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 돌아가니 강유형이 사무실에 있었다.“대표님, 이건 제 사직서입니다. 퇴직 절차는 이미 인사부에 제출했어요.”나는 준비해 둔 사직서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강유형은 사직서를 잠시 훑어보더니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점점 더 대담해지는구나.”아직도 내가 단순히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와 다툰 적도 크게 언성을 높인 적도 없었다.처음에는 그의 집에 얹혀살면서 눈치를 보았고 그 후에는 그를 좋아하게 되어 다투는 일조차 꺼렸었다.사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고집도 있고 투정도 부렸었다. 하지만 강유형 집안에 들어가면서 ‘투정’이라는 단어는 내 삶에서 사라졌다.“충동적으로 사직을 한 것 같아요? 대표님께 불만을 드러낸 적이 있나요?”나는 담담하게 물었다.강유형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번에는 솔직해지고 싶었다.“대표님, 솔직히 말해요. 우리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행동한 건 항상 당신이었죠. 나는 당신에게 그냥 필요할 때 꺼내 보는 ‘작은 인형’ 같은 존재였잖아요. 당신이 바쁘거나 즐거울 땐 나를 아예 잊어버리고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참 무정하군.”그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며 비웃음을 지었다.“그래요. 제가 무정하죠.”“무슨 태도야. 내가 너한테 무슨 죄라도 지었어?”강유형이 불쾌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아니요. 제 마음이 변한 건 제가 무정해서겠죠. 제가 이렇게 떠나려는 것도 제 탓이죠.”내가 그렇게 말하자 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비꼬지 마.”“어떻게 말해야 대표님 기분이 좀 나아지실까요?”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거슬리실 테죠.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뭘 말해도
강유형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이미 얘기했잖아. 그날은 술에 취해서 실수였다고. 정신이 좀 혼란스러웠어.”“한 번 실수한 사람은 또 실수할 수 있어. 난 그런 실수를 절대 용납 못 해.”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그러자 강유형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잘난 척하지 마.”그의 이런 태도에 나는 더 실망했다. 예전에 왜 그를 좋아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정신이 나갔던 걸까?“너 그냥 나 떠나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다른 남자 만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그는 여전히 자기합리화에 빠져 있었다.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말했다.“그래, 네 생각대로 해. 자존심 강한 네가 배신을 용납 못 하겠지. 그럼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놔주는 게 낫잖아. 우리 서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잖아.”나는 이렇게라도 끝내고 싶었지만, 내 말이 오히려 그의 화를 돋운 듯했다. 강유형은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억지로 키스하려 했다.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피했고, 그가 조나연과 키스했던 게 떠올라서 화가 나고 역겨웠다.하지만 내가 피할수록 강유형은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책상 위로 밀어붙이고 손을 거칠게 내 옷 속으로 넣었다.“나랑 키스하기 싫다 이거지? 그럼 누구랑 하고 싶은데? 정우? 너 그 자식이랑 잤어?”그의 저속한 말과 행동에 모욕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의 손이 내 허리까지 올라오자,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그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걸 보고서야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붉은 피 한 방울이 내 눈가에 떨어지자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그건 강유형의 뜨거운 피였다. 그 피가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나는 떨리는 손을 멈추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러자 강유형은 내 뒷머리를 단단히 잡고 차갑게 속삭였다.“지원아, 잘 들어둬. 넌 내 거야.”
“차라리 머리를 제대로 때렸어야지! 그놈을 아예 끝장내버리게! 네가 마음을 줄 땐 받지도 않더니 지금 와서 이런 미친 짓을 하다니!”안리영은 강유형에 대해 욕을 퍼부으며, 평소의 냉정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 인간은 그냥 자존심이 상한 거야. 내가 떠나지 못할 거라 믿었는데, 진짜로 그만두니까 화가 난 거지.”내가 그렇게 설명하자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그래. 이제 와서야 네가 소중한 줄 안 거야. 네가 다른 남자랑 엮이는 건 절대 용납 못 하는 거지.”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와 진정우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온갖 방해 공작을 벌였던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강진혁을 보내더니 이제는 조나연까지 들이밀다니. 덕분에 놀이공원 마무리 작업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그래도 진정우가 도와준 덕에 마무리는 잘될 거라 믿고 있다.“지원아, 앞으로 강유형이 또 이상한 짓 하면 똑같이 맞서. 또 그런 짓 하면 한 번 더 혼내줘야 알아. 겁을 줘야 못 건드리지.”안리영이 진지하게 말했다.“알았어.”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는지, 전화를 끊기 전 안리영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잠시 후에 병원 들러서 그 자식 상태 좀 볼게. 피 많이 흘렸나 확인하고.”그녀의 농담에 나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감돌았다.차 안에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내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이웃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어머, 오늘은 혼자 들어오네? 남자 친구는?”지난번 아주머니들이 진정우에게 했던 얘기가 떠올라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말이에요. 복도 청소를 시켜야 하는데.”내 말에 아주머니들이 웃었다.“아니야, 아니야. 그 청년 참 괜찮던데? 잘생기고 성실하고, 잘 잡아둬.”“네.”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계단을 올랐다.그런데 복도에 들어서자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바로 옆집 문이 열려 있었고, 누군가가 안에서 짐을 옮기며 쿵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네 사직서는 무효야.”강진혁은 마치 모든 걸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물론 그가 이럴 권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강유형이 내 퇴사를 허락했다 해도, 강진혁은 아버지를 통해 내 사직을 무효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도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퉁명스럽게 말했다.“오빠, 대표님이 이미 동의하셨어요.”지금 강유형이 KS 그룹의 실질적인 대표니까, 강진혁이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몇 초 뒤 강진혁이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어?”이곳으로 이사 온 걸 아는 사람은 이소희와 진정우뿐이지만, 강진혁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꾸준히 관심을 두고 지켜봐 온 사람이니, 내 번호도 기억하고 사는 곳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오빠, 놀이공원은 제가 2년 동안 애정을 쏟아온 프로젝트예요. 이제 남은 일은 오빠가 맡아주세요.”“지원아...”“더는 할 말 없어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전화를 끊었다. 죽에서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재료가 많지 않아 간단히 끓인 죽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노트북을 꺼내 죽을 먹으면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KS 그룹에서 쌓은 몇 년의 경력이라면 충분히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이력서를 모두 제출하고 죽도 다 먹었지만, 옆집은 여전히 짐 정리를 끝내지 않은 듯했다.식사를 하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 방해받지 않도록 휴대폰은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다.얼마나 잤을까? 깨어나 보니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고요함이 낯설게 느껴졌다.휴대폰을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바쁘게 지내던 평소와 달리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게 어색했다.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이소희, 강유형 어머니, 그리고 모르는 번호에서 세 번이나 걸려 와 있었다.진정우에게서 온 전화가
결국 나는 놀이공원에 결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의 꿈이 담긴 이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번에 내 역할은 정식 참여자가 아닌 무료로 조언하는 비공식 자문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놀이공원이 잘 마무리되기만 하면 충분했다.어차피 지금 할 일도 없으니 차라리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았다.저녁 무렵 호텔에 도착했다. 집을 나서기 전, 옆집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했다. 이곳에 한 남자가 이사 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주인 아주머니께 옆집을 내가 대신 임대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집주인 아주머니의 번호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내 제안을 듣자 아주머니는 난감해하며 말했다.“글쎄... 이미 계약금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취소하면 곤란하지 않을까?”“그럼 계약금 두 배로 돌려드릴게요. 비용은 제가 부담할게요. 그리고 그분이 내는 임대료보다 더 드릴 수도 있어요.”마음 편히 살 수 있다면 돈이 좀 더 드는 건 상관없었다.‘돈이 주는 자신감’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돈이 있으면 안정감과 여유를 살 수 있고 돈 앞에서는 어떤 원칙도 흔들릴 수 있으니까.아주머니는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더는 망설이지 않고 상대방과 협의해 보고 다시 연락 주겠다고 했다.전화를 끊고 차를 몰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로비 한쪽에 앉아 있는 조나연이 보였다.조나연이 호텔에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왜인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자리에서 나를 불렀다.“지원 씨.”여기까지 와서 나를 기다렸다는 건 오늘은 정말 할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업무 얘기하러 오신 거면 잘못 찾으셨어요. 저 이제 퇴사했거든요.”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못을 박았다. 내가 회사에 사직서를 낸 데에 그녀도
예전에 강유형을 ‘미친개’라고 부르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결국 강유형에게 찍혀 이 바닥에서 쫓겨났다.강유형은 정말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큰 권력은 없는 편이라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찍힌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성격이라면 예전 같았으면 황제 옆에서 간신 노릇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조나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강유형을 비꼬면서 동시에 그녀까지 조롱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지원 씨, 어떻게 그 사람을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그래도 한때 지원 씨가 사랑했던 남자잖아요. 헤어졌다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요?”그래, 완전히 그를 감싸는 말투였다.“예의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예의는 예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 쓰는 거죠. 나연 씨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남편 친구와 눈 맞았고, 남편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남의 약혼남에게까지 마음을 품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예의를 기대하는 건 좀 웃기지 않나요?”조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제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나연 씨가 직접 제 앞에서 한 말이니까요.”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날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조나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치 숨이 막힌 듯 굳어 있었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땐 목소리가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사람이 날 먼저 유혹한 거예요. 내가 아니라...”“정말 그래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죠.”나는 그녀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조나연은 참 끈질긴 여자였다. 한 번에 끝내지 않으면 두고두고 귀찮게 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이제는 확실히 끝을 내야 할 때였다.조나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 사람이 나를 망쳤어요.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거예요. 이건 다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해요
조나연은 내가 한 말에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 참으로 난처해 보였지만 이 모든 건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나연 씨, 더 볼 일 없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지금 임신 중이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요.”내 말은 조롱이 아니라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녀가 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면,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할 테니까. 특히 이런 위험한 장소는 피하는 게 맞았다. 혹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마음이 묘해졌다.더 할 말도 없었고, 내내 쌓였던 불만도 털어냈으니 이제 돌아설 참이었다.그때 뒤에서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원 씨, 정말 강유형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이제 그 사람과 함께할 마음이 정말 없나요?”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한테 넘길게요.”넘겨준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요즘 강유형이 보이는 유치하고 과격한 행동들을 보면 그는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와 끝난 뒤로 오히려 더 나의 관심을 끌려고 이런저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런 걸 보면 조나연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진짜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순간적인 충동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만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다른 여자가 내 남자를 넘보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럼 앞으로는 유형 씨와 다시는 엮이지 말아 주세요.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요.”조나연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정말 강유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책임져 줄 남자를 잃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나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려면 20억 원 정도 줄래요? 그럼 나도 산속에 들어가서 편히 살게요. 그럼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될 테니.”내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예전
진정우는 평소 나에게 친절했고, 성실하고 듬직한 성격이라 이소희를 차별하거나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가 약속한 20분 뒤 그의 방으로 갔다. 아마 나를 10분 정도 기다리게 한 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예상대로, 문을 열어 준 그는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고 편안한 옷차림에 호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들어오세요.”방 안에 들어서자 그의 노트북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무슨 문제 생긴 건가요?”“테이블 위에 있는 파일이에요. 열어보세요.”그가 말을 마치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나는 그의 책상에 놓인 노트북 앞에 앉아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바탕화면이 깔끔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서 파일이 가득해서 놀랐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순간 멍해졌다.“파일이 너무 많아서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요.”“‘YLC’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그의 말을 따라 찾으려 했지만, 드라마를 너무 오래 본 탓인지 눈이 피로해서인지 그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없는데요, 정우 씨.”나는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그는 마침 국화차를 우려내고 있었고, 향긋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제가 찾을게요.”그가 다가오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잠시만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았다.그가 통화하는 동안 나는 다시 파일을 찾으려 했지만, 여전히 찾기 어려웠다.“이미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조건 변경은 없습니다. 보상도 필요 없어요... 네, 협상 여지는 없어요.”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너무 빨리 통화를 끝내서 나는 미처 파일을 찾지도 못한 채였다. 그의 모든 파일 이름이 알파벳 약자로 되어 있어서 찾기가 유난히 어려웠다.전화를 끊고 돌아온 그는 우려낸 차를 내 옆에 조용히 놓았다.“여기요.”“감사합니다.”나는 차를 건네받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의 팔이 내 뒤로 넘어와 반쯤 나를 감싸는 듯한 자세로 화면을 가리켰다.“여기 있네요.”그의 낮고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