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거북이 속도는 부가티 같은 스포츠카에게는 모욕이나 다름없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 화면은 그야말로 드라마의 한 장면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다.부잣집 도련님이 짝사랑하던 여자를 화나게 한 후 수억 원짜리 한정판 스포츠카를 몰고 뒤에서 강아지마냥 졸졸 따라다니는 장면이라니 생각만 해도 재밌었다.차설아는 원래 이 녀석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싶었지만 성진이 그 후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바람에 교통 마비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 않은 말까지 해 대여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었다.하여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조수석 문을 열고는 달갑지 않게 차에 올랐다."야 이 미친놈아, 또 무슨 미친 짓이야? 지난번에 네가 성도윤한테 한 번 혼쭐이 나서 정신 좀 차렸나 했는데 왜 또 이러는 거야!”차설아는 일부러 모진 말을 내뱉어 또 다른 언어폭력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이런 미친놈을 상대하려면 그녀는 더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성진은 화를 내지 않고 천천히 차를 몰고 공항의 꽉 막힌 구역을 빠져나갔는데 오히려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보아하니 그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은 듯하다. 차설아가 그를 욕할수록 그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형수가 그 수모를 겪어도 다시 도윤이랑 만나는데 내가 그렇게 나약해서야 되겠어요?”차는 천천히 환해 대교로 들어섰고 햇빛이 바람막이 유리를 타고 쏟아져 내려와 그를 더욱 잘생기게 비춰주었는데 온몸이 마치 한 겹의 빛을 입힌 듯 몽롱하고 부드러워서 지극히 불 현실적이었다.차설아는 두 팔을 끼고 차창 밖의 푸른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도윤이보다 잘난 게 그 나불대는 입 빼고 뭐가 있어? 내가 너라면 진작 포기하고 맘 편안히 매일 주식 배당금을 받기만 기다리면서 살 거야. 허구한 날 쓸데없이 일이나 벌리니까 가문에서 지금 이렇게 지나가는 개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거 아니야?”이 말은 성진의 아픈 곳을 찌른 셈인데 그의 눈빛은 순간 매서워졌고 차
"조급해하지 말아요, 곧 알게 될 거니까.”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한 시간 후, 차는 해안의 유명한 5성급 리조트 호텔에 도착했다.호텔은 오늘 연회가 있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으며 앞쪽의 큰 잔디밭은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꾸며져 있었고 수영장 옆에는 다양한 술과 정교한 디저트가 예쁘게 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해안 명문가의 도련님 아가씨들이 모여서 아주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비키니 차림의 미녀와 근육질의 잘생긴 남자가 수영장에서 쫓고 쫓기며 장난을 치고 또 어떤 이들은 심지어 서로 끌어안은 채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서로 물어뜯고 난리도 아니었다.차설아는 이런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성진에게 말했다."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성진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웃으며 말했다. "나더러 공을 세워 예전의 잘못을 만회하라면서요? 형수랑 성도윤 구하러 왔죠. 지금 여기서 아주 잘 놀고 있을 텐데!”차설아는 순간적으로 놀라 되물었다."성도윤이 여기 있다는 말이야?”"여기 있을 수도 있고 방에 있을 수도 있으니 잘 찾아보세요.”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만 마음의 준비를 잘해야 할거예요. 형수가 그가 너무 '고통받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플까 봐 두렵거든.”"허튼 수작 부리지 마!”차설아는 퉁명스럽게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호텔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수영장 옆에 사람이 제일 많았는데 귀에 거슬리는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틀어놓고 스프링클러 들고 수영장 중앙에 서서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도 있고 그 사이로 남녀들이 리듬을 타면서 같이 흔들고 어수선했는데 차설아는 이런 장면을 보는 것조차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시선을 돌려 다른 지역을 찾으려는데 갑자기 수영장의 한 리클라이너에 하얀 가운을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긴 손과 발을 가진 익숙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그의 옆에는 흑백 비키니를 입은 섹시한 여인이 앉아 그한테 포도를 정성껏 먹이고 있었다.차
"자기야, 오랜만이네? 난 당신이 너무 소식이 없길래 암살당한 줄 알았는데 여기서 햇볕을 쬐고 있었던 거야? 나한테 설명 좀 해야지 않겠어?”차설아는 성도윤 앞에 서서 위에서 그를 내리깔아 보며 물었다.그녀의 몸은 날씬하고 가벼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치 큰 산처럼 모든 햇빛을 가려 남자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성도윤은 그윽한 눈망울로 여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봤으니까 내가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고 손가락은 손바닥을 꼬집으며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썼다.어떻게 배신할 수 있지? 그의 마음은 돌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어찌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없어 보이지?서은아는 성도윤의 입에 포도를 까서는 계속 먹여주며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도윤아, 내가 여기 있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자리 좀 피해 줄까?”“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은 서은아를 긴 팔로 껴안고는 차설아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아직도 안 가고 뭐 해? 우리랑 같이 놀려고?”차설아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는데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마치 광대를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성도윤을 보며 물었다. "성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나도 알아, 그래서 서가와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일부러 내 앞에서 서은아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지? 그러면 성가가 난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성도윤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서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결합은 해안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줄 거야. 만약 그 대가가 두 가문의 정략결혼이라면 내가 하는 게 맞지.”"어쩔 수 없었다는 건 이해해,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한테 기회를 줄게...”차설아는 마치 하느님처럼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나랑 가자, 우리 같이 이 고비를 넘기는 거야.”그녀는 줄곧 그녀와 성도윤의 사랑이
”거절할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카운트다운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답을 내놓았다.그의 표정은 냉담했는데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같이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너란 사람은 항상 이렇게 잘난 체하길 좋아하지. 본인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나 본데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가지고 논 거야. 이미 너의 진심을 확인했고 이는 내가 이겼다는 것을 의미하니 난 당연히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지. 당신이 이렇게 밀어붙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 역겹게.”“그만해!은성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감정이 다소 격해졌는데 성도윤을 보며 비꼬았다. "이럴 시간 있으면 어떻게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지 생각이나 하는 건 어때? 한 여자에게 이렇게 매너없이 굴면 소문이 나도 성가의 체면이 깎이지 않겠어?”"네가 원했던 거 아니야?”성도윤의 눈동자는 마치 예리한 칼처럼 성진을 향해 쓸고 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던 성진의 아픈 곳을 찔렀고 그는 더 이상 성도윤과 논쟁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뒤돌아 차설아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얼굴도 봤고 이제 정도 끊었으니 이만 가죠?”"급할 거 뭐 있어...”차설아의 고운 얼굴은 슬픔도 기쁨도 없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속을 알 수 없었다.슬픔? 분노? 아니면 허탈?"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도 단념하지 않은 거야?”성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보아하니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를 위해서는 여자의 기본적인 존엄조차 버리는군요. 그러니 배신당해도 싸고 모욕당해도 싸네요!”“시끄러워.”차설아는 성진을 흘기며 말했다. "죽기 싫으면 멀리 빠져있어. 무고한 사람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무슨 말이에요?”성진은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말을 듣고 멀리 섰다.서은아는 침을 삼키고 성도윤의 품속으로 몸을 움츠렸다."너, 뭐 하는 거야, 여기 서 씨네 사람이 얼만데, 함부로 막 나올 생각하지 마...아!”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설아는 그녀를 들어 수영장에 '
아무도 누가 감히 성도윤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성도윤의 가운은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도 흠뻑 젖었는데 또렷한 이목구비는 쓰라리고 초라해 보였다.그러나 남자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햇빛 아래서 더욱 차갑게 빛났다."당신의 복수가 겨우 이거야? 정말 유치하네.”"물론 이건 애피타이저일 뿐이야. 앞으로는 놀랄만한 만찬이 더 많으니 딱 기다려.”차설아는 독설을 내뱉은 뒤 호스를 뿌리치고는 미친 듯이 연회장을 박살 내고서야 호텔을 나섰다.호텔 관계자가 달려들어 따지려 하자 성도윤이 제지했다.남자는 차갑게 말했다.“마음대로 하게 내둬요, 비용은 제가 대신 내죠.”서은아는 차설아가 멀어지자 그제야 수영장에서 뭍으로 올라와서는 성도윤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반응이 클 줄 몰랐는데 내가 따라가서 설명해야 하나?”"네가 진심으로 해명하려 했다면 오늘의 모든 일이 없었을 것 아니야?”남자의 차가운 말에는 털끝만큼의 감정도 없었는데 예전의 '형제' 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도윤아, 지금 날 탓하는 거지, 그렇지?”"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알아? 난 단지 네가 나와 3개월 동안 연애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3개월 후에 성가와 서가의 원한이 모두 사라지면 그때 너는 여전히 너의 아내를 찾아 돌아갈 수 있어. 이게 너한테 이렇게 큰 희생이야?”"성가와 서가는 결국 전쟁이 일어날 거야. 내가 3개월 타협한다고 해서 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야. 내가 너와 3개월을 연애하기로 한 것은 단지 너희들이 설아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를 바랄 뿐이야.”성도윤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3개월 후 네 손에 있는 것을 깨끗이 없애지 않으면 서씨 집안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그 대가를 치를 거야.”이 말에 서은아는 격노했고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그 여자를 그렇게 사랑해? 네 평생의 앞길과 가문의 이익을 걸어서라도 상관 없는
차설아는 그 말에 즉시 폭주를 멈추고 성진의 우산을 낚아채고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쭉 피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였다.그녀는 아무리 슬퍼도 혼자 슬퍼할 뿐 절대로 쓰레기 같은 남자 앞에서 그녀의 슬픈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몇 분 동안이나 쇼를 했는데도 사람이나 차가 오지 않자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저 쓰레기는 어디 있지?”“푸하하하!”성진은 참지 못하고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형수는 정말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귀엽고 도도한 여자야...”“???”"그럴 필요 없어, 거짓말이야. 지금쯤 따뜻한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은아랑 꽁냥대고 있을 텐데 언제 폭우 속에서 뛰어다니겠어.”“야 이 나쁜 놈아, 감히 나를 가지고 놀다니!”차설아는 원래 화가 난 데다가 지금 성진에게 이렇게 놀림까지 당하니 화가 나서 그를 잡고 한바탕 때리며 말했다."성가의 남자들은 모두 한패가 되어 나를 괴롭히는 거 같단 말이지. 내 편이 없으니 죽도록 나를 괴롭히고... 때려 죽일거야 진짜!”그녀의 솜씨는 원래 최상급이었는데 게다가 화까지 난 지금 성진은 그야말로 인육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는데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니 그 모습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빗물이 두 사람의 옷을 흠뻑 적셨고 성진은 아예 바닥에 대자로 뻗어 죽을 각오를 하고 말했다."때려라 때려, 이렇게 하는 게 형수를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마음껏 나를 때려요...”"자, 내가 귀하게 컸다고 불쌍해하지 말고 때려요.”남자의 말은 차설아로 하여 온몸에 소름이 돋게 했는데 순간 때릴 생각이 사라졌다.그리고 그녀는 바람 빠진 공처럼 주저앉았는데 빨간 우산은 거꾸로 옆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모습이 빗물에 씻긴 장미처럼 아름답고 연약했다.“흑흑!”차설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두 다리를 끌어안고 빗속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폭우는 그녀의 울음소리와 눈물을 잘 가렸다..."됐어, 됐어, 너도 충분히 때렸어. 우리 다시 차에 타자. 계속 맞으면 우리 둘 다 감기에
몸을 닦을 때 그녀는 약간 난처해하며 우물쭈물했는데 시종 옷을 걷어내고 닦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걱정하지 마, 난 아무것도 안 보여요.”그렇게 말하면서 성진은 백미러를 닫고 두 손을 들며 말했다.남자가 자신을 등지고 백미러까지 닫자 차설아는 한결 편하게 꼼꼼하게 몸을 닦기 시작했다.한편 성진은 아예 상의를 벗어 조수석으로 던졌고 완벽한 근육 라인이 차설아 앞에 드러났다.솔직히 말해서 그의 사촌 형 성도윤보다 못하지 않았다."콜록콜록!"차설아는 이에 헛기침하며 얼른 눈을 돌렸다."하하, 형수님, 도윤이랑 아이 둘을 낳았는데도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시다니. 당신네 부부간의 즐거움은 매우 보수적인가 보군요!”"입 닥쳐!"차설아는 남자의 등에 주먹을 날리며 경고를 날렸다."내가 네 차에 탔다고 네가 헛소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또 이렇게 분별없이 굴면 내려.”"미안해요. 내가 이런 거 처음 아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진지하려고 노력할게요.”하지만 성진은 차설아에게 맞는 걸 즐겼고 그와 차설아가 이렇게 애매한 분위기 속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는데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차 안의 온풍은 따뜻했고 두 사람은 더 이상 축축한 상태가 아니어서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성진은 스피커를 틀었고 차 안은 경쾌한 곡들로 둘러싸였는데 그녀와 그가 모두 좋아하는 라이트 록 음악이 흘러나왔다."우왕좌왕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탔는데 바로 8시 30분. 바쁜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드셋을 끼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지...”이런 리듬은 창밖 빗방울과도 잘 어울렸는데 차설아도 한때 밴드의 보컬이었던 만큼 음악에 민감했고 이내 빽빽한 기타와 드럼 비트 소리에 맞춰 머리를 흔들었다.성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아는 차설아지, 멋지고 제멋대로고 만사에 해탈하고. 배신자 때문에 너무 슬퍼할 필요 없어.”"헛소리 작작 해.”"그럼 아까 빗속에서 폭주하고 울면서 무고한 행인을 폭행한 사람은 누구지?”
성진은 의자에 엎드려 뒷자리에 앉은 차설아를 향해 손짓했다. "귀 이리 대봐요, 내가 말해줄게.”차설아는 천진난만해 기대에 섞인 얼굴로 다가갔다. 피부에 달라붙은 민소매 꽃무늬 드레스는 옷깃이 살짝 컸는데 어깨에서 비스듬히 흘러내려 새하얀 어깨를 드러냈다.성진은 이 장면을 잠깐 흘겼는데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나와 결혼하고 성대 그룹을 가져요. 그럼 성도윤이 화가 나 죽을걸.”“???”성도윤은 열에 둘째 치고 차설아가 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너 정말 죽고 싶구나, 아직 덜 맞았지? 또 나를 놀려!”차설아가 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보고 성진은 얼른 손을 들어 용서를 빌었다."일단 화내지 말아요,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요...”"무슨 할 말이 더 있어? 네 입에서 무슨 좋은 말이 나오겠어.”"내가 결혼하라는 건 진짜 결혼하자는 게 아니고 그냥 이 기회를 빌려 화풀이나 하라는 거죠...”성진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생각해봐, 성도윤은 성대 그룹을 지키기 위해 너를 배신하고 서가와의 정략결혼을 선택했어. 만약 결국 네가 성대 그룹을 얻고 나처럼 네 말을 고분고분 듣는 꽃미남까지 얻으면 그의 체면을 구기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성대 그룹을 얻는다고?”이 말은 오히려 차설아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천신 그룹도 새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정말 업계 선두인 성대 그룹을 손에 넣는다면 천신 그룹의 앞날은 물론 지금은 망한 차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예전에는 성도윤을 생각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성진은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나랑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차설아는 성급하게 물어보는 성진의 표정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이 자식 이거 정말 야망이 큰 것 좀 봐. 지난번 일이 망하고 성도윤에게 개처럼 쫓겨난 지가 얼만데 다시 또 이런 짓을 꾸며? 너는 정말 성도윤이 너를 뿌리째 뽑아버릴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