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금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차설아를 이대로 곱게 보내줄 리 없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기가 죽은 모습을 하고서 대답하자 마음이 약해져서 욕하지도 못했다.“도윤이가 하마터면 네 손에 죽을 뻔했다는 걸 전해 들었어. 도윤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너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드나드는 걸 볼 때마다 너무 힘들구나. 너는 한때 나의 며느리였잖아.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이제는 도윤이를 만나러 오지 말 거라. 너랑 도윤이가 만나기만 하면 꼭 무슨 일이 벌어졌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는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야.”사실 소영금은 차설아를 처음부터 미워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차설아를 예뻐하고 마음에 들어 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차설아를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성도윤의 안전을 위해 차설아와 갈라놓아야 했다. 차설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셔도 멀리하려고 했어요. 오늘은 꼭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고요. 앞으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찾아오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세요.”“그, 그게 정말이니?”소영금은 눈시울을 붉힌 채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남을 배려해 주는 착한 며느리, 성도윤의 아내가 될 자격이 충분한 차설아였지만 두 사람이 사주는 상극이었다.사주만 아니었다면 소영금은 차설아를 딸처럼 예뻐했을 것이다.“저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차설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엮이고 싶지 않으면 아드님께도 잘 말해보세요. 저만 약속을 지킨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만약 성도윤이 먼저 저를 찾아와서 다치게 된다면 제 탓을 하지 말고요.”“도윤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퇴원하면 은아랑 곧바로 결혼식을 할 거란다. 그럼 도윤이도 너를 완전히 잊을 수 있겠지.”소영금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은아와 성도윤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소꿉친구였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면
“사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 너는 착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내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믿을게.”“용건만 얘기하세요.”“달이와 원이의 양육권을 우리 가문에...”“그건 절대 양보 못 해요. 제가 두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고 키울 거예요.”차설아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하지만 두 아이를 네가 혼자 어떻게 감당하겠어? 내가 도와주겠다는 뜻이야.”소영금은 차설아가 거절할 거라고 진작에 예상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차설아의 눈빛과 마주했을 때, 어쩐지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성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을 내가 포기할 것 같아? 두 아이는 성씨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이잖니!”“아니요. 아이들은 어머니의 유전적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하잖아요. 달이와 원이한테는 차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성씨 가문을 들먹이면서 강요하지 마세요.”“설아야, 네가 이렇게 단호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소송을 하면 두 아이 중 한 명 정도는 성씨 가문에서 데려갈 수 있을 거야.”“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저의 전담 변호사가 전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대단한 건 아시죠? 한 번도 패소한 적이 없으니 소송하려면 해보세요. 이 사건으로 세간이 떠들썩해지면 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차설아는 소영금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술술 말했다.“서씨 가문과는 상관없는 일이야!”소영금은 손을 내저으면서 말을 이었다.“요즘 따라 나도 생각이 많았어. 네가 아이의 양육권을 성씨 가문에 넘긴다면 우리 도윤이와 서은아의 혼약은 없던 일로 해줄게. 아이 한 명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도윤이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잘 키울 수 있어.”성도윤은 애초에 다른 여자한테 관심이 없었기에 결혼을 강요한다고 해도 성도윤이 득을 보는 일은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설아의 아이를 키우면서 남은 생을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 성도윤한테는 더 잘된 일이었다.“죄송해요. 아이들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차설아는 심호흡하고는 말
병원에서 돌아온 차설아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성철은 차씨 가문 저택 뒷마당의 화원에서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땅을 파고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뭐 하고 있었어?”차설아는 두 아이를 보고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서 미소를 지었다.“엄마, 이것 봐요! 삼촌이 꽃을 어떻게 심는지 가르쳐줬어요.”달이는 너무 열심히 뛰어논 바람에 볼이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차설아는 사과처럼 빨간 달이의 볼살을 깨물고 싶었다.“직접 심은 거야? 정말 대단해. 어떤 꽃을 심었는지 한 번 볼까?”차설아는 화원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심었어요. 삼촌이 어렵게 구한 이 해바라기 씨앗은 한 달이면 꽃을 피울 수 있대요. 그럼 화원은 온통 빛나는 해바라기로 가득 차서 해바라기 섬처럼 아주 예쁠 거예요.”달이는 작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달이와 원이는 해바라기 섬에서 태어났기에 그곳을 그리워하곤 했다. 행복한 추억과 꿈같은 꽃밭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엄마, 우리 언제쯤 해바라기 섬에 가요? 그곳에서 놀고 싶어요.”원이는 작은 삽을 내려놓더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진지하게 물었다.“너희들이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갈 수 있어.”차설아는 쭈그려 앉아 원이를 품에 안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요즘 엄마가 바빠서 안 될 것 같단다.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나면 같이 가자.”“해야 할 일이 뭔데요?”원이는 두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원이도 엄마를 도와줄 수 있어요?”“아니. 원이는 그저 달이랑 같이 재밌게 뛰어놀고 어린이집에 가서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면 돼. 그럼 엄마도 힘이 날 거야.”“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랑 달이는 어린이집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재밌게 놀고 있고요.”원이는 어른처럼 주먹을 꽉 쥐고 엄숙하게 말했다. 차설아는 고난이도 임무를 완성하는 것처럼 비장한 원이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우리 원이, 정말 멋진 아
달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아빠도 같이 가면 안 돼요?”“그 사람을 자꾸 아빠라고 부르지 마! 나쁜 사람이랑 왜 같이 소풍 가겠다고 그래?”원이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지만 뉴스에서 차설아한테 잘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성도윤이 다른 여자랑 곧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이는 차성철이 배정해 준 경호원의 눈을 피해 몰래 성도윤의 회사로 향했다. 그러나 성도윤은 원이를 못 본 척하면서 다른 여자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었다.그 뒤로 원이는 아빠를 빼앗겼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아빠라는 존재가 없다고 여겼다.아빠라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하지 못했으니 없다고 해도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원이는 그 사람 때문에 차설아가 상처받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그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었잖아! 우리 엄마를 속상하게 만들었으니 절대 용서 못 해. 엄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찾아가서 복수했을 거야.”원이는 씩씩거리면서 성도윤을 욕했다. “선생님께서는 부모님이랑 같이 오라고 했어. 아빠는 못 올 텐데... 어쩌지?”달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달이는 잘생긴 성도윤을 여전히 아빠라고 생각하면서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두 아이의 대화를 듣던 차설아는 심란했다.원이는 성도윤을 미워했고 달이는 성도윤을 사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감정과는 별개로 차설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더 무기력해졌다.“아빠가 없으면 삼촌이랑 같이 가면 되잖아. 걱정하지 마.”모자를 눌러쓴 차성철은 해바라기 씨앗을 화원에 가득 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너희들은 삼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삼촌을 보고 한눈에 반하면 어쩌지? 너희 삼촌이 어린이집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사람이 될 것 같아.”차설아는 일부러 농담하면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썼다. 이럴 때면 차성철 덕분에 무거웠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차설아는 차성철한테 휴대폰을 건넸다.“이건...”차성철은 영상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여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잊은 줄 알았지만 여전히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오빠, 조금만 기다려보자.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올 거야. 송지아가 다시 오빠를 찾아올 거라고 믿어.”차설아는 차성철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는 지아가 살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차성철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울먹였다. 한참 후에야 진정한 차성철은 휴대폰을 차설아에게 돌려주었다.“설아야,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날 도와주는지 알아. 시간이 지나면 나도 지아를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곧 자리에서 털고 일어날 테니까...”“오빠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마음이 놓여. 지금 상황으로서는 오빠를 닦달할 수밖에 없었어. 경수는 아직 마을 이장 손에 잡혀있고 장재혁은 실종되었어.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죽인 범인을 찾아야 하고 차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해. 우리 같이 기운 차리고 다시 힘내서 이겨내자. 함께라면 해낼 수 있어!”차설아는 이런 일들을 다시 입 밖에 꺼냄으로써 차성철의 삶에 대한 의지를 일깨워 주었다. 자극하지 않는다면 차성철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날 뒤로 차설아는 차성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예전처럼 부지런히 움직였고 어두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소풍 가는 날이 다가왔다. 이번 소풍 주제는 ‘추석’이었기에 아이들과 부모님은 한복을 입고 참석해야 했다. 소풍을 손꼽아 기다리던 차설아는 가족 한복 세트를 주문했다. 개량 한복이 유행이라 차설아와 달이는 기장이 적당하면서도 움직이기 편한 한복을 맞추었다. 차성철과 원이는 사극의 선비처럼 싱그러운 초록색의 한복을 선택했다.네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한복이 눈에 띄게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의 유전자가 확연히 남달랐다. 신체 비율, 외모, 몸매는 흠잡을 곳
달이와 원이가 차설아와 차성철의 손을 잡고 등장하자 이번 시합 1등이 누구의 것인지 확실해졌다. 복장과 헤어스타일 점수가 다른 가족들을 능가했기 때문이다.“오늘 1등은 우리 원이랑 달이인 것 같아요. 달이야, 원이야. 엄마랑 같이 힘내자!”차설아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응원해 주었다.이연지는 차설아의 옆에 서 있는 차성철을 힐끗 쳐다보고는 조각상 같은 외모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혹시 달이랑 원이 아버지세요? 너무 잘생기셔서 아이들의 큰오빠라고 해도 믿겠어요.”이연지가 원이와 달이가 있는 사과반을 맡은 지 몇 달 되지 않았다.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두 아이의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이분은 저의...”차설아가 해석하려는데 차성철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제가 달이, 원이의 아버지예요. 잘 부탁드릴게요.”“역시 아버지가 맞았군요. 사실 이번 소풍 활동은 전부 아이들과 부모님이 같이 참석해야 하거든요. 어머니거나 아버지가 아닌 다른 가족은 이 활동에 참가할 수 없어요. 시합이 시작되면 그저 옆에서 응원해 줄 수밖에 없고요.”이연지가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해 주었다.“알겠어요. 1등 할 수 있게 노력할게요.”차성철은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차성철이 미리 활동 참여 규칙을 알게 되었기에 달이와 원이의 아빠를 자처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나서 이곳까지 온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었다. 차성철은 사랑하는 조카들이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이때 차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연지한테 물었다.“선생님, 이런 규칙은 좀 별로인 것 같아요.”“달이, 원이 어머니. 어떤 면에서 별로라고 느끼셨을까요?”“시대가 변하면서 이혼율이 점점 치솟고 있어요. 엄마 혹은 아빠랑 자란 아이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같이 산 아이도 있어요. 부모가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시합에 참가할 자격도 없다는 건가요? 이 규칙은
어린이집 아이들은 10팀으로 나뉘었고 팀마다 정해진 미션을 완성해야 했다. 미션은 모두 5개였는데 난이도가 높아서 마지막 라운드에 세 팀밖에 남지 않았다.차설아와 차성철은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순리롭게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했다.5 번째 미션은 별 모양의 인형을 제일 빨리 높은 곳에 올려놓는 팀이 승리였다. 올려놓은 높이가 높을수록 더 많은 점수를 얻게 되었다. 이 미션은 암벽 등반과 똑같아서 부모님들의 팔힘과 끈기를 시험하는 코스였다. “세 팀 모두 부모님 중 한 분이 대표로 나와주세요.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별도 따주겠다던 약속을 지키길 바랄게요. 자, 이제는 출발선에 서주세요.”심판은 마이크를 잡고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높게 치솟은 암벽을 쳐다보더니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차성철한테 말했다.“오빠, 이 미션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암벽 등반이야.”“자세히 보니까 암벽 등반 체험장처럼 단단한 벽이 아닌 것 같아. 네가 다칠 수도 있으니 내가 할게. 달이, 원이와 함께 날 응원해 줘!”사실 차성철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암벽 등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달이, 원이의 아빠라고 거짓말까지 한 상황에 차설아의 뒤에 숨는다면 체면이 구겨질 것이다.“예전에 장재혁한테서 전해 들은 말이 있어. 오빠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한다더라. 그러니까 내가 가는 게 맞아. 4년 전에 제15회 아시안컵 암벽 등반 대회에서 일 등 한 사람이 바로 나야. 걱정하지 마.”차설아는 윙크하고는 안전 장비를 착용했고 별 모양의 인형 가방을 메고 출발선에 섰다.“엄마, 힘내세요! 마지막 미션만 통과하면 우리가 1등이에요. 우리 엄마가 최고예요!”달이는 앳된 목소리로 차설아를 응원했다. 그런데 원이는 작은 어른처럼 인상을 찌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엄마,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니면 제가 갈게요. 엄마는 여자니까 고생하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저는 남자로서 이런 위험도 감수해야 해요.”
선우시원은 늘 차설아를 부러워했었다. 사랑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차설아가 비밀리에 투입된 로봇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한편, 성도윤은 병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 소영금이 텔레비전을 켜자 마침 새싹 어린이집에서 진행하는 시합을 보게 되었다. 진지하게 보고 있던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코웃음 쳤다.“벌써 아이까지 있는 여자였구나. 남편이랑 같이 시합에 참가했겠지...”소영금은 고개를 돌려 성도윤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차설아의 남편이 바로 성도윤이라고, 저 아이들은 성도윤의 자식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의사가 성도윤이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기 전에는 되도록 자극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럴 때 성도윤한테 사실대로 말한다면 크게 충격받을 것이다.차설아가 아내이고 원이와 달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극을 받아서 겨우 나았던 병이 되살아날 수도 있었다. 그럼 다시 생사가 오가는 순간이 닥칠 것이다.“그래. 저 여자는 아이도 있는 사람이니까 마음 접는 게 좋을 거야. 거리를 두지 않으면 저 여자도 힘들어질 수 있어.”소영금은 성도윤이 차설아를 향한 마음이 사그라들길 바라면서 부드럽게 타일렀다. 적어도 건강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차설아한테 아무런 마음도 생기지 말아야 했다.“남편이 누군지 알고 계세요?”성도윤은 주먹을 꽉 쥐고는 차갑게 물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상대가 얘기해주기도 전에 프라이버시에 대해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란다. 너는 알 필요 없으니 그저 회복에 신경 써.”소영금이 확답을 주지 않자 성도윤은 침묵했다. 그러고는 깊은 눈동자로 텔레비전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저 여자는 아이가 둘이라는데 넌 여태껏 결혼도 못 했어. 얼른 낫고 서은아랑 결혼해서 아이부터 가져. 아니는 두 명 이상이 좋겠지.”소영금은 계속해서 성도윤을 타일렀다. 처음에는 차설아가 성씨 가문에 한 아이의 양육권을 넘기면 성도윤이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상관없었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며칠 동안 떠들썩했고 팬들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나와 현장 사진을 찍으러 갈 준비를 했다. 소식이 뜨자마자 바로 달려나갈 수 있게.오늘은 원래 진찬영과 배경윤의 계약식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별빛 엔터테인먼트도 준비 태세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소속사 임원진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별빛 엔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저기서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를 축하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반겼다.“찬영아, 경윤 씨.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 회사로 온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자자, 거두절미하고 우리 얼른 회의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죠!”장윤태 감독은 한시라도 더 빨리 계약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회의실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번 연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출연자들이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전부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길가면 무조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에, 진창영 배우님! 정말 잘생기셨어요. 티브이에서도 그렇고 실물도 정말 똑같이 잘생기셨어요!”인기 배우 소수민이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다른 두 여자 중 한 명은 명문대를 다니는 4학년 장유빈이었고, 남은 한 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이나였다.두 사람은 열정적인 소수민과 달리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두 눈에 진찬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저기요.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거든요? 벌써 그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해요. 명한 씨, 저희 둘은 들러리가 확정이겠네요!”스포티하게 입은 남자가 단정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 하늘이었고 단정한 모습의 남자는 유명한 보험계리사 백호연이었다.“늘이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러리가 확정이라
배경윤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진찬영을 바라보았다.“찬영 오빠!”그러고는 진찬영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진찬영은 누구보다도 더 멋있어 보였다. 길을 건너던 배경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진찬영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갔고 배경윤을 와락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간신히 피했고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보아도 애틋한 커플인 것 같았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경윤은 진찬영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전류가 온몸을 뚫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쓱하게 웃었다.“찬영 오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까지 다칠 뻔했어요.”배경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횡설수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배경윤은 수줍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내가 길을 건넜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부 제 탓이에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색 셔츠에 카키색 청바지를 입은 진찬영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매력이었다.길을 걷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여자도 진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길 건너에서 걸어오는 배경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진찬영이었다.“곧 커플로 촬영할 사이인데 편하게 말 놓아도 돼요. 제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진찬영이 진지하게 사과하자 배경윤은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아, 그러네요. 나의 여자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해요.”진찬영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진찬영의 행동 하나가 배경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흠! 얼른 회사로 가요. 장 감독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말을 마친 배경윤은 뒤돌아
반대로 사도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배경윤을 쳐다보았다.“급한 일도 없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 얼마나 좋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사도현,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바빠.”배경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도현이 끌어당기면 질질 끌려갔고 기세로 사도현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뻔뻔스러운 사도현을 어쩌지 못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할 일이 없겠어? 너를 만나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배경윤을 바라보았다.“이 멍청한 놈!”배경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욕했다. 사도현이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사도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듣기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결정했다더라? 진찬영이랑 커플로 연기하는 대본도 받았지?”“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니야.”배경윤이 부정하자 사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나랑 찬영 오빠는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커플이야. 그런 대본 따위 필요 없어.”“배경윤!”사도현은 배경윤의 도발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사도현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왜? 내가 기뻐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배경윤은 늘 싸움에서 기세에 눌렸지만 사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 드디어 이기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배경윤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가 나서 쓰러져야 네 속이 시원하지? 그런 거야?”사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커플이라면 싸울 때도 있을 거야. 작은 다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이건 상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야.”“이게 커플 사이에 싸우는 거로 보여?”배경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피식 웃었다.“내가 네 여자 친구라는 거야, 아니면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
차설아는 해바라기 꽃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옛 친구가 보낸 선물이야.”“어느 친구가 보낸 거야? 너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말이야.”배경윤은 해바라기 꽃의 내음을 맡으면서 싱글벙글 웃었다.“네가 아는 사람이야.”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불안해 난 선우시원이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설마 나도 아는 사람이야?”“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적어도 성도윤은 아니라는 거네? 누가 꽃을 보냈는지 몰라도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성도윤만 아니면 돼.”“왜 성도윤만 아니면 된다는 건데?”차설아는 선우시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성도윤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냈든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은 성도윤 한 명뿐이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총명해 보였던 선우시원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서 의외였다.만약 선우시원이 밤마다 성도윤이 찾아와서 차설아한테 디저트를 먹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댈 것이다.“누가 보낸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설아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으니 좋은 사람 같아.”배경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설아를 관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이 전생에 차설아의 엄마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나 해줘. 어떻게 되었어?”차설아는 배경윤이 걱정되어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이랑 화해한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그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지?”“내가 그놈이랑 싸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배경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면 신이 났다가 자신의 감정사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뜩 긴장했다. 배경윤은 말을 버벅거렸다.“나는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
사실 차성철은 최근 들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차설아의 병실에 긴급 신고 버튼을 설치해 주었다. 버튼만 누르면 병원의 긴급 벨이 울리면서 차성철이 배치한 보디가드가 병실로 달려올 것이다.차설아는 성도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차성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도윤을 향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지키지 못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떠보다가 결국 그 선을 넘어왔다.“나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행복할 뿐이야. 그래서 당신의 입도 닦아준 건데 싫으면 얘기해. 내일 밤부터 다시 오지 않을게. 케이크를 사던 가게의 파티시에를 스카우트해서 매일 케이크를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이었다.“내일 메뉴는 헤이즐넛 케이크라고 했어. 아쉽지만...”“잠시만요!”차설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차설아가 제일 기대하던 메뉴가 바로 헤이즐넛 케이크였기에 성도윤을 내쫓을 수 없었다.“파티시에도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르겠어요. 내일도 와주면 고맙겠지만 앞으로는 뭐가 묻어도 도와주지 말아요.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직접 닦을게요.”“그래. 당신이 이토록 애원하니 한 번 고려해 볼게.”성도윤은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여우처럼 교활하기 그지없었다.“휴...”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성도윤은 예전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를 부드럽게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맛있는 케이크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 되어갈 때쯤 차설아는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성도윤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성과는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이제는 병실로 돌아갈 테니 푹 쉬어. 내일 밤에도 올 테니까 기다려. 잘자.”차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릿속은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퍼붓던 화면으로 가득 차서 얼굴이 화끈
차설아는 병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성도윤이 늦은 밤에 가져다주는 야식이 유일한 낙이었다. 차설아는 누워서 입을 벌리고 성도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애틋한 커플 같아서 오글거렸지만 케이크를 먹기 위해 꾹 참았다.“역시 다크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을...”크림과 초콜릿이 조화를 이루어서 입안에 가득 퍼졌다. 차설아는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내일도 가져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어쩌려고 그래.”성도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하면서 허겁지겁 먹는 차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의도치 않게 성도윤의 손가락을 물게 되었다.긴 손가락이 차설아의 입에 들어가자 성도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고 닭살이 돋았다.“어머.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급하게 먹다보니...”차설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면서 성도윤한테 사과했다.“더 먹을래?”성도윤은 뜨거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아, 아니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민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성도윤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더 이상 케이크를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숨을 기세였다.“안 먹으면 입부터 닦아. 다 묻히고 먹었잖아.”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차설아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설아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음식을 몰래 훔쳐먹은 고양이 같아서 더 귀여웠다.“그럼 티슈 좀 주세요. 입에 묻은 줄도 몰랐어요.”차설아는 혀로 입가를 날름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성도윤은 내가 며칠 굶은 줄 알겠어. 아, 손가락까지 물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왜 그랬지?’“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뭐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티슈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뜻이야.”“왜요? 다 썼어요?”“아니. 내가 닦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