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머리를 제대로 때렸어야지! 그놈을 아예 끝장내버리게! 네가 마음을 줄 땐 받지도 않더니 지금 와서 이런 미친 짓을 하다니!”안리영은 강유형에 대해 욕을 퍼부으며, 평소의 냉정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 인간은 그냥 자존심이 상한 거야. 내가 떠나지 못할 거라 믿었는데, 진짜로 그만두니까 화가 난 거지.”내가 그렇게 설명하자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그래. 이제 와서야 네가 소중한 줄 안 거야. 네가 다른 남자랑 엮이는 건 절대 용납 못 하는 거지.”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와 진정우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온갖 방해 공작을 벌였던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강진혁을 보내더니 이제는 조나연까지 들이밀다니. 덕분에 놀이공원 마무리 작업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그래도 진정우가 도와준 덕에 마무리는 잘될 거라 믿고 있다.“지원아, 앞으로 강유형이 또 이상한 짓 하면 똑같이 맞서. 또 그런 짓 하면 한 번 더 혼내줘야 알아. 겁을 줘야 못 건드리지.”안리영이 진지하게 말했다.“알았어.”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는지, 전화를 끊기 전 안리영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잠시 후에 병원 들러서 그 자식 상태 좀 볼게. 피 많이 흘렸나 확인하고.”그녀의 농담에 나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감돌았다.차 안에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내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이웃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어머, 오늘은 혼자 들어오네? 남자 친구는?”지난번 아주머니들이 진정우에게 했던 얘기가 떠올라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말이에요. 복도 청소를 시켜야 하는데.”내 말에 아주머니들이 웃었다.“아니야, 아니야. 그 청년 참 괜찮던데? 잘생기고 성실하고, 잘 잡아둬.”“네.”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계단을 올랐다.그런데 복도에 들어서자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바로 옆집 문이 열려 있었고, 누군가가 안에서 짐을 옮기며 쿵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네 사직서는 무효야.”강진혁은 마치 모든 걸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물론 그가 이럴 권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강유형이 내 퇴사를 허락했다 해도, 강진혁은 아버지를 통해 내 사직을 무효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도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퉁명스럽게 말했다.“오빠, 대표님이 이미 동의하셨어요.”지금 강유형이 KS 그룹의 실질적인 대표니까, 강진혁이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몇 초 뒤 강진혁이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어?”이곳으로 이사 온 걸 아는 사람은 이소희와 진정우뿐이지만, 강진혁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꾸준히 관심을 두고 지켜봐 온 사람이니, 내 번호도 기억하고 사는 곳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오빠, 놀이공원은 제가 2년 동안 애정을 쏟아온 프로젝트예요. 이제 남은 일은 오빠가 맡아주세요.”“지원아...”“더는 할 말 없어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전화를 끊었다. 죽에서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재료가 많지 않아 간단히 끓인 죽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노트북을 꺼내 죽을 먹으면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KS 그룹에서 쌓은 몇 년의 경력이라면 충분히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이력서를 모두 제출하고 죽도 다 먹었지만, 옆집은 여전히 짐 정리를 끝내지 않은 듯했다.식사를 하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 방해받지 않도록 휴대폰은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다.얼마나 잤을까? 깨어나 보니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고요함이 낯설게 느껴졌다.휴대폰을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바쁘게 지내던 평소와 달리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게 어색했다.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이소희, 강유형 어머니, 그리고 모르는 번호에서 세 번이나 걸려 와 있었다.진정우에게서 온 전화가
결국 나는 놀이공원에 결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의 꿈이 담긴 이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번에 내 역할은 정식 참여자가 아닌 무료로 조언하는 비공식 자문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놀이공원이 잘 마무리되기만 하면 충분했다.어차피 지금 할 일도 없으니 차라리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았다.저녁 무렵 호텔에 도착했다. 집을 나서기 전, 옆집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했다. 이곳에 한 남자가 이사 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주인 아주머니께 옆집을 내가 대신 임대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집주인 아주머니의 번호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내 제안을 듣자 아주머니는 난감해하며 말했다.“글쎄... 이미 계약금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취소하면 곤란하지 않을까?”“그럼 계약금 두 배로 돌려드릴게요. 비용은 제가 부담할게요. 그리고 그분이 내는 임대료보다 더 드릴 수도 있어요.”마음 편히 살 수 있다면 돈이 좀 더 드는 건 상관없었다.‘돈이 주는 자신감’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돈이 있으면 안정감과 여유를 살 수 있고 돈 앞에서는 어떤 원칙도 흔들릴 수 있으니까.아주머니는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더는 망설이지 않고 상대방과 협의해 보고 다시 연락 주겠다고 했다.전화를 끊고 차를 몰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로비 한쪽에 앉아 있는 조나연이 보였다.조나연이 호텔에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왜인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자리에서 나를 불렀다.“지원 씨.”여기까지 와서 나를 기다렸다는 건 오늘은 정말 할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업무 얘기하러 오신 거면 잘못 찾으셨어요. 저 이제 퇴사했거든요.”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못을 박았다. 내가 회사에 사직서를 낸 데에 그녀도
예전에 강유형을 ‘미친개’라고 부르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결국 강유형에게 찍혀 이 바닥에서 쫓겨났다.강유형은 정말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큰 권력은 없는 편이라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찍힌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성격이라면 예전 같았으면 황제 옆에서 간신 노릇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조나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강유형을 비꼬면서 동시에 그녀까지 조롱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지원 씨, 어떻게 그 사람을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그래도 한때 지원 씨가 사랑했던 남자잖아요. 헤어졌다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요?”그래, 완전히 그를 감싸는 말투였다.“예의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예의는 예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 쓰는 거죠. 나연 씨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남편 친구와 눈 맞았고, 남편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남의 약혼남에게까지 마음을 품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예의를 기대하는 건 좀 웃기지 않나요?”조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제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나연 씨가 직접 제 앞에서 한 말이니까요.”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날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조나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치 숨이 막힌 듯 굳어 있었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땐 목소리가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사람이 날 먼저 유혹한 거예요. 내가 아니라...”“정말 그래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죠.”나는 그녀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조나연은 참 끈질긴 여자였다. 한 번에 끝내지 않으면 두고두고 귀찮게 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이제는 확실히 끝을 내야 할 때였다.조나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 사람이 나를 망쳤어요.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거예요. 이건 다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해요
조나연은 내가 한 말에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 참으로 난처해 보였지만 이 모든 건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나연 씨, 더 볼 일 없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지금 임신 중이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요.”내 말은 조롱이 아니라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녀가 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면,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할 테니까. 특히 이런 위험한 장소는 피하는 게 맞았다. 혹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마음이 묘해졌다.더 할 말도 없었고, 내내 쌓였던 불만도 털어냈으니 이제 돌아설 참이었다.그때 뒤에서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원 씨, 정말 강유형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이제 그 사람과 함께할 마음이 정말 없나요?”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한테 넘길게요.”넘겨준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요즘 강유형이 보이는 유치하고 과격한 행동들을 보면 그는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와 끝난 뒤로 오히려 더 나의 관심을 끌려고 이런저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런 걸 보면 조나연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진짜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순간적인 충동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만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다른 여자가 내 남자를 넘보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럼 앞으로는 유형 씨와 다시는 엮이지 말아 주세요.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요.”조나연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정말 강유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책임져 줄 남자를 잃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나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려면 20억 원 정도 줄래요? 그럼 나도 산속에 들어가서 편히 살게요. 그럼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될 테니.”내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예전
진정우는 평소 나에게 친절했고, 성실하고 듬직한 성격이라 이소희를 차별하거나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가 약속한 20분 뒤 그의 방으로 갔다. 아마 나를 10분 정도 기다리게 한 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예상대로, 문을 열어 준 그는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고 편안한 옷차림에 호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들어오세요.”방 안에 들어서자 그의 노트북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무슨 문제 생긴 건가요?”“테이블 위에 있는 파일이에요. 열어보세요.”그가 말을 마치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나는 그의 책상에 놓인 노트북 앞에 앉아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바탕화면이 깔끔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서 파일이 가득해서 놀랐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순간 멍해졌다.“파일이 너무 많아서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요.”“‘YLC’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그의 말을 따라 찾으려 했지만, 드라마를 너무 오래 본 탓인지 눈이 피로해서인지 그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없는데요, 정우 씨.”나는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그는 마침 국화차를 우려내고 있었고, 향긋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제가 찾을게요.”그가 다가오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잠시만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았다.그가 통화하는 동안 나는 다시 파일을 찾으려 했지만, 여전히 찾기 어려웠다.“이미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조건 변경은 없습니다. 보상도 필요 없어요... 네, 협상 여지는 없어요.”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너무 빨리 통화를 끝내서 나는 미처 파일을 찾지도 못한 채였다. 그의 모든 파일 이름이 알파벳 약자로 되어 있어서 찾기가 유난히 어려웠다.전화를 끊고 돌아온 그는 우려낸 차를 내 옆에 조용히 놓았다.“여기요.”“감사합니다.”나는 차를 건네받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의 팔이 내 뒤로 넘어와 반쯤 나를 감싸는 듯한 자세로 화면을 가리켰다.“여기 있네요.”그의 낮고
내가 너무 솔직했나 싶어 순간 민망해졌다. 진정우도 당황했을 것 같았다.그런데 그는 바로 거리를 두는 대신 반쯤 기대어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 그래요.”‘그래요?’이렇게 태연하게 나올 줄이야.나는 그를 올려다봤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파일을 못 찾으신다길래 도와드린 것뿐이에요. 시력이 안 좋아서...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 찾을 것 같았어요.”그럴듯한 말에 내가 괜히 혼자 오해한 건가 싶어 살짝 머쓱해졌다.진정우는 내 옆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뭔가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슬쩍 쳐다보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일에 집중하려 했다.그가 체크해 둔 파일에는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충분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사실 이렇게 늦은 밤에 부를 정도는 아닌 것 같아, 혹시 일부러 핑계를 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다시 그를 슬쩍 보았지만, 진정우는 태블릿에만 집중한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걸지도 몰라, 그가 표시해 둔 문제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고개를 들었다.그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진정우는 소파에 반쯤 누운 채 태블릿을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그가 늘 든든하게 일하는 사람이라 잠도 별로 안 자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깊이 잠든 걸 보니 안쓰러웠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얼마나 피곤했을까.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잠든 그의 얼굴은 눈매가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피부는 비록 하얗진 않지만 건강한 피부색이어서 더 남자답게 느껴졌다.높고 오뚝한 콧날은 위에서 비치는 조명에 비쳐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빛나 보였다.오늘 이소희가 지쳐 힘들어하던 걸 떠올리니 진정우는 그보다 훨씬 더 고생했을 게 분명했다. 요 며칠 나와 여기저기 현장을 뛰어다니며 온 힘을 다해 애쓴 걸 옆에서 지켜봐 온 터라,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쓰였다.그때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진정우가 반팔
진정우는 내 손을 더 꽉 잡았고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린 뒤 힘을 빼며 내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나는 손을 살짝 문지르며 서둘러 옆으로 물러섰다.“정우 씨가 표시해 둔 부분은 다 수정했어요. 지금 확인해 보시겠어요?”하지만 진정우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괜찮아요. 가서 쉬세요.”“아... 그럼 좋은 밤 되세요.”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순간 깜짝 놀랐다. 방금 뭐라고 했지? 지원아...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부모님뿐이었고 친구인 안리영조차도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진정우가 나를 지원아라고 부른 것이다.놀라서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문 좀 닫아 주시겠어요?”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진정우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숨을 고르며 복도 벽에 잠시 기대었다.시간이 지나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자꾸만 방금 진정우와의 눈 맞춤과 그가 내 손을 잡고 파일을 열어주던 순간이 떠올라서 마음이 복잡해졌다.결국 나는 스스로 머리를 가볍게 치며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고도 잡생각을 지우려고 휴대폰을 켜 보니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먼저 안리영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였다.[그 자식은 아직 무사해. 피를 꽤 많이 흘렸어.]그 말에 웃음이 나서 답장을 보냈다.[다음엔 더 세게 때려야지.]안리영은 답이 없었다. 아마 이미 잠들었거나 관리를 받고 있는 중일 것이다.그녀와의 대화창을 닫고 이번엔 신지태에게서 온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전부 강유형과 관련된 얘기였다.메시지 1: [전 남친 머리통을 가격하다니. 멋있는데?]메시지 2: [몰래 말하는 건데, 잘했어.]메시지 3: [예전에 이 정도 배짱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메시지 4: [유형이는 맞아야 정신 차릴 사람이지. 뭔가 충격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온몸이 이불에 휩싸인 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군인 출신인 진정우의 자제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그는 단순히 나를 씻겨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깨끗하게 씻겨준 것.이미 그의 능력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정우, 너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야?”이 말은 남자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어지간한 남자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없겠지만 진정우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애쓰지 마. 아무 소용 없으니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살짝 상처받았는데...”나는 일부러 힘없이 실망한 척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그러자 그가 이불을 살짝 당겨 내 얼굴을 드러내며 내 볼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는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럼 내가 너랑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칠 것 같으면 너 평생 나한테 손도 안 댈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응, 참아야겠지.”“...”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이불째 나를 품에 안았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조금만 쉬어. 나 샤워하고 올게.”분명 찬물 샤워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찬물 샤워하러 간다.”“...”정말 원칙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렀다.“진정우.”“응?”“너, 진짜 최고야.”그리고는 창피해서 혀를 쏙 내밀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자 그가
진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내가 모든 원칙을 포기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문장 하나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전을 먹으며 입안 가득 찬 상태로 웅얼거렸다.“진정우, 이리 와봐.”“왜?”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오라면 오라니까.”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멈췄고 내가 말했다.“네 어깨에 기대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진정우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오늘 여기서 잘까, 아니면 네 방에서 잘까?”“여기서 잘래!”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득, 밤마다 푸쉬업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근데 오늘 밤에는 푸쉬업 금지야.”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일부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마.”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안 하면 안 꺼낼게.”진정우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장난치지 마.”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못 참겠어?”나는 한층 대담하게 물었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장난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를 더 자극하지 마.”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였다.“너도 원하고 있잖아.”나는 점점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원아...”그는 나의 손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제 다 나았어.
이 상황, 얼마나 민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진정우는 예외였다.“잠시만요.”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천천히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었다.“천천히 먹어. 죽이 좀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문가에 서 있는 강진혁은 들어오기도, 물러서기도 난감해 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내 말은 진정우에게 얼른 강진혁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정우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모든 음식 포장을 풀고 식기를 내 앞에 정갈히 놓아주었다.문가에 서 있던 강진혁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애정 행위를 강제로 목격한 셈이었다.아마 나를 짝사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강 실장님, 무슨 일이 신가요?”진정우는 문가로 걸어가며 강진혁에게 물었다.강진혁은 병실 밖으로 나갔고 그가 진정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진정우는 약 3분 후에 돌아왔는데 그의 평온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그의 대답은 꽤 건조했다. 아마도 그 자신도 느꼈는지 덧붙였다.“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더군.”“스카우트? 어디로? KS그룹?”강진혁은 아직 총괄 감독에 불과하다. 스카우트 같은 건 인사 부서나 그룹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혹시 이미 강유형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아까 그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었을까?내게 심리적 준비를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걸까?“어디로 간다는 얘기는 없었고 그저 내 생각을 물어봤어.”진정우는 덤덤하게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죽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어.”그의 대답은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너무 솔직하고 귀여워서.”칭찬을 듣자
“오빠, 강유형은 성인이에요.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강유형을 회사에서 내보내든, 관계를 끊든, 그건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는 걸 보니 속이 타더라. 그리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에도 영향이 클 거야.”강진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있잖아요?”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지원아, 난 한 번도 회사를 관리할 생각을 해본 적 없어. 그러지 않을 거였으면 애초에 회사를 떠나지도 않았겠지.”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다만 내 생각을 덧붙였다.“회사의 일은 삼촌께서 알아서 계획하고 계실 거예요. 강유형이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멈추는 건 아니죠.”나는 이성적으로 말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세상은 누구 없어도 돌아가게 돼 있어요.”강진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오빠, 아마 너무 걱정되니까 그런 거겠죠.”나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덧붙였다.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4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4년 전?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4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도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그걸 성장이라고 하죠.”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진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아. 네가 정말 많이 컸다, 우리 꼬마 지원이.”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찡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강가에 들어왔을 때, 강유형과 강진혁은 종종 나를 이렇게 부르며 장난스럽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나를 놀리곤 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빠, 이런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세요. 너무 관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그의 ‘꼬마 지원이'라는 말에 잠시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강진혁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