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지운 게 뭐?”차성철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재앙 같은 존재였어. 하지만 지아는 멍청하게도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 나는 지아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서 악역을 자처했을 뿐이야.”차설아는 차성철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그, 그렇지만 오빠랑 송지아는 특별한 사이였잖아. 소중한 여자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축복일 텐데 오빠는 도대체 왜 그런...”“닥쳐!”차성철은 차설아를 노려보면서 종래로 본 적 없는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이 일에 대해서 더 묻지 마. 만약 나를 네 오빠로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그만둬. 너는 호기심을 빌미로 나의 상처를 발가벗기고 있어. 더는 선 넘지 마. 알겠어?”집 앞에서 차가 멈춰서자 차성철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차설아는 그 뒤를 따라가지 않고 차 안에 앉아 한숨만 내쉬었다.차설아의 추측이 맞다면 강제적으로 지운 아이가 차성철과 송지아 사이의 원한으로 되었을 것이다. 지나간 일은 오로지 당사자들만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차성철과 송지아는 이 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싫어했기에 미워하는 마음은 점점 쌓여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곪은 상처는 자꾸 덧나서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차설아는 송지아를 먼저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퇴원한 송지아를 찾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 도시에서 송지아가 퇴원하자마자 연락할 만한 사람, 송지아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 단 한 사람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성도윤이었다.차설아는 자신의 손에 죽을 뻔한 성도윤을 다시 찾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성도윤이 아니라면 송지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이번이 마지막이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성도윤을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제와 비싼 과일을 사서 병원으로 향
성도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키위를 먹다가 은근슬쩍 물었다.“내가 키위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이런 것까지 알아주니까 우리가 인연이 깊다는 생각이 들어.”“당연히 깊죠. 당신은 하마터면 우리 오빠를 죽일 뻔했고 나는 하마터면 당신을 죽일 뻔했어. 이런 인연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차설아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내가 당신 오빠를 죽일 뻔하고 당신이 날 죽일 뻔했으니 퉁친 셈이잖아.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래?”성도윤은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차설아는 갑자기 오래전에 사라진 성진이 떠올랐다. 성도윤은 성진의 피를 주입한 뒤로부터 냉혈한 유전자가 희석된 것처럼 자꾸 다정하게 굴었다. 행동하는 것이 성진을 똑 닮았다.“나는 당신을 목 졸라서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성대 그룹 대표라는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할 줄 몰랐네요.”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럼 당신은 날 용서했어?”성도윤이 되레 반문하자 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성도윤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당신은 내가 미워? 아니면 날 용서한 거야? 확실히 알려주어야 나도 내 주제를 알잖아.”차설아는 고개를 들고 성도윤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지금 그게 중요해요?”“나한테는 당신의 대답이 중요해.”성도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입원하는 동안 차설아와 관련된 조각들이 조금씩 머리에 스며들고 있었다. 가끔 흐릿한 두 장면이 떠오르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두 차설아와 연관된 것이었다.성도윤은 직감적으로 차설아를 예전부터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기에 차설아가 성도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했다.“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우리 오빠의 산소마스크를 벗긴 게 정말 당신인가요?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차설아는 예리한 눈빛으로 성도윤의 마음을 흔들
성도윤은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날 그렇게 미워한다면서 왜 병문안을 온 거야? 영양제까지 가져온 걸 보니 자꾸 의심이 들어. 당신이 날 죽이러 온 것 같아.”차설아는 심호흡하고는 성도윤을 노려보면서 말했다.“나는 약자를 괴롭힐 만큼 양심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 당신이 우리 오빠를 죽이려 했던 건 퉁친 셈이지만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어요.”“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성도윤은 두 눈을 감고는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말했다.“죽이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나는 지금 반항할 힘이 조금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을 거야.”“죽고 싶으면 알아서 죽어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되잖아요. 여기는 18층이니까 무조건 죽을 거예요.”차설아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 ‘난 정말 착한 것 같아. 이런 나쁜 놈을 앞에 두고 친절하게 어떻게 죽는지 설명해 주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성도윤을 창밖으로 밀어버렸겠지.’“날 미워하면서 굳이 찾아온 이유가 뭐야?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줘.”성도윤은 갑자기 두 눈을 번뜩 뜨더니 차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도윤 씨는 정말 똑똑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졌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내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그게 누군데?”“송지아예요.”“송지아라고?”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차갑게 웃었다.“송지아가 입원한 병원이 어딘지 당신도 알잖아? 만나고 싶으면 바로 찾아가도 되었을 텐데, 굳이 왜 여기까지 와서 물어보는 거야?”“송지아를 찾았으면 여기까지 왔겠어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차설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오늘 병원에 찾아갔더니 송지아가 며칠 전에 이미 퇴원했대요. 송지아는 해안시에서 아는 사람도 없잖아요. 당신은 송지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죠? 알려줘요.”“송지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차설아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성도
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그 두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네. 오빠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겨우 의식을 되찾았어요. 성격도 완전히 달라져서 예전처럼 폭력적으로 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도윤 씨와 있었던 일은 전부 잊고 평화롭게 지내겠다고 약속했고요. 그래서 나는 오빠랑 송지아가 만나서 오해를 풀기를 바랐던 거예요.”차설아는 성도윤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성도윤이 얄미운 구석은 있었지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성도윤이 도와주겠다고 해도 손해 볼 입장이 아니었다.오히려 한 번 도와준 것을 빌미로 차설아를 마음대로 조종할 좋은 기회였다.“그건 당신만의 생각일 뿐이야. 차성철은 변하지 않았어.”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남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종 순진한 척하면서 신임을 얻어. 한때는 송지아를 아껴주는 좋은 오빠였잖아? 좋은 오빠인 척하면서 차성철이 송지아한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다시 생각해 봐!”성도윤은 남자로서 남자라는 생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차성철이 잘못을 반성하고 착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은 척하면서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송지아는 성도윤이 여태껏 만났던 사람 중에 제일 불쌍한 여자였다. 차성철이 아니었다면 송지아가 비참해질 리 없었다. 송지아의 불행을 차성철이 어느 정도는 책임져야 두 사람의 만남에 도움을 줄 것이다.“그러니까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는 거네요?”차설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우리는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상극 같은 사이네요. 도와달라고 강요하지 않을 테니 이 부탁만 들어줘요. 우리 오빠한테 송지아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오빠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마음 아파한다고 전해줄래요?”“반성만 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후회한 적은 없대?”성도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차설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차성철은 송지아한테 저지른 짓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를 지운 것을 통쾌해했다.‘다시 생각해 보면 두
소영금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차설아를 이대로 곱게 보내줄 리 없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기가 죽은 모습을 하고서 대답하자 마음이 약해져서 욕하지도 못했다.“도윤이가 하마터면 네 손에 죽을 뻔했다는 걸 전해 들었어. 도윤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너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드나드는 걸 볼 때마다 너무 힘들구나. 너는 한때 나의 며느리였잖아.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이제는 도윤이를 만나러 오지 말 거라. 너랑 도윤이가 만나기만 하면 꼭 무슨 일이 벌어졌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는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야.”사실 소영금은 차설아를 처음부터 미워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차설아를 예뻐하고 마음에 들어 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차설아를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성도윤의 안전을 위해 차설아와 갈라놓아야 했다. 차설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셔도 멀리하려고 했어요. 오늘은 꼭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고요. 앞으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찾아오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세요.”“그, 그게 정말이니?”소영금은 눈시울을 붉힌 채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남을 배려해 주는 착한 며느리, 성도윤의 아내가 될 자격이 충분한 차설아였지만 두 사람이 사주는 상극이었다.사주만 아니었다면 소영금은 차설아를 딸처럼 예뻐했을 것이다.“저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차설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엮이고 싶지 않으면 아드님께도 잘 말해보세요. 저만 약속을 지킨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만약 성도윤이 먼저 저를 찾아와서 다치게 된다면 제 탓을 하지 말고요.”“도윤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퇴원하면 은아랑 곧바로 결혼식을 할 거란다. 그럼 도윤이도 너를 완전히 잊을 수 있겠지.”소영금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은아와 성도윤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소꿉친구였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면
“사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 너는 착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내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믿을게.”“용건만 얘기하세요.”“달이와 원이의 양육권을 우리 가문에...”“그건 절대 양보 못 해요. 제가 두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고 키울 거예요.”차설아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하지만 두 아이를 네가 혼자 어떻게 감당하겠어? 내가 도와주겠다는 뜻이야.”소영금은 차설아가 거절할 거라고 진작에 예상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차설아의 눈빛과 마주했을 때, 어쩐지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성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을 내가 포기할 것 같아? 두 아이는 성씨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이잖니!”“아니요. 아이들은 어머니의 유전적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하잖아요. 달이와 원이한테는 차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성씨 가문을 들먹이면서 강요하지 마세요.”“설아야, 네가 이렇게 단호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소송을 하면 두 아이 중 한 명 정도는 성씨 가문에서 데려갈 수 있을 거야.”“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저의 전담 변호사가 전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대단한 건 아시죠? 한 번도 패소한 적이 없으니 소송하려면 해보세요. 이 사건으로 세간이 떠들썩해지면 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차설아는 소영금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술술 말했다.“서씨 가문과는 상관없는 일이야!”소영금은 손을 내저으면서 말을 이었다.“요즘 따라 나도 생각이 많았어. 네가 아이의 양육권을 성씨 가문에 넘긴다면 우리 도윤이와 서은아의 혼약은 없던 일로 해줄게. 아이 한 명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도윤이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잘 키울 수 있어.”성도윤은 애초에 다른 여자한테 관심이 없었기에 결혼을 강요한다고 해도 성도윤이 득을 보는 일은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설아의 아이를 키우면서 남은 생을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 성도윤한테는 더 잘된 일이었다.“죄송해요. 아이들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차설아는 심호흡하고는 말
병원에서 돌아온 차설아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성철은 차씨 가문 저택 뒷마당의 화원에서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땅을 파고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뭐 하고 있었어?”차설아는 두 아이를 보고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서 미소를 지었다.“엄마, 이것 봐요! 삼촌이 꽃을 어떻게 심는지 가르쳐줬어요.”달이는 너무 열심히 뛰어논 바람에 볼이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차설아는 사과처럼 빨간 달이의 볼살을 깨물고 싶었다.“직접 심은 거야? 정말 대단해. 어떤 꽃을 심었는지 한 번 볼까?”차설아는 화원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심었어요. 삼촌이 어렵게 구한 이 해바라기 씨앗은 한 달이면 꽃을 피울 수 있대요. 그럼 화원은 온통 빛나는 해바라기로 가득 차서 해바라기 섬처럼 아주 예쁠 거예요.”달이는 작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달이와 원이는 해바라기 섬에서 태어났기에 그곳을 그리워하곤 했다. 행복한 추억과 꿈같은 꽃밭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엄마, 우리 언제쯤 해바라기 섬에 가요? 그곳에서 놀고 싶어요.”원이는 작은 삽을 내려놓더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진지하게 물었다.“너희들이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갈 수 있어.”차설아는 쭈그려 앉아 원이를 품에 안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요즘 엄마가 바빠서 안 될 것 같단다.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나면 같이 가자.”“해야 할 일이 뭔데요?”원이는 두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원이도 엄마를 도와줄 수 있어요?”“아니. 원이는 그저 달이랑 같이 재밌게 뛰어놀고 어린이집에 가서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면 돼. 그럼 엄마도 힘이 날 거야.”“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랑 달이는 어린이집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재밌게 놀고 있고요.”원이는 어른처럼 주먹을 꽉 쥐고 엄숙하게 말했다. 차설아는 고난이도 임무를 완성하는 것처럼 비장한 원이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우리 원이, 정말 멋진 아
달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아빠도 같이 가면 안 돼요?”“그 사람을 자꾸 아빠라고 부르지 마! 나쁜 사람이랑 왜 같이 소풍 가겠다고 그래?”원이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지만 뉴스에서 차설아한테 잘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성도윤이 다른 여자랑 곧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이는 차성철이 배정해 준 경호원의 눈을 피해 몰래 성도윤의 회사로 향했다. 그러나 성도윤은 원이를 못 본 척하면서 다른 여자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었다.그 뒤로 원이는 아빠를 빼앗겼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아빠라는 존재가 없다고 여겼다.아빠라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하지 못했으니 없다고 해도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원이는 그 사람 때문에 차설아가 상처받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그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었잖아! 우리 엄마를 속상하게 만들었으니 절대 용서 못 해. 엄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찾아가서 복수했을 거야.”원이는 씩씩거리면서 성도윤을 욕했다. “선생님께서는 부모님이랑 같이 오라고 했어. 아빠는 못 올 텐데... 어쩌지?”달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달이는 잘생긴 성도윤을 여전히 아빠라고 생각하면서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두 아이의 대화를 듣던 차설아는 심란했다.원이는 성도윤을 미워했고 달이는 성도윤을 사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감정과는 별개로 차설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더 무기력해졌다.“아빠가 없으면 삼촌이랑 같이 가면 되잖아. 걱정하지 마.”모자를 눌러쓴 차성철은 해바라기 씨앗을 화원에 가득 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너희들은 삼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삼촌을 보고 한눈에 반하면 어쩌지? 너희 삼촌이 어린이집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사람이 될 것 같아.”차설아는 일부러 농담하면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썼다. 이럴 때면 차성철 덕분에 무거웠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표정을 굳히며 오만한 태도로 진무열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 지금 도윤이에 대한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예요?”“아니요,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을 위해서 어떤 희생까지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거죠.”이기적이고 강압적인 보스라 할지라도 감정에서는 많은 시련을 겪었었기에 진무열은 서은아가 성도윤에게 정말 어울리는 짝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차설아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만약 서은아도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면 성도윤이 또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진무열이 걱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목숨까지도 내어줄 거에요.”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입술을 깨문 채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때 그 여자 오빠가 미친 사람처럼 도윤이 납치해갔을 때 내가 도윤이 구하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진 비서님은 모르죠?”이 얘기는 처음 듣는 진무열은 호기심에 차 물었다.“무... 무슨 일을 겪었는데요?”“차설아 씨 오빠가 도윤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비서님도 알죠?”“대표님과 자정 살인마가 오랫동안 싸우기는 했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어요.”두 사람의 원한에는 깊은 관여를 하지 않고 가끔 조언을 해준 게 전부였기에 진무열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둘 다 원한을 내려놓고 화해하는 게 서로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성대 그룹의 고위 간부들은 이 기회에 자정 살인마를 제대로 눌러놔야 한다며 성도윤을 부추겼지만 성도윤은 결국 박성훈을 보내 차성철을 구해주며 그와의 화해를 선택했다.타인에게 장미를 건네면 내 손엔 그 잔향이 남는다고 그 인연으로 성도윤도 이번에 박성훈에게 수술받아 기억을 되찾을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이렇게 보니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은 하늘도 굽어살펴 주는 것 같았다.“둘은 화해했지만 나는... 내가 받은 상처는
그 모습을 보던 성도윤은 눈썹은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됐어, 성훈이 형 실력이면 너희들이 아무리 숨겨도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 뭐.”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와 들고 있던 보온 용기까지 떨어트려 버렸다.“아! 아파...”뜨거운 국물에 덴 손이 아픈지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성도윤도 빠르게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로 향했다.“괜찮아?”“응, 그냥 살짝 데인 것뿐이야.”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서은아의 표정은 서러움 그 자체였다.“봐봐.”여자의 앞에 쭈그려 앉은 성도윤은 빨개진 손등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진무열을 향해 말했다.“진무열, 은아 보건실로 데려가.”“괜찮아,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하지만 서은아는 계속 괜찮다고 하며 바닥에 엎질러진 국물을 보며 말했다.“너 주려고 온 오후 끓인 건데 다 쏟아버려서 어떡해... 그리고 네 러그도 더러워졌네.”“그거야 다시 끓이면 되고 러그도 사람 불러서 청소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네가 여기서 다치면 내가 미안하잖아 괜히. 그러니까 말 들어.”“알, 알겠어.”성도윤의 다정한 모습을 다시 본 서은아는 밀려오는 행복감에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하지만 만약 수요일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성도윤은 다시는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기억을 되찾은 그라면 전에 자신이 의사를 매수해 뇌에 이상이 생기게 만든 걸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그래서 서은아는 지금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마냥 불안했다.“아가씨, 저 따라오세요.”서은아를 데리고 성대 그룹 보건실로 향한 진무열은 의료진이 처치를 해주는 걸 보며 팔짱을 끼더니 서은아를 향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우리 대표님 마음 사로잡기가 쉽지 않죠?”“진 비서님도 내가 너무 달라붙으니까 꼴사나워 보여요?”“아가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전혀 꼴사납지 않죠.”진무열은 또 옛날의 차설아를 떠올리며 말했다.“예전 사모님도 서은아 씨처럼 우리 대표님한테 지
보온 용기를 들고 들어온 서은아는 활짝 웃으며 성도윤에게로 다가섰다.“보신탕 끓여왔는데 이게 위에 좋대, 너 안 그래도 위 안 좋은데 얼른 마셔봐.”그녀가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로운 보신탕의 냄새가 확 풍겨오자 진무열은 감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와, 냄새 너무 좋은데요. 서씨 집안 아가씨로 살면서 요리는 언제 배우셨어요?”책상을 마주 앉아 계약서를 넘기던 성도윤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가져가서 마시던가.”“...”성도윤에게 보신탕을 덜어주려던 서은아는 매정한 남자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는데 진무열도 바보는 아닌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가씨가 대표님 위해서 직접 만들어 오신 건데 제가 뭐라고 감히 그걸 마셔요, 저는 그냥 뜨거운 물 마실게요.”그 말에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은 서은아가 진무열을 보며 웃었다.“많이 해와서 괜찮아요. 드실 거면 덜어드릴게요.”“말씀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냥 장난이었어요. 대표님 요새 마침 속 안 좋으신데 대표님 다 드리세요. 앞으로 종종 해주시면 좋고요...”말을 하던 진무열은 갑자기 제 아내를 떠올리며 말했다.“대표님 이혼 전에는 사모님도 이런 보신탕 자주 해왔었는데 대표님만 드리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다 나눠줬었어요. 회사 복지라면서 곳곳에 놔두고 왔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우렁각시라는 별명도 얻었죠.”“그... 그래요?”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꾸했다.이렇게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성도윤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방해할 게 분명했기에 서은아는 하루빨리 진무열부터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일에 열중하며 진무열과 서은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성도윤은 갑자기 들리는 ‘이혼’과 ‘사모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며 물었다.“진 비서, 아까 이혼이라고 했어?”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캐묻기 시작했다.“내가 전에 결혼을 했었어? 그리고
전화를 끊은 차설아는 생각 없이 말만 내뱉는 제 입을 원망하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로 지내오다가 이제야 사랑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을 응원은 못 할망정 저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으니, 혹시라도 그게 도화선이 되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차설아는 점점 두려워졌다.무슨 일이 있어도 남의 혼사는 깨는 게 아니라는데 이런 금기를 범했으니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한편 성도윤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든 채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성대 그룹 대표 사무실에 앉아있던 그의 옆에는 진무열과 그가 불러온 해커도 함께 있었다.“찾았어?”“네, 찾았습니다.”성도윤이 전화를 할 때도 열심히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전화 신호가 잡히는 곳은 해안시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수림입니다.”남자가 빠르게 좌표를 찍어주자 진무열은 그걸 인터넷에 검색해봤는데 이내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대표님, 이 별장... 성진 씨 별장인데 차설아 씨가 성진 씨랑 같이 있는 걸까요?”“나도 눈 있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함께 화면을 보고 있던 성도윤은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헛웃음을 흘렸다.“옛친구랑 이렇게 뜨거운 재회를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괜히 걱정했네.”“대표님, 진정하세요. 차설아 씨는 이제 자유의 몸인데 그분이 누굴 만나든 누구랑 데이트를 하든 그건 다 그분 자유죠. 이건 선 넘으시는 거예요.”기억을 잃은 탓에 많은 일들을 기억 못 하는 성도윤이지만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지 그녀의 일이라면 성도윤은 늘 이성을 잃곤 했다.비서로서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무열은 가슴이 아파서 제 보스가 하루빨리 끝난 사이는 떨쳐버리고 새로운 인연과 함께 새 삶을 살길 바랐다.“아까 서은아 씨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몸도 아직 다 회복 못 하셨는데 야근부터 하신다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지금 보신탕 가지고 오신대요.”서은아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진무열이
그에 차설아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성도윤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설아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그에 핸드폰을 귀에서 뗀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는 왜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하하, 아니지.”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웃으며 비꼬기 시작했다.“그냥 하룻밤 잔 사이니까 이런 연락은 불필요한 거긴 하지.”남사스러운 말에 얼굴이 빨개진 차설아는 차갑게 대꾸했다.“용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끊을게요.”“잠깐만!”끊는다는 말에 조급해진 성도윤이 소리치며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같이 있어? 거기 안전하긴 한 거야?”“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같이 있는지를 당신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 물어보니까 얘기는 하는데... 아주 안전해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딴 쓸데없는 통화도 하는 거겠죠?”차설아는 혹시나 성도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진짜야?”하지만 성도윤은 조심성이 많고 예리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나는 못 믿겠는데, 네가 영상통화를 건다면 몰라도.”“영상통화라니, 드디어 미친 거예요? 우리는 친구도 못 되는 사이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굳이 그걸 알자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표정을 잔뜩 굳힌 성도윤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지금 어디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친구 집에 있어요. 친구랑 사이도 좋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성도윤의 관심 따위 매정하게 넘기면 그만이었겠지만 얼마 전 원이가 한 말이 떠오른 차설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그건 무슨 말이야? 뭘 알기라도 한 거야?”성도윤처럼 예민한 사람은 차설아가 흘리듯
“제가 그분이었으면 진작에 신분을 밝히고 감사 인사라도 받았겠죠. 뭐하러 성진 씨를 속이겠어요?”“그 사람은 나한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청아 씨가 더... 그 사람 같은 거예요.”“착각하신 거예요.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제가 눈을 내어주는 건 돈을 위해서인데 그분은 뭘 위해서 당신에게 눈을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은...”자신의 커리어가 있고 아이도 있고 성도윤과 한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녀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 같은 병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기에 성진은 차설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정말 헛된 꿈을 꾼 것만 같아 성진은 차설아의 손을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세요. 이틀 뒤에 뵙죠. 수술만 잘 끝나면 얼마를 원하든지 다 드릴게요, 그쪽이랑 가족분들 노후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든든하네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남자와 가슴을 부딪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그때 아래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박서영이 내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빠르게 달려가며 물었다.“어때요, 안 들켰어요?”“들킬뻔했어요.”“그래서 어떻게 했어요?”“잘 넘어갔죠.”정원 쪽을 보며 한숨을 쉬던 차설아가 말을 이었다.“저 정도로 순정파일 줄 몰랐는데, 이젠 눈을 줄 수밖에 없게 됐네요. 안 돌려주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요.”“잘 부탁드려요.”“다른 볼일 없으면 난 이만 지하실로 돌아갈게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곤란하잖아요.”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하는 박서영을 보면서도‘움직이는 기관창고’답게 담담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죄송해요...”그녀의 태연함 앞에서 박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전에는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애썼는데... 제 도련님이 눈여겨 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너그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