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머리를 제대로 때렸어야지! 그놈을 아예 끝장내버리게! 네가 마음을 줄 땐 받지도 않더니 지금 와서 이런 미친 짓을 하다니!”안리영은 강유형에 대해 욕을 퍼부으며, 평소의 냉정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 인간은 그냥 자존심이 상한 거야. 내가 떠나지 못할 거라 믿었는데, 진짜로 그만두니까 화가 난 거지.”내가 그렇게 설명하자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그래. 이제 와서야 네가 소중한 줄 안 거야. 네가 다른 남자랑 엮이는 건 절대 용납 못 하는 거지.”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와 진정우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온갖 방해 공작을 벌였던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강진혁을 보내더니 이제는 조나연까지 들이밀다니. 덕분에 놀이공원 마무리 작업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그래도 진정우가 도와준 덕에 마무리는 잘될 거라 믿고 있다.“지원아, 앞으로 강유형이 또 이상한 짓 하면 똑같이 맞서. 또 그런 짓 하면 한 번 더 혼내줘야 알아. 겁을 줘야 못 건드리지.”안리영이 진지하게 말했다.“알았어.”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는지, 전화를 끊기 전 안리영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잠시 후에 병원 들러서 그 자식 상태 좀 볼게. 피 많이 흘렸나 확인하고.”그녀의 농담에 나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감돌았다.차 안에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내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이웃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어머, 오늘은 혼자 들어오네? 남자 친구는?”지난번 아주머니들이 진정우에게 했던 얘기가 떠올라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말이에요. 복도 청소를 시켜야 하는데.”내 말에 아주머니들이 웃었다.“아니야, 아니야. 그 청년 참 괜찮던데? 잘생기고 성실하고, 잘 잡아둬.”“네.”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계단을 올랐다.그런데 복도에 들어서자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바로 옆집 문이 열려 있었고, 누군가가 안에서 짐을 옮기며 쿵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네 사직서는 무효야.”강진혁은 마치 모든 걸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물론 그가 이럴 권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강유형이 내 퇴사를 허락했다 해도, 강진혁은 아버지를 통해 내 사직을 무효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도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퉁명스럽게 말했다.“오빠, 대표님이 이미 동의하셨어요.”지금 강유형이 KS 그룹의 실질적인 대표니까, 강진혁이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몇 초 뒤 강진혁이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어?”이곳으로 이사 온 걸 아는 사람은 이소희와 진정우뿐이지만, 강진혁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꾸준히 관심을 두고 지켜봐 온 사람이니, 내 번호도 기억하고 사는 곳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오빠, 놀이공원은 제가 2년 동안 애정을 쏟아온 프로젝트예요. 이제 남은 일은 오빠가 맡아주세요.”“지원아...”“더는 할 말 없어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전화를 끊었다. 죽에서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재료가 많지 않아 간단히 끓인 죽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노트북을 꺼내 죽을 먹으면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KS 그룹에서 쌓은 몇 년의 경력이라면 충분히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이력서를 모두 제출하고 죽도 다 먹었지만, 옆집은 여전히 짐 정리를 끝내지 않은 듯했다.식사를 하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 방해받지 않도록 휴대폰은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다.얼마나 잤을까? 깨어나 보니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고요함이 낯설게 느껴졌다.휴대폰을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바쁘게 지내던 평소와 달리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게 어색했다.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이소희, 강유형 어머니, 그리고 모르는 번호에서 세 번이나 걸려 와 있었다.진정우에게서 온 전화가
결국 나는 놀이공원에 결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의 꿈이 담긴 이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번에 내 역할은 정식 참여자가 아닌 무료로 조언하는 비공식 자문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놀이공원이 잘 마무리되기만 하면 충분했다.어차피 지금 할 일도 없으니 차라리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았다.저녁 무렵 호텔에 도착했다. 집을 나서기 전, 옆집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했다. 이곳에 한 남자가 이사 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주인 아주머니께 옆집을 내가 대신 임대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집주인 아주머니의 번호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내 제안을 듣자 아주머니는 난감해하며 말했다.“글쎄... 이미 계약금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취소하면 곤란하지 않을까?”“그럼 계약금 두 배로 돌려드릴게요. 비용은 제가 부담할게요. 그리고 그분이 내는 임대료보다 더 드릴 수도 있어요.”마음 편히 살 수 있다면 돈이 좀 더 드는 건 상관없었다.‘돈이 주는 자신감’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돈이 있으면 안정감과 여유를 살 수 있고 돈 앞에서는 어떤 원칙도 흔들릴 수 있으니까.아주머니는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더는 망설이지 않고 상대방과 협의해 보고 다시 연락 주겠다고 했다.전화를 끊고 차를 몰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로비 한쪽에 앉아 있는 조나연이 보였다.조나연이 호텔에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왜인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자리에서 나를 불렀다.“지원 씨.”여기까지 와서 나를 기다렸다는 건 오늘은 정말 할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업무 얘기하러 오신 거면 잘못 찾으셨어요. 저 이제 퇴사했거든요.”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못을 박았다. 내가 회사에 사직서를 낸 데에 그녀도
예전에 강유형을 ‘미친개’라고 부르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결국 강유형에게 찍혀 이 바닥에서 쫓겨났다.강유형은 정말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큰 권력은 없는 편이라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찍힌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성격이라면 예전 같았으면 황제 옆에서 간신 노릇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조나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강유형을 비꼬면서 동시에 그녀까지 조롱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지원 씨, 어떻게 그 사람을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그래도 한때 지원 씨가 사랑했던 남자잖아요. 헤어졌다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요?”그래, 완전히 그를 감싸는 말투였다.“예의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예의는 예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 쓰는 거죠. 나연 씨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남편 친구와 눈 맞았고, 남편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남의 약혼남에게까지 마음을 품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예의를 기대하는 건 좀 웃기지 않나요?”조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제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나연 씨가 직접 제 앞에서 한 말이니까요.”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날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조나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치 숨이 막힌 듯 굳어 있었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땐 목소리가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사람이 날 먼저 유혹한 거예요. 내가 아니라...”“정말 그래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죠.”나는 그녀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조나연은 참 끈질긴 여자였다. 한 번에 끝내지 않으면 두고두고 귀찮게 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이제는 확실히 끝을 내야 할 때였다.조나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 사람이 나를 망쳤어요.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거예요. 이건 다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해요
조나연은 내가 한 말에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 참으로 난처해 보였지만 이 모든 건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나연 씨, 더 볼 일 없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지금 임신 중이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요.”내 말은 조롱이 아니라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녀가 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면,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할 테니까. 특히 이런 위험한 장소는 피하는 게 맞았다. 혹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마음이 묘해졌다.더 할 말도 없었고, 내내 쌓였던 불만도 털어냈으니 이제 돌아설 참이었다.그때 뒤에서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원 씨, 정말 강유형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이제 그 사람과 함께할 마음이 정말 없나요?”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한테 넘길게요.”넘겨준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요즘 강유형이 보이는 유치하고 과격한 행동들을 보면 그는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와 끝난 뒤로 오히려 더 나의 관심을 끌려고 이런저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런 걸 보면 조나연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진짜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순간적인 충동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만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다른 여자가 내 남자를 넘보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럼 앞으로는 유형 씨와 다시는 엮이지 말아 주세요.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요.”조나연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정말 강유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책임져 줄 남자를 잃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나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려면 20억 원 정도 줄래요? 그럼 나도 산속에 들어가서 편히 살게요. 그럼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될 테니.”내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예전
진정우는 평소 나에게 친절했고, 성실하고 듬직한 성격이라 이소희를 차별하거나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가 약속한 20분 뒤 그의 방으로 갔다. 아마 나를 10분 정도 기다리게 한 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예상대로, 문을 열어 준 그는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고 편안한 옷차림에 호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들어오세요.”방 안에 들어서자 그의 노트북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무슨 문제 생긴 건가요?”“테이블 위에 있는 파일이에요. 열어보세요.”그가 말을 마치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나는 그의 책상에 놓인 노트북 앞에 앉아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바탕화면이 깔끔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서 파일이 가득해서 놀랐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순간 멍해졌다.“파일이 너무 많아서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요.”“‘YLC’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그의 말을 따라 찾으려 했지만, 드라마를 너무 오래 본 탓인지 눈이 피로해서인지 그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없는데요, 정우 씨.”나는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그는 마침 국화차를 우려내고 있었고, 향긋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제가 찾을게요.”그가 다가오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잠시만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았다.그가 통화하는 동안 나는 다시 파일을 찾으려 했지만, 여전히 찾기 어려웠다.“이미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조건 변경은 없습니다. 보상도 필요 없어요... 네, 협상 여지는 없어요.”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너무 빨리 통화를 끝내서 나는 미처 파일을 찾지도 못한 채였다. 그의 모든 파일 이름이 알파벳 약자로 되어 있어서 찾기가 유난히 어려웠다.전화를 끊고 돌아온 그는 우려낸 차를 내 옆에 조용히 놓았다.“여기요.”“감사합니다.”나는 차를 건네받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의 팔이 내 뒤로 넘어와 반쯤 나를 감싸는 듯한 자세로 화면을 가리켰다.“여기 있네요.”그의 낮고
내가 너무 솔직했나 싶어 순간 민망해졌다. 진정우도 당황했을 것 같았다.그런데 그는 바로 거리를 두는 대신 반쯤 기대어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 그래요.”‘그래요?’이렇게 태연하게 나올 줄이야.나는 그를 올려다봤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파일을 못 찾으신다길래 도와드린 것뿐이에요. 시력이 안 좋아서...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 찾을 것 같았어요.”그럴듯한 말에 내가 괜히 혼자 오해한 건가 싶어 살짝 머쓱해졌다.진정우는 내 옆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뭔가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슬쩍 쳐다보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일에 집중하려 했다.그가 체크해 둔 파일에는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충분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사실 이렇게 늦은 밤에 부를 정도는 아닌 것 같아, 혹시 일부러 핑계를 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다시 그를 슬쩍 보았지만, 진정우는 태블릿에만 집중한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걸지도 몰라, 그가 표시해 둔 문제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고개를 들었다.그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진정우는 소파에 반쯤 누운 채 태블릿을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그가 늘 든든하게 일하는 사람이라 잠도 별로 안 자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깊이 잠든 걸 보니 안쓰러웠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얼마나 피곤했을까.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잠든 그의 얼굴은 눈매가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피부는 비록 하얗진 않지만 건강한 피부색이어서 더 남자답게 느껴졌다.높고 오뚝한 콧날은 위에서 비치는 조명에 비쳐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빛나 보였다.오늘 이소희가 지쳐 힘들어하던 걸 떠올리니 진정우는 그보다 훨씬 더 고생했을 게 분명했다. 요 며칠 나와 여기저기 현장을 뛰어다니며 온 힘을 다해 애쓴 걸 옆에서 지켜봐 온 터라,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쓰였다.그때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진정우가 반팔
진정우는 내 손을 더 꽉 잡았고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린 뒤 힘을 빼며 내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나는 손을 살짝 문지르며 서둘러 옆으로 물러섰다.“정우 씨가 표시해 둔 부분은 다 수정했어요. 지금 확인해 보시겠어요?”하지만 진정우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괜찮아요. 가서 쉬세요.”“아... 그럼 좋은 밤 되세요.”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순간 깜짝 놀랐다. 방금 뭐라고 했지? 지원아...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부모님뿐이었고 친구인 안리영조차도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진정우가 나를 지원아라고 부른 것이다.놀라서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문 좀 닫아 주시겠어요?”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진정우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숨을 고르며 복도 벽에 잠시 기대었다.시간이 지나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자꾸만 방금 진정우와의 눈 맞춤과 그가 내 손을 잡고 파일을 열어주던 순간이 떠올라서 마음이 복잡해졌다.결국 나는 스스로 머리를 가볍게 치며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고도 잡생각을 지우려고 휴대폰을 켜 보니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먼저 안리영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였다.[그 자식은 아직 무사해. 피를 꽤 많이 흘렸어.]그 말에 웃음이 나서 답장을 보냈다.[다음엔 더 세게 때려야지.]안리영은 답이 없었다. 아마 이미 잠들었거나 관리를 받고 있는 중일 것이다.그녀와의 대화창을 닫고 이번엔 신지태에게서 온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전부 강유형과 관련된 얘기였다.메시지 1: [전 남친 머리통을 가격하다니. 멋있는데?]메시지 2: [몰래 말하는 건데, 잘했어.]메시지 3: [예전에 이 정도 배짱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메시지 4: [유형이는 맞아야 정신 차릴 사람이지. 뭔가 충격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
“우린 잘 몰라요. 찾고 싶으시면 병원에 한번 가보시죠.”여기까지 와서 확인한 건 그저 화재 직후 법운사의 참담한 모습뿐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아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강유형이 무사하다는 소식도 들었다.나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혹시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나는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은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종종걸음에 가까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화재로 인한 응급 상황 때문에 병원은 비상 진료 통로를 열어놓은 상태였고 나는 비교적 빠르게 부상자들이 치료받는 구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유형을 보았다.그의 옷은 여기저기 재로 인해 더럽혀져 있었고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이런 모습의 강유형은 처음이었다. 더는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넘볼 수 없는 거리감도 사라졌다. 고귀함도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평범한 남자로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직접 보기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토록 현실적이고 다정한 그의 모습이라니 꿈꾸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나는 짐지영이 너무 걱정돼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강유형.”그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지원아,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뉴스 봤어. 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받질 않아서 법운사에도 직접 다녀왔어...”나는 말끝을 흐리며 곧장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사모님은? 괜찮으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착했던 내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강유형, 왜 말을 안 해? 사모님 설마...”내가 채 묻기도 전에 용준호가 허둥지둥 달려왔다.“우리 엄마 어딨어? 엄마! 엄마...”늘 껄렁하고 건들거리며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용준호였다.하지만 지금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강유형, 우리 엄마 어딨어?”그 역시 나처럼 물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