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철은 차설아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설아야, 역시 넌 나를 잘 아는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들켜버렸으니 말이야.”“내가 오빠한테 처음 송지아에 관해 물어본 날, 나한테 단 한 번도 화내지 않았던 오빠가 나한테 화냈었잖아. 송지아라는 세글자가 오빠한테는 금기어였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송지아한테 강한 집념을 보이면서 자아를 잃어가는 것 같아. 하루에 수십 번씩 웃다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잖아.”차설아는 차성철이 의식을 되찾은 뒤에 성격이 완전히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차성철이 송지아를 증오하는지 사랑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사실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만약 차성철이 송지아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사라졌다면 얘기해도 될 것이다.하지만 차성철이 여전히 송지아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송지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절대 알려주어서는 안 되었다. 송지아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기에 차설아는 계속 고민했다.“두 번이나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마음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차성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어떻게 달라졌는데?”“처음 죽을 뻔했을 때는 증오하는 마음이었어. 복수하기 위해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어. 가족이 주는 사랑에 보답하고 내 가족을 지키겠다고 생각하면서 꼭 살고 싶었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편하더라. 복수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차성철은 솔직한 감정을 내뱉었다. 차설아 앞에서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그럼 오빠는 이미 송지아를 용서하고 그 일로 인한 원한을 풀었다는 뜻이잖아? 이제는 송지아가 밉지 않은 거지?”차설아는 차성철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마도 그렇겠지. 그런 건 이제는 소용없어...”차성철은 슬픈 두 눈을 하고서 허공을 바라보았다.“내가 용서하든 말든 지나간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어. 죽
차설아는 다시 한번 확고하게 말했다. 차성철은 입술을 깨물고는 놀란 마음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들려온 좋은 소식에 흥분했는지 축 늘어졌던 몸이 덜덜 떨렸다.“오빠, 괜찮아? 많이 놀랐어?”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차성철이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나 지금 멀쩡해. 아주 멀쩡해!”차성철은 심호흡하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송지아가 살아있다면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처럼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거지? 사고를 당해서 계속 입원해 있었던 건가?”“아, 그게 말하려면 좀 길어. 그러니까 송지아는...”차설아는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었다.“경수가 변강섭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내가 송지아랑 같이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 조금만 늦었어도 그 마을 사람들이 송지아의 신체 기관을 꺼내서 팔았겠지만 송지아는 애초에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었어. 몇 년 동안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았거든... 그 마을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었대.”동쪽 금각 지대는 암흑 지대라고도 불렸다. 마약과 범죄의 지대에 들어갔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송지아처럼 예쁜 여자들은 지옥의 맛을 보았고 줄줄이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송지아는 그중에서 살아남은 행운아였다.“됐어! 이제는 그만 말해. 말하지 말라고!”차성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설아의 말을 듣고 휘청거리더니 손을 내저으면서 그만 말하라고 했던 것이다. 차성철은 동쪽 금각 지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영흥 부둣가는 동쪽 금각 지대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모를 리 없었다.성심 전당포가 자리를 잡고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건, 송지아처럼 어린 여자아이들로 거래한 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차성철이 송지아와 충돌이 생긴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성인이 된 차성철은 송지아와 같이 어촌을 벗어나 영흥 부둣가로 향했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송지아를 위한 정원을 꾸렸고 예쁜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그, 그때는 오빠한테 송지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될 것 같았어. 오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오늘은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았어?”차설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응. 나는 오빠를 믿어. 적어도 오빠는 송지아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 같았어. 송지아의 곁을 지키면서 평생 보호해 줄 사람 같아서 얘기한 거야.”“아니. 네 추측이 틀렸을지도 몰라.”차성철이 주먹을 꽉 쥔 채 단호하게 말했다. 차설아는 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봐 식겁해서 다급히 물었다.“오빠, 그 말 무슨 뜻이야? 아까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보다 쉬워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잖아. 이제는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해?”“설아야, 이건 나만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차성철은 먼 곳을 내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증오의 씨앗이 심어지고 싹이 튼 후부터는 쉽게 뽑아낼 수 없어. 나는 다 내려놓았지만 송지아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화해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오빠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어.”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성철이 송지아를 미워하지 않는 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오빠, 걱정하지 마. 송지아는 오빠가 밉긴 하겠지만 여전히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왜 죽기 전에 오빠의 이름을 불렀겠어? 내가 송지아랑 잘 얘기해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해볼게. 나만 믿어!”차설아는 송지아와 차성철이 다시 만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했다.“고마워. 나도 송지아랑 얘기해 보고 싶었어. 사과하고 못다 한 말도 할 거야.”차성철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평화로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 해가 밝았다. 차성철은 일찍 일어나서 맨투맨과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빛나는 미모에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니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잠에서 깬 차설아는 머리를 빗지도 않고 잠옷
차설아는 재빨리 씻고는 가족들과 함께 식탁 앞에 모여 앉아 아침을 먹었다.“이 저택이 이렇게 북적북적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두 분이 이 모습을 보셨다면 정말 기뻐했을 거예요.”이른 새벽부터 아침 식사를 준비한 민이 이모는 다 같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울컥하면서 말했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 매일 이렇게 행복할 거예요. 차씨 가문 저택에서 다 함께 지내면서 즐겁게 보내자고요!”“그래요. 이런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겠어요.”아침 식사를 마친 뒤, 민이 이모는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등교하러 갔다. 차설아는 책을 읽고 있는 차성철한테 말을 걸었다.“오빠,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집에서 쉬는 건 어때? 난 일이 있어서 나갈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줘.”차성철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너 설마 지아를 찾으러 가는 건 아니지?”“그, 그게 있잖아...”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성철의 질문에 거짓말해도 결국 들통나게 되기 때문이다. 차성철은 책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같이 가자.”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다. 차설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오빠도 같이 간다고?”“왜? 나도 같이 가면 불편해서 그래?”“불편한 게 아니라 오빠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차설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송지아는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성격이 변했어. 오빠가 기억하는 천진난만한 송지아가 아니란 뜻이야. 그리고 오빠를 향한 증오가 생각보다 더 깊을 수도 있어. 그런 상황에 갑자기 오빠를 만나게 되면 어떤 반응일지 짐작이 안 가.”차설아는 송지아가 빨개진 두 눈을 하고서 차성철을 죽이겠다고 난리 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는 곳에서 죽음보다 더 두려운 나날들을 보냈기에 모든 잘못을 차성철에게 전가하는 것도 예상했던 것이었다.“설아야, 난 괜찮아. 송지아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 또다시 칼로 나를 찌
차설아는 인맥을 통해서 송지아의 주치의를 만나게 되었다.“의사 선생님, 혹시 1206호 병실에 있던 환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다른 병실로 옮겨진 건가요?”차설아는 송지아가 차성철이 입원했던 병실과 같은 층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혼수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몇십 미터를 두고 만나지 못했었다.의사는 차설아와 차성철이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찾아오기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 의사는 안경을 위로 밀더니 차분하게 말했다.“너무 늦게 오셨어요. 송지아 씨는 이미 퇴원했거든요.”“네? 퇴원했다고요?”차설아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한 달 전에 상황이 심각해서 적어도 3달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왜 퇴원한 거죠? 더 치료받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환자가 퇴원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말려봤지만 환자의 의지가 확고하더군요. 이 병원의 의사는 환자의 뜻에 따라야 해요.”“환자가 퇴원하겠다고 했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송지아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거죠? 그럼 퇴원할 때 몸은 어땠어요? 지금 퇴원해도 괜찮은 건가요? 또 갑자기 쓰러지지는 않겠죠?”차설아는 송지아의 상황이 차성철보다 더 심각해서 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혼수상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좋아졌지만 계속 깨나지 못하고 있었다.의사도 언제 깨날지 확답을 주지 못했는데 송지아가 퇴원하겠다고 말한 걸 보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차설아한테는 좋은 소식이었다.“송지아 씨는 기운을 차렸어요. 더 치료받고 안정을 취하면 좋았겠지만 거절하더군요. 아시다시피 몸에 상처가 많고 허리 양측에 난 상처가 깊어요. 자칫하다가 또 염증을 일으킬 수 있어서 걱정이에요. 하지만 송지아 씨가 퇴원하겠다고 했으니 강요할 수 없었어요.”의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송지아는 의사가 그동안 치료한 환자 중에서 제일 신경 써준 환자였다. 연약한 몸에 수많은 흉터와 화상이
“그래. 지아는 내가 집착이 심한 괴물로 보였을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지아가 날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지금처럼 나한테서 멀어지는 게 나아.”차성철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차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어쩌면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무술을 배우거나 칼을 익숙하게 다루어서 그때처럼 날 한 방에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오빠,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니까! 송지아를 찾을 방법을 생각할 테니 기다려줘. 만나서 오빠가 잘 얘기하면 돼.”“만약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절대 발버둥 치지 않았을 거야. 지아는 내가 바다에 잠겨 죽기를 바랐을 거라고...”차성철은 차설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송지아의 미소가 차성철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 같았다. 차설아는 차성철이 몹시 걱정되었다.‘얼른 송지아를 찾아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해. 하지만 갑자기 퇴원한 송지아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의사한테 물어보았지만 송지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송지아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혼자 퇴원 수속을 밟고 인파로 숨어들었다.송지아가 작정하고 숨었다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다.“오빠, 일단 집으로 가서 쉬어. 내가 송지아를 찾아볼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차설아는 차에 올라탔고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해안시에 송지아랑 관련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퇴원하면 제일 먼저 누구를 찾아갔을 것 같아?”“그런 사람 없어.”차성철은 가만히 있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지아의 가족은 내가 직접 죽였어.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나뿐일 거야.”“흠!”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헛기침했다. 송지아한테 직접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하지만 차성철이 인정했으니 사실이라는 뜻이었다.‘오빠가 송지아의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 복수하고 싶어 했겠지. 만약 내가 송지아였다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난도질했을 거야.’“오빠, 송지아의 부모님 즉 오빠의 수양부모님을 다 죽였다는 거야? 오빠는 이유
“아이를 지운 게 뭐?”차성철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재앙 같은 존재였어. 하지만 지아는 멍청하게도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 나는 지아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서 악역을 자처했을 뿐이야.”차설아는 차성철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그, 그렇지만 오빠랑 송지아는 특별한 사이였잖아. 소중한 여자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축복일 텐데 오빠는 도대체 왜 그런...”“닥쳐!”차성철은 차설아를 노려보면서 종래로 본 적 없는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이 일에 대해서 더 묻지 마. 만약 나를 네 오빠로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그만둬. 너는 호기심을 빌미로 나의 상처를 발가벗기고 있어. 더는 선 넘지 마. 알겠어?”집 앞에서 차가 멈춰서자 차성철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차설아는 그 뒤를 따라가지 않고 차 안에 앉아 한숨만 내쉬었다.차설아의 추측이 맞다면 강제적으로 지운 아이가 차성철과 송지아 사이의 원한으로 되었을 것이다. 지나간 일은 오로지 당사자들만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차성철과 송지아는 이 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싫어했기에 미워하는 마음은 점점 쌓여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곪은 상처는 자꾸 덧나서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차설아는 송지아를 먼저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퇴원한 송지아를 찾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 도시에서 송지아가 퇴원하자마자 연락할 만한 사람, 송지아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 단 한 사람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성도윤이었다.차설아는 자신의 손에 죽을 뻔한 성도윤을 다시 찾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성도윤이 아니라면 송지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이번이 마지막이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성도윤을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제와 비싼 과일을 사서 병원으로 향
성도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키위를 먹다가 은근슬쩍 물었다.“내가 키위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이런 것까지 알아주니까 우리가 인연이 깊다는 생각이 들어.”“당연히 깊죠. 당신은 하마터면 우리 오빠를 죽일 뻔했고 나는 하마터면 당신을 죽일 뻔했어. 이런 인연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차설아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내가 당신 오빠를 죽일 뻔하고 당신이 날 죽일 뻔했으니 퉁친 셈이잖아.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래?”성도윤은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차설아는 갑자기 오래전에 사라진 성진이 떠올랐다. 성도윤은 성진의 피를 주입한 뒤로부터 냉혈한 유전자가 희석된 것처럼 자꾸 다정하게 굴었다. 행동하는 것이 성진을 똑 닮았다.“나는 당신을 목 졸라서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성대 그룹 대표라는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할 줄 몰랐네요.”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럼 당신은 날 용서했어?”성도윤이 되레 반문하자 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성도윤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당신은 내가 미워? 아니면 날 용서한 거야? 확실히 알려주어야 나도 내 주제를 알잖아.”차설아는 고개를 들고 성도윤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지금 그게 중요해요?”“나한테는 당신의 대답이 중요해.”성도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입원하는 동안 차설아와 관련된 조각들이 조금씩 머리에 스며들고 있었다. 가끔 흐릿한 두 장면이 떠오르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두 차설아와 연관된 것이었다.성도윤은 직감적으로 차설아를 예전부터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기에 차설아가 성도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했다.“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우리 오빠의 산소마스크를 벗긴 게 정말 당신인가요?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차설아는 예리한 눈빛으로 성도윤의 마음을 흔들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표정을 굳히며 오만한 태도로 진무열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 지금 도윤이에 대한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예요?”“아니요,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을 위해서 어떤 희생까지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거죠.”이기적이고 강압적인 보스라 할지라도 감정에서는 많은 시련을 겪었었기에 진무열은 서은아가 성도윤에게 정말 어울리는 짝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차설아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만약 서은아도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면 성도윤이 또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진무열이 걱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목숨까지도 내어줄 거에요.”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입술을 깨문 채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때 그 여자 오빠가 미친 사람처럼 도윤이 납치해갔을 때 내가 도윤이 구하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진 비서님은 모르죠?”이 얘기는 처음 듣는 진무열은 호기심에 차 물었다.“무... 무슨 일을 겪었는데요?”“차설아 씨 오빠가 도윤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비서님도 알죠?”“대표님과 자정 살인마가 오랫동안 싸우기는 했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어요.”두 사람의 원한에는 깊은 관여를 하지 않고 가끔 조언을 해준 게 전부였기에 진무열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둘 다 원한을 내려놓고 화해하는 게 서로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성대 그룹의 고위 간부들은 이 기회에 자정 살인마를 제대로 눌러놔야 한다며 성도윤을 부추겼지만 성도윤은 결국 박성훈을 보내 차성철을 구해주며 그와의 화해를 선택했다.타인에게 장미를 건네면 내 손엔 그 잔향이 남는다고 그 인연으로 성도윤도 이번에 박성훈에게 수술받아 기억을 되찾을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이렇게 보니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은 하늘도 굽어살펴 주는 것 같았다.“둘은 화해했지만 나는... 내가 받은 상처는
그 모습을 보던 성도윤은 눈썹은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됐어, 성훈이 형 실력이면 너희들이 아무리 숨겨도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 뭐.”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와 들고 있던 보온 용기까지 떨어트려 버렸다.“아! 아파...”뜨거운 국물에 덴 손이 아픈지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성도윤도 빠르게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로 향했다.“괜찮아?”“응, 그냥 살짝 데인 것뿐이야.”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서은아의 표정은 서러움 그 자체였다.“봐봐.”여자의 앞에 쭈그려 앉은 성도윤은 빨개진 손등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진무열을 향해 말했다.“진무열, 은아 보건실로 데려가.”“괜찮아,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하지만 서은아는 계속 괜찮다고 하며 바닥에 엎질러진 국물을 보며 말했다.“너 주려고 온 오후 끓인 건데 다 쏟아버려서 어떡해... 그리고 네 러그도 더러워졌네.”“그거야 다시 끓이면 되고 러그도 사람 불러서 청소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네가 여기서 다치면 내가 미안하잖아 괜히. 그러니까 말 들어.”“알, 알겠어.”성도윤의 다정한 모습을 다시 본 서은아는 밀려오는 행복감에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하지만 만약 수요일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성도윤은 다시는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기억을 되찾은 그라면 전에 자신이 의사를 매수해 뇌에 이상이 생기게 만든 걸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그래서 서은아는 지금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마냥 불안했다.“아가씨, 저 따라오세요.”서은아를 데리고 성대 그룹 보건실로 향한 진무열은 의료진이 처치를 해주는 걸 보며 팔짱을 끼더니 서은아를 향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우리 대표님 마음 사로잡기가 쉽지 않죠?”“진 비서님도 내가 너무 달라붙으니까 꼴사나워 보여요?”“아가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전혀 꼴사납지 않죠.”진무열은 또 옛날의 차설아를 떠올리며 말했다.“예전 사모님도 서은아 씨처럼 우리 대표님한테 지
보온 용기를 들고 들어온 서은아는 활짝 웃으며 성도윤에게로 다가섰다.“보신탕 끓여왔는데 이게 위에 좋대, 너 안 그래도 위 안 좋은데 얼른 마셔봐.”그녀가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로운 보신탕의 냄새가 확 풍겨오자 진무열은 감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와, 냄새 너무 좋은데요. 서씨 집안 아가씨로 살면서 요리는 언제 배우셨어요?”책상을 마주 앉아 계약서를 넘기던 성도윤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가져가서 마시던가.”“...”성도윤에게 보신탕을 덜어주려던 서은아는 매정한 남자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는데 진무열도 바보는 아닌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가씨가 대표님 위해서 직접 만들어 오신 건데 제가 뭐라고 감히 그걸 마셔요, 저는 그냥 뜨거운 물 마실게요.”그 말에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은 서은아가 진무열을 보며 웃었다.“많이 해와서 괜찮아요. 드실 거면 덜어드릴게요.”“말씀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냥 장난이었어요. 대표님 요새 마침 속 안 좋으신데 대표님 다 드리세요. 앞으로 종종 해주시면 좋고요...”말을 하던 진무열은 갑자기 제 아내를 떠올리며 말했다.“대표님 이혼 전에는 사모님도 이런 보신탕 자주 해왔었는데 대표님만 드리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다 나눠줬었어요. 회사 복지라면서 곳곳에 놔두고 왔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우렁각시라는 별명도 얻었죠.”“그... 그래요?”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꾸했다.이렇게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성도윤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방해할 게 분명했기에 서은아는 하루빨리 진무열부터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일에 열중하며 진무열과 서은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성도윤은 갑자기 들리는 ‘이혼’과 ‘사모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며 물었다.“진 비서, 아까 이혼이라고 했어?”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캐묻기 시작했다.“내가 전에 결혼을 했었어? 그리고
전화를 끊은 차설아는 생각 없이 말만 내뱉는 제 입을 원망하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로 지내오다가 이제야 사랑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을 응원은 못 할망정 저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으니, 혹시라도 그게 도화선이 되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차설아는 점점 두려워졌다.무슨 일이 있어도 남의 혼사는 깨는 게 아니라는데 이런 금기를 범했으니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한편 성도윤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든 채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성대 그룹 대표 사무실에 앉아있던 그의 옆에는 진무열과 그가 불러온 해커도 함께 있었다.“찾았어?”“네, 찾았습니다.”성도윤이 전화를 할 때도 열심히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전화 신호가 잡히는 곳은 해안시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수림입니다.”남자가 빠르게 좌표를 찍어주자 진무열은 그걸 인터넷에 검색해봤는데 이내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대표님, 이 별장... 성진 씨 별장인데 차설아 씨가 성진 씨랑 같이 있는 걸까요?”“나도 눈 있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함께 화면을 보고 있던 성도윤은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헛웃음을 흘렸다.“옛친구랑 이렇게 뜨거운 재회를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괜히 걱정했네.”“대표님, 진정하세요. 차설아 씨는 이제 자유의 몸인데 그분이 누굴 만나든 누구랑 데이트를 하든 그건 다 그분 자유죠. 이건 선 넘으시는 거예요.”기억을 잃은 탓에 많은 일들을 기억 못 하는 성도윤이지만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지 그녀의 일이라면 성도윤은 늘 이성을 잃곤 했다.비서로서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무열은 가슴이 아파서 제 보스가 하루빨리 끝난 사이는 떨쳐버리고 새로운 인연과 함께 새 삶을 살길 바랐다.“아까 서은아 씨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몸도 아직 다 회복 못 하셨는데 야근부터 하신다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지금 보신탕 가지고 오신대요.”서은아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진무열이
그에 차설아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성도윤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설아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그에 핸드폰을 귀에서 뗀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는 왜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하하, 아니지.”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웃으며 비꼬기 시작했다.“그냥 하룻밤 잔 사이니까 이런 연락은 불필요한 거긴 하지.”남사스러운 말에 얼굴이 빨개진 차설아는 차갑게 대꾸했다.“용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끊을게요.”“잠깐만!”끊는다는 말에 조급해진 성도윤이 소리치며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같이 있어? 거기 안전하긴 한 거야?”“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같이 있는지를 당신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 물어보니까 얘기는 하는데... 아주 안전해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딴 쓸데없는 통화도 하는 거겠죠?”차설아는 혹시나 성도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진짜야?”하지만 성도윤은 조심성이 많고 예리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나는 못 믿겠는데, 네가 영상통화를 건다면 몰라도.”“영상통화라니, 드디어 미친 거예요? 우리는 친구도 못 되는 사이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굳이 그걸 알자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표정을 잔뜩 굳힌 성도윤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지금 어디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친구 집에 있어요. 친구랑 사이도 좋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성도윤의 관심 따위 매정하게 넘기면 그만이었겠지만 얼마 전 원이가 한 말이 떠오른 차설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그건 무슨 말이야? 뭘 알기라도 한 거야?”성도윤처럼 예민한 사람은 차설아가 흘리듯
“제가 그분이었으면 진작에 신분을 밝히고 감사 인사라도 받았겠죠. 뭐하러 성진 씨를 속이겠어요?”“그 사람은 나한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청아 씨가 더... 그 사람 같은 거예요.”“착각하신 거예요.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제가 눈을 내어주는 건 돈을 위해서인데 그분은 뭘 위해서 당신에게 눈을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은...”자신의 커리어가 있고 아이도 있고 성도윤과 한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녀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 같은 병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기에 성진은 차설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정말 헛된 꿈을 꾼 것만 같아 성진은 차설아의 손을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세요. 이틀 뒤에 뵙죠. 수술만 잘 끝나면 얼마를 원하든지 다 드릴게요, 그쪽이랑 가족분들 노후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든든하네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남자와 가슴을 부딪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그때 아래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박서영이 내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빠르게 달려가며 물었다.“어때요, 안 들켰어요?”“들킬뻔했어요.”“그래서 어떻게 했어요?”“잘 넘어갔죠.”정원 쪽을 보며 한숨을 쉬던 차설아가 말을 이었다.“저 정도로 순정파일 줄 몰랐는데, 이젠 눈을 줄 수밖에 없게 됐네요. 안 돌려주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요.”“잘 부탁드려요.”“다른 볼일 없으면 난 이만 지하실로 돌아갈게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곤란하잖아요.”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하는 박서영을 보면서도‘움직이는 기관창고’답게 담담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죄송해요...”그녀의 태연함 앞에서 박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전에는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애썼는데... 제 도련님이 눈여겨 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너그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