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한현진은 웃으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그땐 인터넷에서 한창 이과생의 낭만, 뭐 이런게 유행했을 때였어. 그래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본 거였어.”한성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과생인 나한테 이과생의 낭만을 논해? 그 방법으로 고백을 안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넌 평생 솔로였을 거야. 그런 식으로 고백에 성공하면 내가 성을 간다.”차미주가 말했다. “넌 공부를 못하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현진이는 공부 잘 했잖아. 이건 모범생끼리의 낭만이라고.”한현진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아냐. 나도 못 풀어.”혹여나 강한서가 또 “이과생의 낭만”을 선사하기라도 할까, 한현진이 당부하듯 말했다. “난 이과생의 낭만 같은 거 안 좋아해. 난 부자의 낭만이 좋아.”멈칫한 강한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한성우가 대답했다. “따뜻한 말보다는 수표라는 거예요? 저와 형수님이 생각하는 사랑이 같네요. 이젠 우리에게 뭘 선물해야 할지 알겠지?”강한서: ...차미주가 한성우를 꼬집었다. “네가 왜 끼어들어.”바로 그때, 민경하가 케이크를 밀며 나타났다. 민경하 옆에 선 강민서는 와인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생일 노래가 은은히 흘러나오고 한현진은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케이크에 꽂힌 촛불이 흔들리며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촛불이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었고 울컥한 강한서의 눈시울도 점점 뜨거워졌다. 생일이라는 건 언제나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걱정,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섭섭한 그런 날이었다. 강한서는 인맥이 넓어 생일엔 파티를 열어 다 함께 즐기는 한성우와는 달랐다. 그는 친한 친구 네, 다섯 명을 불러 호프집에서 간단히 술이나 한두 잔 하며 옛날 얘기도 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하는 걸 즐겼다. 한현진은 그런 강한서를 누구보다
불현듯 긴장감에 휩싸인 강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되었을 땐 강한서는 단지 혈연으로 이어진 아기 두 명이 더 생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이들을 사랑할 책임과 어른으로 성장시킬 의무가 더해지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꽤 흐릿한 느낌이었다. 아빠는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와는 달리 아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움직임을 느끼고 나서야 강한서는 두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뱃속의 아이는 그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혈육이었다. 두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나 그의 품에서 조금씩 성장하며 그를 “아빠”라고 부를 작은 생명체였다. 그 순간, 강한서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몸을 숙여 한현진의 배에 가까이 다가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착하지, 아빠 여기 있어.”마치 강한서의 말에 감응이라도 하듯, 뱃속의 어린 꼬물이들이 얌전해졌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물었다. “내 말을 들은 건가?”“이제 몇 개월이라고, 듣긴 뭘 들어.”라고 대답하려던 한현진은 반짝이는 강한서의 눈빛에 결국 그를 따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아. 애들에게 얘기 자주 해줘.”강한서가 갑자기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준비 좀 해야겠어.”한현진: ?“뭘 준비해?”강한서가 말했다. “태교 책도 좀 사고, 태교 수업도 받아야지. 계몽은 정말 중요한 거야. 태교라고 마음대로 가르치면 안 돼.”한현진은 진지한 모습의 강한서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태교는 너에게 맡길게. 난 누굴 배워주는 일에 참을성이 전혀 없거든.”강한서는 정중하게 태교 임무를 맡았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과일 좀 주고 올게.”한현진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과일은 바로 옆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미주네와 기껏해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굳이 가져다준다고?’하지만 강한
강한서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가면 들통 나잖아.”한현진이 말했다. “희연 언니 똑똑한 사람이야. 언니가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원장님께 연락드렸대. 난 원장님 부탁으로 조예단 씨 병문안 간 척 하면 돼.”“그럼 같이 가.”“넌 오늘 생일이잖아. 넌 가지 말고 여기서 재밌게 놀아. 나 혼자 가면 돼.”강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놀 수 있겠어. 가자. 내가 운전할게.”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조예단은 이미 응급실로 실려간 후였다. 아들을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희연은 두 사람을 보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희연 언니, 어떻게 됐어요?”한현진이 앞으로 다가가서야 입을 열었다. 진희연이 말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어요. 의사 말로는 아파서 쓰러진 것 같대요. 쓰러질 때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어서 가스 중독이 온 것 같아요. 저도 쓰러진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늘이가 오늘 학교에서 상을 받았는데 잠자리에 들어서야 갑자기 떠올리고는 굳이 상장을 할아버지께 보여주겠다고 해서 문을 두드렸더니 인기척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경비를 불러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조예단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바로 119에 신고하고 현진 씨에게 연락한 거예요.”한현진이 진희연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생하셨어요.”“고생은요.”진희연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예단 씨도 참 안 됐어요. 몸도 성치 않은데 곁에 가족이나 친구도 하나 없고.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려고 보니까 연락처에서 일부러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더라고요. 저장된 번호가 하나도 없었어요. 통화목록에서 원장님 번호를 찾아서 전화 드린 거예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예단은 당시 아이가 뒤바뀐 그 사건에게 혐의가 제일 큰 사람이었다. 오늘 그녀가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업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예단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둔
한현진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운 조예단의 모습이 보이자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두 사람을 힐끔 쳐다본 의사가 물었다. “어느 쪽이 환자 분 보호자시죠?”진희연이 말했다. “제가 이 분 이웃이에요. 이 분은 교포라 가족은 몰라요.”한현진이 말했다. “저는 이 분이 기부한 고아원의 대표예요.”의사가 말했다.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길어야 3개월 밖에 남지 않으셨어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드리세요. 비록 지금 수술은 의미 없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오셔서 약은 처방 받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통증이 심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고통스러울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하세요.”말하며 의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사인하세요.”서류를 받아 훑어보던 한현진은 성별란에 적힌 남이라는 글자에 그만 멍해졌다. “선생님, 이 분이 남자라고요?”의사가 기이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편견 어린 시선으로 트렌스젠더를 보지 마시죠.”한현진: !!!의사의 재촉에 진희연이 서류를 건네받아 사인한 후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한현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조예단이 도일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전환이라니? 왜 성전환 수술을 한 거야?’이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 앞으로 걸어갔을 때, 그는 진희연의 아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다가오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한현진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강한서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는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안 놀라워?”강한서가 물었다. “남장여자가 어떻게 티가 안 나? 여권, 비자 심지어 M국의 모든 신상정보도 전부 진짜였어. 만약 여자라면 그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병 때문에 병원도 자주 가야 했을 텐데, 병원은 가기만 하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급히 병실로 들어서던 그때, 도일준은 주사바늘을 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희연이 얼른 다가가 도일준을 제지했다. “뽑으시면 안 돼요. 아직 링거 다 못 맞았잖아요.”진희연을 힐끔 쳐다보던 도일준은 진희연 옆에 서 있는 한현진을 보고는 멈칫 몸을 굳혔다. 그리곤 곧바로 진희연의 손을 떨쳐내며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한현진을 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진희연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집에서 쓰러지셨어요. 의사가 보호자에게 연락하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연락을 드려야 할지 몰라 도일준 씨 휴대폰으로 아무 번호에나 연락을 했어요. 무슨 고아원이라고 하던데 이 분이 바로 그 고아원에서 보내주셔서 함께 도일준 씨를 병원으로 모신 분이세요. 이분 도움이 없었으면 전 당황해서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도일준 눈빛에 가득하던 경계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말했다. “원장님께서 연락을 받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가보라고 전화하셨어요.”“전 괜찮아요. 원장님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 그저 고아원에 후원을 조금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살면서 당신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원치 않아요. 오늘 전화는 사고 같은 거였어요. 이만 돌아가세요.”도일준은 차가운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한현진은 도일준의 손에서 옷을 빼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일준 씨가 본인이 후원하신 고아원의 사람들과 연락을 하던 안 하든 전 관심 없어요. 전 그저 원장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것 뿐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도일준 씨는 꽤 안 좋은 상황이라 입원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원장님께 부탁을 받았으니 그냥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퇴원하고 싶으시면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셔도 된다고 할 때 다시 얘기하죠.”말하며 한현진은 침대 맡에 있던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68번 베드 바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급히 병실로 들어서던 그때, 도일준은 주사바늘을 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희연이 얼른 다가가 도일준을 제지했다. “뽑으시면 안 돼요. 아직 링거 다 못 맞았잖아요.”진희연을 힐끔 쳐다보던 도일준은 진희연 옆에 서 있는 한현진을 보고는 멈칫 몸을 굳혔다. 그리곤 곧바로 진희연의 손을 떨쳐내며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한현진을 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진희연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집에서 쓰러지셨어요. 의사가 보호자에게 연락하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연락을 드려야 할지 몰라 도일준 씨 휴대폰으로 아무 번호에나 연락을 했어요. 무슨 고아원이라고 하던데 이 분이 바로 그 고아원에서 보내주셔서 함께 도일준 씨를 병원으로 모신 분이세요. 이분 도움이 없었으면 전 당황해서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도일준 눈빛에 가득하던 경계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말했다. “원장님께서 연락을 받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가보라고 전화하셨어요.”“전 괜찮아요. 원장님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 그저 고아원에 후원을 조금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살면서 당신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원치 않아요. 오늘 전화는 사고 같은 거였어요. 이만 돌아가세요.”도일준은 차가운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한현진은 도일준의 손에서 옷을 빼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일준 씨가 본인이 후원하신 고아원의 사람들과 연락을 하던 안 하든 전 관심 없어요. 전 그저 원장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것 뿐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도일준 씨는 꽤 안 좋은 상황이라 입원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원장님께 부탁을 받았으니 그냥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퇴원하고 싶으시면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셔도 된다고 할 때 다시 얘기하죠.”말하며 한현진은 침대 맡에 있던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68번 베드 바
한현진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운 조예단의 모습이 보이자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두 사람을 힐끔 쳐다본 의사가 물었다. “어느 쪽이 환자 분 보호자시죠?”진희연이 말했다. “제가 이 분 이웃이에요. 이 분은 교포라 가족은 몰라요.”한현진이 말했다. “저는 이 분이 기부한 고아원의 대표예요.”의사가 말했다.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길어야 3개월 밖에 남지 않으셨어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드리세요. 비록 지금 수술은 의미 없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오셔서 약은 처방 받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통증이 심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고통스러울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하세요.”말하며 의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사인하세요.”서류를 받아 훑어보던 한현진은 성별란에 적힌 남이라는 글자에 그만 멍해졌다. “선생님, 이 분이 남자라고요?”의사가 기이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편견 어린 시선으로 트렌스젠더를 보지 마시죠.”한현진: !!!의사의 재촉에 진희연이 서류를 건네받아 사인한 후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한현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조예단이 도일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전환이라니? 왜 성전환 수술을 한 거야?’이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 앞으로 걸어갔을 때, 그는 진희연의 아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다가오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한현진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강한서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는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안 놀라워?”강한서가 물었다. “남장여자가 어떻게 티가 안 나? 여권, 비자 심지어 M국의 모든 신상정보도 전부 진짜였어. 만약 여자라면 그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병 때문에 병원도 자주 가야 했을 텐데, 병원은 가기만 하
강한서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가면 들통 나잖아.”한현진이 말했다. “희연 언니 똑똑한 사람이야. 언니가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원장님께 연락드렸대. 난 원장님 부탁으로 조예단 씨 병문안 간 척 하면 돼.”“그럼 같이 가.”“넌 오늘 생일이잖아. 넌 가지 말고 여기서 재밌게 놀아. 나 혼자 가면 돼.”강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놀 수 있겠어. 가자. 내가 운전할게.”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조예단은 이미 응급실로 실려간 후였다. 아들을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희연은 두 사람을 보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희연 언니, 어떻게 됐어요?”한현진이 앞으로 다가가서야 입을 열었다. 진희연이 말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어요. 의사 말로는 아파서 쓰러진 것 같대요. 쓰러질 때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어서 가스 중독이 온 것 같아요. 저도 쓰러진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늘이가 오늘 학교에서 상을 받았는데 잠자리에 들어서야 갑자기 떠올리고는 굳이 상장을 할아버지께 보여주겠다고 해서 문을 두드렸더니 인기척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경비를 불러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조예단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바로 119에 신고하고 현진 씨에게 연락한 거예요.”한현진이 진희연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생하셨어요.”“고생은요.”진희연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예단 씨도 참 안 됐어요. 몸도 성치 않은데 곁에 가족이나 친구도 하나 없고.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려고 보니까 연락처에서 일부러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더라고요. 저장된 번호가 하나도 없었어요. 통화목록에서 원장님 번호를 찾아서 전화 드린 거예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예단은 당시 아이가 뒤바뀐 그 사건에게 혐의가 제일 큰 사람이었다. 오늘 그녀가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업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예단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둔
불현듯 긴장감에 휩싸인 강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되었을 땐 강한서는 단지 혈연으로 이어진 아기 두 명이 더 생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이들을 사랑할 책임과 어른으로 성장시킬 의무가 더해지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꽤 흐릿한 느낌이었다. 아빠는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와는 달리 아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움직임을 느끼고 나서야 강한서는 두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뱃속의 아이는 그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혈육이었다. 두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나 그의 품에서 조금씩 성장하며 그를 “아빠”라고 부를 작은 생명체였다. 그 순간, 강한서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몸을 숙여 한현진의 배에 가까이 다가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착하지, 아빠 여기 있어.”마치 강한서의 말에 감응이라도 하듯, 뱃속의 어린 꼬물이들이 얌전해졌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물었다. “내 말을 들은 건가?”“이제 몇 개월이라고, 듣긴 뭘 들어.”라고 대답하려던 한현진은 반짝이는 강한서의 눈빛에 결국 그를 따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아. 애들에게 얘기 자주 해줘.”강한서가 갑자기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준비 좀 해야겠어.”한현진: ?“뭘 준비해?”강한서가 말했다. “태교 책도 좀 사고, 태교 수업도 받아야지. 계몽은 정말 중요한 거야. 태교라고 마음대로 가르치면 안 돼.”한현진은 진지한 모습의 강한서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태교는 너에게 맡길게. 난 누굴 배워주는 일에 참을성이 전혀 없거든.”강한서는 정중하게 태교 임무를 맡았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과일 좀 주고 올게.”한현진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과일은 바로 옆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미주네와 기껏해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굳이 가져다준다고?’하지만 강한
한성우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한현진은 웃으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그땐 인터넷에서 한창 이과생의 낭만, 뭐 이런게 유행했을 때였어. 그래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본 거였어.”한성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과생인 나한테 이과생의 낭만을 논해? 그 방법으로 고백을 안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넌 평생 솔로였을 거야. 그런 식으로 고백에 성공하면 내가 성을 간다.”차미주가 말했다. “넌 공부를 못하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현진이는 공부 잘 했잖아. 이건 모범생끼리의 낭만이라고.”한현진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아냐. 나도 못 풀어.”혹여나 강한서가 또 “이과생의 낭만”을 선사하기라도 할까, 한현진이 당부하듯 말했다. “난 이과생의 낭만 같은 거 안 좋아해. 난 부자의 낭만이 좋아.”멈칫한 강한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한성우가 대답했다. “따뜻한 말보다는 수표라는 거예요? 저와 형수님이 생각하는 사랑이 같네요. 이젠 우리에게 뭘 선물해야 할지 알겠지?”강한서: ...차미주가 한성우를 꼬집었다. “네가 왜 끼어들어.”바로 그때, 민경하가 케이크를 밀며 나타났다. 민경하 옆에 선 강민서는 와인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생일 노래가 은은히 흘러나오고 한현진은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케이크에 꽂힌 촛불이 흔들리며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촛불이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었고 울컥한 강한서의 눈시울도 점점 뜨거워졌다. 생일이라는 건 언제나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걱정,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섭섭한 그런 날이었다. 강한서는 인맥이 넓어 생일엔 파티를 열어 다 함께 즐기는 한성우와는 달랐다. 그는 친한 친구 네, 다섯 명을 불러 호프집에서 간단히 술이나 한두 잔 하며 옛날 얘기도 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하는 걸 즐겼다. 한현진은 그런 강한서를 누구보다
“현진아.”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울대가 움직였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주문한 거야?”“아마 새벽에 잠 못 들고 침대에서 일어난 네가 몰래 수집실에 들어가 그 기계뭉치를 꺼내봤을 때?”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생각했지. 강아지처럼 불쌍한 사람이니까, 내가 많이 아껴줘야지.”피식 웃던 강한서가 곧 눈시울을 붉혔다. 손을 뻗어 한현진을 꽉 안은 강한서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의 가는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럽게 강한서의 등을 토닥이던 한현진이 와장창,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렇게 감동할 거 없어. 네 돈으로 산거야. 알잖아. DC 어르신, 값을 부를 땐 양심도 없다니까.”강한서: ...한현진은 다시 분위기를 살리고 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때 어머니가 내가 망가뜨린 거라고 했잖아. 단 일 초도 날 의심한 적 없었어?”신미정은 먼저 강한서에게 못생긴 기계뭉치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신미정이 전한 스토리에서 기계를 망가뜨린 범인은 한현진이 되어버렸다. 당시 강한서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지만 한현진은 마음 속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강한서는 신미정을 믿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감동한 표정의 한현진이 말했다. “넌 그때부터 날 믿었던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RC카에 블랙박스가 있었어.”한현진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굳어갔고 감동도 파스스 사라졌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어떻게 널 안 믿겠어? 넌 아무리 화가 나도 제일 싼 컵을 던지는 애였어. 그런 애가 그걸 부쉈을 리가 없잖아.”한현진은 기쁜 듯, 또 아닌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짠돌이 근성을 믿은 것이었다. “강한서.”한현진이 나지막이 강한서를 불렀다. “응.”강한서가 대답했다. 눈을 감은
못생긴 기계뭉치는 강한서가 직접 만든 로봇 RC카였다. 한현진은 막 개조를 완성한 강한서가 못생긴 기계뭉치를 조종해 그녀에게 택배를 가져다 줄 때의 덤덤한 척 하지만 은근히 그녀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며 결국엔 입꼬리를 씩 올려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던 강한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봇 RC카는 강한서가 먼지 한 톨이 묻어도 직접 닦을 정도로 아끼는 물건이었다. 만약 강한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 못생긴 기계뭉치가 아이들 손에 놀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어쩌면 한현진이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한 탓인지 친척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미정은 한현진의 말이 자기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수리해도 우리 집안 돈으로 할 거야. 너한테 비용 감당하라고 안 해.”신미정의 그 말은 정말이지 듣기 거북할 정도였다. 한현진을 전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미정의 발언에 한현진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함께 따라온 친척들 역시 일이 더 커질 것을 예견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데리고 하나둘 자리를 피했다. 신미정은 한현진을 노려보며 차를 타오라고 명령했다. 한현진은 신미정이 그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랬기에순순히 차를 내리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현진이 주방에서 나왔을 때 신미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못생긴 기계뭉치는 산산히 부서진 채 바닥에 널부러져있었다. 누군가 위에서 던진 것이었다. 강한서가 출장에서 돌아와서야 한현진은 그 일을 강한서에게 알렸다. 그가 돌아오기 전 한현진은 이미 수십 명의 정비사를 찾아 복원을 시도했다. 하지만 로봇 자체가 이미 강한서에 의해 개조된 것이었고 부품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더는 교체할 부품이 없었다. 한현진이 부탁한 모든 정비사들은 하나 같이 아쉽지만 도와줄 수 없다고 얘기했다. 강한서는 부서진 로봇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잔해를 안고 수집실로 향했다. 수많은 방법을 시도
물병엔 점과 선으로 구성된 부호가 찍혀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못생긴 병을 가져온 거야.’물을 마신 한현진은 물병을 던져버렸다. 화가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한현진은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한현진은 얌전히 앉아있는 강한서를 보고도 무시한 채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 씻은 후 잠에 들었다. 늦은 새벽, 잠결에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 한현진은 움찔 몸을 떨며 손을 들어 그대로 내려쳤다. 머리를 맞은 강한서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한현진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너 뭐하는 거야? 이 새벽에 변태 행세라도 하려고 그래?”‘아직 화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달래지도 않고 그냥 들이대시겠다? 센스라곤 없는 자식!’강한서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는 한참만에야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그 물 마셨잖아.”멈칫하던 한현진이 물었다. “그 물에 약이라도 탔어?”‘그래서 직접 해독제라도 해주겠다는 거야?’강한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시간이 꽤 흘러서야 그는 어두운 얼굴로 이불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그날 밤, 강한서는 서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한현진은 잠이 들 때까지도 강한서가 대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가 한현진이 오랫동안 기대했던 케이크를 강민서에게 “선물”한 사건이 벌어졌다. 조금 느슨해졌던 두 사람 사이에 다시 긴장이 맴돌았다. 얼마 후 새해가 밝았다. 그날 강한서는 출장 때문에 한주에 없었고 신미정은 신표 가족을 비롯한 몇 촌인지도 알 수 없는 친척들을 데리고 한현진과 강한서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 강한서가 있을 때면 신미정은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 비록 신미정은 강한서의 생활에 이것저것 간섭하기를 좋아했지만 강한서는 신미정의 그런 모습을 제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대화는 늘 다툼으로 마무리 되었다. 신미정은 아들
처음엔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한 한현진은 길을 피해주었다. 그러자 로봇 RC카는 그녀를 에워싸고 한 반퀴 빙 돌더니 또 다시 그녀의 발에 부딪혔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2층은 텅 비어 강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났을 때면 한현진은 누구보다 강한서를 미워했다. ‘너로는 부족해서 거지같은 네 기계까지 날 괴롭히는 거야?’생각하던 한현진은 아예 몸을 일으켜 겉옷을 챙겨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그 결과, 이상한 생김새의 RC카는 한현진을 따라 집을 나섰다. RC카는 강아지처럼 한현진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잔뜩 짜증이 난 한현진은 로봇 RC카를 펑 차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가방보다도 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꾹 참아내야 했다. 한현지이 자리를 잡고 의자에 앉자 로봇 RC카는 그의 기계팔로 물병을 한현진의 발 옆으로 건넸다. 못생긴 기계뭉치를 노려보던 한현진은 물병을 잡아 던져버렸다. 그러자 “못생긴 기계뭉치”는 U턴하더니 강아지처럼 달려가 물병을 다시 주웠다. 아름드리는 입주민이 꽤 많은 별장에 속했다. 이웃들 모두 같은 업계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녀와 강한서처럼 아이도 없는 젊은 부부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아이를 키우는 부부거나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한현진이 산책을 나선 시간은 마침 다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즐기는 시간대였다. 그러니 로봇 RC카가 물병을 주워오는 그 장면은 마침 일반 RC카를 갖고 놀던 아이들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로봇 RC카를 구경하며 재잘재잘 질문을 던졌다. “누나,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너무 멋져요. 물건도 주울 줄 알아.”“엔진 완전 대박이야. 이렇게 가파른 길도 올라갈 수 있다니. 최고잖아.”“휘발유를 연료로 하는 거예요? 저게 연료탱크예요?”“바퀴도 더 큰 거로 개조한 거야. 무거운 물건도 끌 수 있어요?”못생긴 기계뭉치는 마치 일부러 뽐내기라도 하듯 기계팔을 뻗어 통통한 남자 아이를 잡고 자기 등으로 끌었다. “올라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