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
다음날.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설아는 8시 30분부터 구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찍 도착한 건 물론 화장까지 정성껏 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풀어헤쳤던 머리카락마저 높게 묶어 백조처럼 길고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냈다.멀리서 보면 여신이 따로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시크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하지만 그날 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열이 살짝 난 탓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9시 정각이 되자, 은색 부가티 베이런이 지상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설아를 발견하자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꽤 적극적이네?”성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스쳐 지나가 기다란 다리로 접수창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별난 놈이야.’차설아는 듬직하면서도 어딘가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생각했다.‘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네! 자기도 급하게 가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이혼 신고는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었다. 사인하고 날인하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새로 도입된 법에 따르면 이혼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숙려기간이 있는데, 등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혼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서 아무나 접수증을 들고 와서 취소해도 돼요.”구청 직원은 말을 마치고 이혼 접수증 2부를 각각 나눠줬다.매일 매일 이혼을 접수하면서 울고불고 심지어 현장에서 싸우기는 별의별 상황을 다 접했지만, 이렇게 무덤덤하게 처리하는 부부는 처음 본다.게다가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단 말인가?차설아는 접수증을 건네받아 빼곡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있으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왜 없대? 만약 혼인 신고할 때 숙려기간이 있다면...”성도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리 당당하단 말이지?차설아는 모든 게 어이가 없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속세를 벗어난 선비처럼 남녀관계에 관심이 없고, 여자를 돌같이 볼 줄 알았는데 결국 소리소문없이 시한폭탄을 터뜨렸다.애인을 집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지다니?순간 정신이 번쩍 든 차설아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슬픔마저 말끔히 사라졌다.“그러니까 지금 불륜이란 말이지?”성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채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차설아 씨, 이게 다 제 탓이에요.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 해요!”이 여자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제대로 보여주네?“그래?”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뺨을 때릴 기세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임채원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 성도윤의 등 뒤로 쏙 숨었다.“자기한테 화풀이하라더니 왜 숨는데?”차설아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작작 좀 해, 난 나름 소양 있는 사람이라 내연녀와 개싸움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둘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데 방해하기는커녕 그 소원을 이뤄줘야 하지 않겠어?”“뭐... 뭐라고?”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임채원은 어리둥절했다. 몰래 준비한 ‘감성팔이’ 작전도 무용지물이 된 듯싶었다.보아하니 성도윤과 차설아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계약 부부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아니면 내연녀를 마주친 상황에서 대체 어떤 와이프가 이처럼 무심하고 관대할 수 있겠는가?이내 차설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다만 불륜인 만큼 이혼 합의서에 적힌 재산분할에 관한 내용을 다시 협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임채원은 차설아가 재산을 언급하자 조급한 나머지 가식을 떨기는커녕 한층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도윤이가 당신한테 800억에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까지 넘겨주지 않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줬다고 보는데? 게다가 그동안 도윤네 집에서 그쪽 집안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못 써.”차설아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질 거라는 차설아의 예상과 달리 순간 단단하고 늘씬한 팔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페퍼민트처럼 상쾌한 향기가 코끝에 닿자, 그녀는 한순간에 매료되었다.“몸이 엄청 뜨겁네? 열이 나는 건가?”성도윤은 품에 안긴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평소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이렇게 말랐을 줄이야! 깃털처럼 가벼운 몸은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너랑 상관없어.”차설아는 중심을 잡고 이를 꽉 악물더니 애써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자고로 이혼은 깔끔하게 해야 한다. 전 남편한테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여줘야 후련하기 마련이니까.따라서 그녀는 감성팔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실비실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말은 세게 할 수 있어도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미 기력을 다한 차설아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이내 성도윤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차설아는 아픈 것도 있지만 민망한 나머지 계속해서 몸부림쳤다.“우린 이미 이혼했다고, 잊었어?”“숙려기간 동안 넌 여전히 내 아내야.”단호하고 강압적인 남자의 말투는 차설아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두 사람을 보자 임채원은 발을 동동 굴렀다.이건 결코 그녀가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곧이어 잽싸게 허리를 짚고 힘든 척 가냘픈 목소리로 외쳤다.“도윤아, 잠깐만. 나 배가 슬슬 불러와서 걷기 불편하다고.”“거기서 기다려. 진무열한테 픽업하러 오라고 할 테니까.”말을 마친 성도윤은 품에 안긴 차설아를 내려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이에 차설아는 기가 막혔다.지금 뭐 하자는 거지? 임신한 애인 데리고 이혼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자상한 척 챙겨주겠다는 건가?이렇게 뻔뻔스러운 남자가 있을 줄이야! 관계는 끝냈어도 남 주기 아깝다는 뜻인가?여우 같
세상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어가던 배경수는 병실에 떡하니 서 있는 만년설 같은 성도윤을 발견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그는 성도윤을 위아래로 훑었고, 성도윤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병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둘이 알아?”성도윤은 차설아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천하의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남자와 재벌가 며느리로 조용한 삶을 사는 여자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지 않은가? 교집합이 전혀 없을 텐데...“그게...”차설아는 골치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녀가 배경수한테 병원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보낸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전남편과 외간 남자의 만남이라니, 어딘가 수라장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뭐지?“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무려 저의 여신이라고요.”배경수는 노란색 해바라기 꽃다발을 들고 한껏 들뜬 걸음걸이로 차설아를 향해 다가갔다.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도윤을 바라보았다.“성도윤 씨는 모를 테지만, 당시 설아 누나는 우리 학교의 아이돌이었죠. 누나한테 대시하려는 남자들이 줄을 섰을 지경이니까. 물론 전 수많은 추종자 중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운 팬이었죠. 오늘은 누나가 이혼을 신청한 경사스러운 날인데, 찐 팬으로서 당연히 제일 먼저 축하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말을 마친 배경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싹 지우고 정중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으로 차설아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나의 여신이여, 이 해바라기꽃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해바라기는 누님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죠? 갖은 역경에도 오로지 햇빛만 보고 자라나라는 것이 꽃말이잖아요. 누님한테 해바라기보다 더 잘 어울리는 꽃은 없을 거예요.”물론 차설아가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다만 해바라기의 꽃말은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는 한결같은 사랑이다. 마치 성도윤을 향한 그녀의 마음처럼 말이다.그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여태껏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하지만 이제는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할 때가
“당연하죠, 누님께서 부탁한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배경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우고 두툼한 자료 뭉치를 예의 바르게 건넸다.자료를 건네받은 차설아는 고열에 시달려 불편한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곧이어 그녀의 뽀얗고 여린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차츰 떠올랐다.“역시 평범한 변호사들이 아니었어. 가치를 따지면 800억 현금과 아파트 펜트하우스는 아무것도 아니야.”“쳇, 성도윤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어요?”배경수는 늘씬한 다리를 꼬고 침대 난간에 몸을 기대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이 사람들보다 더 잘나가는 변호사를 알고 있거든요? 만약 필요하다면 당장 소개해줄게요.”“아니야, 난 이 사람들이 필요해.”차설아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혼 따위 전혀 영향받지 않은 듯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누님, 지금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예요? 내 레이더망에 음모가 탐지되었는걸요?”배경수는 급 관심이 생겼다.드디어 4년 만에 사업의 여신이 다시금 부활하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얼른 얘기해 봐요!”차설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됐어, 곧 알게 될 테니까.”차설아의 성격을 잘 아는 배경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어차피 물어봤자 알려줄 사람도 아니었고,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또 차단당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다만...”배경수는 똑바로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차설아를 떠보았다.“진짜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있어요?”그는 차설아가 성도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찌 쉽게 잊겠는가?“내가 붙잡는다고 해서 될 일인가?”차설아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무심하게 말했다.“성도윤의 와이프로 산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야. 애초에 손해 보는 장사라서 이제 진짜 차설아로 살아가고 싶어.”...성가네 별장.성명원과 소영금은 배가 나온 임채원을 보고 서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소영금은 기쁨을 주체하지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