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인맥을 통해서 송지아의 주치의를 만나게 되었다.“의사 선생님, 혹시 1206호 병실에 있던 환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다른 병실로 옮겨진 건가요?”차설아는 송지아가 차성철이 입원했던 병실과 같은 층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혼수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몇십 미터를 두고 만나지 못했었다.의사는 차설아와 차성철이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찾아오기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 의사는 안경을 위로 밀더니 차분하게 말했다.“너무 늦게 오셨어요. 송지아 씨는 이미 퇴원했거든요.”“네? 퇴원했다고요?”차설아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한 달 전에 상황이 심각해서 적어도 3달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왜 퇴원한 거죠? 더 치료받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환자가 퇴원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말려봤지만 환자의 의지가 확고하더군요. 이 병원의 의사는 환자의 뜻에 따라야 해요.”“환자가 퇴원하겠다고 했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송지아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거죠? 그럼 퇴원할 때 몸은 어땠어요? 지금 퇴원해도 괜찮은 건가요? 또 갑자기 쓰러지지는 않겠죠?”차설아는 송지아의 상황이 차성철보다 더 심각해서 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혼수상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좋아졌지만 계속 깨나지 못하고 있었다.의사도 언제 깨날지 확답을 주지 못했는데 송지아가 퇴원하겠다고 말한 걸 보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차설아한테는 좋은 소식이었다.“송지아 씨는 기운을 차렸어요. 더 치료받고 안정을 취하면 좋았겠지만 거절하더군요. 아시다시피 몸에 상처가 많고 허리 양측에 난 상처가 깊어요. 자칫하다가 또 염증을 일으킬 수 있어서 걱정이에요. 하지만 송지아 씨가 퇴원하겠다고 했으니 강요할 수 없었어요.”의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송지아는 의사가 그동안 치료한 환자 중에서 제일 신경 써준 환자였다. 연약한 몸에 수많은 흉터와 화상이
“그래. 지아는 내가 집착이 심한 괴물로 보였을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지아가 날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지금처럼 나한테서 멀어지는 게 나아.”차성철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차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어쩌면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무술을 배우거나 칼을 익숙하게 다루어서 그때처럼 날 한 방에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오빠,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니까! 송지아를 찾을 방법을 생각할 테니 기다려줘. 만나서 오빠가 잘 얘기하면 돼.”“만약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절대 발버둥 치지 않았을 거야. 지아는 내가 바다에 잠겨 죽기를 바랐을 거라고...”차성철은 차설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송지아의 미소가 차성철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 같았다. 차설아는 차성철이 몹시 걱정되었다.‘얼른 송지아를 찾아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해. 하지만 갑자기 퇴원한 송지아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의사한테 물어보았지만 송지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송지아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혼자 퇴원 수속을 밟고 인파로 숨어들었다.송지아가 작정하고 숨었다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다.“오빠, 일단 집으로 가서 쉬어. 내가 송지아를 찾아볼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차설아는 차에 올라탔고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해안시에 송지아랑 관련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퇴원하면 제일 먼저 누구를 찾아갔을 것 같아?”“그런 사람 없어.”차성철은 가만히 있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지아의 가족은 내가 직접 죽였어.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나뿐일 거야.”“흠!”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헛기침했다. 송지아한테 직접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하지만 차성철이 인정했으니 사실이라는 뜻이었다.‘오빠가 송지아의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 복수하고 싶어 했겠지. 만약 내가 송지아였다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난도질했을 거야.’“오빠, 송지아의 부모님 즉 오빠의 수양부모님을 다 죽였다는 거야? 오빠는 이유
“아이를 지운 게 뭐?”차성철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재앙 같은 존재였어. 하지만 지아는 멍청하게도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 나는 지아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서 악역을 자처했을 뿐이야.”차설아는 차성철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그, 그렇지만 오빠랑 송지아는 특별한 사이였잖아. 소중한 여자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축복일 텐데 오빠는 도대체 왜 그런...”“닥쳐!”차성철은 차설아를 노려보면서 종래로 본 적 없는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이 일에 대해서 더 묻지 마. 만약 나를 네 오빠로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그만둬. 너는 호기심을 빌미로 나의 상처를 발가벗기고 있어. 더는 선 넘지 마. 알겠어?”집 앞에서 차가 멈춰서자 차성철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차설아는 그 뒤를 따라가지 않고 차 안에 앉아 한숨만 내쉬었다.차설아의 추측이 맞다면 강제적으로 지운 아이가 차성철과 송지아 사이의 원한으로 되었을 것이다. 지나간 일은 오로지 당사자들만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차성철과 송지아는 이 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싫어했기에 미워하는 마음은 점점 쌓여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곪은 상처는 자꾸 덧나서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차설아는 송지아를 먼저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퇴원한 송지아를 찾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 도시에서 송지아가 퇴원하자마자 연락할 만한 사람, 송지아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 단 한 사람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성도윤이었다.차설아는 자신의 손에 죽을 뻔한 성도윤을 다시 찾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성도윤이 아니라면 송지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이번이 마지막이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성도윤을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제와 비싼 과일을 사서 병원으로 향
성도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키위를 먹다가 은근슬쩍 물었다.“내가 키위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이런 것까지 알아주니까 우리가 인연이 깊다는 생각이 들어.”“당연히 깊죠. 당신은 하마터면 우리 오빠를 죽일 뻔했고 나는 하마터면 당신을 죽일 뻔했어. 이런 인연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차설아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내가 당신 오빠를 죽일 뻔하고 당신이 날 죽일 뻔했으니 퉁친 셈이잖아.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래?”성도윤은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차설아는 갑자기 오래전에 사라진 성진이 떠올랐다. 성도윤은 성진의 피를 주입한 뒤로부터 냉혈한 유전자가 희석된 것처럼 자꾸 다정하게 굴었다. 행동하는 것이 성진을 똑 닮았다.“나는 당신을 목 졸라서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성대 그룹 대표라는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할 줄 몰랐네요.”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럼 당신은 날 용서했어?”성도윤이 되레 반문하자 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성도윤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당신은 내가 미워? 아니면 날 용서한 거야? 확실히 알려주어야 나도 내 주제를 알잖아.”차설아는 고개를 들고 성도윤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지금 그게 중요해요?”“나한테는 당신의 대답이 중요해.”성도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입원하는 동안 차설아와 관련된 조각들이 조금씩 머리에 스며들고 있었다. 가끔 흐릿한 두 장면이 떠오르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두 차설아와 연관된 것이었다.성도윤은 직감적으로 차설아를 예전부터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기에 차설아가 성도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했다.“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우리 오빠의 산소마스크를 벗긴 게 정말 당신인가요?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차설아는 예리한 눈빛으로 성도윤의 마음을 흔들
성도윤은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날 그렇게 미워한다면서 왜 병문안을 온 거야? 영양제까지 가져온 걸 보니 자꾸 의심이 들어. 당신이 날 죽이러 온 것 같아.”차설아는 심호흡하고는 성도윤을 노려보면서 말했다.“나는 약자를 괴롭힐 만큼 양심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 당신이 우리 오빠를 죽이려 했던 건 퉁친 셈이지만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어요.”“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성도윤은 두 눈을 감고는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말했다.“죽이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나는 지금 반항할 힘이 조금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을 거야.”“죽고 싶으면 알아서 죽어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되잖아요. 여기는 18층이니까 무조건 죽을 거예요.”차설아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 ‘난 정말 착한 것 같아. 이런 나쁜 놈을 앞에 두고 친절하게 어떻게 죽는지 설명해 주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성도윤을 창밖으로 밀어버렸겠지.’“날 미워하면서 굳이 찾아온 이유가 뭐야?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줘.”성도윤은 갑자기 두 눈을 번뜩 뜨더니 차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도윤 씨는 정말 똑똑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졌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내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그게 누군데?”“송지아예요.”“송지아라고?”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차갑게 웃었다.“송지아가 입원한 병원이 어딘지 당신도 알잖아? 만나고 싶으면 바로 찾아가도 되었을 텐데, 굳이 왜 여기까지 와서 물어보는 거야?”“송지아를 찾았으면 여기까지 왔겠어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차설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오늘 병원에 찾아갔더니 송지아가 며칠 전에 이미 퇴원했대요. 송지아는 해안시에서 아는 사람도 없잖아요. 당신은 송지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죠? 알려줘요.”“송지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차설아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성도
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그 두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네. 오빠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겨우 의식을 되찾았어요. 성격도 완전히 달라져서 예전처럼 폭력적으로 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도윤 씨와 있었던 일은 전부 잊고 평화롭게 지내겠다고 약속했고요. 그래서 나는 오빠랑 송지아가 만나서 오해를 풀기를 바랐던 거예요.”차설아는 성도윤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성도윤이 얄미운 구석은 있었지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성도윤이 도와주겠다고 해도 손해 볼 입장이 아니었다.오히려 한 번 도와준 것을 빌미로 차설아를 마음대로 조종할 좋은 기회였다.“그건 당신만의 생각일 뿐이야. 차성철은 변하지 않았어.”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남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종 순진한 척하면서 신임을 얻어. 한때는 송지아를 아껴주는 좋은 오빠였잖아? 좋은 오빠인 척하면서 차성철이 송지아한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다시 생각해 봐!”성도윤은 남자로서 남자라는 생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차성철이 잘못을 반성하고 착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은 척하면서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송지아는 성도윤이 여태껏 만났던 사람 중에 제일 불쌍한 여자였다. 차성철이 아니었다면 송지아가 비참해질 리 없었다. 송지아의 불행을 차성철이 어느 정도는 책임져야 두 사람의 만남에 도움을 줄 것이다.“그러니까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는 거네요?”차설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우리는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상극 같은 사이네요. 도와달라고 강요하지 않을 테니 이 부탁만 들어줘요. 우리 오빠한테 송지아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오빠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마음 아파한다고 전해줄래요?”“반성만 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후회한 적은 없대?”성도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차설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차성철은 송지아한테 저지른 짓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를 지운 것을 통쾌해했다.‘다시 생각해 보면 두
소영금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차설아를 이대로 곱게 보내줄 리 없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기가 죽은 모습을 하고서 대답하자 마음이 약해져서 욕하지도 못했다.“도윤이가 하마터면 네 손에 죽을 뻔했다는 걸 전해 들었어. 도윤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너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드나드는 걸 볼 때마다 너무 힘들구나. 너는 한때 나의 며느리였잖아.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이제는 도윤이를 만나러 오지 말 거라. 너랑 도윤이가 만나기만 하면 꼭 무슨 일이 벌어졌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는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야.”사실 소영금은 차설아를 처음부터 미워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차설아를 예뻐하고 마음에 들어 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차설아를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성도윤의 안전을 위해 차설아와 갈라놓아야 했다. 차설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셔도 멀리하려고 했어요. 오늘은 꼭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고요. 앞으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찾아오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세요.”“그, 그게 정말이니?”소영금은 눈시울을 붉힌 채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남을 배려해 주는 착한 며느리, 성도윤의 아내가 될 자격이 충분한 차설아였지만 두 사람이 사주는 상극이었다.사주만 아니었다면 소영금은 차설아를 딸처럼 예뻐했을 것이다.“저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차설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엮이고 싶지 않으면 아드님께도 잘 말해보세요. 저만 약속을 지킨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만약 성도윤이 먼저 저를 찾아와서 다치게 된다면 제 탓을 하지 말고요.”“도윤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퇴원하면 은아랑 곧바로 결혼식을 할 거란다. 그럼 도윤이도 너를 완전히 잊을 수 있겠지.”소영금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은아와 성도윤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소꿉친구였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면
“사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 너는 착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내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믿을게.”“용건만 얘기하세요.”“달이와 원이의 양육권을 우리 가문에...”“그건 절대 양보 못 해요. 제가 두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고 키울 거예요.”차설아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하지만 두 아이를 네가 혼자 어떻게 감당하겠어? 내가 도와주겠다는 뜻이야.”소영금은 차설아가 거절할 거라고 진작에 예상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차설아의 눈빛과 마주했을 때, 어쩐지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성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을 내가 포기할 것 같아? 두 아이는 성씨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이잖니!”“아니요. 아이들은 어머니의 유전적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하잖아요. 달이와 원이한테는 차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성씨 가문을 들먹이면서 강요하지 마세요.”“설아야, 네가 이렇게 단호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소송을 하면 두 아이 중 한 명 정도는 성씨 가문에서 데려갈 수 있을 거야.”“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저의 전담 변호사가 전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대단한 건 아시죠? 한 번도 패소한 적이 없으니 소송하려면 해보세요. 이 사건으로 세간이 떠들썩해지면 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차설아는 소영금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술술 말했다.“서씨 가문과는 상관없는 일이야!”소영금은 손을 내저으면서 말을 이었다.“요즘 따라 나도 생각이 많았어. 네가 아이의 양육권을 성씨 가문에 넘긴다면 우리 도윤이와 서은아의 혼약은 없던 일로 해줄게. 아이 한 명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도윤이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잘 키울 수 있어.”성도윤은 애초에 다른 여자한테 관심이 없었기에 결혼을 강요한다고 해도 성도윤이 득을 보는 일은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설아의 아이를 키우면서 남은 생을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 성도윤한테는 더 잘된 일이었다.“죄송해요. 아이들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차설아는 심호흡하고는 말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