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투는 분명 정중했다. 그런데도 내 귀에는 상사가 명령하듯 들렸다.그리고 그가 나를 부른 건 절대 업무 때문이 아니었다.어제는 꽃을 보낸 이에 대해 물어보더니, 오늘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이건 아무래도 나를 추궁하려는 거 아닌가?이제야 알았다. 남자 친구를 사귀는 건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드는 일이었다.만약 진정우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면 조태혁이 들이대는 것도 가볍게 쫓아내면 끝날 일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제는 진정우의 기분까지 맞춰야 했다.‘역시 세상에 속이 넓은 남자는 없나 보네.’동료들이 모두 지켜보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진정우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사무실은 나와 그리 멀지 않았고 내부 인테리어는 심플했다. 하지만 방 안은 온갖 장비들로 꽉 차 있었다.책상과 의자, 컴퓨터 외에도 각종 전자 장비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다.무슨 용도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 연봉 6억의 가치를 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장비들을 흘끗거리며 둘러보았다. 그때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돌아서며 무심하게 인사를 건넸다.“정우 씨.”들어오기 전, 그의 사무실 문패에서 총괄 엔지니어라는 직함을 확인했었다.이 정도 직책이면 연봉 6억도 이상하지 않았다.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침은 먹었어?”그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곤 했는데 어젯밤 일을 떠올리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더 어려웠다.나는 방 안의 장비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응.”“오늘 쉬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회사에 나온 거야?”그의 물음에 나는 기계를 구경하던 동작을 멈췄다.그리고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선 넘지 마. 여긴 회사야.”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덧붙였다.“우리가 연인이라고 해서 정우 씨가 내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게 설령 나를 위한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길래 나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성숙하고 듬직하며 잘생기기까지 했다.그의 나이는 조태혁 같은 풋풋한 애송이와는 비교가 안 됐다.아저씨라는 말이 이제는 칭찬처럼 들리는 시대다.성숙한 매력의 대명사가 아니던가.요즘은 다들 아저씨 취향 아니던가?젊은 아가씨부터 결혼한 부인 그리고 심지어 어린 소녀들까지도 진정우 같은 성숙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던가.그런데도 그는 아저씨라는 말을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면 이 호칭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나는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정우 씨 나이도 적진 않잖아. 특히 아까 그 풋내기 앞에서는 더 그렇고. 아직 열여덟도 안 됐는데 그 애가 정우 씨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뭐가 이상해?”“너도 내가 늙었다고 생각해?”진정우는 내 말을 끊으며 물었고 표정이 굳어 있었다.‘헉!’진정우가 이렇게 나이에 민감할 줄은 몰랐다.나는 급히 말했다.“내가 말한 건 네가 나이가 어리진 않다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싫어한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는데 그가 바로 말을 잘랐다.“다른 사람은 나이 얘기해도 상관없어. 근데 너는 안 돼.”“...”나는 할 말을 잃었다.그가 억울한 듯 화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혹시 내가 정우 씨 나이 때문에 싫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자존심 상해?”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삐져 있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됐어. 난 전혀 신경 안 써. 내가 좋아하는 건 너의 성숙한 매력이야. 안 그랬으면 아까 그 풋풋한 애를 왜 거절했겠어?”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나는 그의 볼을 살짝 비비며 다시 말했다.“진짜 어른답지 못하네. 이렇게 삐지는 거 보면.”문득 강유형이 떠올랐다.그 사람은 내가 사과 한마디만 하면 바로 넘어갔는데.그에 비해 진정우는 마치 삐친 아이 같았다.결국 나는 발끝을 들어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이 정도
나는 안리영과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은 진정우와 허진호랑 먹지 않았다.안리영의 말에 따르면 선배가 그들 병원에 객원 교수로 초청되어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인사를 나눴으니 나도 가서 만나보라는 것이었다.특히 진소영의 치료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기회라고 했다.“그럼 정우 씨도 같이 갈게. 어쨌든 소영이 오빠잖아. 직접 듣는 게 좋지 않을까?”그리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그의 몫이니 함께 있는 게 맞았다.안리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왜? 불편해?”“너 혼자 오는 게 좋겠어. 시간이 촉박해서 선배님이 잠시 쉬는 틈에 간단히 얘기하는 게 전부일 거야.”안리영이 이렇게 설명했다.나는 혼자 진소영의 병력을 들고 병원으로 갔다.안리영은 이미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가져온 병력을 확인한 후 곧바로 학술 강연장으로 안내했고 가는 길에 그녀가 말했다.“선배님이 정말 바쁘셔. 강연 끝나면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아마 너는 4,5분 정도밖에 얘기할 시간이 없을 거야.”나는 어이가 없었다.“그렇게 바빠? 대통령급 아니야?”안리영은 내 농담에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뭐.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교수잖아. 우리 병원에 온 건 완전 행운이지. 아마 병원장이 큰 선물이라도 들고 가서 부탁했거나 정말 운이 좋아서 초청된 거겠지.”나는 안리영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말 속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안리영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녀가 흠모하는 선배 앞에서는 그런 우수함이 빛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그녀의 짝사랑은 쉽게 끝나지 않는 거겠지.사랑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 때 더 아름답다고 했다.“너 그 선배랑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어?”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없어. 그 사람이 워낙 바쁘니까. 그리고 만약 따로 만날 수 있었다면 굳이 너를 부르진 않았겠지.”안리영은 웃으며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말했잖아. 그는 대단한 교수님이고 조교랑 스
그의 강연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의학을 모르는 나조차도 쉽게 이해할 정도로 명확하고 깔끔했다. 덕분에 현대 의학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너 왜 그래? 꼭 뭔가 수상한 짓이라도 한 사람 같아.”안리영은 내 감탄은 무시한 채 내 상태부터 지적했다.역시 산부인과 의사답게 눈치가 빨랐다. 내 이상함을 단번에 간파한 것도 모자라 이유까지 짚은 듯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좀 피곤하긴 해.”안리영의 눈이 커지며 날 노려봤다.“진짜야? 누구랑?”“뭘 누구랑이야.”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안리영, 네 생각엔 누구겠어?”그녀는 날 한참 뜯어보더니 조용히 말했다.“진정우?”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말 의외다. 강유형이랑은 10년을 넘게 지냈는데 결국 진정우가 먼저야?”“....”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뭐야, 네가 먼저 덮쳤어?”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장난스러운 말을 던졌다.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서로 좋아서 그렇게 된 거야.”안리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웃어? 진짜라니까. 내가 억지로 그런 거 아니야.”“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그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차지했다는 거지. 그럼 된 거야.”그녀의 말은 간결했지만 매번 날 놀라게 했다.나는 반격했다.“너는 이 많은 시간 동안 아무도 안 만나더니... 결국 네 목표는 구안석 교수님 같은 완벽한 남자였던 거야?”그녀는 태연히 말했다.“맞아.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서도 뛰어난 사람이어야지.”“근데 진짜 구안석 교수님은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야. 마음 있으면 고백이라도 해봐. 혹시 모르잖아.”이번엔 내가 그녀를 부추겼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린 안 될 거야. 내가 고백하면 결과는 딱 두 가지뿐일 테니까.”“어떤 두 가지?”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하나는 시작. 서로 사랑하며
“리영아, 나를 찾았다면서?” 구안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러자 안리영은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선배, 이쪽은 내가 말했던 윤지원이야. 전에 수술 상담을 요청했던 진소영이 바로 지원이의 시누이이고.”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안리영이 한마디로 나를 진정우와 엮어버린 셈이었다.구안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나는 재빨리 진소영의 병력을 그에게 건넸다.그는 병력을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소영 씨의 상태는 이미 파악했습니다. 병력과 대체로 일치하고요. 이 수술은 치료 효과가 확실합니다. 게다가 빨리 진행할수록 좋습니다. 이미 심장이식 대기 등록도 해두었으니 적합한 심장이 나오면 바로 수술 가능합니다.”“그럼 진소영 씨가 지금 바로 입원해서 이식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안리영이 전문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응.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그저 선배가 후배를 바라보는 평범한 시선이라기엔 묘하게 다정함이 느껴졌다. 혹시 이건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오가는 거 아닐까?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구... 교수님.”나는 그의 호칭을 부르다 멈칫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조만간 소영이를 입원시킬게요.”나는 재빨리 대답했다.안리영도 말을 덧붙였다.“선배, 바쁘신 와중에 신경 써주셔서 정말 고마워.”구안석은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입술이 살짝 움직이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그녀는 하얗고 고운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흰 가운과 잘 어울리는 우아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곱슬머리를 살짝 묶어 올린 모습은 완벽한 미인이었다.그녀는 자연스럽게 구안석의 옆에 멈춰 섰다.“구 교수님, 왕 원장님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별거 아니야. 너랑 밥 한 끼 먹고 싶어서.” 구안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안리영은 잠시 멍해 있다가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이 바보 같은 계집얘... 또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거절하는 거 아니야?’그때 안리영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요.”‘오! 생각보다 똑똑하네. 하긴 이렇게 멋진 남자를 멀리할 리 없지.’나는 속으로 안리영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와 함께 아름다운 저녁 시간을 보낼 상상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소희연이 끼어들었다.“졸업 이후로부터 우리 셋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요. 다 같이 한 번 모이죠.”‘뭐라고? 정말 이렇게 눈치 없는 방해꾼이라고.’ 경험자로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희연은 분명히 구안석과 안리영이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었다.안리영이 간신히 용기 내어 잡은 기회였기에 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내가 말을 꺼내기 직전 안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소 교수님, 저랑 구 교수님은 따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놀랍게도 안리영은 이번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이런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잡은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태도가 돋보였다.하지만 소희연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아. 친구 가족분의 수술 관련 이야기겠지? 아마 모를 텐데 나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나중에 구 교수님과 함께 수술대에 설 거야.”‘와,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이유네.’ 소희연이 수술에 직접 관여할 예정이라는 신분을 내세우다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끼어들겠다는 의지였다.안리영의 입술이 약간 떨리는 걸 보니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그러나 그때 구안석이 나섰다.“희연아, 나랑 리영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외쳤다.‘이제 됐어!’이보다 더 완벽한 대응은 없었다.그 순간 소희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굳어졌고 억지로 짓던 미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구안석 씨는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구안석이 안리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명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다만 지금의 안리영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그도 그럴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구안석을 짝사랑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그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그녀의 이런 태도는 사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아마도 구안석이 직접 그녀에게 명확히 감정을 표현해야만 그녀가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는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굳이 말을 더 할 필요도 없었다.“난 이만 가볼게. 오늘 저녁 잘 준비하고 예쁘게 꾸미고 약속에 나가. 그리고 근무는 미리 교대해 둬.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약속 깨는 건 절대 안 돼.”나는 마치 그녀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엄마도 너만큼 나에 대해 그렇게 신경 안 써.”그건 그녀의 엄마가 딸이 이렇게 힘들게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힘내, 리영아!”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그녀를 응원했다. “그럼 난 간다.”“잠깐. 그냥 가지 말고 나랑 사무실에 좀 들르자.” 안리영이 나를 붙잡았다.“왜? 빨리 가서 정우 씨랑 얘기해서 소영이를 입원 준비시키는 일 상의해야 하는데.” 나는 급한 일이라며 서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놓지 않았다.“조금만 시간 내. 금방이면 돼.”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갔다. 그녀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이게 뭐야?”나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보며 물었다.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가 사용법과 용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집에 가서 깨끗이 씻은 뒤에 발라. 부기를 가라앉히고 멍도 없애 줄 거야.”그제야 나는 그 약의 용도를 알아챘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이런 건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나 필
똑같은 말이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그저 비웃음처럼 들렸다.“알아. 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내 말에 강유형은 숨은 의미를 이해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내가 너무 신경 썼네.”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론 걸을 때 집중 좀 해. 딴생각하지 말고.”나는 짧게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순간 지난밤 꿈속에서 피투성이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지금 병원에 있는 그를 보니 괜히 가슴이 철렁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그는 잠시 입을 열 듯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아픈 데 없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유형 씨, 빨리 와요!”조나연이었다.강유형의 큰 키에 가려 그녀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그가 아파서 온 게 아니라 조나연과 함께 온 것이다.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조나연의 산부인과 검진을 위해 왔을 것이었다.그런데 나는 겨우 꿈 하나 때문에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니.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조나연의 부름에 강유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나는 빈정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볼 일 있으면 먼저 가봐.”그렇게 말한 뒤 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차에 올라타자 휴대전화가 두 번 진동했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확인해 보니 조나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원 씨, 당신과 유형 씨는 이미 끝났으니 앞으로는 유형 씨와 거리를 두길 바랍니다.”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불안하면 강유형의 허리에 끈이라도 묶어놓으세요. 난 상관없으니까요.”메시지를 보낸 뒤 난 조나연의 번호를 바로 차단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아 회사로 돌아갔다.하지만 회사에 도착해 보니 진정우도 허진호도 없었다. 입사 환영회가 너무 즐거웠던
그는 늘 믿음직스럽고 정직한 얼굴이었다. 거짓말을 해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진솔해 보였고 지금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를 보고 나는 더 이상 그가 농담하는지조차 추궁할 수 없었다. 그래도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그건 애들 장난이지. 그런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진정우, 정말 왜 이래?”그는 채소를 자르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짧게 말했다.“너니까.”정말이지, 이 남자. 달콤한 말을 할 때는 과하다 싶을 정도다.“언니, 나도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든요.”진소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강유형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강유형은 내가 진정우를 데려가고 싶다고 오해했을 뿐이었다.진정우는 내가 데려갈 필요도 없이 놀이공원에 갈 것이었다. 놀이공원 후반 작업, 특히 조명 설계는 그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니까.개장 광고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마케팅팀은 사전 예측을 통해 시간대를 나눠 티켓을 판매하고 입장을 조절했다. 덕분에 혼란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진정우와 나는 진소영을 데리고 전용 통로를 통해 입장했다. 진정우는 내가 특별 손님인 걸 알고 있었기에 진소영을 데리고 놀러 가고 나는 개막식 참석자용 대기실로 향했다.“지원아! 어서 와! 너희 삼촌이랑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한껏 멋을 낸 강유형의 어머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나는 강유형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삼촌, 몸은 좀 어떠세요?”“아주 좋아.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고 잠도 푹 자.”그는 농담처럼 말했다.강유형과 강진혁도 정장을 입고 나왔다. 두 사람 모두 훤칠해 눈길을 끌었다. 강유형의 어머니는 그런 두 아들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근데 너 혼자야?” 강유형이 물었다.“정우가 동생 데리고 놀러 갔어.”“점심에 연회가 열릴 거야. 그때 둘 다 같이 오라고 해.”강유형의 아버
“갈 거야.”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가야 했다.그곳은 내게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2년 동안 쏟아부은 노력, 무수한 밤의 땀방울, 내 기대와 후회, 그리고 나의 새로운 시작까지.초대장을 손에 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한 사람 더 데려가도 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진정우야?”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네가 오기만 하면 누구를 데려오든 상관없어.”이건 그의 양보였다. 예전의 그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고마워.”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강유형이 다시 나를 불렀다.“지원아, 내일 부모님도 오실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릴 거야.”그는 분명히 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알겠어.”나의 대답을 듣고도 그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았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결국, 그의 침묵 속에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모든 영상 플랫폼과 지역 전광판에 모두 놀이공원 개장 광고가 떴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만큼 확실히 알리고 싶다는 의미였다.천하의 강유형답게 그의 사업적 감각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이렇게 멀어진 지금도 그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언니, 이 놀이공원이 언니랑 오빠가 연애 시작한 장소 아니에요?”진소영이 TV 속 광고를 가리키며 물었다.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고 진정우를 바라봤다.“맞아요?”“아니.”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그럼 어디예요?”진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묻는 소영에게 내가 대신 말했다.“청평. 전에 얘기했던 그 작은 마을.”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미묘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정우가 주방으로 간 뒤, 나는 그를 따라갔다.“내가 뭔가 잘못 말했어?”“응.”그는 짧게 답했다.“뭔데?”나는 의아해하
혹시 조나연이 단순히 나에 대한 원망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걸까?그럴 리 없다. 조나연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데는 반드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내가 반격하려는 순간, 진정우와 허진호가 나타났다. 진정우는 내 옆으로 걸어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애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조나연은 그의 강렬한 기세에 몸을 떨며, 더더욱 약한 척하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만약 윤지원 씨가 강유형에게 가지 않았다면 당연히 상관없었겠죠.”진정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대꾸했다.“두 사람은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서로 연락하면 어때서요?”그의 반격은 나조차도 조금 놀랐다. 조나연은 그의 태도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아마도 그녀는 진정우가 나를 이렇게까지 옹호할 줄 몰랐을 것이다.그 순간, 그녀가 왜 이런 소란을 피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조나연은 내 연인 관계를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강유형에게 돌아간다면? 그녀는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하지만 저 여자가 계속 강유형과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잖아요.”조나연은 다시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당신과 강유형의 관계가 정말로 탄탄하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지원 씨가 나쁜 여자라고 나더러 믿으라고 이러는 거잖아요.”역시 진정우다. 그는 조나연의 얕은 속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조나연이 입을 열려 하자, 진정우는 내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한 방을 더 날렸다.“조나연 씨, 당신이 지원 씨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건 알겠는데 감히 여기까지 와서 지원 씨를 괴롭히다니요. 대체 무슨 배짱으로요?”그 순간, 주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참 뻔뻔하네!”그 말을 듣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나연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꼭 뺨이라도 맞은 듯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더 몰아붙일 수도
조나연이 나를 찾아온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다만 우리 회사로 직접 찾아왔다는 점이 의외였다. 차라리 아파트 앞이나 집 근처에서 기다릴 줄 알았다.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당연히 강유형과 관련된 일이겠지만 이제는 그녀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래서 리셉션 직원에게 간단히 말했다.“그냥 제가 없다고 전하세요.”그런데 퇴근 시간이 되어도 그녀는 여전히 회사를 떠나지 않고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부장님, 그분이 반나절 동안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드린 물도 손도 안 대셨고요. 임신한 몸이신데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요.” 리셉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조나연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나를 압박하려는 속셈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다음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나를 괴롭힐 게 분명했다.“일이 생기든 말든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라 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한 뒤 건물을 나섰다.“지원 씨!”갑자기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그 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었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하얀 실크 소재의 임산부 드레스를 입고 약간 부른 배를 내보이며, 얼굴에는 약간 홍조가 감돌았다. 아마 방금 큰 소리를 낸 탓일 것이다.“왜 저를 피하는 거예요?” 그녀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피하는 게 아니라, 만나기 싫어서 안 만나는 겁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특유의 약한 척하는 모습으로 힘없이 말했다.“찔리니까 그런 거죠.”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강유형에게 저에 대해 고자질한 거예요? 왜 헤어졌으면서도 여전히 그와 얽혀 있는 거죠?”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였다.그녀가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제 우리 둘 주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두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화제를
계단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보니, 내가 굳이 거절의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진정우는 검은 반팔 티셔츠에 작업복 스타일의 팬츠를 입고, 검은 오토바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모습에 시선이 저절로 끌렸다.이런 모습의 진정우는 처음이었다.하지만 이런 남자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예전에 강유형도 이런 모습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자신감 넘쳤던 때가 있었다.그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지금도 생생하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 그의 허리를 감싸고, 밤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그 짜릿한 순간들이.“아직도 오토바이를 좋아하나 봐?”잠시 넋이 나간 사이, 강유형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의도를 눈치챘지만, 나는 가볍게 미소만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정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진정우는 내가 다가가자마자 천천히 걸음을 맞춰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를 막아섰다.진수로!우리 회사의 대표님이자, 진정우와 나의 현재 상사였다.그는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빳빳한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그의 단단한 배와 진정우의 날렵한 체격은 대비가 극명했다.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마치 진정우가 진수로에게 지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진수로가 나를 흘끗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진정우는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그가 강유형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나만 향하고 있었고, 걸음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그의 발걸음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오래 기다렸어?”나는 계단 위, 그는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덕분에 우리 눈높이가 나란히 맞았다.“아니.”진정우의 눈빛은 깊고 진지했다.그의 눈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의 말처럼 그의 마음도 정직하고 솔직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가자.”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그때 진수로가
“지원 씨, 지금 강유형과 같이 계세요? 제 전화 좀 받아달라고 해주실 수 있나요?”조나연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방 안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했다.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 섞인 숨소리와 함께 모든 시선이 내 휴대폰과 강유형 사이를 오갔다.나는 주변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강유형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조나연 씨, 혹시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당신 남자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왜 저한테 전화하시는 거죠?”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이 큰 공간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제... 제 전화를 안 받으까요...”조나연의 목소리는 분명히 기운이 빠져 있었다.“아, 그렇군요.”나는 비웃듯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제가 받아보라고 하면 정말 받을 것 같으세요?”내 말이 끝나자 조나연은 대답하지 못했고 대신 강유형이 내 휴대폰을 확 낚아채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그를 보고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이렇게 행동하시면 당신 여자 친구가 더 오해하지 않겠어요? 제가 일부러 대표님께서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이죠.”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목을 잡아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강유형!”신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비켜.”강유형은 짧게 말하며 신지태를 밀어냈다.신지태는 내가 다치지 않을까 염려해 따라오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지태야, 저 둘은 아직 풀지 못한 게 있는 것 같아. 네가 끼어들 필요 없어.”그들에게는 내가 여전히 강유형과 잘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하지만 방금 전의 대화는 나를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방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세게 뿌리치며 말했다.“강유형,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내 손 더럽히지 말고.”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강유형의 곁에 있을 때 나는 늘 그에게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 좀 하라고 말했었다. 어울리기 너무 어려운 사람으로 보이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땐 그나마 좀 나았는데 지금의 강유형은 완전히 혼자 겉도는 느낌이었다.“유형이 너랑 헤어진 이후로 쟤 완전히 딴사람이 됐어. 맨날 저런 얼굴로 세상 다 빚진 사람처럼 굴잖아."신지태가 나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을 흘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지태 오빠,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나는 그가 지금 시합 때문에 정신이 없겠지만 이 부탁은 그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뭔데?”신지태는 먼저 동의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우리 부모님 교통사고의 진짜 원인을 좀 알아봐 줄래?”그러자 그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준비해 온 사고 감정서와 의문점을 그에게 보여주었다.“지태 오빠, 날 도와 줄 수 있는 건 오빠뿐이야.”“지원아, 그걸 알아낸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는데?”신지태가 되물었다.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달라질 건 없어. 부모님이 돌아오실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난 진실을 알고 싶어. 그래야 부모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알아볼 거야? 어떤 결과가 나와도 괜찮아?”“응. 반드시 알아내야겠어.”“알았어.”신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지태 오빠, 비용은 내가 낼게.”신지태도 분명히 다른 사람을 시켜서 조사할 것이고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그래. 근데 결과 나오고 나서 얘기하자.”그도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듯 가볍게 말했다.신지태와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모두 술에 취해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지태야! 빨리 와. 오늘 네가 주인공이잖아! 그리고 지원아,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보다 지태랑만 붙어 있잖아!”나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지태 오빠가 나 잘 챙겨
나는 조나연을 따라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내가 사는 아파트의 단지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보자 머릿속에 딱 두 글자가 떠올랐다.어이없었다.그녀가 바로 내 위층에 살고 있었다.이게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된 걸까?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다행인 건 내 옆집 이웃은 거의 집에 오지 않는 사람이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 조나연과도 절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그녀의 무거운 걸음걸이를 보니 출산이 가까운 듯했다.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녀는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물건조차 사기 어려워 보였는데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산다니 누가 도왔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강유형.그는 여전히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내가 그런 그를 떠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는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며칠 뒤, 지태 오빠가 경기를 마치고 돌아왔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함께하자고 했다.“너 경기 보러 못 와서 아쉬웠잖아. 축하 파티엔 꼭 와야지.”나는 고민스러웠다. 그 자리에 강유형과 그의 친구들이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다음에 따로 축하하면 안 될까?”하지만 신지태는 단호했다.“내일 바로 해외로 나가야 해. 이번 아니면 기회 없어.”내가 망설이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설마 강유형이랑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거야?”“맞아.”나는 솔직히 인정했다.그러자 신지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그건 네가 아직도 강유형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는 뜻이야. 만약 정말로 다 정리했다면 강유형도 그냥 아는 사람일 뿐이잖아.”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태 오빠조차 이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 특히 강유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정말 너무해. 내 말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구는 거야?”“내가 언제 안 들었어. 네 얘기를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그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그려졌다.내가 없어진 걸 알고 CCTV까지 확인하며 나를 찾아다녔겠지. 그리고 결국 내가 강유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강유형이 말한 대로 진정우는 나를 찾기 위해 애썼다.나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전화 못 받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땐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거든.”“알아.”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화내지 않았어. 그리고 전화가 안 됐던 이유는 집에 가면 얘기해줄게.”그는 멀리 보이는 아파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네가 어젯밤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 물도 안 마셨고. 정말 피곤하고 목이 말라.”그의 말에 마음이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간 걸 알면서 왜 잠도 안 자고 물도 안 마신 거야? 대체 뭘 했길래 이래?”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나를 따라 걸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돼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짐을 내려놓고 과일을 정리하더니 나를 신발장 쪽으로 밀어붙였다.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해 나는 침을 삼켰다.“물 준비해 놨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질투 났어.”그의 말에 나는 놀라 멈췄다.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걸 이해한다는 말투였는데, 이제 와서 질투했다고?“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말을 막았다.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나누며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거칠고 마른 입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따뜻했다.“네가 한 일을 이해해. 그래도 질투는 멈출 수 없더라.”그가 입맞춤을 멈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