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소연은 차성철을 바라보면서 차성철의 엄마 허지현을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남소연의 마음은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지현이가 힘들어할 때 내가 곁에 있어 주었다면 그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겠지...’“아저씨, 아주머니! 오늘은 오빠가 퇴원해서 기쁜 날이잖아요. 슬픈 얘기는 잠시 넣어두고 일단 같이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떨까요? 다른 얘기는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사람들을 식탁 쪽으로 안내했다. 사실 차설아는 복수에 대한 생각을 멈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복수에 눈이 멀어 막무가내로 원수를 덮친다면 되레 차씨 가문이 위험해질 수 있기에 계획부터 자세하게 짜야 했다.뭇사람들은 식탁 앞으로 모여들었고 맛있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면서 환하게 웃었다.“제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먼저 말씀드릴게요. 오빠를 위한 복귀 파티를 열어서 재벌가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오빠가 차씨 가문의 장자라는 것을 모두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어요.”차설아는 술잔을 든 채 뭇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차설아는 어릴 적부터 고생하고 상처받은 차성철이 안쓰러웠다. 차성철은 가정의 화목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차씨 가문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차성철을 위한 파티를 열어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고 다른 가문한테 차씨 가문의 실력을 선보이고 싶었던 것이다.“그럴 필요 없어. 파티 주최 비용도 그렇고 많은 인력이 동원되잖아. 나는 그저 가족들이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차성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체면을 세워주려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차성철은 외부의 주목과 관심이 부담스러웠다.“오빠,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난 오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오빠가 차씨 가문의 장자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줄 거야.”차설아가 허리에 두 손을 얹으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차설아는 태생적으로 겸손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차성철을 위해서 파티보다 더한 것도 해줄 수 있었다.뭇사람들은 늦은 시간
차성철은 차설아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설아야, 역시 넌 나를 잘 아는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들켜버렸으니 말이야.”“내가 오빠한테 처음 송지아에 관해 물어본 날, 나한테 단 한 번도 화내지 않았던 오빠가 나한테 화냈었잖아. 송지아라는 세글자가 오빠한테는 금기어였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송지아한테 강한 집념을 보이면서 자아를 잃어가는 것 같아. 하루에 수십 번씩 웃다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잖아.”차설아는 차성철이 의식을 되찾은 뒤에 성격이 완전히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차성철이 송지아를 증오하는지 사랑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사실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만약 차성철이 송지아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사라졌다면 얘기해도 될 것이다.하지만 차성철이 여전히 송지아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송지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절대 알려주어서는 안 되었다. 송지아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기에 차설아는 계속 고민했다.“두 번이나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마음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차성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어떻게 달라졌는데?”“처음 죽을 뻔했을 때는 증오하는 마음이었어. 복수하기 위해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어. 가족이 주는 사랑에 보답하고 내 가족을 지키겠다고 생각하면서 꼭 살고 싶었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편하더라. 복수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차성철은 솔직한 감정을 내뱉었다. 차설아 앞에서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그럼 오빠는 이미 송지아를 용서하고 그 일로 인한 원한을 풀었다는 뜻이잖아? 이제는 송지아가 밉지 않은 거지?”차설아는 차성철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마도 그렇겠지. 그런 건 이제는 소용없어...”차성철은 슬픈 두 눈을 하고서 허공을 바라보았다.“내가 용서하든 말든 지나간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어. 죽
차설아는 다시 한번 확고하게 말했다. 차성철은 입술을 깨물고는 놀란 마음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들려온 좋은 소식에 흥분했는지 축 늘어졌던 몸이 덜덜 떨렸다.“오빠, 괜찮아? 많이 놀랐어?”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차성철이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나 지금 멀쩡해. 아주 멀쩡해!”차성철은 심호흡하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송지아가 살아있다면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처럼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거지? 사고를 당해서 계속 입원해 있었던 건가?”“아, 그게 말하려면 좀 길어. 그러니까 송지아는...”차설아는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었다.“경수가 변강섭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내가 송지아랑 같이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 조금만 늦었어도 그 마을 사람들이 송지아의 신체 기관을 꺼내서 팔았겠지만 송지아는 애초에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었어. 몇 년 동안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았거든... 그 마을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었대.”동쪽 금각 지대는 암흑 지대라고도 불렸다. 마약과 범죄의 지대에 들어갔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송지아처럼 예쁜 여자들은 지옥의 맛을 보았고 줄줄이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송지아는 그중에서 살아남은 행운아였다.“됐어! 이제는 그만 말해. 말하지 말라고!”차성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설아의 말을 듣고 휘청거리더니 손을 내저으면서 그만 말하라고 했던 것이다. 차성철은 동쪽 금각 지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영흥 부둣가는 동쪽 금각 지대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모를 리 없었다.성심 전당포가 자리를 잡고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건, 송지아처럼 어린 여자아이들로 거래한 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차성철이 송지아와 충돌이 생긴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성인이 된 차성철은 송지아와 같이 어촌을 벗어나 영흥 부둣가로 향했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송지아를 위한 정원을 꾸렸고 예쁜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그, 그때는 오빠한테 송지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될 것 같았어. 오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오늘은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았어?”차설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응. 나는 오빠를 믿어. 적어도 오빠는 송지아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 같았어. 송지아의 곁을 지키면서 평생 보호해 줄 사람 같아서 얘기한 거야.”“아니. 네 추측이 틀렸을지도 몰라.”차성철이 주먹을 꽉 쥔 채 단호하게 말했다. 차설아는 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봐 식겁해서 다급히 물었다.“오빠, 그 말 무슨 뜻이야? 아까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보다 쉬워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잖아. 이제는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해?”“설아야, 이건 나만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차성철은 먼 곳을 내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증오의 씨앗이 심어지고 싹이 튼 후부터는 쉽게 뽑아낼 수 없어. 나는 다 내려놓았지만 송지아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화해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오빠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어.”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성철이 송지아를 미워하지 않는 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오빠, 걱정하지 마. 송지아는 오빠가 밉긴 하겠지만 여전히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왜 죽기 전에 오빠의 이름을 불렀겠어? 내가 송지아랑 잘 얘기해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해볼게. 나만 믿어!”차설아는 송지아와 차성철이 다시 만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했다.“고마워. 나도 송지아랑 얘기해 보고 싶었어. 사과하고 못다 한 말도 할 거야.”차성철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평화로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 해가 밝았다. 차성철은 일찍 일어나서 맨투맨과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빛나는 미모에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니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잠에서 깬 차설아는 머리를 빗지도 않고 잠옷
차설아는 재빨리 씻고는 가족들과 함께 식탁 앞에 모여 앉아 아침을 먹었다.“이 저택이 이렇게 북적북적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두 분이 이 모습을 보셨다면 정말 기뻐했을 거예요.”이른 새벽부터 아침 식사를 준비한 민이 이모는 다 같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울컥하면서 말했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 매일 이렇게 행복할 거예요. 차씨 가문 저택에서 다 함께 지내면서 즐겁게 보내자고요!”“그래요. 이런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겠어요.”아침 식사를 마친 뒤, 민이 이모는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등교하러 갔다. 차설아는 책을 읽고 있는 차성철한테 말을 걸었다.“오빠,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집에서 쉬는 건 어때? 난 일이 있어서 나갈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줘.”차성철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너 설마 지아를 찾으러 가는 건 아니지?”“그, 그게 있잖아...”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성철의 질문에 거짓말해도 결국 들통나게 되기 때문이다. 차성철은 책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같이 가자.”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다. 차설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오빠도 같이 간다고?”“왜? 나도 같이 가면 불편해서 그래?”“불편한 게 아니라 오빠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차설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송지아는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성격이 변했어. 오빠가 기억하는 천진난만한 송지아가 아니란 뜻이야. 그리고 오빠를 향한 증오가 생각보다 더 깊을 수도 있어. 그런 상황에 갑자기 오빠를 만나게 되면 어떤 반응일지 짐작이 안 가.”차설아는 송지아가 빨개진 두 눈을 하고서 차성철을 죽이겠다고 난리 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는 곳에서 죽음보다 더 두려운 나날들을 보냈기에 모든 잘못을 차성철에게 전가하는 것도 예상했던 것이었다.“설아야, 난 괜찮아. 송지아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 또다시 칼로 나를 찌
차설아는 인맥을 통해서 송지아의 주치의를 만나게 되었다.“의사 선생님, 혹시 1206호 병실에 있던 환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다른 병실로 옮겨진 건가요?”차설아는 송지아가 차성철이 입원했던 병실과 같은 층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혼수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몇십 미터를 두고 만나지 못했었다.의사는 차설아와 차성철이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찾아오기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 의사는 안경을 위로 밀더니 차분하게 말했다.“너무 늦게 오셨어요. 송지아 씨는 이미 퇴원했거든요.”“네? 퇴원했다고요?”차설아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한 달 전에 상황이 심각해서 적어도 3달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왜 퇴원한 거죠? 더 치료받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환자가 퇴원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말려봤지만 환자의 의지가 확고하더군요. 이 병원의 의사는 환자의 뜻에 따라야 해요.”“환자가 퇴원하겠다고 했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송지아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거죠? 그럼 퇴원할 때 몸은 어땠어요? 지금 퇴원해도 괜찮은 건가요? 또 갑자기 쓰러지지는 않겠죠?”차설아는 송지아의 상황이 차성철보다 더 심각해서 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혼수상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좋아졌지만 계속 깨나지 못하고 있었다.의사도 언제 깨날지 확답을 주지 못했는데 송지아가 퇴원하겠다고 말한 걸 보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차설아한테는 좋은 소식이었다.“송지아 씨는 기운을 차렸어요. 더 치료받고 안정을 취하면 좋았겠지만 거절하더군요. 아시다시피 몸에 상처가 많고 허리 양측에 난 상처가 깊어요. 자칫하다가 또 염증을 일으킬 수 있어서 걱정이에요. 하지만 송지아 씨가 퇴원하겠다고 했으니 강요할 수 없었어요.”의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송지아는 의사가 그동안 치료한 환자 중에서 제일 신경 써준 환자였다. 연약한 몸에 수많은 흉터와 화상이
“그래. 지아는 내가 집착이 심한 괴물로 보였을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지아가 날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지금처럼 나한테서 멀어지는 게 나아.”차성철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차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어쩌면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무술을 배우거나 칼을 익숙하게 다루어서 그때처럼 날 한 방에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오빠,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니까! 송지아를 찾을 방법을 생각할 테니 기다려줘. 만나서 오빠가 잘 얘기하면 돼.”“만약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절대 발버둥 치지 않았을 거야. 지아는 내가 바다에 잠겨 죽기를 바랐을 거라고...”차성철은 차설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송지아의 미소가 차성철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 같았다. 차설아는 차성철이 몹시 걱정되었다.‘얼른 송지아를 찾아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해. 하지만 갑자기 퇴원한 송지아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의사한테 물어보았지만 송지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송지아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혼자 퇴원 수속을 밟고 인파로 숨어들었다.송지아가 작정하고 숨었다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다.“오빠, 일단 집으로 가서 쉬어. 내가 송지아를 찾아볼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차설아는 차에 올라탔고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해안시에 송지아랑 관련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퇴원하면 제일 먼저 누구를 찾아갔을 것 같아?”“그런 사람 없어.”차성철은 가만히 있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지아의 가족은 내가 직접 죽였어.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나뿐일 거야.”“흠!”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헛기침했다. 송지아한테 직접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하지만 차성철이 인정했으니 사실이라는 뜻이었다.‘오빠가 송지아의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 복수하고 싶어 했겠지. 만약 내가 송지아였다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난도질했을 거야.’“오빠, 송지아의 부모님 즉 오빠의 수양부모님을 다 죽였다는 거야? 오빠는 이유
“아이를 지운 게 뭐?”차성철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재앙 같은 존재였어. 하지만 지아는 멍청하게도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 나는 지아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서 악역을 자처했을 뿐이야.”차설아는 차성철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그, 그렇지만 오빠랑 송지아는 특별한 사이였잖아. 소중한 여자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축복일 텐데 오빠는 도대체 왜 그런...”“닥쳐!”차성철은 차설아를 노려보면서 종래로 본 적 없는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이 일에 대해서 더 묻지 마. 만약 나를 네 오빠로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그만둬. 너는 호기심을 빌미로 나의 상처를 발가벗기고 있어. 더는 선 넘지 마. 알겠어?”집 앞에서 차가 멈춰서자 차성철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차설아는 그 뒤를 따라가지 않고 차 안에 앉아 한숨만 내쉬었다.차설아의 추측이 맞다면 강제적으로 지운 아이가 차성철과 송지아 사이의 원한으로 되었을 것이다. 지나간 일은 오로지 당사자들만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차성철과 송지아는 이 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싫어했기에 미워하는 마음은 점점 쌓여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곪은 상처는 자꾸 덧나서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차설아는 송지아를 먼저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퇴원한 송지아를 찾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 도시에서 송지아가 퇴원하자마자 연락할 만한 사람, 송지아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 단 한 사람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성도윤이었다.차설아는 자신의 손에 죽을 뻔한 성도윤을 다시 찾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성도윤이 아니라면 송지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이번이 마지막이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성도윤을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제와 비싼 과일을 사서 병원으로 향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