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이 제조에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 송가람은 벌써 냉소적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꽤 전문가답네요. 현진 씨는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하려면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늦어서 2시간이요. 세은이가 그랬잖아요. 청력에 문제 있어요?”송가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2시간 안에 성공한다면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회사는 불필요한 사람을 키워줄 이유가 없거든요.”한현진이 냉담한 태도로 받아쳤다. “줄곧 필요 없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었잖아요.”멈칫하던 송가람은 그제야 한현진이 말 한 필요 없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송가람이 한현진을 반박하려는데 서해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보려거든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 사람은 나가.”‘얘는 철이 안 들어! 하필 지금 여기서 한현진과 설전을 벌여야겠어?’송가람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주세은이 창피를 당하기만을 기다렸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주세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제조에 성공해도 걱정, 실패해도 걱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제조에 성공해 너무 일찍 실력을 드러낸다면 서해금의 경계 대상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대부분은 주세은이 우스운 꼴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꼬맹이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것이라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는 게 나을 텐데요.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서 제조에 실패하면 얼마나 창피해요.”“오일을 제조하겠다는 건 핑계고 그저 나대고 싶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전 회사에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지금 어린 친구들은 너무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니까요.”...그나마 눈치를 보며 말을 내뱉는 현장의 사람들과 다르게 단체 채
[한 대표님이요...]채팅방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물었다. [한 대표님, 돈을 이렇게 많이 거셨다가 지면 어쩌시려고요.]한현진이 대답했다. [한 번 걸어보는 거죠. 돈방석에 앉게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채팅방은 곧 [대표님, 쿨하시네요.]라는 문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몇십 명의 사람들이 실패에 베팅했다. 심지어 돈을 더 거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딜러가 또 말했다. [송 팀장님께 실패에 2000만 원을 거셨어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마치 한현진이 자신을 쳐다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은 송가람이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말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미소를 짓던 한현진이 입 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물었다. “사기당한 40억은 돌려받았어요?”송가람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버럭 화를 내려던 송가람은 자신을 쳐다보는 서해금의 시선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세은은 매번 제조해 낸 오일의 향에 따라 원료의 비율을 조절했다. 1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10가지가 넘는 샘플을 만들어냈지만 넘버 S 오일에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직 없었다. 서해금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주세은이 시도한 비율은 서해금의 제조 방안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던 샘플과 비슷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오일의 비율을 조절했다. 그러니 주세은이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리가 없었다. 현장에서 제조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전교 일 등인 척하는 전교 꼴찌를 지켜보는 기분이네요. 대체 제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넘버 S의 성분 분석에 참여했던 사람이 말했다. “세은 씨가 정확한 오일을 고르긴 했어요. 정말 천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저 우연일 뿐이었네요.”“한 대표님께서 성공에 2000만 원이나 거셨던데 그 돈이
송가람은 약 올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나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 씨는 뭔데 뿌듯해하는 거예요. 현진 씨가 제조한 것도 아니잖아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세은이는 제가 특례로 입사시킨 천재잖아요. 제가 왜 뿌듯하면 안 되는 거예요?”말하며 한현진은 서해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 대표님,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했으니 이젠 억울하게 오일을 깨뜨렸다는 누명을 쓴 일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그리고 서하 씨의 보너스 삭감이 정말 규정에 따란 이행된 건지, 아니면 누군가 그걸 빌미로 사적인 화풀이를 하려고 한 건지 회사 감사위원회에 조사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한현진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향이 비슷하긴 하지만 사용 여부에 대해선 테스트를 진행해 봐야 해.”한현진이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일단 오일을 깨뜨린 일부터 조사하시죠.”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해금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경찰이 도착했어요. 누군가 회사의 재물손괴가 있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고 신고를 해 조사하러 왔다고 하네요.”서해금이 휙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아무래도 경찰에게 맡기는 편이 효율적인 것 같아서요. 값비싼 물건인 만큼 만에 하나 범인을 색출하지 못한다면 저희가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잖아요. 제가 소유하고 있는 지분이 제일 많으니 손실을 제일 많이 보는 것도 저예요. 그러니 저도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해하시죠?”서해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현진은 지금의 서해금은 어쩌면 옆에 놓은 물을 자신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현진은 성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해금이 손을 움직이는 순간 성월의 등 뒤로 숨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해금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신고까지 한 거냐며 난리를 피우는 송가람과 달리 서해금은 몸을 일으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곧 아무
송민준은 매주 서너 번씩 주승관을 찾아왔다. 말도 많고 멍청한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매번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다 마지막은 꼭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내 동생도 이렇게 컸으면 세은이만큼 귀여웠을 거예요.”그 후 여동생이 아파서 송민준은 두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주승관은 주세은과 함께 송민준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그의 여동생인 송가람을 만났다. 송민준의 말과 달리 주세은은 그의 여동생이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꼈다. 송민준과 비슷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주세은과 주승관을 배웅하며 송민준은 주세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 “양심도 없는 꼬맹아. 의사에겐 오빠라고 하면서 우리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오빠라고 안 불러?”주세은이 대답했다. “멍청하니까요.”그 말에 송민주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마치 못 들을 충격적인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세은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거 맞잖아. 6개월 동안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하다니. 대체 뭘 배운 거야.’주세은의 말에 자극을 받은 송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면 날 오빠라고 부를 거야?”주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나보다 똑똑하겠어? 아빠가 가르쳐준 건 이젠 나도 거꾸로 외울 수 있는 수준인데도 아직 기억하지 못하잖아.’송민준이 말했다. “그럼 내가 문제 낼게. 네가 정답을 맞힐 수 있으면 난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인정할게. 하지만 만약 네가 틀리면 앞으론 날 볼 때마다 얌전히 오빠라고 불러.”주세은이 송민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송민준이 말했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을까?”“...”“모르겠어?”빨갛게 얼굴을 붉히던 주세은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는데요?”송민준이 씩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머리에 붙어 있는 만큼.”“...”자신에게 농락당해 얼굴이
멈칫하던 한현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연 사람은 다름이 아닌 한현진의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현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주혁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깡마르고 잔뜩 움츠러든 그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여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표님, 오일은 제가 깨뜨린 거예요. 오늘 안에서 청소를 하다 그만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이곳엔 값비싼 물건들만 저장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서워... 무서워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말하며 그는 한현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죄송해요.”미간을 찌푸린 한현진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회사엔 청소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고 있는데 왜 기사님이 청소하신 거예요?”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차마 한현진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제가 신청했어요. 시급으로 15000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이라도 해주려고...”주혁이 청소를 하게 된 이유를 들은 한현진은 화조차도 낼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송가람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한 대표님이 고르고 고른 사람이 고작 이 정도였어요? 넘버 S 오일을 얼마나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실수로 깨뜨려요? 오일을 깨뜨리고 무서워서 감히 인정을 못 한 게 아니라 어쩌면 애초부터 손버릇이 나쁜 사람인 걸지도 몰라요. 청소를 핑계로 훔치려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깨뜨린 거죠.”당황하던 주혁이 창백해진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눈빛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소매에 감춰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 그저 먼지를 닦으려고 오일병을 꺼낸 거였어요. 하지
“넘버 S 오일이 저장되어 있던 곳은 잠겨 있었어요. 잠금장치가 있었으니 기사님은 오일을 건드릴 수 없었어야 해요. 하지만 기사님이 오일을 꺼낼 수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엔 잠겨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장실의 규정에 관해선 전혀 모르고 계세요. 책임자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 업무 중 실수로 오일을 깨뜨린 건 고의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일에 관한 책임을 논한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감당해야 해요.”“하지만 주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의 제조에 성공했고 이 일은 사실상 저희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진 않았어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퇴사 처리는 너무 심한 처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오늘 내린 이 징계를 전례로 따른다면 업무 중 실수를 저질렀을 때 해고 당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숨겨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상황을 피면할 수 있을 거예요. 처벌이라는 건 실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수단이잖아요.”서해금이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송가람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건 기사님을 감싸주려고 그러는 거죠?”한현진이 쿨하게 인정했다. “내 사람은 당연히 내가 감싸야죠. 송 팀장님도 홍혜림 씨에게 실수를 하셨지만 그저 감봉을 조금 당한게 전부였잖아요.”그 말은 송가람뿐만 아니라 서해금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혁이 해고를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한현진은 부하 직원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줄곧 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3개월 감봉, 보너스 삭감. 이 정도면 되겠니?”조금 더 말다툼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한현진의 예상과는 달리 서해금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서해금을 힐끗 훑어보던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죠.”송가람이 불퉁하게 말했다. “이 처벌은 너무 가볍잖아요.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고작 이정도 처벌로 넘어간다면 앞으로 다른 직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한현진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
놀란 은서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성 비서님, 전 괜찮아...”“받아요!”성월이 차가운 말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받아요. 이건 서 대표님 마음이에요. 대표님의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요.”은서하의 눈초리가 파르르 진동했다. 떨리는 손으로 돈다발을 받은 은서하가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께 감사하다고 인사 전해주세요.”성월이 멸시가 담긴 눈빛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성월이 말했다. “한 대표님이 서하 씨를 대신해 나서신 건 서하 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고마운 건 고맙다고 인사 드려요. 한 대표님 실망하게 하지 말고.”‘내가 한 대표님과 사이가 멀어지는 건 원치 않는 거네...’고개를 푹 숙인 은서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시 돈이 급한 저에게 일자리를 주신 건 서 대표님이셨어요. 성 비서님, 벼랑 앞에 서 있는 저에게 손 내밀어 주신 은혜는 그 어떤 도움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성월은 의외라는 듯 은서하를 쳐다보더니 곧이어 말했다. “알면 됐어요. 돈 받아요. 들키지 말고.”재킷을 벗은 은서하는 돈다발을 옷 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성월은 은서하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은서하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아무리 한현진이 지지해 준다고 해도 서해금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아직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한현진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뒤이어 따라온 주혁이 노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기에 한현진은 주혁을 들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주혁이 들어온다면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혁은 한현진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연장자였다. 한참 어른인 그를 도무지 혼낼 수가 없었다. ‘돈이 부족해 회사 청소 일을 하고 싶다고 왜 얘기를 하지 않는 거야. 만약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대체 언제까지 숨기려던 거냐고.’한현진이 주혁을 고용한 건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