈게!”나는 진정우의 무릎에서 일어나 진소영 쪽으로 서둘러 갔다.전화를 확인하니 아줌마가 여러 번 걸어왔다. 분명히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아줌마?”내가 전화를 받자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아니에요. 휴대전화를 안 들고 있었어요.”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소리를 냈다.“전화를 안 받으니까 별별 상상을 다 했잖니.”“다음부턴 꼭 챙길게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정말 미치겠어!”아줌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누가 또 그렇게 화나게 했어요? 삼촌이요?”내가 일부러 농담처럼 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네 삼촌이면 내가 직접 손봤을 거야. 이번엔 강유형이야!”강유형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아줌마와의 관계가 이어지는 한 그의 이름이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요?”“유형이가 조나연 때문에 우리랑 인연을 끊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아예 떠나버렸어!”아줌마는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나는 전에 강진혁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는 삼촌이 먼저 강유형과 연을 끊자고 말했다고 했다.굳이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아줌마, 아마 잠깐 화가 나서 그런 거일 거예요. 바람 쐬러 나간 것뿐일지도 몰라요.”“아니야! 유형이가 진혁한테 다 말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우리랑은 완전히 끝내겠다고 말이야.”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
“진정우는 참 복이 많네. 너 같은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다니 말이야.”아줌마의 말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사실 나도 행운이었다. 강유형이 나를 배신했을 때 진정우가 나를 구해줬다.“언제쯤 돌아올 거니?”“정확히는 모르겠어요.”아줌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원아, 돌아오면 아줌마랑 얘기 좀 해줘. 마음속에 쌓인 게 너무 많아서 견디기 힘들어.”그녀가 강유형과 그렇게 틀어진 것도 결국 나를 위해 그녀가 조나연을 몰아냈기 때문이었다.“네. 돌아가면 꼭 들를게요. 삼촌이랑 같이 뵈러 갈게요.”“그래. 그리고 밖에서는 항상 조심하고 낯선 곳에서는 특히 신경 써야 해.”“알겠어요. 아줌마도 너무 화내지 마세요.”“휴...”아줌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전화를 끊고 나서야 나도 크게 숨을 내쉬었다.강유형과 관계가 틀어진 이후 아줌마와 삼촌과의 대화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진정우와 진소영이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뭔가를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고 진소영은 가끔 진정우의 옷을 잡아당기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나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카카오톡으로 안리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조나연에게서 온 몇 개의 메시지를 발견했다.[강유형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그에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연락이 안 돼요.][지금 너무 불안해요.]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강유형이 집을 떠날 때 조나연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물론 나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대화창을 닫고 진소영과 진정우가 있는 풍경을 찍어 안리영에게 보냈다.안리영의 답장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메시지를 추가로 작성했다.[소영이를 데리러 왔어요.]하지만 아직 보내기도 전에 조나연에게서 음성 통화가 걸려 왔다.메시지로는 답이 없으니 바로 전화를 걸어오다니.지금 혹시 강유형이 나랑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건가?그 생각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지원 씨, 늦은 시간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줌마가 강유형이 유언을 남기듯 떠났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조나연까지 그의 행동이 마치 후사를 정리하는 것 같다고 하니 분명히 강유형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난 문득 전에 꿨던 꿈과 함께 강유형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내가 죽으면...”비록 강유형을 더 이상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지만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 그는 내게 단순한 과거의 존재일지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조나연은 슬픈 목소리로 울먹였지만 그녀의 슬픔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위로는커녕 동정조차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그럼에도 강유형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솔직히 말했다.“강유형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어떤 일이 닥쳤다고 해서 생을 포기할 사람이라면 그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도 없을 거고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질 수 없을 것이다.“저도 유형 씨가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조나연이 내 말을 따라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연락이 안 되고 유형 씨가 했던 행동들 때문에 너무 불안해요.”“그가 모든 걸 다 준비해 줬다면서요. 그럼 뭐가 불안해요?”나는 냉소적인 어조로 대꾸했다.나는 관대할 수 있지만 내 선의에도 한계는 있다.조나연은 내 약혼자를 빼앗아 간 사람이고 그런 그녀와 친밀해지는 건 나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았다.“유형 씨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요. 사실 유형 씨가 준비해 둔 모든 것보다 진짜로 저를 안심시키는 건 유형 씨일 뿐이죠.”조나연의 말은 의도치 않게 나의 마음을 찔렀다.“그래요? 그렇다면 저한테 전화할 게 아니라 나연 씨를 안심시킬 곳을 찾아보세요. 저한테는 그런 거 없으니까.”나는 단호히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지원 씨!”그녀가 나를 붙잡았다.“만약 유형 씨가 지원 씨에게 연락하거나 어떤 소식을 전한다면 저한테 말해줄 수 있을까요?”“당신이 한 말을 강유형에게 전해줄게요. 나연 씨한테 직접 연락하라고요.”나는 전화를
그의 말이 이어지면서 나는 학창 시절 아무 걱정 없이 자유로웠던 강유형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당시의 그는 정말로 무슨 걱정도 없는 사람이었다.나는 그가 언제까지나 그런 모습일 거라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변했고 결국 우리가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다.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강유형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돌봐달라고 했어. 그리고 너도 말이야.”강진혁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마지막으로 네가 결혼하면 자신에게 꼭 알려달래. 직접 찾아와 축하해주고 싶다고.”그 말에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동시에 짜증이 치밀었다.이렇게 온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어놓고선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 줄 알았더니 결국 그는 그냥 어디로 숨어버리려는 것이었다.“이건 자기 후사를 정리한 건 아닌 것 같네요.”내 말은 다소 독살스럽게 나갔다.강진혁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유형이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야.”나는 비웃음을 터뜨렸다.“아내도, 아이도, 잘나가는 사업도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와 고충이 있다는 거예요? 그냥 징징대고 싶은 거 아닌가요?”“지원아, 아직도 유형에게 화가 나 있는 거지?”그는 내 비난이 여전히 강유형에 대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아니요. 제가 유형 씨와 완전히 선을 그었을 때 사랑도 미움도 모두 끝났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하자 강진혁은 잠시 침묵했다.“사랑과 미움을 그렇게 쉽게 놓을 수 있을까?”그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묘하게 진정우가 해준 분석과 강진혁이 나를 향해 품고 있는 억눌린 감정이 떠오르게 했다.순간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유형 씨는 나를 잊었나요?’그러나 그런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오빠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나는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뭐?”그는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듯 물었다.“유형 씨가 다 떠넘기고 갔잖아요. 회사를 포함해서 모든 걸 말이에요. 오빠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내 말을 듣고 그는
나는 몸이 굳어졌고 멍하니 진정우를 바라보았다.진정우의 아버지가 사고 당시 운전사였다. 브레이크 문제가 있었다면 책임은 그의 아버지에게 있었다는 뜻이었다.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잠시 후 진정우가 내 어깨를 잡은 손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아버지가 운전사였고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게 사람의 실수든 차량의 결함이든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는 거야.”나는 온몸이 더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날씨 때문이 아니라 감정 때문이었다.만약 내가 진정우와 이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진정우 아버지의 책임을 추궁하고 그에 따라 조사를 하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가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버렸다.만약 그의 아버지가 이 사고의 책임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원아, 내가 항상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해 왔다고 알잖아. 이 사건도 어쩌면 내 아버지와 연관이 있을 수 있어. 조사가 끝나면 너에게 결과를 말해줄게.”진정우의 말은 단호하고 진지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연관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나는 그의 성실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만약 그의 아버지가 정말로 관련이 있다면 그는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여기까지 일이 흘러온 것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그러나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앞에 두고 나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조사를 멈출 수는 없었다.진정우도 이 사건을 계속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용의자인 용진표를 조사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용진표는 나에게 모든 사실을 말한 상태였다.나는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진정우는 내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낀 듯 내 뒤쪽 목덜미에 손을 얹고 가볍게 눌렀다.“지원아, 너무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마. 상황이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최악은 아닐 수도 있어.”그도 만약 그 결과가 사실이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파멸을 가져올지 알고 있었다.나는 더욱 심하
‘결벽증 있다더니 이게 무슨 행동이야?’헤르나는 안았다가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었다.나는 손을 뿌리치려다 병실 안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헤르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경기 데려가기 전에 들른 거야. 그런데 상태는 좀 어때?”그 말에 브라운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헤르나는 일부러 그의 상처를 그것도 가장 굴욕적인 상처 들춰내고 있었다.브라운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부위를 떠올렸고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복수는커녕, 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조롱하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브라운의 분노가 병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그냥 알리러 온 거야.”그는 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브라운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럼 난 괜히 당한 거야?”“네가 당한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널 다치게 한 사람도 얘가 아니야.”헤르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나는 헤르나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하지만 모든 게 저 여자 때문이었잖아.”브라운은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지.”헤르나는 냉정하게 말했고 그의 말에 브라운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브라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푸른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저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도대체 왜 신지태의 문제에 얽히려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나는 단순히 신지태가 걱정돼서 관여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강유형이 일부러 날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그 생각은 스쳐 갔지만
나는 헤르나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온 건가? 이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헤르나는 내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을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네 눈이 네 입보다 솔직하네.”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삼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내가 이곳에 올 때는 헤르나에게 기절당한 채 끌려왔지만 이제는 그의 고급 차량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내 마음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차가 멈추자 나는 옆에 앉은 헤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병원에 왜 온 거죠?”“한 사람을 만나러.” 헤르나는 내 긴장한 모습을 흘깃 보며 말했다.“누구를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진정우를 생각하고 있는가 봐?”나는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이미 헤어졌잖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를 신경 써?”헤르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억지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헤어졌다고 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법은 없잖아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렸다.“그게 진정우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서 보면 알겠지.”나는 차 안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정우라면 난 가지 않을 거예요.”“왜?” 헤르나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잖아요. 내가 전 연인으로 찾아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헤르나는 입가를 살짝 핥으며 웃었다.“선을 잘 지키네. 하지만…… 넌 가야 해.”“가지 않으면요?” 나는 그와 대립하듯 대꾸했다.“그럼 내가 널 안고 갈 거야.”나는 눈이 커
헤르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약속한 경기 날이 다가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날 진정우가 올 거라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진정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실망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걸, 강유형과 진정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셋째 날 아침, 헤르나가 돌아왔다. 나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고개를 돌리니 연한 카키색 재킷과 흰색 캐주얼 팬츠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90cm가 넘는 그의 키와 탄탄한 체격은 마치 톱 모델처럼 보였다.“내려와.”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그때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친하지도 않은 남녀 사이에 이건 아닌 것 같네요. 함부로 그러지 마세요.”나는 순간 뭔가 깨달았다. 헤르나는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것 같았고 내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굴수록 그는 오히려 나를 더 흥미롭게 대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남들의 복종에 익숙해져서, 가끔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게 느끼는 모양이다.“하하, 참 쑥스러움이 많네.”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나는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경기 보러 언제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없으면 시작도 못 할 테니까.”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스누커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선수가 이런 부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을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헤르나 씨, 이렇게 하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아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그는 정말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이틀 동
나는 강유형을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든, 개한테 물리든 그게 네 일이야?”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일에 간섭하지 마. 그리고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원하지 않아.”내 말에 강유형의 눈빛이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원아, 이건 네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내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강유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렸지만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헤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경고야. 지원이한테 손대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떠났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그 자식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헤르나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대답했다.“유통기한 지난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필요 없어요.”헤르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똑똑한 소녀네.”그가 나를 칭찬한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한 선택이 현명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강유형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더라면 그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가자. 뭐라도 먹어야지. 오늘 특별히 중국 요리사를 불러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했어.”헤르나는 마치 소중한 손님을 대접하듯 말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의 '인질'인데도, 그는 나를 VIP처럼 대했다.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만두까지 있었다.'이 사람, 철저히 나를 조사했구나.'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왜 안 먹어?”그는 만두 하나를 내 접시에 놓으
내가 언제 헤르나의 사람이 됐다는 거지?헤르나는 일부러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마치 내가 도화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강유형은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헤르나를 노려보았다.“헤르나 씨,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해 봐.”헤르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경찰을 들먹이다니, 너 수준이 진징우보다 조금 낮구나. 그래서 지원이가 너 대신 진정우를 선택했구나.”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헤르나... 정말 교활한 자식이야. 강유형과 진정우 사이의 갈등까지 부추기다니.’강유형의 얼굴은 이미 험악했는데 진정우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굳어졌다.진정우는 강유형에게 가시 같은 존재인데 헤르나는 그 가시를 더 깊이 찔러 넣었다.“헤르나, 네가 누구를 상대로 하든, 어떤 일을 꾸미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지원이에게 손대는 건 절대 안 돼.”강유형은 차가운 경고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헤르나는 내 손목을 쥔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렇게 귀여운 소녀를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어?”그는 깊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내 곁에 두고 싶을 뿐이야.”그의 목소리마저도 유난히 다정하게 들렸다.“죽고 싶어!”강유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크게 소리쳤지만 헤르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운 채 나를 향해 물었다.“네가 직접 말해봐. 여기서 나갈지, 남을지.”그는 교묘하게 나를 갈등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지원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데리고 나갈게.”강유형은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강유형은 비록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보호하려는 그의 태도만큼은 진심이었다.하지만 헤르나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체격 좋은 경호원이 그의 뒤를 바짝 지키고 있었다. 헤르나가 눈짓만 하면 그들은 당장이라도 강유형에게 달려들 태세였다.강유형이 강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군대를 다녀온 진정우처럼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좋아.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아닌가 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 신지태를 구하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겉으로는 친절해 보이는 헤르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떠보며 내 약점을 찾으려 했고 내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중요하지 않아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헤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를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유일한 기회를 그를 위해 썼잖아.”“내가 스누커를 배운 건 지태 오빠 덕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기회는 그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내 말에 헤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 나를 설득해서 너를 놓아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어차피 당신은 날 여기 가두고 경기를 보게 하려고 했잖아요. 날 풀어준다 해도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태 오빠의 경기를 보러 왔기에 굳이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내가 말하며 그의 팔에 난 상처를 힐끔 쳐다보자, 헤르나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이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어. 다 나으면 문신이라도 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지.”“누가 그런 거예요?”나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모를 리가 있나?”헤르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나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정우를 상대로 복수하려는 거군요.”헤르나는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그게 전부는 아니야.”그리고 와인잔을 흔들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날 다치게 해서 생긴 게 아니거든.”“진정우랑 이미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내가 묻자, 이번엔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너희 사귀었다면서? 그런데도 자기 과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어?”그의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안 했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연민이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헤르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헤르나는 자리에 앉아 흰색 캐주얼 팬츠 위로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했다.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보였다.솔직히 말해, 그의 외모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깊고 또렷한 눈매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아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당구대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경기가 끝나면 절대 지태 오빠에게 다시는 손대지 마세요.”현존 최고의 스누커 선수라면 단연 신지태였다.그들은 불법 도박 자본을 이용해 경기를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결국 신지태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고 내가 아는 신지태는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의 팔을 끊어버릴 만큼 단호한 사람이었다.헤르나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당신이 내가 이기면 어떤 요구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헤르나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답했다.“긴장하지 마. 약속을 깨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역시 이런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지.”나는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큐대를 내던지고 뒤돌아섰다.그때, 헤르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널 여기 데려온 건 두 사람 때문이야.”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누군데요? 당신, 브라운 때문에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요?”그가 내게 조건을 내걸라고 했지만 나는 브라운과 그의 팬들에게 나를 놔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지태를 구
“세 판.”“좋아요.”나는 말하면서 천천히 큐를 골랐다.“보는 눈이 있는데?”내가 큐를 손에 쥐자마자, 헤르나가 웃으며 칭찬했고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곧 이유를 덧붙였다.“네가 고른 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그래요?”나는 살짝 비웃으며 큐를 살펴보다가 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큐에 새겨진 건 ‘진’이라는 번체 글자였다.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나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이건 당신 게 아니라..”나는 이어서 진정우의 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진정우와 헤르나는 완전히 대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떻게 진정우의 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큐는 보통 프로 선수들만 사용하는 건데.이전에도 진정우에게 스누커를 잘 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보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전문 큐를 가질 리 없었다.“이거 누구 거야?”헤르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맞춰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것은 아니예요. 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역시 스누커를 잘 아는 소녀답네. 이런 것도 알아보네.”‘스누커 소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브라운이 나를 처음 그렇게 불렀었다.“그렇게 저를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왜?”헤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나는 헤르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나를 욕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해.”나는 헤르나를 욕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웃음을 무시했고 이미 공이 배치된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이제 시작하죠.”그는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해봐.”내가 먼저 시작하라는 조건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큐를
‘무슨 경기를 본다는 거야. 이건 그냥 날 인질로 잡아 지태 오빠가 이기게 만들려는 거잖아.’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렇다면... 여기 온 김에 차분히 적응하는 수밖에.’사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방금 핸드폰을 던지며 보였던 격앙된 행동은 모두 헤르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그는 이미 내 핸드폰을 만졌으니, 내 메시지나 통화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핸드폰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더 이상 발버둥 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헤르나도 이미 나에게 구체적으로 통보했고 이 상황에서 계속 소란을 피워봐야 무의미할 뿐이었다.그래서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했다. 그런데 테라스에 나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었다.엄청난 규모의 테라스 아래로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은 푸른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골프장, 야외 스누커 경기장, 커다란 수영장과 화려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곳에서 헤르나가 한가롭게 당구를 치고 있었다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꼬마야, 내려와서 나랑 한 판 치지 않을래?”순간, 나와 시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브라운이 떠올랐다.브라운과 헤르나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나가 브라운을 압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브라운 한 명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고 언제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결국 이 팬들을 진정시키려면 브라운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헤르나뿐이었다.하지만 나는 그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네가 당구를 잘 친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널 미리 돌려보내 줄 수도 있지.”헤르나가 유혹적인 제안을 던졌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정우나 신지태와 가끔 시합을 즐겼을 뿐인데 어쩌다 내 당구 실력이 이리 소문났는지.두 명의 외국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