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젠장. 어쩐지 그 얼굴에 여자친구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양다리 걸치는 쓰레기였네.]D: [내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그런 인간은 다 죽어버려야 돼요.]F: [역시 잘생긴 것들은 어떻게든 얼굴값을 한다니까요. 너무 잘생긴 남자는 감당할 수 없나 봐요. 대표님, 전 얼굴 안 밝혀요. 책임감 있고 진취적인데다 술, 담배 안 하는 사람이면 돼요. 지인 분 중에 이런 남자 있어요?]A: [흑흑, 전 그래도 잘생긴 남자가 좋아요. 너무 못생기면 키스할 마음이 안 생긴다고요~]B: [여러분, 제 친구 중에 연현 테크에 출근하는 애가 있는데 회사에 고발 메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쓰레기 같은 인간이 여자친구 몰래 소개팅한 사실을 회사에 알려 이름 좀 나게 해달라고 해볼까요?]B: [찬성이요.]C: [찬성이요.]F: [찬성이요.]...강한서는 처음으로 도끼를 들어 발등을 찍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체험할 수 있었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자신의 휴대폰을 보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재밌다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저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소개팅을 본 남자는 세상에 알려야 해요.]강한서: ...아무 것도 모르는 민경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민경하는 한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 인간은 패가망신시켜야 해요.”말을 마친 민경하는 뒤에서 오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움찔 몸을 떨었다. ‘실수한 건가?’민경하 앞에서는 차마 애교 섞인 말투로 고개를 숙이기 부끄러웠던 강한서는 휴대폰을 꺼내 한현진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휴대폰 알람에 카톡을 확인한 한현진은 곧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강한서에게 [네 죄를 사하노라.]라는 의미의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한현진이 그룹 채팅방에 공지를 올렸다. [여러분, 그 사람의 개인 정보도 가짜였어요. 연현 테크에 출근하는 지인에게
한현진이 이끄는 대로 강한서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밤공기는 조금 차가웠고 재스민 향으로 가득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강한서는 마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잎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향기가 바람 따라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가 좋아하는 향이었다. “계단 있어. 다리 높게 들어. 넘어지지 말고.”한현진의 목소리가 가볍게 귓가에 울렸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꼭 잡고 한걸음 천천히 내딛었다. 그의 발밑은 자갈로 포장된 길이었다. 그 위를 걸으면 돌멩이가 살짝 내려앉으며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현진이 말했다. “도착했어. 여기야.”그 자리에 멈춰선 강한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 “안대 벗어도 돼?”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벗겨줄게.”그 말에 한현진이 쉽게 안대를 벗길 수 있도록 강한서는 고개를 숙였다. 안대가 벗겨지는 그 순간, 강한서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불빛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천천히 눈을 뜬 강한서 앞에는 하얀 재스민으로 가득 차있었다. 정말 그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 한 송이, 한 송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마당을 따라 한 바퀴 빙 비추던 조명은 앞에 놓인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빛을 모았다. 그 순간, 프로젝터가 켜지고 신우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편안한 차림의 그를 보니 집에서 촬영한 것 같았다. “강한서, 생일 축하해. 얼른 나아서 최대한 빨리 기억 찾아. 시간 나면 술 한 잔 해.”어두워진 화면이 몇 초 후 다시 환해지며 이번엔 송민준의 모습이 보였다. “생일 축하해. 오늘은 생일이니까 욕은 안 할게. 그리고, 한라봉은 큰 게 맛있어. 현진이가 너한테 거짓말 한 거야.”말을 마친 송민준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도 그런 송민준을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유치하긴.’그 다음인 정인월이었다. 동영상 촬영은 처음이라 촬영이 시작되었음에도 한참 동안 진씨에게 촬영이 되고 있냐며 물었다.
차미주가 옆에서 맞장구치며 말했다. “너 같은 짠돌이가 강한서 생일에 뭐라도 가져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강한서는 네가 환생이라도 한 줄 알 거야.”한성우가 이를 갈았다. “네가 더 해. 내가 남한텐 짠돌이처럼 굴어도 너나 친구한테 그런 적 있어?”차미주가 예를 들려 말했다. “앞에선 날 속이고 또 뒤에선 친구에게 거짓말 하면서 일전 한 푼도 안내고 한 달 동안 내가 해준 밥 축냈던 건 잊었나봐?”한성우가 변명했다. “중매인으로써 돈 조금 번게 뭐 어때서? 밥 얻어먹은 것도 너무한 거야?”“부끄럽지도 않아?”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며 강한서 앞으로 걸어왔다. 한성우는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강한서에게 건넸다. “친구, 생일 축하해. 전에 네가 강에 빠졌을 땐 이젠 평생 납골당에서 생일을 축하해 줘야 하나, 했어. 다행히도 하늘이 너 같은 사고뭉치를 데려가지 않으셨으니 오늘 이 기회를 빌려 진지하게 맹세할게. 내가 너보다 죽게 죽는 한, 매년 네 생일은 내가 책임질게.”차미주가 팔꿈치로 한성우를 퍽 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생일에 죽느니, 사느니 그런 얘길 왜 해. 퉤퉤퉤.”한성우가 차미주의 어깨를 감싸 안고 웃으며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너랑 평생 친구 해준다고.”울컥한 강한서는 침착하게 한성우가 건네는 선물을 받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너 하는 거 봐서.”“쯧. 감동 받았으면 울어. 뭘 센 척 하고 있어.”흥, 콧방귀를 뀌던 한성우가 말을 이었다. “내 선물은 마지막에 뜯어. 너무 처음부터 감동을 주면 다른 사람 선물은 눈에 차지도 않을 테니까.”호기심에 가득 찬 차미주가 물었다. “강한서에게 무슨 선물을 준비해준 거야?”한성우가 검지를 내밀어 가볍게 흔들었다. “비밀이야.”“쳇.”차미주 역시 강한서에게 “선물”했다. “그, 넌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으니까 뭘 주면 좋을지 몰라서 준비했어. 마침 엄마 가게들이 리모델링 중이라 루나를 추천했더니 호객용으로
강한서는 멍해진 한현진에게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고 한현진은 더 이상 차미주를 말리지 않았다. 차미주가 한주에서 막 일을 시작했을 때 한현진은 그녀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줬었다. 김경선은 한현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줄곧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니 차미주가 하현주의 병원비 때문에 걱정하는 한현진을 돕기 위해 김경선에게 손을 벌렸을 때, 김경선은 두 말 없이 바로 2억을 보내줬었다. 한성우에게서 그 일을 전해들은 강한서 역시 줄곧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한성 그룹의 모든 자회사의 사무용품과 명절 선물 세트를 구매하는 협력 업체를 미소마트로 바꿨다. 김경선이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맞지만 그녀 역시 사업가였다. 어떻게 한성과 계약을 맺게 된 것인지, 조금만 조사해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딸의 친구는 한주 명문가에서 태어난 재벌 2세였고 지금은 자신의 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김경선은 한 번 더 은혜를 베푸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이를 돈독히 해야 사업이 더 번창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차미주의 체면까지 세워줄 수 있었으니 더 좋은 일이었다. 강한서는 김경선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한현진에게 더 이상 거절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앞으로 협력할 기회는 지금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한성우가 질투 섞인 말투로 말했다. “휴. 역시 여자를 잘 만나는 게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아. 난 왜 그런 운이 없을까.”차미주가 한성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럼 나 가?”한성우가 차미주를 끌어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좋은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도 좋지.”차미주가 한성우의 가슴을 쿡 찔렀다. “좀 패기 있게 살면 안 돼? 왜 계속 데릴 사위할 생각만 해? 넌 줏대도 없어?”“내가 강한서처럼 큰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그저 내 아내와 아이가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 수 있으면 그거로 충분해. 너만 허락하면 난 바로 결
처음엔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한 한현진은 길을 피해주었다. 그러자 로봇 RC카는 그녀를 에워싸고 한 반퀴 빙 돌더니 또 다시 그녀의 발에 부딪혔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2층은 텅 비어 강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났을 때면 한현진은 누구보다 강한서를 미워했다. ‘너로는 부족해서 거지같은 네 기계까지 날 괴롭히는 거야?’생각하던 한현진은 아예 몸을 일으켜 겉옷을 챙겨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그 결과, 이상한 생김새의 RC카는 한현진을 따라 집을 나섰다. RC카는 강아지처럼 한현진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잔뜩 짜증이 난 한현진은 로봇 RC카를 펑 차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가방보다도 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꾹 참아내야 했다. 한현지이 자리를 잡고 의자에 앉자 로봇 RC카는 그의 기계팔로 물병을 한현진의 발 옆으로 건넸다. 못생긴 기계뭉치를 노려보던 한현진은 물병을 잡아 던져버렸다. 그러자 “못생긴 기계뭉치”는 U턴하더니 강아지처럼 달려가 물병을 다시 주웠다. 아름드리는 입주민이 꽤 많은 별장에 속했다. 이웃들 모두 같은 업계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녀와 강한서처럼 아이도 없는 젊은 부부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아이를 키우는 부부거나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한현진이 산책을 나선 시간은 마침 다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즐기는 시간대였다. 그러니 로봇 RC카가 물병을 주워오는 그 장면은 마침 일반 RC카를 갖고 놀던 아이들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로봇 RC카를 구경하며 재잘재잘 질문을 던졌다. “누나,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너무 멋져요. 물건도 주울 줄 알아.”“엔진 완전 대박이야. 이렇게 가파른 길도 올라갈 수 있다니. 최고잖아.”“휘발유를 연료로 하는 거예요? 저게 연료탱크예요?”“바퀴도 더 큰 거로 개조한 거야. 무거운 물건도 끌 수 있어요?”못생긴 기계뭉치는 마치 일부러 뽐내기라도 하듯 기계팔을 뻗어 통통한 남자 아이를 잡고 자기 등으로 끌었다. “올라가라는
물병엔 점과 선으로 구성된 부호가 찍혀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못생긴 병을 가져온 거야.’물을 마신 한현진은 물병을 던져버렸다. 화가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한현진은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한현진은 얌전히 앉아있는 강한서를 보고도 무시한 채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 씻은 후 잠에 들었다. 늦은 새벽, 잠결에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 한현진은 움찔 몸을 떨며 손을 들어 그대로 내려쳤다. 머리를 맞은 강한서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한현진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너 뭐하는 거야? 이 새벽에 변태 행세라도 하려고 그래?”‘아직 화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달래지도 않고 그냥 들이대시겠다? 센스라곤 없는 자식!’강한서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는 한참만에야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그 물 마셨잖아.”멈칫하던 한현진이 물었다. “그 물에 약이라도 탔어?”‘그래서 직접 해독제라도 해주겠다는 거야?’강한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시간이 꽤 흘러서야 그는 어두운 얼굴로 이불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그날 밤, 강한서는 서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한현진은 잠이 들 때까지도 강한서가 대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가 한현진이 오랫동안 기대했던 케이크를 강민서에게 “선물”한 사건이 벌어졌다. 조금 느슨해졌던 두 사람 사이에 다시 긴장이 맴돌았다. 얼마 후 새해가 밝았다. 그날 강한서는 출장 때문에 한주에 없었고 신미정은 신표 가족을 비롯한 몇 촌인지도 알 수 없는 친척들을 데리고 한현진과 강한서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 강한서가 있을 때면 신미정은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 비록 신미정은 강한서의 생활에 이것저것 간섭하기를 좋아했지만 강한서는 신미정의 그런 모습을 제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대화는 늘 다툼으로 마무리 되었다. 신미정은 아들
못생긴 기계뭉치는 강한서가 직접 만든 로봇 RC카였다. 한현진은 막 개조를 완성한 강한서가 못생긴 기계뭉치를 조종해 그녀에게 택배를 가져다 줄 때의 덤덤한 척 하지만 은근히 그녀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며 결국엔 입꼬리를 씩 올려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던 강한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봇 RC카는 강한서가 먼지 한 톨이 묻어도 직접 닦을 정도로 아끼는 물건이었다. 만약 강한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 못생긴 기계뭉치가 아이들 손에 놀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어쩌면 한현진이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한 탓인지 친척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미정은 한현진의 말이 자기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수리해도 우리 집안 돈으로 할 거야. 너한테 비용 감당하라고 안 해.”신미정의 그 말은 정말이지 듣기 거북할 정도였다. 한현진을 전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미정의 발언에 한현진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함께 따라온 친척들 역시 일이 더 커질 것을 예견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데리고 하나둘 자리를 피했다. 신미정은 한현진을 노려보며 차를 타오라고 명령했다. 한현진은 신미정이 그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랬기에순순히 차를 내리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현진이 주방에서 나왔을 때 신미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못생긴 기계뭉치는 산산히 부서진 채 바닥에 널부러져있었다. 누군가 위에서 던진 것이었다. 강한서가 출장에서 돌아와서야 한현진은 그 일을 강한서에게 알렸다. 그가 돌아오기 전 한현진은 이미 수십 명의 정비사를 찾아 복원을 시도했다. 하지만 로봇 자체가 이미 강한서에 의해 개조된 것이었고 부품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더는 교체할 부품이 없었다. 한현진이 부탁한 모든 정비사들은 하나 같이 아쉽지만 도와줄 수 없다고 얘기했다. 강한서는 부서진 로봇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잔해를 안고 수집실로 향했다. 수많은 방법을 시도
“현진아.”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울대가 움직였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주문한 거야?”“아마 새벽에 잠 못 들고 침대에서 일어난 네가 몰래 수집실에 들어가 그 기계뭉치를 꺼내봤을 때?”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생각했지. 강아지처럼 불쌍한 사람이니까, 내가 많이 아껴줘야지.”피식 웃던 강한서가 곧 눈시울을 붉혔다. 손을 뻗어 한현진을 꽉 안은 강한서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의 가는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럽게 강한서의 등을 토닥이던 한현진이 와장창,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렇게 감동할 거 없어. 네 돈으로 산거야. 알잖아. DC 어르신, 값을 부를 땐 양심도 없다니까.”강한서: ...한현진은 다시 분위기를 살리고 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때 어머니가 내가 망가뜨린 거라고 했잖아. 단 일 초도 날 의심한 적 없었어?”신미정은 먼저 강한서에게 못생긴 기계뭉치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신미정이 전한 스토리에서 기계를 망가뜨린 범인은 한현진이 되어버렸다. 당시 강한서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지만 한현진은 마음 속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강한서는 신미정을 믿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감동한 표정의 한현진이 말했다. “넌 그때부터 날 믿었던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RC카에 블랙박스가 있었어.”한현진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굳어갔고 감동도 파스스 사라졌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어떻게 널 안 믿겠어? 넌 아무리 화가 나도 제일 싼 컵을 던지는 애였어. 그런 애가 그걸 부쉈을 리가 없잖아.”한현진은 기쁜 듯, 또 아닌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짠돌이 근성을 믿은 것이었다. “강한서.”한현진이 나지막이 강한서를 불렀다. “응.”강한서가 대답했다. 눈을 감은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