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의 상처받은 눈빛과 슬픔은 너무도 진실처럼 다가왔다. 만약 예전의 한현진이라면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한현진이 강한서와 이혼하고 제일 힘들었던 그 시간 동안 주강운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줬었기에 설사 주강운이 강한서와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주강운을 친구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주강운이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로 한현진은 도무지 주강운이 내뱉는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가 없어졌다. 눈을 감은 한현진은 최대한 냉정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어요.”시선을 내린 주강운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진 씨. 한서가 실종됐을 동안 저와 보낸 시간이 현진 씨는 혐오스러웠어요?”입을 꾹 다문 한현진이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그 시간 동안 도와주신 거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미안하기도 하고요. 강한서를 나타나게 하려고 염치도 없이 변호사님을 이용했어요. 제가 변호사님에게 화를 낸 건, 강한서가 이 일에 연루될까 봐 그런 거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변호사님께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죄송해요.”주강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현진 씨. 저에게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필요는 없어요. 현진 씨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전부 알고 있어요. 한서가 현진 씨를 기억하든 아니든, 현진 씨의 선택은 늘 한서겠죠. 그래서 전 다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어요. 오늘 현진 씨에게 이 얘기를 한 건 제가 현진 씨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현진 씨에게 알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만약 제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거라면 제 사심은 그저 현진 씨를 한 번 만나는 거, 그거뿐이었어요. 만약 그것마저도 불편하다고 하면... 미안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주강운이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갈게요.”그러자 한현진이 그를 불러세웠다. “주 변호사님. 사과해야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물뿌리개를 가져가서야 한현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왔어?”한현진의 곁에 앉은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강한서, 너 하우스클럽 간 적 있어?”강한서는 오히려 평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설희 씨 사건과 내가 연관이 있는 건지 묻고 싶은 거야?”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넌 그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걸 알아. 난 단지 네가 그때 그곳에 왜 간 건지, 그게 궁금한 거야. 너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해. 그래야 대책을 세울 수가 있어.”오후 사이 한현진은 모든 생각을 정리했다. 강한서가 정설희가 눈에 익다고 했었던 건 아마 그때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저 한 번 본 것이 전부이니 바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한현진이 걱정되는 건 정설희의 사건에 강한서가 연루되는 것이었다. 그 사진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설사 강한서가 그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사진 한 장으로 충분히 연루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초조해하는 한현진의 얼굴을 보며 강한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후 내내 걱정하더니, 그 이유 때문이었어?”잡힌 손을 빼내며 한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가볍게 장난처럼 웃어넘기지 마. 지금 이거 심각한 상황이야. 만약 정설희가 정말 그날 그 파티에서 누군가에게 속아 마약을 한 거라면 그 자리에 있었던 넌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이 일이 밝혀지면 네가 아무리 결백해도 다른 사람 눈엔 그저 가해자와 다름이 없는 거라고.”이제 겨우 강단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만약 이 일이 밝혀진다면 그건 강단해가 강한서를 찍어 누를 칼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한현진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주강운이 대체 너에게 뭘 보여준 거야?”“사진. 네가 하우스클럽에서 정설희와 같은
한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서희 언니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서희 씨가 꾸민 알이 아닐 수도 있어. 난 왠지 정서희 씨를 강운에게로 인도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만약 주강운이 이 일을 이용해 강한서를 공격하려는 거라면, 그건 너무 주강운스럽지 않은 방식이었다. “왜 서희 언니를 끌어들여 주 변호사님이 이 사건을 맡게 한 거야? 서희 언니를 끌어들인 사람은 누구고 그 사람 목적이 뭐지?”강한서의 분석에 한현진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강운이는 다른 변호사와는 달라. 강운이 뒤에는 주씨 가문이 있잖아.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감히 받지 못하는 사건을 강운이는 받을 수 있어. 그 사람은 어쩌면 그 점을 노렸을 지도 몰라.”혹여 주강운이 이 사건을 거절할까 그 사진을 미끼로 던진 것도 꽤 합리적인 추측이 될 수 있었다. “아, 맞다. 너 방금 그날 밤 있었던 추락사고 기사를 덮은 이유가 장준 때문이라고 했잖아. 주 변호사님이 보여준 설희 사진에 장준 씨와 찍은 사진도 있었어. 혹시 설희가 마약에 중독된 거 장준 씨와 관련되어 있는 거 아닐까?”“그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강한서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네 친구를 돕고 싶어서 내가 뭐라도 해주길 바라는 거야?”잠시 침묵하던 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난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바라지 않아.”소변 검사도 조용히 덮을 수 있다는 건 장씨 가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런 사람들을 건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큰 모험이었고 그녀는 그 정도로 고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어깨를 꼭 감싸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췄다. “네 말대로 할게.”강한서의 품에 안겨 한참을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우리 그때 장준이 하우스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해 보는 건 어때
“넌 시간도 안 보고 전화하는 거냐?”신우가 욱, 화를 냈다. “넌 와이프가 없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아니야.”강한서가 생각했다. ‘나도 있어. 난 아이도 있다고. 그것도 두 명이나!’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누른 강한서가 마친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미안해, 신우야. 이 시간에 전화한 건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신우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예의 있게 말을 해?’입술을 짓이긴 신우가 물었다. “무슨 부탁?”“너 네 와이프가 사용하는 업무 시스템 해킹해서 뭐 좀 알아—”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우가 뚝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휴대폰이 꺼진 상태였다. ...신우는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더 이상 휴대폰에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다. 욕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신우는 얼른 위쪽 단추를 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가져오더니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고여정이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를 털며 이불을 걷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그녀는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누가 보낸 문자인 건지 고여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장하고 있었다. 가끔은 생각에 잠기고 또 가끔은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춤추듯 빠르게 움직였다. 옆에서 누워 있는 신우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소외당하고 있던 신우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서에서 온 문자야?”고여정이 상대방의 답장을 기다리는 틈에 대답했다. “아니, 강한서 씨 문자야. 최근에 일이 생겨서 나한테 물어볼게 있대.”신우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는 티 나지 않게 고여정을 떠보았다. “무슨 일인데?”고여정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친구 분 지인이 모함으로 자살했대. 그 분은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동생을 위해 진범을 찾고 싶다나 봐. 하지만 인맥도 없고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동생인 척 연기하면서 동생이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
신우가 미간을 꾹 눌렀다. “강한서. 너 이 개자식, 나한테 제발 좀 합법적인 일을 시킬 수는 없어? 내가 언젠가 너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개 같은 자식. 자긴 사람들 앞에서 성인군자인 척, 선량한 시민인 척 하면서. 법 아주 잘 지키시네, 위법 행위는 전부 나한테 시켰잖아.’강한서가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네가 아니면 아무도 조사 못해.”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대놓고 서버를 해킹할 수 있고 해킹했던 참에 버그도 해결해주잖아. 얼마나 많은 사기 사이트를 해킹해 사기 집단 검거에 도움을 줬는데. 이것도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법률이 아직도 개선할 부분이 있다는 거야.”강한서의 아부에 전혀 낚이지 않은 신우가 사나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닥쳐. 지금 네 놈이 하는 말은 전혀 듣고 싶지 않으니까.”신우에게 부탁을 해야 했던 강한서는 그의 말에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신우가 씩씩거리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여정이에게 했던 말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우리 와이프 친구가 실제로 겪은 일이라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난 그런 건 전혀 모르잖아. 여정 씨는 법의관이시니까 알 것 같아서 물어봤어.”‘그냥 물어본 거라고?’신우가 냉소 지었다. ‘방귀도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하고 뀔 것 같은 자식이 그냥 물어본 거라고?’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기억 잃었다며. 한현진 씨와 파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한현진 씨 일이 너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러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부부였던 것도 인연인데, 굳이 얼굴 붉히며 헤어질 필요는 없잖아.”“허.”신우는 헛웃음을 뱉으며 컴퓨터를 켰다. “부부였던 것도 인연이라 돌아오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파혼하려 했던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화제를 좀 바꿀 수 없어?”“왜? 네가 그렇게 행동할 땐 언제고 이젠 나더러 얘기도 하지 말라는 거야?”신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
신우의 표정을 살피던 고여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비켜.”신우는 모니터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냐. 여보 먼저 들어가.”고여정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여보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시민에겐 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어. 조사에 응하지 않다가 덜미가 잡히면 감형 받을 자격이 없는 거야.”신우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서려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고여정이 신우의 옷을 꼭 잡았다. “저리 비켜.”말하며 고여정이 신우를 잡아당기자 모니터 속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흘러나오는 장면을 확인한 고여정은 그대로 자리에 굳어졌다. 스피커에서는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로 뒤엉킨 몸은 살색의 향연이었다. 야하기가 이루 말할 것 없었다. 고여정의 얼굴이 점차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우는 고여정의 등 뒤로 다가오며 빨간 그녀의 귓불에 입 맞추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 형사님, 퍼뜨리지 않고 저만 보는 건 불법 아니죠?”고여정이 이를 악물었다. “배고파서 뭐 좀 먹어야겠다며?”“그랬지. 배도 채우고 인강으로 공부도 하고.”고여정이 신우의 손을 탁 쳐냈다. “지워.”신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힘들게 강한서한테서 받은 거야. 아직 다 못 봤는데, 다 보고 지우면 안 돼?”수화기 너머로 부부의 야한 농담을 듣고 있던 강한서가 침묵했다. 부끄러운 듯 고여정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른 지워. 남자들은 같이 모였다 하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신우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말하며 그는 고여정이 보는 앞에서 영상을 지웠다. 영상이 삭제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고여정이 말했다. “컴퓨터도 꺼. 내가라면 끓여줄게. 같이 먹어.”신우가 고여정을 품에 꽉 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여보~”고여정이 방을 나서자 신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자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망연자실한 눈빛의 그가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진아, 은서 이젠 아빠 없어. 내가 은서에게 했던 약속 다신 지킬 수 없게 됐어.”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뭐?”강한서의 눈빛이 처량하게 빛났다. 그는 한현진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6년 전, 하우스클럽에서 추락해서 사망한 사람이 바로 은서 아빠야.”한현진이 중얼거렸다. “은서는 정말 주 변호사님 딸이 아니었던 거야?”그 말에 강한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넌 대체 무슨 허황된 생각을 한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주강운 씨와 잠입 수사 중인 형사가 서로 죽고 못살 다가 같이 교통사고를 당해 간민혜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은서를 부탁한 거 아냐?”강한서는 한현진의 상상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언제 은서가 강운이 딸이라고 했어?”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은서는 주강운 씨와 함께 사고 났던 전 여자 친구 사이에서 낳은 아이 아니야?”대답하려던 강한서가 갑자기 멈칫했다. “네가 간민혜 씨를 어떻게 알아?”한현진이 모른 척 눈을 깜빡였다. “내가 간민혜라고 했어?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강한서가 냉정하게 말했다. “너 분명 얘기했어. 분명 간민혜가 나에게 은서를 부탁했다고 했잖아. 누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하하. 누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해?”한현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나한테 무슨 얘기한 적 없어.”한현진을 살펴보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한성우, 그 방정맞은 자식이지?”한현진이 강한서의 시선을 피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낮게 욕을 읊조린 강한서가 물었다. “한성우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지어낸 거야?”“성우 씨는 별 얘기 안 했어. 그때 성우 씨는 한주에 없어서 아는게 많지 않다며 간민혜 씨와 강운 씨가 헤어진 일만 얘기해줬어. 그리고 나중에 두 사람이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나머지는 전부 내 추측이야.”말을 마친 한현진이 화제를 바꾸었다.
갑작스러운 주강운의 말을 이상하게 여긴 강한서가 간민혜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간민혜는 그저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이미 결혼을 한 것은 물론 곧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간민혜에게 그녀와 주강운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전부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주강운과 함께 해외로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강한서의 말을 들은 한현진은 곧바로 당시의 주강운이 발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주강운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그와 간민혜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간민혜는 진작 과거에서 벗어나 있었고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주강운 뿐이었다. 어떻게 주강운을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쯤, 돈 때문에 강한서의 사인을 받으러 온 신미정이 갑작스레 주강운과 간민혜의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예전부터 재벌가 며느리가 되기를 꿈꾸는 여자들을 마땅치 않은 시선으로 봤었다. 신미정에게 간민혜 역시 신데렐라를 꿈꾸는 그런 여자였다. 투덜거리며 몇 마디 늘어놓던 신미정이 일을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주씨 가문에 그런 여자를 받아들일 리가 없잖니. 지금 시윤 씨가 찾아갔으니 그 성격에 간민혜가 두 번 다시는 강운이에게 매달리지 못하게 할 거야.”신미정의 말에 멈칫한 강한서는 순간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만약 주씨 가문은 주진철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면 주시윤은 바로 그의 생각을 실현하는 행동대장에 가까웠다. 주시윤의 수단은 간민혜처럼 힘없는 여자 아이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한서는 최대한 빨리 주강운에게 연락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주강운이 주시윤을 막아 간민헤가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 뒤로 일어난 일은 갑작스레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갔다. 어째서인지 갑자기 돌변한 주강운은 간민혜를 택시에 태워 급히 한주를 벗어나려했다. 그러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