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옷과 장신구, 먹는 음식과 차, 모두 침서가 정해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전부 내가 좋아하길 바라는 것들이었습니다.”“하지만 사실 난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그런데 그저 그에게 어울려 주기 위해 자신을 속이며 연기를 한 것뿐었지.”“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언젠가부터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빛이 사라졌어. 내 연기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 거겠지.”“나도 참을성을 잃었다. 난 그 방에 몇 년간 갇혀 있었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없어서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난 항상 집이 그리웠다.”“그러다가 그와 크게 싸웠지.”“그 뒤로 우리 매번 만날 때마다 항상 싸웠다. 정말 미칠 것 같았어.”“그때부터 내 감정은 통제를 벗어났어.”“그 뒤로 침서는 날 밀실에 가뒀어. 공간이 더 협소해지면서 난 더욱더 미칠 것 같았어.”“난 밀실에 반년 동안 갇혀 있었어. 겨울이 되자 침서는 날 놓아주겠다고 했어.”“난 그가 정말 날 놓아주는 줄 알고 고마워했었다.”“그런데 그는 내 영혼을 더 좁은 곳에 가둬놓았어.”거기까지 말한 임장음은 목을 놓아 울었다.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결국 터져 나온 것이다.낙요는 그녀의 얘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임장음은 감정을 다스린 뒤 계속해 말했다.“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외롭게 떠도는 넋이 된다고 해도 자유로운 귀신이 되고 싶었어.”“살아있을 때도 갇혀 있었는데 죽어서도 갇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다가 어느 날, 내게 기회가 생겼어. 난 등이 깨진 틈을 타서 도망쳤고 마침 그날 어떤 여자가 내 목소리에 이끌려 문을 열었어.”“그리고 난 도망쳤지.”“하지만 그 등을 벗어난 뒤 난 점점 더 의식이 흐려졌다. 그저 내 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그 뒤에 난 너에게 잡혔지.”낙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드디어 그 과정을 조금 이해했다.낙요는 의아한 듯 물었다.“밀실? 밀실이 어디 있단 말이냐?”임장음이 대답했다.“침서의 방에 있을 것이다.”“도망칠 때
낙요는 생각한 뒤 말했다.“그러면 내가 널 데리고 여기저기 다닐까?”낙요는 일어나서 등을 들고 나가려 했는데 임장음이 말했다.“난 혼자 가고 싶다. 날 놓아줄 수 있겠느냐? 난 우리 부모님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낙요는 눈살을 찌푸리며 난색을 보였다.“네가 지금 나와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네가 이 등에 있으며 내 피로 영양을 자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다.”“이 등을 떠난다면 소모가 아주 빨라 이내 허약해질 것이다.”“그러다가 곧 사라지겠지.”임장음에게 겁을 주려는 게 아니었다.임장음은 이미 명이 다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이 등을 떠난다면 기억을 조금씩 잃게 된다.그러면서 혼백 또한 조금씩 흩어지다가 사라지게 된다.심지어 다시 태어날 기회도 사라지게 된다.그러나 임장음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난 괜찮다.”“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니니까. 나는, 임장음은 이번 생에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다.”“난 한 번이라도 자유를 가지고 싶다.”낙요는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그녀는 곧 등을 열었다.“가거라.”“고맙다.”말을 마친 뒤 임장음은 곧바로 등을 떠나 밀실 입구에서 사라졌다.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배웅했다.그런데 마침 마당 밖에서 부진환을 만났다.부진환이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부진환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침서와 혼인하는 겁니까?”그는 계진에게 몇 번이나 확인해 봤으나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낙요는 부인하지 않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내 결정이오. 계진과는 상관없는 일이오.”“계진 때문이 아니오.”부진환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무엇 때문입니까? 침서가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 왜 그와 혼인하려는 겁니까?”낙요는 당연히 모든 걸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그녀의 일이었다.“왜 안 된단 말이오? 내가 혼인하는 거지, 당신이 혼인하는 것도 아닌데!”낙요는 말을 마친 뒤 떠
낙요는 깜짝 놀랐다.“대제사장님, 이 두 분이 대제사장님의 친우라고 하셨습니다.”월규의 설명에 낙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노예곡의 일이 있은 지 한참 되어서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봉시는 시완의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노예곡에서 시간이 좀 지체되었고 또 이곳저곳 다니며 노느라 이제야 대제사장을 만나러 왔소.”시완은 달게 웃으면서 털털하게 말했다.“대제사장님은 우리의 은인이니 꼭 만나 뵈러 와야지요.”“거기 서 있지 말고 전청으로 가서 차나 한 잔 하지. 앉아서 천천히 얘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소.”낙요는 그들을 전청으로 안내했다.부진환은 어두워진 얼굴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낙요가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리고 무턱대고 내뱉은 말로 인해 둘의 관계가 어색해지지는 않을지 걱정됐다.부진환은 조금 후회됐다.이때 여단청 등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간이 아주 크던데!”“우리 대제사장님의 용모에 환장하는 사내들이 이 도성에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소? 하지만 다들 대제사장님의 신분 때문에 대제사장님께 다가가는 사내가 없었지.”부진환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간이 커서 뭔 소용이 있다고.”“간이 크면 당연히 쓸모가 있지. 첫걸음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 말이오. 당신이 끈질기게 질척대면 꼭 대제사장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여단청은 무척 흥분해서 말했다.그는 부진환의 어깨를 잡고 마당을 나섰다.그가 말을 계속 이어갔다.“비록 침서가 있기 하지만 당신은 대제사장 저택에서 살고 있지. 원래 거리가 가까운 자가 승산이 더 많은 법이오!”“대제사장님이 당신을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셈이오!”부진환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왜요?”“대제사장님이 당신을 내쫓지 않았다는 건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오.”“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넘보는 사내를 왜 자신의 저택에서 살게 하겠소?”그 말을 들은 부진환은 오히려 걱정하기 시작했
그때까지만 해도 낙요는 그것이 평범한 지도인 줄 알았다.그런데 봉시가 말했다.“지도는 7일 내로 대제사장의 손에 들어갈 것이오.”“때마침 우리도 이 도성에 며칠 머무를 생각이오.”낙요가 대답했다.“좋소. 그러면 이곳에 잠깐 머무르시오.”봉시는 거절한 뒤 부드러운 눈빛으로 시완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아니, 우리는 객잔으로 갈 것이오. 이곳저곳 머무르며 도성의 번화함을 즐길 생각이오.”“그러니 대제사장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소.”“그리고 우리는 눈에 띄고 싶지 않소. 괜히 다른 이들에게 노려질 수 있으니 말이오.”낙요는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그렇게 봉시와 시완은 밥도 먹지 않고 바로 떠났다.-날이 저물었다.장군 저택.식사를 보내줄 때가 왔다.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낙정은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난희가 아니라 침서였다.게다가 침서의 뒤에는 호위 두 명이 있었다.낙정은 심장이 철렁했다.“장군.”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침서는 절대 괜히 그녀를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다.침서는 뒷짐을 지고 아무 말 없이 눈빛을 보냈다.두 명의 호위가 곧바로 낙정의 두 팔을 잡고 그녀를 잡아당겼다.뜻밖에도 방 안에 기관이 있었다.기관을 누르자 밀실이 열렸고 그렇게 낙정은 그곳으로 끌려갔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반항하며 소리 질렀다.“침서! 침서! 뭐 하는 것입니까! 약조를 어기려는 것입니까?”침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라서 밀실로 들어갔다.그 방안의 밀실은 아래로 향했다. 아래에 도착해 보니 감옥이었다.낙정은 순간 당황했다.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침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낙정은 더욱 절망했다.침서가 날 죽이려는 건 아닐까.낙정은 형벌을 받는 방으로 끌려간 뒤 밧줄에 묶였고 이내 가시가 박힌 채찍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극심한 통증에 낙정은 죽어라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침서! 대체 뭘 어쩌려는 것입니까?”“제가 죽는다면 당신은 절대
곧이어 낙정의 비명이 이어졌다.낙정은 그제야 침서가 문밖으로 향한 이유가, 그에게 피가 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침서의 차가운 눈빛이 잔인하게 번뜩였다.낙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다시 한번 물으마.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면 못이 조금 더 깊게 박혀 들어가겠지.”낙정이 그런 형벌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침서의 악랄함을 얕보지 말았어야 했다.“말하겠습니다.”“당신이 궁금해하는 건 전부 대답하겠습니다.”침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그들이 썼던 야수의 혼백을 가진 자객들은 어디서 온 것이냐?”“넌 누굴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이냐?”낙요는 그 사실을 조사해 내야 그와 혼인할 것이라고 했다.그래서 침서는 최대한 빨리 그 일을 조사하려 했다. 그리고 손을 쓰기 가장 좋은 상대가 바로 낙정이었다.“엄란(嚴瀾)입니다!”“그 자객들은 엄란이 키운 자객들입니다. 제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가 거의 다했고 전 한 일이 얼마 없습니다.”침서는 눈을 가늘게 떴다.“엄란?”낙정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네, 도주영 엄란 말입니다.”침서의 눈빛에 살기가 일었다. 도주영.예전에는 운주영이 그 몰래 일을 꾸몄는데 이번에는 도중영이라니.“그외에 또 뭘 알고 있는 것이냐?”낙정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그것 외엔 아무것도 모릅니다.”“전 엄란의 돈을 받고 인간의 몸에 야수의 혼백을 집어넣는 방법을 시험해 봤을 뿐입니다. 성공한 뒤로 그의 일에 끼어든 적은 없습니다.”“저와 그는 거래를 한 것뿐입니다.”“그를 도운 적이 있으니 그에게 자객을 몇 명 달라고 했을 뿐이고 그들은 이미 전부 죽었습니다.”침서는 낙정이 더는 고문을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알았다.그리고 감히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거짓말한 게 아니길 바란다. 내가 직접 도주영에 가볼 생각이니 말이다.”“문제가 있다면 돌아와 널 찾을 것이다.”말을 마친 뒤 침서는 돌아
성주와 도주영의 통령은 직위가 다르다. 그런데 그들이 같은 편을 먹은 것일까?낙요가 고민하고 있을 때 침서가 입을 열었다.“나요야, 우리 내일 도주로 떠나자꾸나.”“이 일을 빨리 해결해야 하루빨리 혼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비록 혼사가 정해지긴 했지만 혼인하기 전까지 침서는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그 일을 빨리 처리해야 낙요가 안심하고 그와 혼인할 것이다.낙요는 살짝 놀랐다.침서가 이렇게 빨리 도주영을 조사해 낸 것은 빨리 그 일을 처리하고 혼인하기 위해서였다.낙요는 생각한 뒤 물었다.“도주영에 가서 어떻게 조사할 생각입니까?”침서가 대답했다.“당연히 대놓고 조사하고 죽일 놈들은 전부 죽여야지.”낙요는 미간을 구겼다.“안 됩니다. 대놓고 도주영을 조사하면 그들은 절대 당신이 멋대로 조사하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게다가 전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나 단서가 틀렸으면 어떡합니까?”침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말했다.“그러면 다 네 말대로 하마. 네가 조사하고 싶은 대로 조사하거라.”낙요는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좋습니다. 하지만 며칠 기다려야 합니다.”“전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빈손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비록 침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도주로 가고 싶었으나 겨우 성질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에 따르마.”“전 잠시 외출해야 하니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침서는 아쉬운 얼굴로 허탈하게 대답했다.“그래.”“그러면 난 먼저 돌아가마.”곧이어 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침서가 떠난 뒤 낙요는 계진을 만나러 갔다.“네 상처가 어떤지 보러 왔다.”계진은 다급히 일어났다.“대제사장님, 전 거의 다 나았습니다.”하지만 낙요는 그의 안색이 창백한 걸 보았다. 팔뚝 위 물린 상처도 심각했다.“누워서 푹 쉬거라.”사실 낙요는 그를 데리고 도주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상처를 보니 보름 안에 낫기는 그른 것 같아 포기하려 했다.낙요는 돌아가서 처방을 적어 월규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봉시는 비밀스럽게 웃어 보였다.“예전 일은 얘기할 생각이 없소.”“다만 이 지도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오.”“그저 모든 것이 순조롭길 바라오!”봉시가 말하지 않으려 하자 낙요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고맙소!”“우리는 오늘 도성을 떠날 것이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나지.”“좋소.”봉시는 곧 시완을 데리고 대제사장 저택을 나섰다. 그들은 도성을 떠났다.낙요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햇빛이 그들의 위로 드리워져 머리 위로 금빛이 은은히 보였다.운이 좋을 거라는 징조였다.그들의 여정은 평탄하고 순조로울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다정한 한 쌍이 될 것이다.봉시가 떠난 뒤 여단청이 헐레벌떡 부진환의 방으로 뛰어갔다.“들었소! 내가 들었소!”“대제사장님의 친우라는 두 사람이 대제사장님께 뭔가를 주러 왔는데, 그것이 도주의 지도라고 들었소.”“대제사장님은 분명 도주로 향할 것이오!”부진환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오?”여단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당신이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엿들은 건데 말이오.”“그리고 겨우 두 마디 들은 것뿐이고 대제사장님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뭘 두려워하는 것이오?”“도주요. 대제사장님은 도주로 가려는 것이오!”여단청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그는 부진환의 팔을 툭툭 쳤다.“내가 또 다른 소식을 알려주겠소.”“내가 듣기로 장군 저택 쪽에 이틀간 열 명이 넘는 대오가 도성을 떠났다고 들었소.”“그들도 아마 도주로 향했을 것이오.”“저번에 침서가 온 적이 있는데 아마 대제사장님께 뭐라고 했을 것이오. 그래서 대제사장님이 멀리 떠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오.”“이번에 침서는 분명 대제사장님과 동행할 것이오! 대제사장님을 빼앗고 싶다면 반드시 따라가야 하오.”“그들이 떠났다가 돌아오면 당신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오.”부진환은 그 얘기를 듣고 미간을 심하게 구겼다.그는
주락은 흥분해서 화를 내며 탁자를 내리쳤다.“침서가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구십칠이 그의 손에 죽었는데 어떻게 그와 혼인할 수 있단 말이오?”“만약 대제사장이 침서와 혼인한다면 잘 살 수 있겠소?”“침서는 대제사장의 권력을 탐내는 것뿐이오!”“왜 그녀를 설득하지 않는 것이오?”부진환은 눈살을 찌푸렸다.“설득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오.”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주락은 표정이 심각해져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힐끗 보았다. 아마 부진환은 그 누구보다도 초조할 것이다.“중요한 건 대제사장이 아직 낙청연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오.”“그래서 당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그녀가 벙어리와 함께 겪었었던 일을 떠올린다면 그녀는 당신을 더 믿을 것이오.”그 말을 들은 부진환은 살짝 놀라더니 미간을 구기고 사색에 잠겼다.“기억이 조금 회복했었는데...”주락은 눈을 빛냈다.“회복했다고? 어떻게 된 일이오?”“그런데 또 잊은 듯했소.”부진환은 그날 밤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그때 대제사장은 천궐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듯했소. 그녀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인 듯했소.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다음 날 깨어났을 때는 전부 잊었소.”“그리고 그 뒤로 그녀는 줄곧 찬물로 몸을 씻었소. 뜨거운 물을 몸에 댄 적이 없소.”부진환은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혹시... 뜨거운 물이 그녀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걸지도 모르겠소.”주락은 경악했다.“정말이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대제사장이 찬물을 쓰지 않게 할 수 있소?”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대제사장이 스스로 찬물을 쓰기로 선택했다는 건 아마 뭔가를 눈치채서일 것이오. 그녀는 그 과거를 잊기로 결정한 것이오...”그 점을 깨달은 부진환은 심장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숨 쉬기도 힘들만큼 괴로웠다.그는 눈빛이 암담해지더니 쓴웃음을 지었다.“그 과거들은 그녀에게 악몽이겠지.”“잊는 것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상대가 안 되오.”낙요는 고개를 돌려 바둑판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당신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바둑을 두며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요.”부진환은 바둑알을 하나하나 거두었다.낙요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햇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러고 보니, 나의 답답함을 풀 사람은 당신뿐이오.”“심시몽은 어의원의 심사를 통과하고 정식으로 어의원에 들어가게 되었소. 그리고 강소풍의 집안에서도 그들의 혼사를 승낙하여 두 사람은 곧 혼사를 올릴 것이오.”“갑자기 심면과 낙현책도 혼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소.”부진환이 웃으며 말했다.“일찍이 혼인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이들도 조급해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오?”낙요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여유롭게 말했다.“걱정하지 않소. 대소사를 모두 당신이 걱정하고 있지 않소? 초경의 수위가 있으니, 몇 년이 지나도록 용모가 변하지 않았소. ”“나 같으면 그렇게 걱정을 많이 했으니, 일찌감치 늙었을 것이오.”몇 년 동안 부진환은 그녀를 도와 적지 않은 조정의 일을 분담했다.그녀도 부진환의 동반에 습관이 되었다.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진환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턱을 괴고 물었다.“이 나이가 되니,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을 후회하오?”“걸을 수 없을 정도로 늙었을 때, 다른 사람의 자식들이 단란히 모여있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오? ”부진환은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후회하지 않소.”“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오.”“게다가 당신은 여제요. 당신이 늙었다고 해도 누가 감히 푸대접하겠소?”“당신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면 난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오. 초경의 수위로 늦게 늙는다고 하지 않았소? 앞으로 당신이 늙으면 내가 당신을 부축하고 업고 다닐 것이오.”낙요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참 좋소.”이듬해 가을.심시몽은 강소풍과 혼사를 올렸고 어의원 5품
강소풍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오. 어머니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셨소.”설명할수록 강소풍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심시몽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그를 위로했다.“자네의 뜻을 알고 있소. 설명할 필요 없소.”“시몽... 미안하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방법을 강구하여 어머니에게 자네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오. 분명 어머니도 자네를 받아들일 것이오. ”그 말에 심시몽은 살짝 놀라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나와 헤어지려는 것이 아니었소?”심시몽은 강소풍이 특별히 그녀를 찾아와 이 일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그녀와 연을 끊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니요. 그럴 리가 있소.”“나는 단지 이전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뿐이오. 이번 달 안에 혼담을 꺼낼 수 없을 텐데, 나를 기다려줄 수 있소?”“말재주가 좋지 않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 어머니께서는 자네가 연약하고 힘없다고 생각하시오. 앞으로 내가 출정하면 자네가 홀로 집안을 지킬 텐데, 우리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하시오.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대충 뜻을 알아차렸다.“어머니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며느리를 원하고, 자네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서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기를 원하시오.”“나는 비록 무공을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소.”고개를 들어 올린 심시몽의 눈빛은 밝았다..강소풍은 놀라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정말이오? 여전히 나와 함께 있고 싶소?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심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소? 자네가 포기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강가는 장군 집안이라 분명 우리 언니와 같은 여인을 좋아할 것이오. 난 비록 언니와 비길 수 없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오.”“여제께서 나에게 약옥을 주었소. 만약 순 의원과 의술을 배울 수 있다면 어의원에 들어갈 기회가 있소.”“성공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약간 의아해했다.“공주는 저를 탓하지 않습니까...”“그분은 공주시다. 천하를 품고 있는데, 어찌 네가 범한 작은 잘못을 추궁할 리 있냐?”“지금 너의 변화를 보면 공주도 더 이상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려야 할 예의는 없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나면 공주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거라.”심시몽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예. 내일 가겠습니다.”“저는 먼저 약옥을 넣고 의관에 가겠습니다.”심시몽은 기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고, 의기양양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도 방금의 의기소침함이 없었다.심면도 기뻤다.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 같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소풍이 집에서 어머니와 싸우고 있었다.“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너를 현학서원에 보내 양성하는 것도 앞으로 네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너도 마땅히 너와 어울릴 만한 부인을 얻어야 한다. 너와 전장을 누비며 적을 죽이는 그런 사람 말이다.”“힘없이 연약하게 집안에서 서방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평범한 아가씨는 안 된다.”“이전에 그 심시몽을 위해 집안의 빙천영지를 훔쳤고, 심지어 벌을 받고도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난 그때부터 심시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 아이와 혼사를 올리려는 것이냐?”“말도 안 된다!”강부인은 단호한 태도로 조금도 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강소풍은 내키지 않는 듯 반박했다.“심시몽이 평범하다니요? 어떻게 평범하다는 말입니까? 심시몽은 그저 무공이 부족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예를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하물며 그녀의 언니는 이미 태자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니 심시몽도 좋은 아가씨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강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언니는 언니이고, 심시몽은 심시몽이다. 어찌 동일하게 논할 수 있겠냐?”“강가는 권세에 빌붙지 않고, 심시몽의 언니가 태자라는 것을 봐서 그녀를 맞이하려
“나중에 자네가 신의가 될지도 모르오.”심시몽이 웃으며 말했다.“자네의 좋은 말대로 되길 바라오.”모두 술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심면이 임계천에게 물었다.“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소?”“나라에 보답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소.”임계천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기에 그저 궁의 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다들 기분이 좋았고 투지가 넘치고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술을 너무 늦은 시각까지 마셔서 그들은 심가에서 묵었다.오전이 되자, 각 집안의 하인들이 부랴부랴 사람을 찾아왔다. 몇 사람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집으로 끌려갔다.궁에서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강소풍은 금군 기사영 통령으로 봉해져 도성과 황궁의 안위를 지키게 되었다.임계천은 형부로 전근되었다.소우청과 봉함선은 수주의 군영 부장군으로 명을 받았다.소우청의 행처는 그의 아버지 소진오가 좋은 경험을 하기를 바라며 부탁한 것이다.낙요는 봉함선이 여인이기에 그녀를 그렇게 멀고 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동적으로 수주에 갈 것을 청구했다.봉함선이 말했다.“여국은 역대로 여 장군이 없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여장군이 되고 싶습니다.”“만약 힘들고 험한 곳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포부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낙요는 그녀의 담력과 야심을 높이 사고 그녀의 청을 승낙했다.“나는 네가 여국의 첫 번째 여장군이 되기를 기대한다.”이들 외에 현학서원의 다른 학생들도 그들로 하여금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행선지를 얻었다.유독 심시몽에 대해, 낙요는 따로 안배를 해주지 않았다.백서가 걱정했다.“어찌 유독 심시몽만 얘기가 없으십니까? 심시몽이 알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낙요가 웃었다.“아니다. 이미 심면을 시켜 심시몽에게 한가지 물건을 보냈다.”백서는 살짝 놀랐다.“일찍이 계획이 있으셨군요.”이때의 심시몽은 홀로 넋을 잃고 연못가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흩날리는 낙엽처럼 어수
유생이 드디어 알아차렸다.“그랬구나. 내가 어찌 이걸 잊은 것이냐.”“난 정말 운이 좋은 것 같구나. 이렇게 운 좋게 제사장 자리를 주울 수 있으니.”심면이 답했다.“아닙니다. 전에 제가 청주 전쟁에서 조난했을 때, 제자들을 통솔해 적과 싸우지 않았습니까? 현책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났습니다.”“사저가 소제사장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유생은 쑥스러워하며 낙현책을 힐긋 쳐다보았다.“네가 이렇게 말하면 낙현책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낙현책이 웃으며 답했다.“그녀가 말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너는 나보다 대제사장이 더 잘 어울린다.”“나는 무학에서 너보다 좀 나을 뿐이다. 정말 대제사장이 되려면 너보다 잘할지 모를 일이다.”“다만 제사장 일족의 심사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하물며 나도 대제사장이 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단지 여제가 기뻐하기를 바랄 뿐이다.”이 말을 듣고 유생은 마음이 놓였다.“불쾌하지 않았다면 다행이구나. 권력과 지위 앞에서 네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나!”“한 잔 권하마!”유생이 술잔을 들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대문이 열렸고,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목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왜 벌써 마시는 것이오?”“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니, 의리가 없소!”몇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강소풍과 임계천이 술병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오늘 밤 다들 왔구나!”“자, 심면과 유생을 위해 한 잔 하세!”모두 자리에 앉아서 잔을 들어 함께 마셨다.그렇게 한참 마시다 보니 술에 취한 강소풍이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가에 겹경사가 닥칠 것이오.”모두 멍해졌다.강소풍은 낙현책과 심면을 바라보았다.“여제가 두 사람의 일을 인정했으니, 언제 혼사를 치르는 것이오?”심면은 갑자기 얼굴을 붉어지며 황급히 강소풍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술을 마셔도 자네의 입을 막지 못한 것이오?”
“저희가 어찌 가족입니까?”“50냥의 이득을 본 걸 후회한다면서요?”이 말이 나오자 다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야 유생이 그날 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어쩐지 상자를 도둑맞았더라니.유룽은 체면을 깎으며 사과했다.“유생아, 우리는 한 가족이니 티격태격하는 것도 정상이다. 그러나 다들 나쁜 생각은 없다.”“이전의 일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이렇게 너희들에게 사과하마!”“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자. 너를 위해 잘 경축해야지 않겠느냐!”둘째아버지와 셋째 아버지도 모두 따라서 사과했다.집안 재산을 나누겠다고 얘기한 그날 그들이 각박한 만큼 지금 아주 자상했다.“유생아, 집으로 가자. 지나간 일은 잊고, 우리 가족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떠냐?”“그래. 가족이 함께 지내면 얼마나 시끌벅적하냐? 따로 이곳에서 지내면 쓸쓸하지 않으냐?”“우리 집에 좋은 술도 두 병 간직하고 있는데, 유생을 축하하러 오늘 꺼내마!”유생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차분하고 차갑게 말했다.“다들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집안 재산을 나누고 연을 끊었는데, 어찌 번복할 사람이 있겠습니까?”“잘살든 못살든 더 이상 유가와 관계가 없습니다.”“다들 가시지요. 굳이 우리 집 앞에서 매달리려 한다면, 관아에 신고할 것입니다.”말을 마치고 유생은 방안으로 돌아와 차갑게 문을 닫았다.문밖의 사람들은 후회에 휩싸였다.게다가 둘째는 첫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형님 탓입니다. 제사장 자리가 발표되기도 전에 넷째네를 쫓아내더니, 지금은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셋째도 불평했다.“유생은 앞으로 대제사장이 될 것이오. 앞으로 유생 덕을 보긴커녕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앞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할 수도 있소...”유롱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어찌 또 내 잘못이 되었냐?”“애초에 심사 결과가 나오자, 다들 하나하나 달려와서 유생네가 끝났다고, 그들 일가를 헛되이 잘해줬다고 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넷째 일가를 쫓아낸 것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유가 사촌들은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유생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왜 제가...”왜 낙현책이 아닌가?장 총관이 웃으며 말했다.“어서 명을 받으시지요. 소제사장”유생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얼른 명을 받고 고마움을 전했다.장 총관은 자리에 있던 병사들을 힐긋 보고 유생에게 친절하게 물었다.“소제사장,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제가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까?”유생은 웃으며 말했다.“필요 없습니다. 고맙습니다!”“어찌 사양하십니까? 제가 필요한 곳이 없다면, 이만 궁으로 돌아가 명을 전해야 합니다.”“예. 바래다 드리겠습니다.”유생은 장 총관을 골목 밖까지 배웅했다. 장 총관이 의미심장하게 일깨워주었다.“아가씨는 아직 소제사장의 권력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성에서 제사장의 권력은 여제와 대제사장에 버금갑니다.”“태자와 동등한 권력입니다.”“이런 사소한 일은 직접 처리할 필요도 없으니, 제게 한마디만 분부하면 됩니다.”유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깨워 줘서 고맙습니다.”“오늘 여제께서 태자도 정하셨습니까? 심면입니까?”장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심가에 뜻을 전하고 왔습니다.”장 총관을 떠나보내고 유생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선택받을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낙현책한테 졌기 때문이다.심면도 태자로 봉해져서 참 좋았다.오늘 밤 심면을 찾아 축하하려면,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밖으로 돌아갔다.병사들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바꾸어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소제사장, 오늘 분명 오해일 것입니다. 저희는 먼저 떠나겠습니다.”유생이 차가운 소리로 호통을 쳤다.“멈추거라!”그들은 뻣뻣하게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땀을 뻘뻘 흘렸다.제사장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직무를 잃을 수도 있다.“수사를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안 하시오?”“저희가 감히 소제사장의 집을 수색할 용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
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궁을 나가려던 참이다. 함께 가자.”유생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심면을 찾으러 가는 것이냐?”“심사 결과가 나온 후, 심면을 만나지 못했구나.”“심면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낙현책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그런가 보구나.”“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거라.”“그래.”두 사람이 함께 궁으로 나온 후 유생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낙현책은 심면의 집으로 향했다.유가의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관아의 사람들이 유생의 집 앞을 막고 그녀의 부모님을 잡고 그들을 관아에 데리고 가려 했다.옆에는 그녀의 사촌들이 있었다.안색이 바뀐 유생은 다급히 달려갔다.“그만하시오!”“뭐 하는 것이오?”유생은 바로 부모님을 뒤에 감쌌다.유롱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하냐니? 집안 재산을 나누었으니, 유가와 이젠 연이 없는 것이다. 집안 재산도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찌 유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냐? 그 상자에는 족히 수십만 냥이 있다!”“감히 너희랑 아무 연관도 없다고 할 수 있느냐?”유생은 그들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고, 관리에게 고소할 줄도 몰랐다.“우리가 훔쳤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증거도 없이 저희를 잡다니, 법을 따르셔야죠.”유롱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유가 사람들이 네가 돌아온 것을 봤다!”“변명하지 말거라. 할 말이 있으면 감옥에 가서 변명하거라!”물건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유일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유생이다.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은 그 돈을 되찾으려 했다.“내가 돌아갔다고 돈을 훔쳤다는 것입니까? 농이 심하십니다!”“관청에 따라서 갈 수 있지만, 저희 부모님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사람을 잡을 수 없습니다!”유롱이 화를 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패다! 당연히 관아로 데려가야 한다!”“나으리, 그들은 수십만 냥을 훔쳤습니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나리께서 반드시 돈을 되찾아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조영궁.심사 결과가 나온 후 오랫동안 기다리던 낙요는 드디어 낙현책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여제.”낙현책은 고개를 숙이고 여제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심사 결과가 나온 지 오래됐는데, 어찌 이제야 나를 찾아온 것이냐? 잘 고려한 것이냐?”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이 말을 듣고 낙요는 그의 결정을 알아차렸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낙현책은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여제의 가르침을 저버렸습니다. 저는 대제사장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낙요는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의외는 아니었다.“잘 생각했느냐? 이 일은 번복한 기회가 없다.”낙현책이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랫동안 심사숙고한 후 내린 결정입니다.”“제가 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했고 최종 심사에서 1등까지 하였는데, 여제를 실망하게 했다.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일으켜 세웠다.“실망하지 않았다.”“네 실력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어찌 실망했겠느냐?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말거라. 마음을 놓고 네 목표를 향해 가거라.”“나는 네 결정을 존중한다!”여제가 화를 내지 않자, 낙현책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그는 감동에 겨웠다.“고맙습니다.”낙요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동안 심면을 만나지 않았겠구나? 어서 네 결정을 알리러 가거라.”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을 나갈 준비를 했다.그동안 심면도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있어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누군가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낙현책이 궁을 나서려는데 제사장족 제자가 그를 가로막았다.“유생이 궁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소.”“급한 일? 알겠소.”유생은 그동안 궁에 있지 않았다. 갑자기 궁으로 찾아온 것을 보아, 중요한 일이 있는 듯했다.먼저 그녀를 만나고 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