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소년이 홍혜림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건 걔가 죽음을 자초한 거고요. 터널에서 역주행하면서 시속 160까지 딛으니까 그렇죠. 제가 120km/h 초과하는 거 보셨어요?”홍혜림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120이 느려?”“안 느려요, 안 느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딱 이번 한 번 만요. 너무 타고 싶어서 그랬어요. 엄마가 이번만 모른 척 해주면 다시는 안 탈게요.”금발의 소년은 홍혜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엄마, 요즘 화장품 바꾸셨어요? 피부가 왜... 이렇게 이상하지?”그 말에 홍혜림이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얼굴을 만졌다. “아닌데, 줄곧 쓰던 브랜드야. 내 얼굴이 왜? 어디가 이상한데?”금발의 소년이 옅은 주황색의 눈을 똑바로 뜨고 홍혜림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예쁘네.”홍혜림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금발의 소년을 한 손으로 툭 밀어냈다. “자식, 엄마를 놀리기는.”금발의 소년은 쪼르르 달려와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진심이에요. 다른 애들 엄마는 점점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엄마는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아요. 지난번에 옷 가져다주시려고 학교에 왔을 때 다들 엄마가 제 누나인 줄 알았다니까요. 제 친구는 저한테 엄마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도 했었다고요. 제 매형이 되고 싶다면서요. 생각해 보니까 아빠가 절대 동의할 리가 없어서 단호하게 거절했어요.”예의 없다며 아들을 꾸짖는 홍혜림의 말과는 다르게 그녀는 전혀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됐어. 장난 그만해. 엄마 향수 골라준다며? 자, 얼른 고르고 집에 가자. 네 아빠 곧 퇴근할 시간이야. 식사할 시간까지 집에 없으면 또 그 더러운 성질부릴 거야.”금발의 소년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말을 다 내뱉기 전에 멈칫하던 소년이 홍혜림에게 물었다. “엄마, 이 누나는 뭐라고 부르면 돼요?”“이 분은 깔린느의 부대표님이신 한현진 씨야.”홍혜림이 간단하게 소개했다.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운천’은 저희가 수많은 테스트를 거친 제품이에요. ‘운천’의 향을 맡은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별로라고 평가한 사람이 없었어요.”송가람은 말하며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대표님, ‘운천’은 저희 회사의 톱클래스 제품이에요. ‘운천’이 얼마나 진귀하고 독특한 제품인지 대표님께서 진윤 씨에게 잘 설명해 드려야죠.”한현진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설명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운천’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래요. 저도 사모님께서 ‘운천’을 시향 하겠다고 했을 때에야 이 향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전 그저 ‘운천’은 진귀한 오일을 사용했고 재고가 지극히 적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다른 건... 송 팀장도 아시겠지만 전 조향 전공도 아니잖아요. 조향에 관해서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는데 괜히 잘못된 설명을 하면 어떡해요.”“그리고 향수는 본인의 취향이 향수의 좋고 나쁨은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잖아요. 아무리 비싼 향수도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과 마찬가지죠.”진윤이 말했다. “맞아요. 천금을 가져와도 제 마음은 안 변해요. 전 ‘인 드림’으로 정했어요.”곧이어 진윤은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어쩐지 저희 엄마를 꼭 ‘운천’을 사게 하려는 것 같네요. 왜요? 안 팔리는 향수를 사줄 호구가 필요했나요? 저희 엄마가 안목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한현진은 의외의 눈빛으로 어린 나이지만 말발은 센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순간 지금의 MZ세대가 하나 같이 대단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이 있는 것은 물론 한 번 입을 열면 날카로운 말로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체면이나 인지상정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한 송가람은 기본적인 존댓말도 내려놓은 채 분노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 지껄이지 마. ‘운천’이 정말 당신 말처럼 별로라면 우리가 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요?”한현진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모님은 오후 내내 여기서 시향 하셨어요. 사모님께서도 향으로 향수를 구분하실 수 있다고요. 조향팀 팀장 일원으로써 향을 분별하는 건 기본 자질이잖아요. 오후 내내 향도 구분하지 못하다가 어떻게 진윤 씨가 별로라고 하니까 바로 생각났다는 거죠? 송 팀장님은 청력으로 향을 구분하시는 거예요?”“전...”송가람이 당황하며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그녀는 성월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대형 사고라는 것을 직감한 성월이 몰래 휴대폰을 꺼내 밖으로 나가 서해금에게 연락했다. 한현진은 차분하고 조리정연하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늘어놓았다. 재벌집 사모님 역시 혹독한 서열 다툼을 거쳐 이 자리에 온 사람이라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만큼 순진할 리가 없었다. 홍혜림 역시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그녀를 이용해 파놓은 함정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바로 눈앞에 있는 깔린느의 부대표였다. 그 사실을 간파한 홍혜림은 더욱 더 화가 치밀었다. 깔린느의 내부 분쟁 따위는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누군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면 절대 가만 둘 위인이 아니었다. 홍혜림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당신 회사 기밀을 유출하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회사 직원이 저에게 직접 전화 했어요. 새로 나온 ‘운천’이라는 향수가 있다면서 말이예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향수라면서 어찌나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하던지. 꼭 직접 회사에 방문해 시향을 해보라고 해서 온 거였어요.”말하며 홍혜림은 휴대폰을 꺼내 통화기록을 뒤졌다. “이게 바로 저에게 연락한 전화번호예요. 저에게 연락한 그 사람은 제가 깔린느에서 주문한 내역까지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회사 내부 직원이 분명하겠죠.”홍혜림이 보여준 전화번호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박 비서님, 사모님께서 알려주신 이 번호 적어두고 신호하세요. 대체 누가 멋대로 회사의 제품을 누설한
20여 년을 금지옥엽처럼 살아 온 송가람은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다. 홍혜림의 몇 마디 말에 눈시울을 붉힌 송가람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이 다루듯 모든 것을 받아준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엄마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 한현진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안내 데스크를 하면서 그 도리를 깊이 깨우친 적이 있었다. 심지어 홍혜림은 막무가내로 다그친 것도 아니었지만 송가람은 그마저도 견디지 못했다. 통화하러 나갔던 성월이 곧 돌아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홍혜림에게 말했다. “사모님, 서 대표님 전화예요. 전화 받으시라고...”아직도 분노를 터뜨리고 있던 서해금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뭔데 전화를 받으라 마라야?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해.”당연히 서해금은 당장 홍혜림을 만나러 올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바다 너머의 한 해안가에 있었다. 그러니 갑자기 날개라도 달린 듯 날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성월이 얼른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자 곧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저 서 대표예요. 일은 성 비서에게 전해들었어요. 두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네요.”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래, 콩 심은데서 콩 나는 법이지. 은근히 비꼬는 모습은 자기 엄마를 꼭 닮긴 했어.’의심할 것도 없이 송가람의 잘못이 분명했지만 서해금은 마치 두 사람 잘못인 듯 얘기했다. 진윤이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 철이 없는 건 대표님 따님이시죠. 한 대표님은 오후 내내 최선을 다해 엄마가 시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한현진이 놀란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 ‘어... 이 잘생긴 소년, 혹시 열이랑 같이 빌런을 분별하는 수업이라도 받은 거야?’진윤의 말에 휴대폰 너머는
이번엔 서해금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현진이 앞으로 나서며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 오늘 불쾌한 시향을 경험하게 해드려 정말 죄송해요. 시간도 많이 지체했고 마음에 드시는 제품을 찾지도 못했으니 정말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한현진은 말하며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동안 깔린느를 지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번엔 저희가 사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했어요. 이 ‘인 드림’은 저희가 사모님께 드리는 사죄의 인사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바로 계약 해지를 도와드릴게요. 물론 회원을 해지하셔도 전에 저희 회사에서 구매하신 제품은 여전히 VVIP 고객님 맞춤 애프터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어요. 이건 사모님께 대한 저희 마음이에요.”멈칫한 홍혜림은 자신을 잡지도, 심지어 칭찬으로 추켜세우지도 않는 한현진을 의외라는 듯 훑어보았다. 서해금을 포함한 깔린느의 모든 사람은 은근히 아부하는 말투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었다. 홍혜림에게 쇼핑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바로 결단력 있게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서해금과 송가람에게는 분명하게도 그런 태도를 보아낼 수 없었다. 보상을 진행하겠다고 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어찌됐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치 홍혜림이 생트집을 잡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잘못이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 걸까?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어린 나이의 부대표는 그들처럼 말을 빙빙 돌리지도 않았다. 한현진의 태도에 홍혜림은 순간 분노로 꽉 막혔던 숨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홍혜림이 한현진이 눈치도 있다고 느낀 점은 바로 자신이 “인 드림”을 눈독들였다는 것을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진귀한 제품의 가격은 홍혜림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방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가 홍혜림은 꽤 마음에 들었다. 서해금은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비록 현장에 없었지만 느
엘리베이터 안에서 홍혜림 옆에 서 있던 진윤이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한현진은 수시로 엘리베이터의 반짝이며 변하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물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하얀 느낌이었다. 피부가 어찌나 하얀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 화면에서 보던 메이크업 후의 모습보다는 공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련함 한 스푼을 얹은 느낌이라 더 눈이 갔다. 진윤은 몰래 휴대폰을 꺼내 슬그머니 한현진의 옆 모습을 찍어 “한현진 전 남편”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에게 전송했다. [아저씨, 저 연애해요~]한성 그룹 대표 사무실.강한서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모니터의 데이터를 훑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한현진 쪽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걱정이었다. 강한서가 알고 있는 한현진의 말빨이라면 충분히 잘 어르고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현진은 비굴하지도, 도도하지도 않은 태도로 일관할 것이고 거기에 노란 머리의 서포트까지 더해진다면 아마 해결할 수 있을 테지.사람은 정말이지 이상한 생물이었다. 한현진이 그와 결혼 후 집에서 현모양처 같은 전업주부로 있을 때 강한서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얼마를 벌든 세상을 많이 알아야 사람도 밝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강한서는 매번 마음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늘 불쾌하게 대화를 마쳐야 했다. 하지만 한현진이 일이 시작한 지금, 강한서는 또 유치원에 보낸 딸이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지 불안해 하는 아빠의 마음으로 한현진을 걱정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쯤, 휴대폰이 진동하고 카톡 이름이 “한현진 현남친”인 사람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대화창을 연 강한서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소년이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저한테 말을 걸었을 때 전 심지어 저희 아이 이름까지 생각해뒀어요. 실물도 정말 너무 예쁘잖아요! 아저씨는 어떻게 누나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안 거예요? 살의 무대인사에
소년은 잠깐의 침묵 후 쉴 새 없이 문자를 전송했다. [형님, 형님. 제가 잘못했어요.]강한서: [알고 싶어?]소년: [완전요!]강한서와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은 한현진을 따라 사무실에 도착했다. 바로 그때, 강한서가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에 홍혜림이 고개를 돌려 진윤을 바라보자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엄마, 저 전화 받고 올게요.”말을 마친 진윤이 휴대폰을 들고 쪼르르 밖으로 나갔다. “형님, 우리 형님. 형님이 현진 누나 연락처 알려주시면 오늘부터 형님을 친형으로 모실게요.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강한서가 진윤의 말을 잘랐다. “지금 어떻게 됐어?”진윤이 말했다. “엄마가 계약 해지하려고 하세요.”진윤은 간단하게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을 강한서에게 전했다. 그리곤 사건의 스포트라이트를 전부 자신이 영웅처럼 나타나(본인 기준) 한현진을 구해준 것에 집중시켰다. 그는 마지막엔 꽤 득의 양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님, 지금 누나들은 전부 저처럼 열정적이고 밝은 연하를 좋아해요. 형님은 나이로는 전혀 우세가 없다고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너희 엄마가 회원을 해지하면 네 현진 누나가 과연 네 친구 추가를 받아줄까?”진윤은 유치한 강한서의 말에 그만 할말을 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엄마!”한현진은 이미 협의서를 가져와 홍혜림에게 사인하도록 했다. 그 순간 진윤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와 소리쳤다. “엄마!”깜짝 놀라 움찔 손을 떤 홍혜림이 서류에 올챙이 모양의 점을 찍어버렸다. 홍혜림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진윤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소란스럽게 뭐하는 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정말 해지하시려고요?”홍혜림이 대답했다. “지금 사인하려는 거 안 보여?”“엄마, 정말 해지하셔도 괜찮겠어요? 그동안 향수 많이 쓰셨지만 깔린느를 제일 좋아하셨잖아요. 저희 회사에서 전에 출시했던 바디로션도 깔린느와의 콜라보로 제조한 향이었잖아요. 그덕에 최대 매출을
한현진은 조용히 홍혜림의 말을 머리에 새겼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홍혜림과의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홍혜림은 고집스레 “인 드림”의 값을 지불했다. 한현진은 본인에 대한 평가를 신경 쓰지 않을진 몰라도 홍혜림은 절대 다른 사람이 그녀가 향수 하나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한현진이 홍혜림을 배웅하는 동안, 진윤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느낀 한현진은 그 시선을 따라 그녀의 뒤에 있던 테이블의 디퓨저에 닿았다. 한현진은 진윤이 자신의 편을 들며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일부러 도와주려고 한 말을 아닐지라도 말이다. 걸음을 옮겨 디퓨저를 가져온 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디퓨저는 정신을 집중시키는 효능이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가져가셔서 서재에 두세요. 효율이 많이 올라갈 거예요.”그러자 홍혜림이 말했다. “저희 아들은 디퓨저를 안 좋—”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디퓨저를 받았다. 그가 귓불을 붉히며 말했다. “고마워요, 한 대표님.”홍혜림은 진윤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진윤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몇 번이나 한현진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타이밍을 엿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눅이 들어 입을 열지도 못했다. ‘난 팬클럽 회장이라고. 이건 너무 못났잖아. 사인해 달라고 부를 용기도 없다니.’진윤은 결국 한현진이 웃으며 배웅을 마칠 때까지도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한현진이 선물로 준 디퓨저를 손에 들고 서 있던 진윤은 그제야 사진을 찍어 “한현진 전남편”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현진 누나가 선물로 줬어요!]몇 초 후, 강한서는 자신과 한현진의 웨딩사진을 전송했다. [현진이가 직접 내 사무실에 가져온 거야.]사진을 확인한 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형님 심지어 기술직이시네요. 포토샵 완전 진짜 같잖아요. 합성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형님, 저도 합성 해줘요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