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두 손 모아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냈지만 안리영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더 보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급한 일이 생겨 불려 간 것 같았다.내 예상은 맞았다. 1385번째 천사의 엄마가 갑자기 대출혈을 해서 안리영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녀가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다. 손과 수술복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었고 이번 응급 처치는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산모는 고비를 넘겼다.“산모 가족 중 한 분, 제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주세요.”안리영은 간호사에게 지시하며 곧장 탈의실로 향했다.산모가 갑작스럽게 대출혈을 일으킨 원인은 다름 아닌 분노 때문이라는 걸 수술하는 과정에 이미 파악했었다.그녀가 화가 난 건 산모가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모진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모의 남편은 좋은 거 먹이고 마시게 하면서 10달을 공들였는데 고작 이런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면서 원망했고 마침 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2천만 원에 팔겠다고 했다.안리영은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었지만 매번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아직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산모의 남편이 먼저 들이닥쳤고 안리영한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난 동의한 적 없어. 저 여자가 수술받은 비용 난 인정 못 해.”그 말에 안리영은 그대로 폭발했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한 번 더 말해봐요.”안리영의 손에 묻은 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풍기는 기세에 눌린 건지 남자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계속 투덜댔다.“어쨌든 난 인정 못 해.”“인정 안 하기만 해 봐요.”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자 그는 움찔했지만 계속 강하게 밀어붙였다.“인정 못 해. 애 낳고 피 좀 흘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병원에서 돈 벌려고 괜히 호들갑 떠는 거지.”그 뻔뻔한 태도에 안리영은 더욱 화가 치밀어서 그대로 남자의 코앞까지 손가락을 들이밀며 쏘아붙였다.“당신 와이프가 당신 자식을 낳았어요. 그런데 고
구안석이 안리영을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한복판,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듯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에게 쏠렸고 심지어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안리영은 마치 아이처럼 구안석의 품에서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바로 뒤에서 나왔던 소희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그들 곁을 지나쳤다.안리영도 그녀를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구 교수님만 있으면 됐으니까.“안 선생님!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어요!”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쳤다.안리영이 바라보니 낯이 익은 여성이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아마도 자신이 분만을 도왔던 산모일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안리영은 거리낌 없이 구안석의 어깨에 기댄 채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남자친구예요!”“안 선생님, 두 분 행복하세요! 그리고 우리 애처럼 귀여운 아기도 얼른 낳길 바라요!”이보다 더 강력한 덕담이 있을까.안리영은 익살스럽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알겠어요!”이 짧은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둘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공항을 나섰다.“화났지?”구안석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지난번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화났어. 근데 이제 용서해 줄래.”다른 사람들 눈에 안리영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당당한 의사였지만 구안석 앞에서는 그냥 사랑에 빠져 있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구안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입 맞췄다.“우리 리영이 진짜 넓은 마음을 가졌네.”“나 그런 거 싫어.”안리영은 단호했다.넓은 마음과 착한 심성의 전제는 결국 자기희생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할 때 이미 충분히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구안석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이고 싶었다.구안
“좋아, 나도 오늘 하루는 구 교수님의 것이야.”안리영은 까치발을 들어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끝낼 리 없었던 그는 그녀의 입술을 붙잡고 진하게 키스했다...그러나 두 사람은 가까운 곳에 멈춰 섰던 한 차량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사라진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구안석의 핸드폰은 무음 상태였다. 그는 온전히 안리영과 함께 영화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석양 아래에서 자전거를 함께 탔다.마치 오늘 하루 구안석이 온전히 그녀만의 사람이 된 듯했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사실 그의 핸드폰은 무음이었지만 안리영의 핸드폰은 진동이 울렸다. 소희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안리영 씨, 구안석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전화하라고 하세요.]문자 속의 날카로운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는데 아마 구안석에게 이미 여러 번 전화를 한 것 같았다.석양이 지는 잔디밭 위,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안리영은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전화해 봐.”구안석은 그녀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녀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수백 개의 낮과 밤을 이겨내고 만나게 된 이 순간을 그녀가 그리워했듯이 그 역시 그녀를 그리워해왔다.“괜찮아, 별일 아니야. 게다가 지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 있겠어? 난 오늘 하루 온전히 너와 함께하기로 했잖아.”그의 대답에 안리영은 감동했다. 그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고 그녀를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니까. “구 교수님 최고야.”그녀는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지는 석양 아래 두 사람의 뜨거운 입맞춤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슬쩍슬쩍 쳐다봤지만 전혀 상관없었고 부끄러울 것 하나 없었다.그 순간 소희연이 전화를 걸어왔고 그 벨소리에 두 사람의 입맞춤이 멈춰버렸다.“받아 봐, 중요한 일일 수도 있잖아.”그녀는 구안석에게 핸드폰을 건넸다.그는 전화를 받아 들고 스피커폰을 켰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희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안리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구안석 교수처럼 올곧은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안리영은 얼굴이 붉어진 그를 보며 깔깔 웃었다.그녀는 구안석을 데리고 유희연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로 갔다. 진단서와 진료 기록을 검토한 후 구안석은 담담하게 말했다.“환자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수술은 권장하지 않아. 단순히 심장 문제뿐만 아니라 뇌경색도 함께 진행되고 있거든.”안리영도 의사 었기에 의사가 쉽게 희망을 끊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구안석이 이렇게 단정 짓는다는 건 더 이상의 진단은 무의미하다는 뜻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지원이랑 이야기해 볼게. 최후의 희망이라도 붙잡을지는 가족들이 결정할 문제야. 그래도 만약 그들이 수술을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구안석은 정말 바빴기에 잠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안리영도 그걸 알고 있었다기에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 “일단 지원이랑 상의해 볼게.”“알겠어, 만약 정말 필요하면 말해. 조수한테 일정 조율하라고 할게.”구안석은 결국 수락했만 안리영은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귀국한 이후 그녀와 함께 있어 주긴 했지만 얼마나 바쁜지 그녀도 느낄 수 있었기에 지도 교수님과의 마찰까지 감수하며 그녀를 위해 시간을 내는 그의 희생이 달갑지만은 않았다.그녀도 의사라 바쁘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구안석이 왜 이렇게까지 바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구안석, 정말 그렇게 바빠?” 그녀가 무심코 물었다.구안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그의 죄책감 어린 표정을 보며 안리영은 미소 지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 이해해. 가자, 어차피 오늘은 네가 내 거잖아.”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쌌다. 키 차이 때문에 구안석은 자연스레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웃으며 유희연 부모님의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병동을 벗어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소희연이 눈에 들
구안석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거나 다름없었다.이번엔 구안석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재능이 있지만 세상은 복잡하고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안리영은 그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걸 원치 않았다. 소희연의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게다가 단순히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구안석의 앞길이 막힌다면 두 사람의 관계에도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소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가 봐.”안리영이 한발 물러섰다.소희연의 말에 휘둘려서가 아니라 오로지 구안석을 위해서였다.구안석은 입술을 달싹이며 손을 들어 안리영의 뺨을 어루만졌다.“일 끝나면 바로 올게, 오래 안 걸릴 거야.”“응!” 안리영이 가볍게 끄덕였다.구안석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속삭였다.“기다려.”안리영은 이마를 그의 가슴에 살짝 비볐다.“얼른 다녀와. 빨리 와야 해.”구안석이 떠나고 소희연도 가기 전 안리영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그와 나란히 걸어갔다.어두운 밤하늘 아래 안리영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 스스로 허락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를 싸늘한 기운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이제 돌아갈 마음도 없어져서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휴게실로 향했다.“안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당직을 서던 간호사가 그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안리영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어제 입원한 산모 상태 좀 보려고요. 상태가 어때요? 가족은 곁에 있나요?”그 말을 듣자 간호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말도 마세요. 남편 쪽에서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았어요. 오늘은 친정엄마가 오셨는데 계속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간호사는 그러면서 고개를 저었다.“요즘 이런 무책임한 일들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결혼이랑 출산 자체가 싫어질 지경이에요.”안리영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주임이라 단순히 업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신경 써야 했다.“이런 일
구안석은 안리영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똑같은 자동 응답뿐이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뭔가 이상했다. 안리영이 수술 중이라면 전화를 못 받을 수는 있어도 신호조차 가지 않는 일은 없었다.‘혹시 핸드폰 배터리가 나간 걸까?’하지만 의사라는 직업 특성상 언제든 수술 호출이 올 수 있기 때문에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그때, 소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교수님.”구안석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녀를 바라봤는데 눈빛이 차가웠고 말조차 없었다.그런 반응을 알면서도 소희연은 모른 척했다.“교수님, 민 어르신 가족분들이 아직 궁금한 게 있다고 하세요.”구안석은 냉정하게 응수했다.“방금 전에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나? 더 뭘 묻겠다는 거지?”소희연은 살짝 미소를 지었고 어딘가 체념이 섞여 있었지만 그래도 목소리만큼은 마치 구안석을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저도 알아요. 하지만 가족들이 원래 그렇잖아요. 환자 상태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알고 싶어 하고, 혹시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계속 묻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하지만 이런 태도는 구안석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기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네가 설명해. 난 가봐야겠어.”아까부터 이유 모를 불안감이 그를 짓눌렀다. 오늘 안리영과 헤어진 순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길한 예감이 지금은 더욱 강하게 그를 휘감고 있었다.안리영이 그를 여기 보내는 걸 허락했음에도 그는 어째서인지 계속 불안했다.“교수님.”소희연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이왕 온 김에 몇 분만 더.”그러나 이번에는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놔.”소희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냉정하게 구는 게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녀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가 구안석이기에 그녀는 매번 참고 또 참아왔다.그러나 거침없이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그가 끝내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늦은 밤까지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구안석은 결국 내게 전화를 걸었다.“지원 씨, 리영이랑 같이 있어요?”“아니요.”나는 아직도 반쯤 잠에 취해 있었지만 그래도 물어보는 건 잊지 않았다. “왜요? 리영이 안 보여요?”“방금까지 일하느라 바빴어요.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아마 집에 갔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한 후 구안석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안리영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그는 안리영의 아버지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적이 있었다.“안석이?” 전화가 연결되었고 안성수의 목소리에는 아직 잠귀가 묻어 있었다.“아저씨, 저 구안석입니다. 혹시 리영이 집에 갔나요?”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리영이가 꽤 오래 집에 안 왔는데. 왜? 너희 싸웠어?” 안성수의 반응은 지극히 평범했다.“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아저씨, 저도 오늘 막 돌아왔거든요.” 구안석은 급히 해명했다.하지만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안성수는 구안석이 이렇게까지 전화를 걸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다.거듭된 추궁 끝에 구안석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고 안성수는 바로 그를 꾸짖었다.“이렇게 중요한 일인데 말을 빙빙 돌리면 어떡해! 우리 딸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구안석은 할 말이 없어 그저 더듬거리며 말했다.“저랑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어요. 병원에 있었고요.”“난 내 딸이 지금 어디 있는지만 알고 싶다.” 안성수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리영이 무슨 일이야?” 옆에서 조민영도 깨어나 걱정스럽게 물었다.하지만 안성수는 답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딸의 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제야 와이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리영이가 병원에도 없고 집에도 없어. 그리고 연락이 안 돼.”“지원이한테는? 둘이 친하잖아. 혹시 거기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민영의 말에 안성수는 곧바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나는 너무나도 피
“안리영 같은 소리 하네.”용준호는 여전히 입이 험했다. 늘 가벼운 놈이었지만 적어도 안리영에 대해선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럼 도대체 누구지?’‘강진혁인가?’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서 의심할 사람은 둘 중 하나뿐이다. “용준호 씨, 다시 한번 말하는데 제 사람 건드리지 마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 겁니다.”나는 진정우를 지킬 때처럼 단호하게 경고했다. 용준호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윤지원, 내가 널 너무 봐줬나 보네?”나도 가볍게 비웃으며 받아쳤다. “당신이 됐든 당신 부하가 됐든 당장 연락해서 안리영을 무사히 돌려보내요.”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어 전화를 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내 말이 용준호에게 먹힐 거란 확신은 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 나 대신 안리영을 찾아줄 사람이 없다. 예전엔 진정우가 있었고 신지태를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한 사람은 멀리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이미 발을 뺐다. 방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서서 김지영의 방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 일이 용준호의 짓이라면 그녀에게 가서 해결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용준호가 분명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김지영을 건드릴 수 없다. 그녀는 내가 가진 마지막 카드니까. 김지영을 이용해서 안리영을 구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용준호가 아니라고 했으니 아직 그녀를 움직이게 할 때가 아니었다. 가슴이 조여왔고 불안과 초조함이 정신을 마비시켰다. 심지어 진정우를 잃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무너지진 않았다. 안리영은 나에게 그 이상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고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 노크 소리에 강유형이 마치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곧바로 반응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그는 어깨에 걸친 옷을 여미며 자다 깬 척했다. “미안해, 늦은 시간에.”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
“싸움이 났어요, 밖에서 누가 싸우고 있어요!”복도에서 급히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리고 그 순간 용준호의 주먹이 강유형을 향해 뻗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만둬! 준호 오빠, 당장 멈춰!”나는 소리치며 달려가 그를 말렸다.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힘껏 내던졌다.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얘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것처럼 어질어질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그동안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던 강유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지원아...”그는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장 용준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완전히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누군가에게 부탁해 경호원을 불러달라고 했다.몸싸움을 겨우 뜯어말렸을 땐 이미 멍과 상처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유형은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젖혀 코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다.이들이 왜 갑자기 싸운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강유형의 코피가 너무 심하게 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강유형, 병원으로 들어가자.”그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너는 괜찮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끌었다.“나랑 같이 들어가자”“괜찮아. 금방 멈출 거야.”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용준호가 고함을 질렀다.“강유형, 이 개자식아! 우리 엄마 어딨어? 당장 우리 엄마 데려와!”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분명 그의 어머니는 화재로 숨졌다고 했는데 왜 강유형한테서 어머니를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준호 오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네가 직접 물어보든지.”“신경 쓰지 마. 미쳐서 그래.”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
“우린 잘 몰라요. 찾고 싶으시면 병원에 한번 가보시죠.”여기까지 와서 확인한 건 그저 화재 직후 법운사의 참담한 모습뿐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아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강유형이 무사하다는 소식도 들었다.나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혹시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나는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은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종종걸음에 가까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화재로 인한 응급 상황 때문에 병원은 비상 진료 통로를 열어놓은 상태였고 나는 비교적 빠르게 부상자들이 치료받는 구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유형을 보았다.그의 옷은 여기저기 재로 인해 더럽혀져 있었고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이런 모습의 강유형은 처음이었다. 더는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넘볼 수 없는 거리감도 사라졌다. 고귀함도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평범한 남자로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직접 보기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토록 현실적이고 다정한 그의 모습이라니 꿈꾸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나는 짐지영이 너무 걱정돼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강유형.”그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지원아,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뉴스 봤어. 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받질 않아서 법운사에도 직접 다녀왔어...”나는 말끝을 흐리며 곧장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사모님은? 괜찮으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착했던 내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강유형, 왜 말을 안 해? 사모님 설마...”내가 채 묻기도 전에 용준호가 허둥지둥 달려왔다.“우리 엄마 어딨어? 엄마! 엄마...”늘 껄렁하고 건들거리며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용준호였다.하지만 지금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강유형, 우리 엄마 어딨어?”그 역시 나처럼 물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