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열이 연이어 올린 두 피드는 한열과 신인배우의 브로맨스에 잔뜩 빠져있던 팬들의 멘탈을 와장창 깨뜨렸다. 한열은 당사자가 직접 나서 팬들의 환상을 와장창 깨놓은 최초의 연예인이 되었다. 실망이 극에 달한 팬들은 하나둘 그에게 쓰레기라며 댓글을 남겼다. 그러자 한열의 팬덤도 이에 지지않고 전투력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 두 팬덤은 인터넷에서 서로 피 터지는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그 신인배우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수작을 부렸다. 그는 목도리 사진을 삭제하며 또 다른 피드를 업로드 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높은 곳에 있었다면 네 곁에 설 자격이 있는 건 아닐까.]하필 이 타이밍에 올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피드에 네티즌들은 자연스레 커리어에 영향을 끼칠까 인정하기를 겁낸 한열이 그 신인 배우를 차버리고는 일부러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 상대방을 저격한 것이라 여겼다. 두 사람의 브로맨스 팬클럽 회원이 절반이상 빠져나갔고 나머지 절반은 신인 배우의 팬클럽에 가입해 미친 듯이 한열을 욕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열의 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 신인 배우의 데뷔 전 학폭 사실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과거의 일로 지금의 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많은 증거 사진들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신인 배우는 줄곧 학폭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한열을 밟고 인기 반열에 올라섰다. 예능 스케줄이 하나둘 늘었고 회사에도 더는 그와 견줄 사람이 없었다. 역시 그를 이미 솟아오른 라이징 스타라고 생각한 그의 매니저 역시 그 기회를 틈 타 윤명훈에게서 계약을 빼앗아가려 했다. 그보다 괘씸한 것은 학폭 가해자인 그가 학폭을 반대하는 공익광고를 촬영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던 그때, 촬영장에서의 메이킹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 동영상은 그와 한열이 같이 촬영하던 드라마에서 그가 “실수”로 한열의 커피를 마시고 나서의 뒷이야기였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나온 신인 배우는 매
신하리가 이번엔 질문을 바꿔 다르게 물었다. “그 선택을 안 하면 공백기 동안 인기가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래?”한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다시 가로 저었다. 그리곤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안 하면 제가 또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데뷔 후 한열은 단 한 번도 휴가를 간 적이 없었다. 갑자기 일이 없으면 한열은 목적지를 잃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것 같았다. 또 어쩌면 아버지에게 비웃음을 당할지도 몰랐다. 신하리가 말했다. “공부하면 되잖아. 넌 아직 이렇게 어린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야. 이 바닥에서 오래도록 살아남고 싶으면 언제든 카메라 앞에 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 애초부터 배우로 태어난 사람은 없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연기 지도 교수님들은 대부분 한주대 연극학과에 계셔. 네가 체계적으로 연기를 배우면서 선배님들의 실력을 눈앞에서 느끼게 되면 밖에선 경험할 수 없는 걸 경험하게 될 거야.”신하리의 말에 혼란스럽던 한열의 머릿속에 한줄기의 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한열에게 공부라는 기회가 선택지가 주어지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학창시절 한열의 꿈은 한주대 연극학과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꿈이 한열이 의대를 휴학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그는 어쩌다 보니 또 다른 신분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연기라는 영역은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아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본인의 이해만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기가 어려웠다. 한열 스스로도 본인의 연기가 이젠 서서히 틀에 박힌 똑같은 레퍼토리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연기를 평가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좋은 연기 선생님은 연기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해 연기력이 늘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다. 한열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곧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한주대 연극학과에 입학할 수 있을까요?”신하리가 말했다. “수능 전 영역 1등급은 베껴서 된 거야?”“...”한열이 바득 이
한열이 분통을 터뜨렸다. “미안하다는 사람이 선인장으로 찔러요? 양심이 있긴 한 거예요?”신하리가 말했다. “말라비틀어진 선인장이야. 건드리기만 해도 가시가 부서질 정도라 찔리지도 않았으면 웬 엄살이야?”“그래도 아프다고요! 신하리 씨도 발바닥 한 번 찔려봐요! 발바닥 살이 얼마나 얇은데요.”한열이 신하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종알거렸다. “지금 계단 오르는 것도 아프다고요.”멈칫, 걸음을 멈춘 신하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내가 안아서 방까지 데려다줘?”한열이 움찔 했다. “네?”신하리가 말하며 당장이라도 한열을 안을 듯이 자세를 취하자 한열이 기겁하며 껑충 뛰며 뒤로 물러섰다. “뭐하는 거예요?”신하리가 쯧, 혀를 찼다. “잘 뛰면서, 뭘.”“...”다채로운 표정을 짓던 한열이 결국은 버럭 화를 냈다. “사기꾼!”다친 머리가 여전히 아팠던 신하리는 더는 어린 아이 같은 한열을 놀리고 싶지 않았다. 게스트룸을 열고 새 이불을 가져다준 신하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그냥 자. 내일 사람 불러서 청소해두라고 할게. 욕실은 이쪽, 내 방은 바로 옆방이야. 난 먼저 잘게.”말을 마친 신하리는 한열이 대답할 새도 없이 방을 나서려 했다. 한열이 그런 신하리를 불러세웠다. “세탁기는 어디 있어요?”“일층 베란다.”한열의 질문에 대답한 신하리가 방을 나섰다. 한열은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 방엔 침대와 장롱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 물건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이 방에는 단 한 번도 사람이 지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연희에게 전화해 그녀를 안심시키고 나서야 한열은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한열은 하반신을 샤워 가운으로 가린 채로 방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꼭 닫힌 옆방 문은 아무런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신하리는 이미 잠이 든 모양이었다. 190cm의 장신인 한열이 옷을 안고 까치발을 한 채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향했다. 오늘 사람들이 던진 것들 때문에 더럽혀진 옷은 꿉꿉한 냄
지금 한열의 몸매는 카메라에 완벽에 가깝게 비춰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팬들이 눈호강하겠네.’그런 생각을 하던 신하리는 가져온 담요를 펼쳐 한열에게 덮어주었다. 신하리가 담요를 한열의 어깨로 끌어올려주던 그때, 한열이 번뜩 눈을 떴다. 그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신하리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곤 저도 모르게 신하리를 밀어내며 쑥스럽게 말했다. “새벽에 안 자고 왜 나와서 사람을 놀래켜요?”한열이 허둥지둥 담요로 몸을 감쌌다. 그는 신하리를 선을 안 지키는 미친 여자라며 혼자 투덜거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신하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신하리가 보였다. 한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늦은 새벽, 강한서는 한열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팍에서 한현진의 손을 떼어내고 이불을 덮어준 후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쥐고 방을 나섰다. 강한서가 한열의 부탁으로 신하리를 남산 병원에 입원시켰을 땐 이미 아침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머리를 다친데다 감기까지 걸렸고 심지어 신하리는 요즘 촬영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한꺼번에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열이 난 사람을 본 한열은 놀란 가슴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의사는 신하리가 쓰러진 원인이 고열 때문은 아니라 피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깨어나지 않는 것은 그저 잠이 든 것뿐이라며 충분히 휴식하면 자연스레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미 해열 주사를 맞았으니 깨어날 쯤이면 열도 내릴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실에서 나온 한열은 그와 함께 병원에 와준 강한서를 보고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매형, 고마워요.”매형이라는 호칭에 강한서의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처남들이 귀엽네. 형님에게 인정받는 건 너무 어려워.’강한서는 한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끼리,
지금 한열의 눈에 강한서는 이미 친형 같은 필터가 쓰인 상태였다. 강한서는 프로에게 부탁해 한열 게임 회사의 버그를 해결해주었고 한밤중에 그를 도와 신하리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늦은 저녁엔 퀵을 불러 그에게 어탕을 보내주기도 했다. 동생에게 사기 치는 송민준보다 백만 배는 더 나았다. 그러니 강한서의 질문에 한열은 아는 것 전부를 털어놓았다. “누나가 아니라 친척 분들이요. 매형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나에게 남자를 소개하고 싶다고 저희 부모님을 찾아왔었어요. 전부 고담시 사람들이었어요.”한열의 고모인 한아람은 고담시의 유명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재능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수한 유전자로 인해 한씨 가문과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구 끝까지 줄을 섰다고 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던 당시, 이미 수많은 오작교들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강한서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땐 아예 대놓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자들의 자료를 한준웅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히 말을 못 꺼내던 한준웅과 하연희도 3개월간의 기다림에도 강한서의 기억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심지어 완벽에 가까운 맞선 대상의 조건에 티 나지 않게 한현진에게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준웅을 통해 한태진과 공영선에게 루나를 선물로 보낸게 고작 지난주의 일이었다. 앞에선 마음 써줘서 고맙다고 하더니 뒤에선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하다니. 강한서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한열 씨 부모님이 현진 씨에게 사람을 소개해주신게 언제부터였어요?”잠시 생각하던 한열이 말했다. “최소 두 주일은 된 것 같아요. 제가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일주일 전이었거든요. 엄마는 연락처를 누나에게 보내주면서 두 사람이 알아서 연락하라고 하셨어요.”강한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두 주일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자 [꽃 피는 봄날]은 곧바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청년, 나한테 사진이랑 이력서 보내봐. 한현진 씨가 조건이 좋아. 결혼이라는 게 자고로 서로 조건이 맞아야하는 거잖아. 조건이 너무 떨어지면 아줌마가 청년을 추천할 수가 없어. 내가 추천해준다고 해도 그쪽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청년 자존심만 상하잖아.]강한서가 답장했다. [알겠어요.]그리곤 강한서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아주머니, 한현진 씨에게 몇 명이나 소개해주셨어요?][꽃 피는 봄날]이 대답했다. [6, 7명 정도 소개한 것 같은데. 나도 잘 기억은 안 나.]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게 많이 소개해주셨는데 한현진 씨 마음에 든 분이 한 명도 없었어요?]꽃 피는 봄날: [그냥 얘기해 본다고만 했어. 마음에 든다, 아니다 얘기한 적은 없었지. 하지만 소개해 준 청년들은 한현진 씨를 좋게 본 것 같아. 다들 한현진 씨가 호감이라고 하던데.]강한서가 쯧, 혀를 찼다. 그는 조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내 마음에 든 사람인데, 호감형이 아닐 리가 없잖아.’[청년, 빨리 자료 보내. 오후엔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 끌다간 내가 까먹을 것 같아서 그래.][알겠어요, 아주머니.]강한서는 신우가 개발한 앱을 열어 한현진이 좋아할만한 스타일을 골라 AI 이미지를 생성했다. 그리곤 대충 이력서를 작성해 [꽃 피는 봄날]에게 전송했다. 물론 한현진이 그 몰래 맞선을 봤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한준웅와 하연희의 맞선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강한서가 기억을 회복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한현진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많은 남자의 연락처를 받고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서도 상대방에게 호감을 남길 수 있는 건 대체 어떤 능력인 걸까?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던 강한서는 직접 테스트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기 고구마]가 한열의 성희롱을 폭로한 사건은 다음날 큰 반전을 맞이했다. 한
한현진이 생각했다. ‘당연히 너무 괜찮죠!’눈, 코, 입. 모든 곳이 전부 한현진 마음에 쏙 들었다. 사진 속의 자태는 20대 시절의 강한서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굳이 부족한 점을 찾자면 외모가 너무 완벽한 탓에 왠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전혀 진정성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강한서를 처음 만났을 때 한현진은 그의 외모에 한 눈에 반할 정도였다. 특히 강한서의 생기로 반짝이는 눈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진 속 사람의 눈빛은 2%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한현진은 상대방의 이력서를 대충 훑었다. 이름은 허연석, 28세, 고향은 한주, 대학원생 학력에 지금은 연현 테크에서 칩 설계를 맡고 있었다. ‘여기 강한서네 회사잖아?’한현진이 답장했다. [아주머니, 연락처 보내주세요. 제가 연락해 볼게요.][꽃 피는 봄날]이 곧바로 허연석의 연락처를 한현진에게 보내주었다. 몇 분 후, 강한서는 카톡 친구 추가 신청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었다. 임신을 하고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그의 아내, 한현진이었다.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고 한현진의 맞선 대상의 일원으로 되었다. 한현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허연석 씨. 기혜인 아주머니께서 소개해 주셔서 연락드렸어요.]강한서는 태연하게 아내에게 연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한현진 씨.]한현진: [혜인 아주머니 말로는 연현 테크에 출근하신다고요?]강한서: [네.]한현진이 또 물었다. [연현 테크에 입사하려면 스펙이 좋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허연석 씨 능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강한서: [대단하긴요. 그리 힘들지도 않았어요.]자신감은 꽤 있네, 라고 생각한 한현진이 손가락을 빠르게 놀려 타자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제 친구도 그쪽 일을 하고 있는데 올해 모집한 신입사원은 최소한 인 서울 대학의 대학원생이라고 하던데요.]상대방은 마치 떠보는 한현진의 말을 알아채지 못하기라도 한 듯 되물었다. [이런 우연도 있네요.
한현진이 말했다. [허연석 씨, 저에게 솔로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들어오실래요? 다들 젊은 분들이고 개인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셔서 채팅방에서 마음 놓고 얘기를 나누셔도 돼요. 나중에 친목회가 있을 때면 참석하셔도 되고요.]강한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강한서가 대답했다. [좋아요.]그렇게 한현진은 강한서를 [친목 다짐 7번 방]이라는 이름의 그룹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강한서가 채팅방에 초대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열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강한서는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곧이어 그의 말괄량이 아내인 한현진이 그룹 공지를 올렸다. 공지엔 강한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개인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강한서가 공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이 그룹 채팅방은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강한서는 유일한 남자 멤버였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게다가 채팅방에 있는 전원이 깔린느의 직원이었다. 어리둥절한 강한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쯤, 채팅방에서는 이미 한 여자 아이가 먼저 다가와 강한서에게 말을 걸었다. A: [허연석 씨는 한주가 고향이세요?]강한서가 예의상 그렇다고 대답했다. A: [실례지만 키가 몇이세요?]강한서: 187B: [완전 크시네요!]C: [여자친구가 160cm여도 괜찮으세요?]D: [1살 연상도 괜찮아요?]E: [가영언니(D)가 이렇게 남자 분께 먼저 말 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C: [이번 남자 분은 조건이 너무 좋잖아요. 조건 좋은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D: [한평생 착하게 살았으니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됐어.]A: [언니들, 동생들에게 양보 좀 해요. 지금까지 모태솔로라고요. 연애 좀 하게 해줘요!]강한서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남자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들에게 무차별적인 유혹을 당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젠장,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야.’강한서는 놀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