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와 원이가 차설아와 차성철의 손을 잡고 등장하자 이번 시합 1등이 누구의 것인지 확실해졌다. 복장과 헤어스타일 점수가 다른 가족들을 능가했기 때문이다.“오늘 1등은 우리 원이랑 달이인 것 같아요. 달이야, 원이야. 엄마랑 같이 힘내자!”차설아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응원해 주었다.이연지는 차설아의 옆에 서 있는 차성철을 힐끗 쳐다보고는 조각상 같은 외모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혹시 달이랑 원이 아버지세요? 너무 잘생기셔서 아이들의 큰오빠라고 해도 믿겠어요.”이연지가 원이와 달이가 있는 사과반을 맡은 지 몇 달 되지 않았다.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두 아이의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이분은 저의...”차설아가 해석하려는데 차성철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제가 달이, 원이의 아버지예요. 잘 부탁드릴게요.”“역시 아버지가 맞았군요. 사실 이번 소풍 활동은 전부 아이들과 부모님이 같이 참석해야 하거든요. 어머니거나 아버지가 아닌 다른 가족은 이 활동에 참가할 수 없어요. 시합이 시작되면 그저 옆에서 응원해 줄 수밖에 없고요.”이연지가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해 주었다.“알겠어요. 1등 할 수 있게 노력할게요.”차성철은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차성철이 미리 활동 참여 규칙을 알게 되었기에 달이와 원이의 아빠를 자처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나서 이곳까지 온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었다. 차성철은 사랑하는 조카들이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이때 차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연지한테 물었다.“선생님, 이런 규칙은 좀 별로인 것 같아요.”“달이, 원이 어머니. 어떤 면에서 별로라고 느끼셨을까요?”“시대가 변하면서 이혼율이 점점 치솟고 있어요. 엄마 혹은 아빠랑 자란 아이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같이 산 아이도 있어요. 부모가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시합에 참가할 자격도 없다는 건가요? 이 규칙은
어린이집 아이들은 10팀으로 나뉘었고 팀마다 정해진 미션을 완성해야 했다. 미션은 모두 5개였는데 난이도가 높아서 마지막 라운드에 세 팀밖에 남지 않았다.차설아와 차성철은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순리롭게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했다.5 번째 미션은 별 모양의 인형을 제일 빨리 높은 곳에 올려놓는 팀이 승리였다. 올려놓은 높이가 높을수록 더 많은 점수를 얻게 되었다. 이 미션은 암벽 등반과 똑같아서 부모님들의 팔힘과 끈기를 시험하는 코스였다. “세 팀 모두 부모님 중 한 분이 대표로 나와주세요.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별도 따주겠다던 약속을 지키길 바랄게요. 자, 이제는 출발선에 서주세요.”심판은 마이크를 잡고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높게 치솟은 암벽을 쳐다보더니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차성철한테 말했다.“오빠, 이 미션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암벽 등반이야.”“자세히 보니까 암벽 등반 체험장처럼 단단한 벽이 아닌 것 같아. 네가 다칠 수도 있으니 내가 할게. 달이, 원이와 함께 날 응원해 줘!”사실 차성철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암벽 등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달이, 원이의 아빠라고 거짓말까지 한 상황에 차설아의 뒤에 숨는다면 체면이 구겨질 것이다.“예전에 장재혁한테서 전해 들은 말이 있어. 오빠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한다더라. 그러니까 내가 가는 게 맞아. 4년 전에 제15회 아시안컵 암벽 등반 대회에서 일 등 한 사람이 바로 나야. 걱정하지 마.”차설아는 윙크하고는 안전 장비를 착용했고 별 모양의 인형 가방을 메고 출발선에 섰다.“엄마, 힘내세요! 마지막 미션만 통과하면 우리가 1등이에요. 우리 엄마가 최고예요!”달이는 앳된 목소리로 차설아를 응원했다. 그런데 원이는 작은 어른처럼 인상을 찌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엄마,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니면 제가 갈게요. 엄마는 여자니까 고생하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저는 남자로서 이런 위험도 감수해야 해요.”
선우시원은 늘 차설아를 부러워했었다. 사랑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차설아가 비밀리에 투입된 로봇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한편, 성도윤은 병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 소영금이 텔레비전을 켜자 마침 새싹 어린이집에서 진행하는 시합을 보게 되었다. 진지하게 보고 있던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코웃음 쳤다.“벌써 아이까지 있는 여자였구나. 남편이랑 같이 시합에 참가했겠지...”소영금은 고개를 돌려 성도윤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차설아의 남편이 바로 성도윤이라고, 저 아이들은 성도윤의 자식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의사가 성도윤이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기 전에는 되도록 자극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럴 때 성도윤한테 사실대로 말한다면 크게 충격받을 것이다.차설아가 아내이고 원이와 달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극을 받아서 겨우 나았던 병이 되살아날 수도 있었다. 그럼 다시 생사가 오가는 순간이 닥칠 것이다.“그래. 저 여자는 아이도 있는 사람이니까 마음 접는 게 좋을 거야. 거리를 두지 않으면 저 여자도 힘들어질 수 있어.”소영금은 성도윤이 차설아를 향한 마음이 사그라들길 바라면서 부드럽게 타일렀다. 적어도 건강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차설아한테 아무런 마음도 생기지 말아야 했다.“남편이 누군지 알고 계세요?”성도윤은 주먹을 꽉 쥐고는 차갑게 물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상대가 얘기해주기도 전에 프라이버시에 대해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란다. 너는 알 필요 없으니 그저 회복에 신경 써.”소영금이 확답을 주지 않자 성도윤은 침묵했다. 그러고는 깊은 눈동자로 텔레비전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저 여자는 아이가 둘이라는데 넌 여태껏 결혼도 못 했어. 얼른 낫고 서은아랑 결혼해서 아이부터 가져. 아니는 두 명 이상이 좋겠지.”소영금은 계속해서 성도윤을 타일렀다. 처음에는 차설아가 성씨 가문에 한 아이의 양육권을 넘기면 성도윤이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상관없었
우승이 결정되기 1분 전, 차설아는 이미 앞질러 가고 있었지만 안전장치가 느슨해져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십, 구, 팔, 칠...”심판은 마지막 10초를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현장의 분위기는 고조에 도달했고 모두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차설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위로 등반했다.“자, 이번 소풍 활동 우승자는 달이, 원이의 가족이에요! 축하해요!”심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설아는 그대로 추락했다. 안전끈이 풀어지는 바람에 신이 나서 손을 흔들고 있던 달이와 원이를 쳐다볼 새도 없었다.“꺅!”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놀란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설아야!”“엄마!”차성철, 달이와 원이가 차설아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지만 경호원이 그 앞을 막아섰다.“일단 진정하고 모두 객석으로 다시 돌아가세요. 안전장치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경호원은 손을 내저으면서 뭇사람들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바닥에 해면으로 된 추락 방지 매트가 깔려있었지만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차설아가 멀쩡할 리 없었다.차설아는 그 자리에 누워 꼼짝하지도 못했다. 이 상황에 골절은 면하지 못할 것이다.“당장 비키세요! 1분이라도 늦었다가는 당신 목숨으로 책임질 생각인가요?”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차성철은 경호원을 제치고 재빨리 차설아 쪽으로 달려갔다.“설아야, 괜찮아? 나 좀 봐봐.”차성철은 차설아를 안아 들면 더 다칠까봐 옆에서 그저 지키고만 있었다.“오빠, 나 괜찮아. 허리를 다친 것 같은데 아마 가벼운 골절일 거야. 매트가 충격을 흡수해서 그나마 다행이야.”차설아는 밀려오는 통증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차성철과 두 아이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차설아는 지금 누구보다도 두렵고 무서웠다. 이러다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엄마, 많이 아파요? 엄마가 다칠 줄 알았다면 시합에 참가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괜히 제가 같이 가자고 해서...”달이는 콩알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작은 손으로 차설
서은아는 지난번에 성도윤과 갈등을 빚은 뒤로 조심스러워졌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성도윤이 혼약을 취소할 수도 있었기에 눈치만 봐야 했다.다행히도 성도윤의 태도는 많이 좋아졌고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조금 있다가 친구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야.”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 잔에 물을 받고 있던 서은아는 친구가 온다는 말에 넋을 잃고 있다가 하마터면 끓는 물에 손을 델 뻔했다.“사도현 아니면 강진우? 내가 아는 사람이야?”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서은아를 노려보았다.“내가 친구 좀 만나겠다는데 너한테 보고까지 해야 해?”“그런 뜻이 아닌 걸 알잖아. 사도현이면 나도 아는 사람이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뜻이었어. 얼마나 바쁜지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거든.”서은아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너는 모르는 사람이야.”성도윤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그 정도로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 보면 알아.”성도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리면서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윤아, 우리는 매번 병원에서 만나는 것 같아. 이제는 밖에서 좀 보자.”캐주얼하게 입은 남자가 걸어들어오더니 서은아를 훑어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아, 제수씨도 계셨군요. 안녕하세요.”“누, 누구세요?”서은아는 처음 만난 남자를 경계하면서 지켜보았다.“신경외과 의사 박성훈이라고 해요. 우리 도윤이 잘 부탁드려요.”박성훈은 안경을 위로 올리고는 서은아한테 손을 내밀었다.“신, 신경외과 의사라고요?”서은아는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제수씨, 뭘 그렇게 놀라요? 제가 신경외과 의사인 게 너무 의외라서 그래요? 겁먹지 말아요. 저는 누군가를 해치는 사람이 아니에요.”박성훈은 서은아의 반응이 이상했지만 일단 농담으로 대처했다. 보통 신경외과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사람들은 숭배하는 눈길을 보내왔다.하지만 서은아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알아요. 그저
박성훈은 가슴팍을 툭툭 치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제수씨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어요. 정 걱정된다면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해 보세요. 제가 집도한 수술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수씨는 그저 도윤이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세요.”박성훈은 다른 건 몰라도 뇌수술과 바다낚시만큼은 실수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 있었다. 서은아는 예전부터 박성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성진과 음모를 꾸밀 때, 돈으로 박성훈을 매수해서 더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었다.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박성훈은 돈과 명예에 큰 관심이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다.환자를 보거나 수술을 집도하는 건 전부 기분에 따라서 결정했다.그래서 서은아는 박성훈보다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돈을 좋아하는 신경외과 의사를 찾아 수술을 맡겼다. 만약 박성훈이 성도윤의 수술을 집도하게 되면 들통날 것이 뻔했다.서은아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말했다.“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윤이가 안정을 찾은 지 며칠 되지 않았어요. 더 이상의 수술은 무리라고 봐요. 저는 도윤이가 그저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기억을 되찾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고 지금처럼 건강하면 돼요...”“제수씨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수술은 환자가 받는 거잖아요.”서은아의 말에 박성훈은 가만히 누워있는 성도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도윤아, 너는 기억을 되찾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성도윤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차갑게 말했다.“형을 이곳까지 오게 했다는 건 이 수술이 나한테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에요. 흐릿한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기억을 되찾고 마음 편하게 지낼래요.”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도윤이 성공한 사업가, 사랑하는 가족과 여자를 지킬 수 있는 남자였다. 완벽한 성도윤은 매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여겼다.그러나 성도윤은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닌 누군가의 조종에 따라 흘러가는 인생이 괴로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
“아마 불안해서 더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 수술하고 기억을 찾으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성도윤은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슬픔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서은아가 떠난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서은아가 옆에 있었기에 무수히 많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성도윤은 자신의 곁을 지켜준 서은아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싶었고 이 여자를 책임지고 싶었다. 수술 전이든 수술하고 나서든 여전히 서은아를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 수술은 그저 흐릿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박성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불안하다는 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졌기 때문이야. 너에 비하면 자신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꼈거나 너와의 관계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할 리가 없잖아.”“관계가 떳떳하지 못하다고요?”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박성훈의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아직은 이해 못 하겠지. 수술받고 나면 그 기억이 돌아올 거야. 그럼 왜 수술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불안해하는지 알게 돼.”박성훈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신경외과 의사로서 서은아가 왜 갑자기 긴장하고 두려워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극도로 무서워하는 건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성도윤한테 의심 가는 점을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형이 시간 될 때 수술을 부탁할게요. 나는 언제든지 상관없으니까 형이 수술 날짜를 정해줘요.”성도윤은 두 팔을 벌린 채 덤덤하게 말했다. 언제든지 수술대에 누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본 박성훈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누가 보면 내가 널 죽이는 줄 알겠어. 간단한 수술이니 미리 겁먹을 필요 없어. 지금의 너는 수술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야. 두 주일 정도 푹 쉬고 회복한 뒤에 수술해도 돼.”“알겠어요.”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너랑 같이 많은 것을 겪어온 애틋한 사람이 바로 저분이구나.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마음에도 파란을 일으켰다. 성도윤이 다급히 물었다.“다쳤다고요? 언제 어떻게 다쳤는데요?”“병원으로 이송된 지 얼마 안 되었어. 어린이집에서 열린 시합에 참가했다가 높은 곳에서 추락했대. 심하게 다쳤다고 기사가 났어.”박성훈은 심심해서 생방송을 보다가 차설아가 다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고는 성도윤의 반응을 보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아이가 둘이나 있는 애 엄마인데도 그렇게 좋아? 예전에 만날 때부터 재미난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 혹시 알아? 두 아이가 너의 아이일지...”“농담도 정도껏 해요.”성도윤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거만하게 말했다.“아무 여자하고 놀아날 정도로 무식하지 않아요. 그런 여자는 아이를 낳고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모를 거라고요.”“기억을 잃었다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을 네가 어떻게 알아? 가족한테 물어보지 그랬어.”“물어본 적 없어요.”성도윤은 차갑게 말했다.“두 아이가 내 자식이라면 엄마가 진작에 성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서 데려왔을 거예요. 그런데 엄마는 아이에 관한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아.”박성훈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추측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 두 주일 뒤에 회복되면 전면적인 검사를 진행할 거야. 수술할 만한 상태라고 판단되면 수술 날짜를 정할게. 그럼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그러죠.”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생각에 잠겼다.박성훈이 나간 뒤,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 팔에 꽂은 링거를 뽑아버렸다. 그러고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아무도 모르게 병원을 빠져나갔다.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대기하던 진무열이 걸어오면서 말했다.“보스, 아직 퇴원하면 안 돼요. 아직 다 낫지도 않았잖아요. 나중에 또 쓰러지면 어떡해요?”진무열은 창백한 성도윤의 얼굴을 보고 걱정되었다.“일단 나왔으니까 차에 타. 지금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어.”성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