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시간도 안 보고 전화하는 거냐?”신우가 욱, 화를 냈다. “넌 와이프가 없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아니야.”강한서가 생각했다. ‘나도 있어. 난 아이도 있다고. 그것도 두 명이나!’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누른 강한서가 마친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미안해, 신우야. 이 시간에 전화한 건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신우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예의 있게 말을 해?’입술을 짓이긴 신우가 물었다. “무슨 부탁?”“너 네 와이프가 사용하는 업무 시스템 해킹해서 뭐 좀 알아—”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우가 뚝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휴대폰이 꺼진 상태였다. ...신우는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더 이상 휴대폰에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다. 욕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신우는 얼른 위쪽 단추를 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가져오더니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고여정이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를 털며 이불을 걷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그녀는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누가 보낸 문자인 건지 고여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장하고 있었다. 가끔은 생각에 잠기고 또 가끔은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춤추듯 빠르게 움직였다. 옆에서 누워 있는 신우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소외당하고 있던 신우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서에서 온 문자야?”고여정이 상대방의 답장을 기다리는 틈에 대답했다. “아니, 강한서 씨 문자야. 최근에 일이 생겨서 나한테 물어볼게 있대.”신우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는 티 나지 않게 고여정을 떠보았다. “무슨 일인데?”고여정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친구 분 지인이 모함으로 자살했대. 그 분은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동생을 위해 진범을 찾고 싶다나 봐. 하지만 인맥도 없고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동생인 척 연기하면서 동생이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
신우가 미간을 꾹 눌렀다. “강한서. 너 이 개자식, 나한테 제발 좀 합법적인 일을 시킬 수는 없어? 내가 언젠가 너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개 같은 자식. 자긴 사람들 앞에서 성인군자인 척, 선량한 시민인 척 하면서. 법 아주 잘 지키시네, 위법 행위는 전부 나한테 시켰잖아.’강한서가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네가 아니면 아무도 조사 못해.”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대놓고 서버를 해킹할 수 있고 해킹했던 참에 버그도 해결해주잖아. 얼마나 많은 사기 사이트를 해킹해 사기 집단 검거에 도움을 줬는데. 이것도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법률이 아직도 개선할 부분이 있다는 거야.”강한서의 아부에 전혀 낚이지 않은 신우가 사나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닥쳐. 지금 네 놈이 하는 말은 전혀 듣고 싶지 않으니까.”신우에게 부탁을 해야 했던 강한서는 그의 말에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신우가 씩씩거리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여정이에게 했던 말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우리 와이프 친구가 실제로 겪은 일이라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난 그런 건 전혀 모르잖아. 여정 씨는 법의관이시니까 알 것 같아서 물어봤어.”‘그냥 물어본 거라고?’신우가 냉소 지었다. ‘방귀도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하고 뀔 것 같은 자식이 그냥 물어본 거라고?’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기억 잃었다며. 한현진 씨와 파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한현진 씨 일이 너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러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부부였던 것도 인연인데, 굳이 얼굴 붉히며 헤어질 필요는 없잖아.”“허.”신우는 헛웃음을 뱉으며 컴퓨터를 켰다. “부부였던 것도 인연이라 돌아오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파혼하려 했던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화제를 좀 바꿀 수 없어?”“왜? 네가 그렇게 행동할 땐 언제고 이젠 나더러 얘기도 하지 말라는 거야?”신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
신우의 표정을 살피던 고여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비켜.”신우는 모니터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냐. 여보 먼저 들어가.”고여정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여보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시민에겐 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어. 조사에 응하지 않다가 덜미가 잡히면 감형 받을 자격이 없는 거야.”신우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서려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고여정이 신우의 옷을 꼭 잡았다. “저리 비켜.”말하며 고여정이 신우를 잡아당기자 모니터 속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흘러나오는 장면을 확인한 고여정은 그대로 자리에 굳어졌다. 스피커에서는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로 뒤엉킨 몸은 살색의 향연이었다. 야하기가 이루 말할 것 없었다. 고여정의 얼굴이 점차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우는 고여정의 등 뒤로 다가오며 빨간 그녀의 귓불에 입 맞추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 형사님, 퍼뜨리지 않고 저만 보는 건 불법 아니죠?”고여정이 이를 악물었다. “배고파서 뭐 좀 먹어야겠다며?”“그랬지. 배도 채우고 인강으로 공부도 하고.”고여정이 신우의 손을 탁 쳐냈다. “지워.”신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힘들게 강한서한테서 받은 거야. 아직 다 못 봤는데, 다 보고 지우면 안 돼?”수화기 너머로 부부의 야한 농담을 듣고 있던 강한서가 침묵했다. 부끄러운 듯 고여정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른 지워. 남자들은 같이 모였다 하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신우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말하며 그는 고여정이 보는 앞에서 영상을 지웠다. 영상이 삭제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고여정이 말했다. “컴퓨터도 꺼. 내가라면 끓여줄게. 같이 먹어.”신우가 고여정을 품에 꽉 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여보~”고여정이 방을 나서자 신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자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망연자실한 눈빛의 그가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진아, 은서 이젠 아빠 없어. 내가 은서에게 했던 약속 다신 지킬 수 없게 됐어.”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뭐?”강한서의 눈빛이 처량하게 빛났다. 그는 한현진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6년 전, 하우스클럽에서 추락해서 사망한 사람이 바로 은서 아빠야.”한현진이 중얼거렸다. “은서는 정말 주 변호사님 딸이 아니었던 거야?”그 말에 강한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넌 대체 무슨 허황된 생각을 한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주강운 씨와 잠입 수사 중인 형사가 서로 죽고 못살 다가 같이 교통사고를 당해 간민혜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은서를 부탁한 거 아냐?”강한서는 한현진의 상상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언제 은서가 강운이 딸이라고 했어?”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은서는 주강운 씨와 함께 사고 났던 전 여자 친구 사이에서 낳은 아이 아니야?”대답하려던 강한서가 갑자기 멈칫했다. “네가 간민혜 씨를 어떻게 알아?”한현진이 모른 척 눈을 깜빡였다. “내가 간민혜라고 했어?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강한서가 냉정하게 말했다. “너 분명 얘기했어. 분명 간민혜가 나에게 은서를 부탁했다고 했잖아. 누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하하. 누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해?”한현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나한테 무슨 얘기한 적 없어.”한현진을 살펴보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한성우, 그 방정맞은 자식이지?”한현진이 강한서의 시선을 피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낮게 욕을 읊조린 강한서가 물었다. “한성우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지어낸 거야?”“성우 씨는 별 얘기 안 했어. 그때 성우 씨는 한주에 없어서 아는게 많지 않다며 간민혜 씨와 강운 씨가 헤어진 일만 얘기해줬어. 그리고 나중에 두 사람이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나머지는 전부 내 추측이야.”말을 마친 한현진이 화제를 바꾸었다.
갑작스러운 주강운의 말을 이상하게 여긴 강한서가 간민혜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간민혜는 그저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이미 결혼을 한 것은 물론 곧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간민혜에게 그녀와 주강운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전부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주강운과 함께 해외로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강한서의 말을 들은 한현진은 곧바로 당시의 주강운이 발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주강운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그와 간민혜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간민혜는 진작 과거에서 벗어나 있었고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주강운 뿐이었다. 어떻게 주강운을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쯤, 돈 때문에 강한서의 사인을 받으러 온 신미정이 갑작스레 주강운과 간민혜의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예전부터 재벌가 며느리가 되기를 꿈꾸는 여자들을 마땅치 않은 시선으로 봤었다. 신미정에게 간민혜 역시 신데렐라를 꿈꾸는 그런 여자였다. 투덜거리며 몇 마디 늘어놓던 신미정이 일을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주씨 가문에 그런 여자를 받아들일 리가 없잖니. 지금 시윤 씨가 찾아갔으니 그 성격에 간민혜가 두 번 다시는 강운이에게 매달리지 못하게 할 거야.”신미정의 말에 멈칫한 강한서는 순간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만약 주씨 가문은 주진철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면 주시윤은 바로 그의 생각을 실현하는 행동대장에 가까웠다. 주시윤의 수단은 간민혜처럼 힘없는 여자 아이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한서는 최대한 빨리 주강운에게 연락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주강운이 주시윤을 막아 간민헤가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 뒤로 일어난 일은 갑작스레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갔다. 어째서인지 갑자기 돌변한 주강운은 간민혜를 택시에 태워 급히 한주를 벗어나려했다. 그러
간민혜는 제왕절개로 딸을 낳았다. 출산하자마자 그녀는 또 다시 수술을 시작했다. 전화번호를 건네받은 강한서는 바로 전화번호의 주인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은 줄곧 연락이 닿지 않았다. 병원에서 6일 동안 버티던 간민혜는 결국 부상이 너무 심했던 탓에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강한서는 간민혜의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주의 사람도 아니었으니 경찰서에서는 간민혜의 거주지 관할서에 연락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간민혜의 가족은 이미 이사를 간 상황이라 여전히 연락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강한서가 연락할 수 있는 건 간민혜가 준 그 전화번호뿐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꽤 신중한 편이었다. 처음엔 강한서가 장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상대방은 아이의 울음소리와 간민혜의 주민등록번호를 듣고는 순간 침묵했다. 그날 밤, 병원의 안치실에 어두운 피부의 남자가 도착했다. 우람한 덩치의 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강인해 보이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어림잡아 강한서보다도 몇 살은 더 많아 보였다. 화상을 입었던 터라 간민혜의 시신은 흉측해 보였다. 그 남자는 간민혜의 시신 앞에 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강한서에게 물었다. “민혜 맞아요?”강한서는 그 질문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남자 역시 대답이 필요한 건 아닌 듯싶었다. 그는 화상으로 굳어져 뼈가 선명한 손을 잡고 무명지에 끼워진 반지를 확인하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민혜네...”그는 꽤 오랫동안 안치실에 머물렀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그저 팔소매로 묵묵히 간민혜 몸에 묻은 얼룩을 닦아냈다. 차마 세게 힘을 줄 수도 없었다. 피부가 이미 짓물러 조금만 건드려도 피가 새어나왔기 때문이다.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강한서는 먼저 안치실을 나와 밖에서 그 남자를 기다렸다.안치실에서 나온 문지상은 강한서에게 담배가 있냐며 물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강한서는 문지상을 데리고 병원 밖의 마트로 가 담배 두 갑을 샀다. 문지상은 아
문지상이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한성 그룹의 강한서 씨. 제가 당신 찾을 수 있어요.”강한서가 다시 거절하려고 했지만 문지상이 말을 이었다. “강한서 씨는 주강운 제일 친한 친구잖아요. 그 인간이 내 아내와 딸을 이 지경으로 내몰았으니 친구인 강한서 씨가 대신 이정도 죄를 갚는 건 충분히 할 수 있겠죠.”“...”문지상이 말했다. “지금은 정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래요. 아직 못한 일이 있어요. 아이는 강한서 씨 곁에 있는게 제일 안전해요. 강씨 가문 사람이라면, 아무도 쉽고 못 건드릴 거예요. 나중에 모든 것이 해결되면 제가 아이 데리러 올 거예요. 그러니 그때까지만 잘 숨겨줘요. 절대 그 아이의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돼요. 그 아이는 민혜가 남기고 간 유일한 핏줄이에요. 절대 그 아이까지 휘말려서는 안 돼요...”당시의 강한서는 문지상이 말 한 “휘말리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기에 갓 태어난 아이를, 그것도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기를 두고 가야만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지상은 필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전화 한 통을 받은 그는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떠나기 전, 문지상은 주강운에게 한 마디만 전해달라고 했다. 간민혜의 일은 이게 끝이 아니라고. 강한서는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주씨 가문에서 주강운을 해외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주강운의 해리성 장애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의 가문에선 많은 교수를 모셔와 주강운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강운의 해리성 장애는 간민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주강운의 어머니는 심지어 그의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절대 두 번 다시는 간민혜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며 부탁했다. 심지어 인맥을 동원해 그 교통사고에서 주강운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강한서는 주씨 가문의 결정이 맞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강운이 기억을 되찾은 후 간민혜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또다시 미친 X처럼 발병할까, 그것이 걱정이었
편지 봉투를 건네받은 한현진이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한현진은 안에 증명서 같은 물건이 들어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편지 봉투에 든 물건은 경찰 견장이었다. 물건을 확인한 한현진이 멍해졌다. 그녀는 조금 전 강한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빛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어.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사람들이.”한현진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문지상 씨는 마약수사팀 형사였던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나한테 명확하게 얘기한 적 없어. 하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하우스클럽의 사건이 있기 전, 은서를 보러 한 번 왔었어. 출장을 간다고 했어. 이번엔 좀 오래 걸릴 거라고. 그러면서 은서가 다 나으면 데리러 온다고 했었거든.”말을 이어가던 강한서의 목소리가 점점 잠겼다. “그게 내가 문지상 씨를 마지막으로 본 거였어. 그 뒤로 내 계좌로 매년 돈이 들어왔어. 돈을 보낸 사람은 문지상 씨였고. 하지만 한 번도 나타난 적은 없어. 난 줄곧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생각했지. 여전히 임무를 마치지 못해서 은서를 보러 오지 못하는 거라고. 그래도 은서에게 돈은 보냈으니까. 본인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니까.”“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명예롭게 은서를 집으로 데려갈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어떻게 6년 전에 이미 사망했을 수가 있는 거지? 심지어 약물 과다 투여로 추락사했다니. 문지상 씨가 마약에 손댔을 리가 없어...”“경찰 측에서는 문지상 씨의 사망 소식을 전한 적도 없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었던 사람처럼, 모든 정도가 전부 말살되었어.”한 번도 변한 적 없던 강한서의 신념이 지금 이 순간,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지상의 죽음은 범죄 수사를 위한 희생으로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그의 자료는 전부 말살되었다. 마치 팀의 오점을 지우기라도 하듯. 은서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문지상의 남겨진 아이를 책임질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그의 죽음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