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훈은 가슴팍을 툭툭 치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제수씨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어요. 정 걱정된다면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해 보세요. 제가 집도한 수술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수씨는 그저 도윤이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세요.”박성훈은 다른 건 몰라도 뇌수술과 바다낚시만큼은 실수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 있었다. 서은아는 예전부터 박성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성진과 음모를 꾸밀 때, 돈으로 박성훈을 매수해서 더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었다.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박성훈은 돈과 명예에 큰 관심이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다.환자를 보거나 수술을 집도하는 건 전부 기분에 따라서 결정했다.그래서 서은아는 박성훈보다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돈을 좋아하는 신경외과 의사를 찾아 수술을 맡겼다. 만약 박성훈이 성도윤의 수술을 집도하게 되면 들통날 것이 뻔했다.서은아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말했다.“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윤이가 안정을 찾은 지 며칠 되지 않았어요. 더 이상의 수술은 무리라고 봐요. 저는 도윤이가 그저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기억을 되찾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고 지금처럼 건강하면 돼요...”“제수씨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수술은 환자가 받는 거잖아요.”서은아의 말에 박성훈은 가만히 누워있는 성도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도윤아, 너는 기억을 되찾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성도윤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차갑게 말했다.“형을 이곳까지 오게 했다는 건 이 수술이 나한테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에요. 흐릿한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기억을 되찾고 마음 편하게 지낼래요.”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도윤이 성공한 사업가, 사랑하는 가족과 여자를 지킬 수 있는 남자였다. 완벽한 성도윤은 매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여겼다.그러나 성도윤은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닌 누군가의 조종에 따라 흘러가는 인생이 괴로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
“아마 불안해서 더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 수술하고 기억을 찾으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성도윤은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슬픔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서은아가 떠난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서은아가 옆에 있었기에 무수히 많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성도윤은 자신의 곁을 지켜준 서은아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싶었고 이 여자를 책임지고 싶었다. 수술 전이든 수술하고 나서든 여전히 서은아를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 수술은 그저 흐릿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박성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불안하다는 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졌기 때문이야. 너에 비하면 자신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꼈거나 너와의 관계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할 리가 없잖아.”“관계가 떳떳하지 못하다고요?”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박성훈의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아직은 이해 못 하겠지. 수술받고 나면 그 기억이 돌아올 거야. 그럼 왜 수술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불안해하는지 알게 돼.”박성훈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신경외과 의사로서 서은아가 왜 갑자기 긴장하고 두려워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극도로 무서워하는 건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성도윤한테 의심 가는 점을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형이 시간 될 때 수술을 부탁할게요. 나는 언제든지 상관없으니까 형이 수술 날짜를 정해줘요.”성도윤은 두 팔을 벌린 채 덤덤하게 말했다. 언제든지 수술대에 누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본 박성훈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누가 보면 내가 널 죽이는 줄 알겠어. 간단한 수술이니 미리 겁먹을 필요 없어. 지금의 너는 수술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야. 두 주일 정도 푹 쉬고 회복한 뒤에 수술해도 돼.”“알겠어요.”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너랑 같이 많은 것을 겪어온 애틋한 사람이 바로 저분이구나.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마음에도 파란을 일으켰다. 성도윤이 다급히 물었다.“다쳤다고요? 언제 어떻게 다쳤는데요?”“병원으로 이송된 지 얼마 안 되었어. 어린이집에서 열린 시합에 참가했다가 높은 곳에서 추락했대. 심하게 다쳤다고 기사가 났어.”박성훈은 심심해서 생방송을 보다가 차설아가 다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고는 성도윤의 반응을 보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아이가 둘이나 있는 애 엄마인데도 그렇게 좋아? 예전에 만날 때부터 재미난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 혹시 알아? 두 아이가 너의 아이일지...”“농담도 정도껏 해요.”성도윤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거만하게 말했다.“아무 여자하고 놀아날 정도로 무식하지 않아요. 그런 여자는 아이를 낳고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모를 거라고요.”“기억을 잃었다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을 네가 어떻게 알아? 가족한테 물어보지 그랬어.”“물어본 적 없어요.”성도윤은 차갑게 말했다.“두 아이가 내 자식이라면 엄마가 진작에 성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서 데려왔을 거예요. 그런데 엄마는 아이에 관한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아.”박성훈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추측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 두 주일 뒤에 회복되면 전면적인 검사를 진행할 거야. 수술할 만한 상태라고 판단되면 수술 날짜를 정할게. 그럼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그러죠.”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생각에 잠겼다.박성훈이 나간 뒤,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 팔에 꽂은 링거를 뽑아버렸다. 그러고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아무도 모르게 병원을 빠져나갔다.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대기하던 진무열이 걸어오면서 말했다.“보스, 아직 퇴원하면 안 돼요. 아직 다 낫지도 않았잖아요. 나중에 또 쓰러지면 어떡해요?”진무열은 창백한 성도윤의 얼굴을 보고 걱정되었다.“일단 나왔으니까 차에 타. 지금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어.”성
차설아는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정형외과가 있는 층에 입원해 있었다. 성도윤의 병실도 그 층에 있었다. 차설아를 만나기 위해 뛰어다니다가 결국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차설아의 병실에는 가족과 친구, 배경윤과 선우 시원이 모여있었다.성도윤이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는 차설아의 곁으로 다가갈 틈조차 없었다. 또한 차설아를 걱정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다.이때 병실에서 간호사가 걸어 나왔다. 성도윤이 눈짓하자 진무열은 재빨리 간호사 옆으로 다가갔고 사람이 적은 복도 끝으로 데려갔다.“저... 혹시 저 병실에 있는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을까요?”간호사는 진무열과 성도윤을 경계하면서 말했다.“환자의 보호자예요? 아니라면 환자의 상태에 대해 말해줄 수 없어요. 이건 환자의 프라이버시나 마찬가지니까요.”“이분이 보호자예요. 우리 대표님이 저 병실에 있는 환자의 남편이라고요.”“환자의 남편이에요?”간호사는 성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팔짱을 낀 채 따져 물었다.“남편이면 병실에 바로 들어가지, 왜 사람이 없는 곳까지 데려와서 물어보고 있어요?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 복도에 감시카메라가 5개나 있다고요.”“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 얘기해요. 우리 대표님은 환자의 남편 되는 사람인데...”진무열이 간호사와 싸울 기세로 말하자 성도윤은 머리가 지끈했다. 그러고는 참다못해 진무열을 옆으로 끌어당겼고 간호사한테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얼마 전에 아내랑 심하게 싸웠어요. 지금 들어가면 아내가 안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너무 걱정되어서 간호사님한테 여쭈었던 거고요. 아내의 상태가 어떤지 알려줄 수 없을까요?”“아, 알려드릴게요.”간호사는 조각상처럼 빛나는 성도윤의 얼굴을 보고 원칙 같은 건 진작에 잊어버렸다. 차설아의 상태가 어떤지 솔직하게 말했다.“환자분은 고비를 넘겼지만 허리가 크게 다쳐서 2주일, 제일 길게는 1달 정도 입원해야 해요.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만약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다면...”“회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데요?”성도
성도윤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갓난아기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해요?”“도윤아, 몸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좀 엄마 말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소영금은 말을 듣지 않고 고집 피우는 성도윤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진무열이 성도윤의 앞을 막아서면서 말했다.“저...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 대표님 탓이 아니에요. 전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내가 왜 너를 탓해야 하지?”소영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무열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대표님은 차설아 씨를 보러 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똑바로 알아보지 못한 탓에 병원 밖으로 나갔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차설아 씨도 같은 병동에 입원했더라고요. 제가 민폐를 끼쳤어요.”진무열이 솔직하게 말하자 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걸 보니 시간이 남아도나 봐? 북아메리카 광석 프로젝트 담당자 명단에 네 이름도 추가할 테니 내일부터 진행해.”깜짝 놀란 진무열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대표님, 죄송해요.”“진무열, 당장 나가. 엄마도 이제는 나가주세요. 머리가 아파서 혼자 있고 싶어요. 깨어날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성도윤은 사복을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운 성도윤은 머릿속에 전부 차설아와 함께했던 추억뿐이었다.병실을 나선 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진무열한테 말했다.“어떻게 다쳐도 우리 도윤이랑 같은 병원에 입원한 거야! 정말 악연이라는 말이 맞구나. 한쪽이 죽을 때까지 다치는 건 아니겠지?”“예전에는 미신을 믿지 않으셨죠? 상극이든 악연이든 전부 미신이에요.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 겹쳐 보여서 미신을 믿게 되는 거잖아요.”진무열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너도 곧 믿게 될 거야. 내가 유명한 점집에 가서 두 사람의 사주를 봐달라고 했더니 둘이 상극이라잖아. 도윤이가 차설아랑 만나기만 하면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쪽이 다치지 않으면 다른 한쪽이 이상한 일에 휘말려 들었어. 지금은 둘 다 입원했
차설아는 침대에 누워서 배경윤을 위로해 주었다. 비록 허리에 통증이 밀려오긴 했지만 침으로 찌른 것처럼 따끔할 뿐이었다.선우시원과 배경윤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차설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농담했다.“설마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숨기는 거 아니지?”“절대 아니야! 그런 말 더 이상 하지 마.”차성철은 주먹을 꽉 쥐면서 말했다.“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유명한 의사를 찾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설아야,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오빠야말로 걱정하지 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내가 정말 반신불수가 된다면 차라리 죽여줘.”차설아는 피식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평생을 불구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설아야, 곧 나을 거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완치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잠잠해졌던 배경윤은 또다시 울먹이면서 말했다. 차설아는 한숨을 쉬더니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푹 자고 싶으니까 자리 비켜줘. 가서 밥도 먹고 쉬어.”차설아는 병원에 이송된 후로 통증을 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병실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차설아를 부둥켜안고 울어서 내일이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 우리는 이만 나가볼게. 설아야, 푹 자고 일어나면 연락해.”차성철은 심호흡하고는 뭇사람들을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선우시원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회사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랑 성철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해. 나중에 또 보자.”“바람아, 정말 고마워. 퇴원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가자. 내가 맛있는 걸 사줄게.”차설아는 선우시원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선우시원은 그동안 차설아를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는 선우시원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었다.텅 빈 병실 안에 적막이 흘렀다. 차설아는 그제야 편안하게 누울 수 있었다.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가족과 친구 앞에서는 밝고 쿨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혼자 남
성도윤은 의자에 기대앉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내가 왜 당신을 만나러 왔는지 알아?”“잘 모르겠어요.”차설아는 휴대폰을 찾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당장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오빠한테 전화할 거라고요.”“마음대로 해. 이 시간에 전화해도 구하러 오지 못할 거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얘기했잖아. 내가 아무 대책 없이 들어왔을 것 같아?”성도윤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차설아를 비웃었다. 계획적인 성도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설아의 병실로 들어왔을 리 없었다. 미리 손을 써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었다.“당신이라면 그랬겠죠.”차설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복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오늘 나의 목을 졸라서 죽인다고 해도 반항하지 않을 거니까요.”병실 안으로 내려앉은 달빛이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성도윤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코웃음 쳤다.“당신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야?”“도윤 씨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성도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성대 그룹 대표가 뒤끝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은 절대 손해 볼 타입이 아니에요. 저번에 내가 당신을 목 졸라 죽일 뻔했으니 당신이 날 죽인다고 해도 할 말 없어요. 억울하게 죽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요.”“그렇게 해야 우리 둘에게 공평하다는 말인가?”병실 안이 너무 어두워서 성도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설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늘고 약한 목에 손을 올려놓았다.“당신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참 쉬운 일이야. 백조처럼 목이 하얗고 가늘어서 비틀어 꺾어도 될 것 같아.”“잘 생각해 보고 죽여요. 충동 살인의 후과는 늘 좋지 못한 법이거든요.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미리 고려해 보세요
차설아는 성도윤이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이불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성도윤을 자극해서 이성을 되찾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성도윤은 차설아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그동안 오해한 것 같아. 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야. 당신처럼 예쁜 여자가 내 눈앞에 있는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멍청이가 아닌 이상 당신을 이대로 내버려둘 리 없어. 정말 탐나는 여자거든...”성도윤은 손끝으로 차설아의 쇄골을 매만지더니 환자복의 첫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차설아의 몸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흥분되었다.“성도윤 씨,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직접 당신을 죽일 거예요!”차설아는 성도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당신이랑 사귄 적이 있었다고 했잖아. 당신과의 추억은 전부 잊었지만 어른들의 연애는 아주 뻔해. 옷 단추 하나 풀었다고 호들갑 떨 나이는 아니지 않아? 오버하지 마.”“이미 헤어진 사이에 이래도 될 것 같아요? 당장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성도윤을 노려보았다.“곧 결혼한다는 사람이 약혼녀를 두고 나를 겁탈하는 건가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차설아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피식 웃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흥미를 잃었는지 표정이 굳어있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나를 걱정하는 거야? 왜 나의 인생에 간섭하는 건데?”“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약혼녀가 불쌍해서 그래요. 당신 같은 남자를 거두어 주겠다고 나서는 여자는 천사니까요. 그 여자랑 결혼하면 다른 여자한테 더 이상 찝쩍대지 말아요.”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차설아, 당신은 두 아이의 엄마야. 아이나 잘 키울 것이지 왜 다른 남자를 유혹해?”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차갑게 대답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은아와 맺은 혼약을 취소하고 차설아랑 잘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차설아한테
차설아는 병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성도윤이 늦은 밤에 가져다주는 야식이 유일한 낙이었다. 차설아는 누워서 입을 벌리고 성도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애틋한 커플 같아서 오글거렸지만 케이크를 먹기 위해 꾹 참았다.“역시 다크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을...”크림과 초콜릿이 조화를 이루어서 입안에 가득 퍼졌다. 차설아는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내일도 가져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어쩌려고 그래.”성도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하면서 허겁지겁 먹는 차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의도치 않게 성도윤의 손가락을 물게 되었다.긴 손가락이 차설아의 입에 들어가자 성도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고 닭살이 돋았다.“어머.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급하게 먹다보니...”차설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성도윤한테 사과했다.“더 먹을래?”성도윤은 뜨거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아, 아니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민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성도윤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더 이상 케이크를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숨을 기세였다.“안 먹으면 입부터 닦아. 다 묻히고 먹었잖아.”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차설아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설아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음식을 몰래 훔쳐먹은 고양이 같아서 더 귀여웠다.“그럼 티슈 좀 주세요. 입에 묻은 줄도 몰랐어요.”차설아는 혀로 입가를 날름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성도윤은 내가 며칠 굶은 줄 알겠어. 아, 손가락까지 물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왜 그랬지?’“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뭐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티슈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뜻이야.”“왜요? 다 썼어요?”“아니. 내가 닦아
박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뉴스에서 차설아 씨가 허리를 다쳤다고 했어요...”성진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성진은 심호흡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당장 그 병원으로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정확히 어쩌다가 다쳤고 상황이 어떤지 알아내서 보고해.”“하지만 제가 성진 도련님의 곁을 떠나면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설아한테 가봐. 설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성진은 잔뜩 긴장한 채 박서영을 재촉했다.“알겠어요. 준비하고 바로 갈게요.”박서영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기 전에 뒷마당에 있는 해바라기 꽃을 가져가. 해바라기 꽃을 보면 설아도 좋아할 거야.”“네. 그렇게 할게요.”박서영은 성진을 바라보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사람은 감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동물이었다.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여도 눈 깜빡이지 않던 성진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순애보가 되어있었다.한편, 병원.성도윤은 늦은 시간마다 차설아의 병실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얘기를 나누면서 웃기도 했다.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이 된 차설아는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가끔 성도윤을 만나기 위해 차성철 혹은 병문안을 온 사람들을 일부러 내보내기도 했다.성도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던 차설아는 어쩐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도윤이 찾아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내가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당신을 제일 먼저 내쫓았을 거예요.”어느 조용한 밤, 차설아는 성도윤이 몰래 가져온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자 성도윤은 차갑게 대꾸했다.“말로만 그러지 말고 직접 날 내쫓아 봐. 얼른 나아서 나를 내쫓기를 바랄게.”“딱
“그럴 필요 없어!”성진이 부르짖는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귀신 같은 몰골로 도저히 차설아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성진은 긴 한숨을 내어 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차설아를 두고 떠난 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서였어.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야.”성진은 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차설아한테 평생 책임지라고 말하면 차설아는 주저 없이 승낙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반년 전에 어렵게 상봉한 차성철과 귀여운 아이들, 겨우 이어가고 있던 사업을 내팽개치고 성진과 함께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을 아기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힘들다고 투정 부린 적이 없었다. 성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두 눈과 피를 기부함으로써 사랑하는 여자와 반년 동안 같이 살았기에 이번 생에 여한이 없었다. 성진은 평생 그 나날들을 기억할 것이고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하지만 박서영은 성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총명하고 이득을 위해 기회를 쟁취하던 성진이 도대체 왜 소극적으로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성진 도련님, 차설아 씨를 잊지 못했으면서 왜 만나러 가지 않는 거예요? 성진 도련님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때 갑자기 나타나면 감동해서 성진 도련님과 결혼하려고 할 수도 있어요.”박서영은 굳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성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설아가 그러자고 해도 내가 거절할 거야.”성진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자존심이 있는 남자라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할 거야.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성진은 고상한 품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진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지만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성진 도련님, 다른 사람들이 도련님을 나쁘고 간사한 사람이라고 욕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서은아는 심호흡하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여겼다. 성진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궁금해 난 서은아는 천천히 물었다.“요즘 어디로 갔기에 도통 보이지 않는 거야? 차설아를 데리고 해안시를 떠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차설아가 왜 아직도 내 눈앞에서 알짱대는지 설명해 봐.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차설아는 또 성도윤한테 달라붙어 있을 거야. 그럼 네 눈과 피를 성도윤한테 준 건 뭐가 되는데?”성진의 희생은 차설아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은아도 놀라게 했다.멀쩡하던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를 위해서 자신의 눈과 피를 기부했다. 그로 인해 성진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다.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인 순애보는 성진일 것이다. 서은아는 성도윤을 위해 이 정도로 희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성진은 큰 희생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차설아는 반년 동안 성진과 가까이 지내다가 자신만의 삶을 위해 떠났다. 성진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뭐가 되든 네가 알 바 아니야. 나는 너랑 달라. 설아를 많이 사랑하고 설아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 하지만 너는 성도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국 너를 위해서 수술을 막으려는 거잖아. 너는 성도윤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성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서은아는 허를 찔려 제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차설아를 사랑하는 순애보가 이런 끔찍한 일을 꾸며냈다는 걸 누가 알았겠어... 나는 그저 네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야. 성도윤을 이렇게 만든 것도 전부 너라고!”“여기서 멈추라고 하면 멈출 거야? 너는 나의 꼭두각시라고 했잖아.”“뭐? 뭘 멈추라는 건데?”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는 차갑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야. 성도윤이 수술을 받게 내버려둬. 잊었던 기억을 찾고 나서 너한테 따지면 내가 꾸민 일이라고 말해. 너는
긴 연결음만 이어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 개같은 놈!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제발 좀 받아. 할 얘기가 있단 말이야.”서은아는 서태원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전화를 걸었다. 여러 통 걸었지만 상대는 전화를 계속 받지 않았다. 서은아의 전화번호를 진작에 스팸 번호로 설정했거나 전화번호를 아예 바꾸었을 수도 있었다.“하, 정말 짜증 나! 아직 살아있다면 전화라도 좀 받으라고! 정말 속 터져.”서은아는 방에 놓여있던 화분을 전부 바닥에 던지면서 씩씩거렸다. 서은아가 절망스러워서 힘없이 주저앉자 갑자기 조용하던 전화가 울렸다.“무슨 일로 전화했어?”전화를 건 사람은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서은아와 말을 섞기 싫은 모양이었다.“성진, 이 개자식아!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전화를 건 줄 알아?”서은아는 휴대폰을 꽉 잡고 울분을 토해냈다. 긴급상황이 아니었다면 서은아는 절대 이런 나쁜 놈과 엮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까 무슨 일인데?”성진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러자 서은아는 잔뜩 겁을 먹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성도윤이 벌써 의심하고 있어. 대단한 신경외과 의사를 찾았다고 하면서 뇌수술을 다시 받겠다고 했단 말이야. 만약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지난 기억도 다 떠오를 거고 우리가 한 짓이 들통날 것 같아. 우리 이제 어떡해?”“그럼 어쩔 수 없어. 나의 실력은 예전과 달리 많이 녹쓸었지만 성도윤이 복수하고 싶다면 기다리고 있어야지.”“나쁜 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서은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나한테 부탁할 때와 말이 다르잖아. 들통나면 너는 성도윤한테 좀 맞으면 되겠지만 나는 어떡해? 성도윤이 알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우리 부모님까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서 연락한 거야.”“그러니까 네 말은 성도윤이 뇌수술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거지?”
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가 선우시원이었다면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아이를 데려올 거야. 아이의 엄마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 알 바 아니지. 강요하지도 않을 거고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둘 거야.”“그, 그래요?”차설아는 멋쩍게 웃더니 차오르는 슬픔을 겨우 삼켰다. 선우시원은 차설아와 결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성도윤은 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했다.차설아는 성도윤이 기억을 잃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씨 가문에서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으려고 차설아와 싸울 것이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가서 쉬어요. 궁금한 거에 대해 다 알려주었잖아요.”차설아는 마음이 아파서 혼자 있고 싶었다. 성도윤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대답했다.“이제는 가봐야겠어...”병실 문을 열려던 성도윤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말했다.“만약 당신이라면 뭐라고 하든 내 곁으로 데려왔을 거야.”“뭐라고요?”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캐물으려고 했지만 성도윤은 이미 가버렸다. 아직 기억해 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기에 성도윤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모든 것은 박성훈한테 수술을 받고 나서 기억이 돌아온 뒤에 결정될 것이다.한편, 서씨 가문 저택.병원에서 돌아온 서은아는 화가 나서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모조리 바닥에 던졌다.“은아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설마 성도윤 그놈이 너를 화나게 했어? 지금 당장 그놈한테 전화해서 따져야겠어.”서태원은 서은아를 끔찍이 사랑했기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딸을 괴롭힌다면 두 눈이 뒤집어질 것이다. 상대가 성도윤이라고 해도 서은아를 위해서 따져 물을 수 있었다.“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화풀이하고 있었던 거예요.”서은아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펑펑 흘렸다.“아빠, 저는 이제 끝이에요. 도윤이가 기억을 되찾으면 저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요!”“기억을 되찾는다고?”서태원이 미간을 찌
병실 안은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고 오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성도윤은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차갑게 말했다.“차설아, 당신은 정말 대단해. 얌전해 보였는데 어느새 아이를 두 명이나 낳은 거야? 당신에 비하면 나의 인생은 보잘것없어 보여.”“서씨 가문 아가씨와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요. 지금 도윤 씨의 실력이라면 몇 년 안에 아이를 세 명 정도는 낳을 수 있어요.”차설아는 성도윤이 오해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해로 인해 두 사람이 멀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다.“나는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야.”성도윤이 차갑게 받아쳤다.“왜 가지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이한테 발목이 잡힐까 봐 그러는 건가요? 아직도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싶은가 보죠.”차설아는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가지지 않는 게 좋긴 해요. 책임감으로만 키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이를 향한 사랑을 꾸준히 표현해 주고 아이의 곁에 있어 줘야 해요. 나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거예요. 우리 아이들도 나 때문에 고생했고요.”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차설아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의 삶을 위해서 부모는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극진히 사랑하지 않는 이상 해낼 수 없었다. 달이와 원이를 키우는 동안, 차설아는 수도 없이 포기하고 싶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당신 말대로라면 잘 고려해보고 아이를 가졌다는 거네?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나 봐?”성도윤을 차설아를 쳐다보면서 차갑게 물었다.“애초에 아이를 가질 생각조차 없었어요.”차설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두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아이를 지우려고 했었지만 의사가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하는 건 드문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이를 지우면 다시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고 해서 낳은 거예요. 두 아이는 내가 원해서 생긴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무도 대체
차설아는 성도윤이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이불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성도윤을 자극해서 이성을 되찾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성도윤은 차설아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그동안 오해한 것 같아. 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야. 당신처럼 예쁜 여자가 내 눈앞에 있는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멍청이가 아닌 이상 당신을 이대로 내버려둘 리 없어. 정말 탐나는 여자거든...”성도윤은 손끝으로 차설아의 쇄골을 매만지더니 환자복의 첫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차설아의 몸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흥분되었다.“성도윤 씨,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직접 당신을 죽일 거예요!”차설아는 성도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당신이랑 사귄 적이 있었다고 했잖아. 당신과의 추억은 전부 잊었지만 어른들의 연애는 아주 뻔해. 옷 단추 하나 풀었다고 호들갑 떨 나이는 아니지 않아? 오버하지 마.”“이미 헤어진 사이에 이래도 될 것 같아요? 당장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성도윤을 노려보았다.“곧 결혼한다는 사람이 약혼녀를 두고 나를 겁탈하는 건가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차설아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피식 웃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흥미를 잃었는지 표정이 굳어있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나를 걱정하는 거야? 왜 나의 인생에 간섭하는 건데?”“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약혼녀가 불쌍해서 그래요. 당신 같은 남자를 거두어 주겠다고 나서는 여자는 천사니까요. 그 여자랑 결혼하면 다른 여자한테 더 이상 찝쩍대지 말아요.”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차설아, 당신은 두 아이의 엄마야. 아이나 잘 키울 것이지 왜 다른 남자를 유혹해?”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차갑게 대답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은아와 맺은 혼약을 취소하고 차설아랑 잘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차설아한테
성도윤은 의자에 기대앉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내가 왜 당신을 만나러 왔는지 알아?”“잘 모르겠어요.”차설아는 휴대폰을 찾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당장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오빠한테 전화할 거라고요.”“마음대로 해. 이 시간에 전화해도 구하러 오지 못할 거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얘기했잖아. 내가 아무 대책 없이 들어왔을 것 같아?”성도윤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차설아를 비웃었다. 계획적인 성도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설아의 병실로 들어왔을 리 없었다. 미리 손을 써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었다.“당신이라면 그랬겠죠.”차설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복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오늘 나의 목을 졸라서 죽인다고 해도 반항하지 않을 거니까요.”병실 안으로 내려앉은 달빛이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성도윤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코웃음 쳤다.“당신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야?”“도윤 씨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성도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성대 그룹 대표가 뒤끝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은 절대 손해 볼 타입이 아니에요. 저번에 내가 당신을 목 졸라 죽일 뻔했으니 당신이 날 죽인다고 해도 할 말 없어요. 억울하게 죽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요.”“그렇게 해야 우리 둘에게 공평하다는 말인가?”병실 안이 너무 어두워서 성도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설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늘고 약한 목에 손을 올려놓았다.“당신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참 쉬운 일이야. 백조처럼 목이 하얗고 가늘어서 비틀어 꺾어도 될 것 같아.”“잘 생각해 보고 죽여요. 충동 살인의 후과는 늘 좋지 못한 법이거든요.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미리 고려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