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열의 눈에 강한서는 이미 친형 같은 필터가 쓰인 상태였다. 강한서는 프로에게 부탁해 한열 게임 회사의 버그를 해결해주었고 한밤중에 그를 도와 신하리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늦은 저녁엔 퀵을 불러 그에게 어탕을 보내주기도 했다. 동생에게 사기 치는 송민준보다 백만 배는 더 나았다. 그러니 강한서의 질문에 한열은 아는 것 전부를 털어놓았다. “누나가 아니라 친척 분들이요. 매형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나에게 남자를 소개하고 싶다고 저희 부모님을 찾아왔었어요. 전부 고담시 사람들이었어요.”한열의 고모인 한아람은 고담시의 유명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재능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수한 유전자로 인해 한씨 가문과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구 끝까지 줄을 섰다고 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던 당시, 이미 수많은 오작교들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강한서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땐 아예 대놓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자들의 자료를 한준웅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히 말을 못 꺼내던 한준웅과 하연희도 3개월간의 기다림에도 강한서의 기억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심지어 완벽에 가까운 맞선 대상의 조건에 티 나지 않게 한현진에게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준웅을 통해 한태진과 공영선에게 루나를 선물로 보낸게 고작 지난주의 일이었다. 앞에선 마음 써줘서 고맙다고 하더니 뒤에선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하다니. 강한서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한열 씨 부모님이 현진 씨에게 사람을 소개해주신게 언제부터였어요?”잠시 생각하던 한열이 말했다. “최소 두 주일은 된 것 같아요. 제가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일주일 전이었거든요. 엄마는 연락처를 누나에게 보내주면서 두 사람이 알아서 연락하라고 하셨어요.”강한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두 주일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자 [꽃 피는 봄날]은 곧바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청년, 나한테 사진이랑 이력서 보내봐. 한현진 씨가 조건이 좋아. 결혼이라는 게 자고로 서로 조건이 맞아야하는 거잖아. 조건이 너무 떨어지면 아줌마가 청년을 추천할 수가 없어. 내가 추천해준다고 해도 그쪽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청년 자존심만 상하잖아.]강한서가 답장했다. [알겠어요.]그리곤 강한서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아주머니, 한현진 씨에게 몇 명이나 소개해주셨어요?][꽃 피는 봄날]이 대답했다. [6, 7명 정도 소개한 것 같은데. 나도 잘 기억은 안 나.]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게 많이 소개해주셨는데 한현진 씨 마음에 든 분이 한 명도 없었어요?]꽃 피는 봄날: [그냥 얘기해 본다고만 했어. 마음에 든다, 아니다 얘기한 적은 없었지. 하지만 소개해 준 청년들은 한현진 씨를 좋게 본 것 같아. 다들 한현진 씨가 호감이라고 하던데.]강한서가 쯧, 혀를 찼다. 그는 조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내 마음에 든 사람인데, 호감형이 아닐 리가 없잖아.’[청년, 빨리 자료 보내. 오후엔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 끌다간 내가 까먹을 것 같아서 그래.][알겠어요, 아주머니.]강한서는 신우가 개발한 앱을 열어 한현진이 좋아할만한 스타일을 골라 AI 이미지를 생성했다. 그리곤 대충 이력서를 작성해 [꽃 피는 봄날]에게 전송했다. 물론 한현진이 그 몰래 맞선을 봤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한준웅와 하연희의 맞선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강한서가 기억을 회복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한현진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많은 남자의 연락처를 받고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서도 상대방에게 호감을 남길 수 있는 건 대체 어떤 능력인 걸까?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던 강한서는 직접 테스트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기 고구마]가 한열의 성희롱을 폭로한 사건은 다음날 큰 반전을 맞이했다. 한
한현진이 생각했다. ‘당연히 너무 괜찮죠!’눈, 코, 입. 모든 곳이 전부 한현진 마음에 쏙 들었다. 사진 속의 자태는 20대 시절의 강한서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굳이 부족한 점을 찾자면 외모가 너무 완벽한 탓에 왠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전혀 진정성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강한서를 처음 만났을 때 한현진은 그의 외모에 한 눈에 반할 정도였다. 특히 강한서의 생기로 반짝이는 눈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진 속 사람의 눈빛은 2%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한현진은 상대방의 이력서를 대충 훑었다. 이름은 허연석, 28세, 고향은 한주, 대학원생 학력에 지금은 연현 테크에서 칩 설계를 맡고 있었다. ‘여기 강한서네 회사잖아?’한현진이 답장했다. [아주머니, 연락처 보내주세요. 제가 연락해 볼게요.][꽃 피는 봄날]이 곧바로 허연석의 연락처를 한현진에게 보내주었다. 몇 분 후, 강한서는 카톡 친구 추가 신청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었다. 임신을 하고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그의 아내, 한현진이었다.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고 한현진의 맞선 대상의 일원으로 되었다. 한현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허연석 씨. 기혜인 아주머니께서 소개해 주셔서 연락드렸어요.]강한서는 태연하게 아내에게 연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한현진 씨.]한현진: [혜인 아주머니 말로는 연현 테크에 출근하신다고요?]강한서: [네.]한현진이 또 물었다. [연현 테크에 입사하려면 스펙이 좋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허연석 씨 능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강한서: [대단하긴요. 그리 힘들지도 않았어요.]자신감은 꽤 있네, 라고 생각한 한현진이 손가락을 빠르게 놀려 타자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제 친구도 그쪽 일을 하고 있는데 올해 모집한 신입사원은 최소한 인 서울 대학의 대학원생이라고 하던데요.]상대방은 마치 떠보는 한현진의 말을 알아채지 못하기라도 한 듯 되물었다. [이런 우연도 있네요.
한현진이 말했다. [허연석 씨, 저에게 솔로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들어오실래요? 다들 젊은 분들이고 개인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셔서 채팅방에서 마음 놓고 얘기를 나누셔도 돼요. 나중에 친목회가 있을 때면 참석하셔도 되고요.]강한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강한서가 대답했다. [좋아요.]그렇게 한현진은 강한서를 [친목 다짐 7번 방]이라는 이름의 그룹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강한서가 채팅방에 초대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열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강한서는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곧이어 그의 말괄량이 아내인 한현진이 그룹 공지를 올렸다. 공지엔 강한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개인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강한서가 공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이 그룹 채팅방은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강한서는 유일한 남자 멤버였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게다가 채팅방에 있는 전원이 깔린느의 직원이었다. 어리둥절한 강한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쯤, 채팅방에서는 이미 한 여자 아이가 먼저 다가와 강한서에게 말을 걸었다. A: [허연석 씨는 한주가 고향이세요?]강한서가 예의상 그렇다고 대답했다. A: [실례지만 키가 몇이세요?]강한서: 187B: [완전 크시네요!]C: [여자친구가 160cm여도 괜찮으세요?]D: [1살 연상도 괜찮아요?]E: [가영언니(D)가 이렇게 남자 분께 먼저 말 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C: [이번 남자 분은 조건이 너무 좋잖아요. 조건 좋은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D: [한평생 착하게 살았으니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됐어.]A: [언니들, 동생들에게 양보 좀 해요. 지금까지 모태솔로라고요. 연애 좀 하게 해줘요!]강한서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남자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들에게 무차별적인 유혹을 당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젠장,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야.’강한서는 놀
강한서는 저돌적인 여자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한현진을 화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현진에게 사건의 전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내가 너 몰래 선을 본다고 생각해서 부계정으로 날 추가해 불륜의 증거라도 잡으려고 했던 거야?”강한서가 곧바로 부정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널 믿지 않을 수 있겠어?”“그럼 왜 부계정으로 날 속인 거야?!”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아주머니께서 네가 7, 8명의 연락처를 가져갔다고 하니까 네가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어.”한현진이 불퉁하게 말했다. “연락처를 왜 교환했겠어? 너도 봤잖아! 널 바꿔버릴까, 고민하고 있었어.”본인의 잘못임을 잘 알고 있던 강한서는 나지막이 반성했다. “현진아, 정말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런게 아니야. 난 그냥 질투가 조금 나서 그랬어. 외삼촌과 숙모님께서 너에게 그렇게 많은 맞선 상대를 소개해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야 난 어른들이 날 이렇게까지 안 좋아하시는 건지 알게 돼서 속상했어.”그 말 한 마디는 한현진의 화를 삭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렇게까지 날 안 좋아한다는 말에 한현진은 심지어 마음이 아려왔다.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외삼촌과 숙모는 아직 네가 기억을 회복한 걸 모르시잖아. 두 분은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고 생각하고 계셔. 다들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냐. 게다가 그 사람들은 외삼촌과 숙모가 먼저 소개해 주겠다고 하신게 아니야. 내가 좋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야.”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네가 먼저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다고?”한현진이 말했다.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잠시 후,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영상 하나를 보냈다. 강한서는 그 영상으로 한현진의 카톡에는 조금 전과 같은 [친목 모임] 그룹 채팅방이 7 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그룹 채팅방에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나머지 멤버는 조금 전 채팅방에 있던 멤버들
“난 없어도 민 실장은 아는 사람이 많잖아. 형님 소개팅도 민 실장이 주선해준 거였어. 교사, 의사, 공무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직종은 민 실장이 다 꾀고 있다고.”한현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민 실장님께 부탁 좀 해 봐. 나이는 25살에서 35살 사이, 초혼에 직업은 안정적이고 반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몇 명이든 상관없이 전부 소개해 달라고 해. 미남계로 혼을 쏙 빼서 전부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나면 민 실장님 보너스 두둑이 챙겨줘야지.”강한서가 웃음기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이따 민 실장한테 얘기할게.”강민서의 보고서를 수정해주며 멘탈이 붕괴된 민경하는 연이어 몇 번이나 재채기를 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해진 민경하는 순간 휴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시간을 확인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물었다. “나 생일 파티 해주러 가는 거야?”에이, 감탄사를 내뱉은 한현진이 화난 척 말했다. “사람이 무드 없긴. 알아도 모른 척 해야지. 눈치가 없어. 기대감이 완전 사라졌잖아.”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다시 해. 이번엔 내가 제대로 대답할게.”한현진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어딜? 완전 좋아. 너무 기대된다.”한현진: ...“그냥 닥쳐.”강한서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뭘 할지 알아도 기대가 되는 건 똑같아.”말하며 잠시 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생일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야. 다음은 둘이 아니라 넷일 테니까. 마지막이니까 소중하게 여겨야지.”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괜찮아. 내년에도 아이들은 집에 두고 우리 둘이 보내면 돼.”한현진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젠 가서 일 봐. 좀 이따 만나, 여보.”전화를 끊은 한현진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난 없어도 민 실장은 아는 사람이 많잖아. 형님 소개팅도 민 실장이 주선해준 거였어. 교사, 의사, 공무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직종은 민 실장이 다 꾀고 있다고.”한현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민 실장님께 부탁 좀 해 봐. 나이는 25살에서 35살 사이, 초혼에 직업은 안정적이고 반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몇 명이든 상관없이 전부 소개해 달라고 해. 미남계로 혼을 쏙 빼서 전부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나면 민 실장님 보너스 두둑이 챙겨줘야지.”강한서가 웃음기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이따 민 실장한테 얘기할게.”강민서의 보고서를 수정해주며 멘탈이 붕괴된 민경하는 연이어 몇 번이나 재채기를 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해진 민경하는 순간 휴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시간을 확인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물었다. “나 생일 파티 해주러 가는 거야?”에이, 감탄사를 내뱉은 한현진이 화난 척 말했다. “사람이 무드 없긴. 알아도 모른 척 해야지. 눈치가 없어. 기대감이 완전 사라졌잖아.”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다시 해. 이번엔 내가 제대로 대답할게.”한현진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어딜? 완전 좋아. 너무 기대된다.”한현진: ...“그냥 닥쳐.”강한서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뭘 할지 알아도 기대가 되는 건 똑같아.”말하며 잠시 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생일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야. 다음은 둘이 아니라 넷일 테니까. 마지막이니까 소중하게 여겨야지.”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괜찮아. 내년에도 아이들은 집에 두고 우리 둘이 보내면 돼.”한현진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젠 가서 일 봐. 좀 이따 만나, 여보.”전화를 끊은 한현진
강한서는 저돌적인 여자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한현진을 화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현진에게 사건의 전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내가 너 몰래 선을 본다고 생각해서 부계정으로 날 추가해 불륜의 증거라도 잡으려고 했던 거야?”강한서가 곧바로 부정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널 믿지 않을 수 있겠어?”“그럼 왜 부계정으로 날 속인 거야?!”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아주머니께서 네가 7, 8명의 연락처를 가져갔다고 하니까 네가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어.”한현진이 불퉁하게 말했다. “연락처를 왜 교환했겠어? 너도 봤잖아! 널 바꿔버릴까, 고민하고 있었어.”본인의 잘못임을 잘 알고 있던 강한서는 나지막이 반성했다. “현진아, 정말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런게 아니야. 난 그냥 질투가 조금 나서 그랬어. 외삼촌과 숙모님께서 너에게 그렇게 많은 맞선 상대를 소개해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야 난 어른들이 날 이렇게까지 안 좋아하시는 건지 알게 돼서 속상했어.”그 말 한 마디는 한현진의 화를 삭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렇게까지 날 안 좋아한다는 말에 한현진은 심지어 마음이 아려왔다.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외삼촌과 숙모는 아직 네가 기억을 회복한 걸 모르시잖아. 두 분은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고 생각하고 계셔. 다들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냐. 게다가 그 사람들은 외삼촌과 숙모가 먼저 소개해 주겠다고 하신게 아니야. 내가 좋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야.”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네가 먼저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다고?”한현진이 말했다.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잠시 후,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영상 하나를 보냈다. 강한서는 그 영상으로 한현진의 카톡에는 조금 전과 같은 [친목 모임] 그룹 채팅방이 7 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그룹 채팅방에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나머지 멤버는 조금 전 채팅방에 있던 멤버들
한현진이 말했다. [허연석 씨, 저에게 솔로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들어오실래요? 다들 젊은 분들이고 개인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셔서 채팅방에서 마음 놓고 얘기를 나누셔도 돼요. 나중에 친목회가 있을 때면 참석하셔도 되고요.]강한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강한서가 대답했다. [좋아요.]그렇게 한현진은 강한서를 [친목 다짐 7번 방]이라는 이름의 그룹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강한서가 채팅방에 초대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열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강한서는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곧이어 그의 말괄량이 아내인 한현진이 그룹 공지를 올렸다. 공지엔 강한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개인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강한서가 공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이 그룹 채팅방은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강한서는 유일한 남자 멤버였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게다가 채팅방에 있는 전원이 깔린느의 직원이었다. 어리둥절한 강한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쯤, 채팅방에서는 이미 한 여자 아이가 먼저 다가와 강한서에게 말을 걸었다. A: [허연석 씨는 한주가 고향이세요?]강한서가 예의상 그렇다고 대답했다. A: [실례지만 키가 몇이세요?]강한서: 187B: [완전 크시네요!]C: [여자친구가 160cm여도 괜찮으세요?]D: [1살 연상도 괜찮아요?]E: [가영언니(D)가 이렇게 남자 분께 먼저 말 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C: [이번 남자 분은 조건이 너무 좋잖아요. 조건 좋은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D: [한평생 착하게 살았으니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됐어.]A: [언니들, 동생들에게 양보 좀 해요. 지금까지 모태솔로라고요. 연애 좀 하게 해줘요!]강한서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남자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들에게 무차별적인 유혹을 당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젠장,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야.’강한서는 놀
한현진이 생각했다. ‘당연히 너무 괜찮죠!’눈, 코, 입. 모든 곳이 전부 한현진 마음에 쏙 들었다. 사진 속의 자태는 20대 시절의 강한서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굳이 부족한 점을 찾자면 외모가 너무 완벽한 탓에 왠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전혀 진정성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강한서를 처음 만났을 때 한현진은 그의 외모에 한 눈에 반할 정도였다. 특히 강한서의 생기로 반짝이는 눈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진 속 사람의 눈빛은 2%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한현진은 상대방의 이력서를 대충 훑었다. 이름은 허연석, 28세, 고향은 한주, 대학원생 학력에 지금은 연현 테크에서 칩 설계를 맡고 있었다. ‘여기 강한서네 회사잖아?’한현진이 답장했다. [아주머니, 연락처 보내주세요. 제가 연락해 볼게요.][꽃 피는 봄날]이 곧바로 허연석의 연락처를 한현진에게 보내주었다. 몇 분 후, 강한서는 카톡 친구 추가 신청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었다. 임신을 하고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그의 아내, 한현진이었다.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고 한현진의 맞선 대상의 일원으로 되었다. 한현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허연석 씨. 기혜인 아주머니께서 소개해 주셔서 연락드렸어요.]강한서는 태연하게 아내에게 연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한현진 씨.]한현진: [혜인 아주머니 말로는 연현 테크에 출근하신다고요?]강한서: [네.]한현진이 또 물었다. [연현 테크에 입사하려면 스펙이 좋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허연석 씨 능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강한서: [대단하긴요. 그리 힘들지도 않았어요.]자신감은 꽤 있네, 라고 생각한 한현진이 손가락을 빠르게 놀려 타자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제 친구도 그쪽 일을 하고 있는데 올해 모집한 신입사원은 최소한 인 서울 대학의 대학원생이라고 하던데요.]상대방은 마치 떠보는 한현진의 말을 알아채지 못하기라도 한 듯 되물었다. [이런 우연도 있네요.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자 [꽃 피는 봄날]은 곧바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청년, 나한테 사진이랑 이력서 보내봐. 한현진 씨가 조건이 좋아. 결혼이라는 게 자고로 서로 조건이 맞아야하는 거잖아. 조건이 너무 떨어지면 아줌마가 청년을 추천할 수가 없어. 내가 추천해준다고 해도 그쪽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청년 자존심만 상하잖아.]강한서가 답장했다. [알겠어요.]그리곤 강한서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아주머니, 한현진 씨에게 몇 명이나 소개해주셨어요?][꽃 피는 봄날]이 대답했다. [6, 7명 정도 소개한 것 같은데. 나도 잘 기억은 안 나.]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게 많이 소개해주셨는데 한현진 씨 마음에 든 분이 한 명도 없었어요?]꽃 피는 봄날: [그냥 얘기해 본다고만 했어. 마음에 든다, 아니다 얘기한 적은 없었지. 하지만 소개해 준 청년들은 한현진 씨를 좋게 본 것 같아. 다들 한현진 씨가 호감이라고 하던데.]강한서가 쯧, 혀를 찼다. 그는 조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내 마음에 든 사람인데, 호감형이 아닐 리가 없잖아.’[청년, 빨리 자료 보내. 오후엔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 끌다간 내가 까먹을 것 같아서 그래.][알겠어요, 아주머니.]강한서는 신우가 개발한 앱을 열어 한현진이 좋아할만한 스타일을 골라 AI 이미지를 생성했다. 그리곤 대충 이력서를 작성해 [꽃 피는 봄날]에게 전송했다. 물론 한현진이 그 몰래 맞선을 봤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한준웅와 하연희의 맞선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강한서가 기억을 회복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한현진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많은 남자의 연락처를 받고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서도 상대방에게 호감을 남길 수 있는 건 대체 어떤 능력인 걸까?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던 강한서는 직접 테스트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기 고구마]가 한열의 성희롱을 폭로한 사건은 다음날 큰 반전을 맞이했다. 한
지금 한열의 눈에 강한서는 이미 친형 같은 필터가 쓰인 상태였다. 강한서는 프로에게 부탁해 한열 게임 회사의 버그를 해결해주었고 한밤중에 그를 도와 신하리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늦은 저녁엔 퀵을 불러 그에게 어탕을 보내주기도 했다. 동생에게 사기 치는 송민준보다 백만 배는 더 나았다. 그러니 강한서의 질문에 한열은 아는 것 전부를 털어놓았다. “누나가 아니라 친척 분들이요. 매형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나에게 남자를 소개하고 싶다고 저희 부모님을 찾아왔었어요. 전부 고담시 사람들이었어요.”한열의 고모인 한아람은 고담시의 유명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재능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수한 유전자로 인해 한씨 가문과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구 끝까지 줄을 섰다고 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던 당시, 이미 수많은 오작교들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강한서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땐 아예 대놓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자들의 자료를 한준웅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히 말을 못 꺼내던 한준웅과 하연희도 3개월간의 기다림에도 강한서의 기억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심지어 완벽에 가까운 맞선 대상의 조건에 티 나지 않게 한현진에게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준웅을 통해 한태진과 공영선에게 루나를 선물로 보낸게 고작 지난주의 일이었다. 앞에선 마음 써줘서 고맙다고 하더니 뒤에선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하다니. 강한서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한열 씨 부모님이 현진 씨에게 사람을 소개해주신게 언제부터였어요?”잠시 생각하던 한열이 말했다. “최소 두 주일은 된 것 같아요. 제가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일주일 전이었거든요. 엄마는 연락처를 누나에게 보내주면서 두 사람이 알아서 연락하라고 하셨어요.”강한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두 주일
지금 한열의 몸매는 카메라에 완벽에 가깝게 비춰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팬들이 눈호강하겠네.’그런 생각을 하던 신하리는 가져온 담요를 펼쳐 한열에게 덮어주었다. 신하리가 담요를 한열의 어깨로 끌어올려주던 그때, 한열이 번뜩 눈을 떴다. 그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신하리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곤 저도 모르게 신하리를 밀어내며 쑥스럽게 말했다. “새벽에 안 자고 왜 나와서 사람을 놀래켜요?”한열이 허둥지둥 담요로 몸을 감쌌다. 그는 신하리를 선을 안 지키는 미친 여자라며 혼자 투덜거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신하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신하리가 보였다. 한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늦은 새벽, 강한서는 한열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팍에서 한현진의 손을 떼어내고 이불을 덮어준 후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쥐고 방을 나섰다. 강한서가 한열의 부탁으로 신하리를 남산 병원에 입원시켰을 땐 이미 아침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머리를 다친데다 감기까지 걸렸고 심지어 신하리는 요즘 촬영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한꺼번에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열이 난 사람을 본 한열은 놀란 가슴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의사는 신하리가 쓰러진 원인이 고열 때문은 아니라 피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깨어나지 않는 것은 그저 잠이 든 것뿐이라며 충분히 휴식하면 자연스레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미 해열 주사를 맞았으니 깨어날 쯤이면 열도 내릴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실에서 나온 한열은 그와 함께 병원에 와준 강한서를 보고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매형, 고마워요.”매형이라는 호칭에 강한서의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처남들이 귀엽네. 형님에게 인정받는 건 너무 어려워.’강한서는 한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끼리,
한열이 분통을 터뜨렸다. “미안하다는 사람이 선인장으로 찔러요? 양심이 있긴 한 거예요?”신하리가 말했다. “말라비틀어진 선인장이야. 건드리기만 해도 가시가 부서질 정도라 찔리지도 않았으면 웬 엄살이야?”“그래도 아프다고요! 신하리 씨도 발바닥 한 번 찔려봐요! 발바닥 살이 얼마나 얇은데요.”한열이 신하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종알거렸다. “지금 계단 오르는 것도 아프다고요.”멈칫, 걸음을 멈춘 신하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내가 안아서 방까지 데려다줘?”한열이 움찔 했다. “네?”신하리가 말하며 당장이라도 한열을 안을 듯이 자세를 취하자 한열이 기겁하며 껑충 뛰며 뒤로 물러섰다. “뭐하는 거예요?”신하리가 쯧, 혀를 찼다. “잘 뛰면서, 뭘.”“...”다채로운 표정을 짓던 한열이 결국은 버럭 화를 냈다. “사기꾼!”다친 머리가 여전히 아팠던 신하리는 더는 어린 아이 같은 한열을 놀리고 싶지 않았다. 게스트룸을 열고 새 이불을 가져다준 신하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그냥 자. 내일 사람 불러서 청소해두라고 할게. 욕실은 이쪽, 내 방은 바로 옆방이야. 난 먼저 잘게.”말을 마친 신하리는 한열이 대답할 새도 없이 방을 나서려 했다. 한열이 그런 신하리를 불러세웠다. “세탁기는 어디 있어요?”“일층 베란다.”한열의 질문에 대답한 신하리가 방을 나섰다. 한열은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 방엔 침대와 장롱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 물건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이 방에는 단 한 번도 사람이 지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연희에게 전화해 그녀를 안심시키고 나서야 한열은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한열은 하반신을 샤워 가운으로 가린 채로 방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꼭 닫힌 옆방 문은 아무런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신하리는 이미 잠이 든 모양이었다. 190cm의 장신인 한열이 옷을 안고 까치발을 한 채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향했다. 오늘 사람들이 던진 것들 때문에 더럽혀진 옷은 꿉꿉한 냄
신하리가 이번엔 질문을 바꿔 다르게 물었다. “그 선택을 안 하면 공백기 동안 인기가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래?”한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다시 가로 저었다. 그리곤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안 하면 제가 또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데뷔 후 한열은 단 한 번도 휴가를 간 적이 없었다. 갑자기 일이 없으면 한열은 목적지를 잃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것 같았다. 또 어쩌면 아버지에게 비웃음을 당할지도 몰랐다. 신하리가 말했다. “공부하면 되잖아. 넌 아직 이렇게 어린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야. 이 바닥에서 오래도록 살아남고 싶으면 언제든 카메라 앞에 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 애초부터 배우로 태어난 사람은 없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연기 지도 교수님들은 대부분 한주대 연극학과에 계셔. 네가 체계적으로 연기를 배우면서 선배님들의 실력을 눈앞에서 느끼게 되면 밖에선 경험할 수 없는 걸 경험하게 될 거야.”신하리의 말에 혼란스럽던 한열의 머릿속에 한줄기의 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한열에게 공부라는 기회가 선택지가 주어지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학창시절 한열의 꿈은 한주대 연극학과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꿈이 한열이 의대를 휴학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그는 어쩌다 보니 또 다른 신분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연기라는 영역은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아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본인의 이해만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기가 어려웠다. 한열 스스로도 본인의 연기가 이젠 서서히 틀에 박힌 똑같은 레퍼토리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연기를 평가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좋은 연기 선생님은 연기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해 연기력이 늘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다. 한열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곧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한주대 연극학과에 입학할 수 있을까요?”신하리가 말했다. “수능 전 영역 1등급은 베껴서 된 거야?”“...”한열이 바득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