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 [스탠딩 티켓이라도 사서 옆에 서 있을 수는 없어요?]민경하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강민서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커피 주문 해뒀어요. 얼른 와요.]그리곤 카페 위치를 강민서에게 알려주었다. 주강운이 한현진을 위해 커피를 주문하려고 하자 한현진이 손을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할 얘기가 뭐예요? 약속이 있어서 너무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아요.”메뉴판을 가리키던 주강운의 손가락이 멈칫 공중에서 멈췄다. 라테 한 잔을 시키고 나서 주강운이 고개를 들었다. “한서 요즘 어때요? 기억은 좀 돌아왔어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그렇죠, 뭐. 의사가 최면 치료를 권유하더라고요. 주 변호사님, 혹시 실력 있는 최면사 아시는 분 있으세요?”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제가 해외에서 알게 된 정신과 치료를 전담하는 최면사 한 분이 계세요. 나중에 제가 연락처 알려드릴게요.”덤덤한 태도의 주강운에게서는 그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현진이 씩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알바생이 물 한 잔을 가져오자 컵을 받아 든 한현진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까지 절 데려온 이유가 이 얘기를 하시려고 그런 건 아니죠?”주강운은 말없이 서류 가방을 열어 안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한현진 앞에 내밀었다. “정설희 씨가 돌아가시기 전 남긴 유서 복사본과 다른 자료들이에요. 한 번 보세요.”한현진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주 변호사님, 저 설희가 겪은 일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설희의 죽음은 저에게도 슬픈 일이에요. 하지만 전 이런 일에 개입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이 자료도 안 볼 거고요. 변호사님도 웬만하면 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이번 일은 한두 사람이 힘을 모은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서희 언니가 경찰에 신고할 수 있게 설득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설득할 거예요. 하지만 이 자료는 현진 씨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말하며 주강운은
주강운의 상처받은 눈빛과 슬픔은 너무도 진실처럼 다가왔다. 만약 예전의 한현진이라면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한현진이 강한서와 이혼하고 제일 힘들었던 그 시간 동안 주강운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줬었기에 설사 주강운이 강한서와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주강운을 친구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주강운이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로 한현진은 도무지 주강운이 내뱉는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가 없어졌다. 눈을 감은 한현진은 최대한 냉정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어요.”시선을 내린 주강운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진 씨. 한서가 실종됐을 동안 저와 보낸 시간이 현진 씨는 혐오스러웠어요?”입을 꾹 다문 한현진이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그 시간 동안 도와주신 거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미안하기도 하고요. 강한서를 나타나게 하려고 염치도 없이 변호사님을 이용했어요. 제가 변호사님에게 화를 낸 건, 강한서가 이 일에 연루될까 봐 그런 거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변호사님께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죄송해요.”주강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현진 씨. 저에게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필요는 없어요. 현진 씨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전부 알고 있어요. 한서가 현진 씨를 기억하든 아니든, 현진 씨의 선택은 늘 한서겠죠. 그래서 전 다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어요. 오늘 현진 씨에게 이 얘기를 한 건 제가 현진 씨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현진 씨에게 알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만약 제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거라면 제 사심은 그저 현진 씨를 한 번 만나는 거, 그거뿐이었어요. 만약 그것마저도 불편하다고 하면... 미안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주강운이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갈게요.”그러자 한현진이 그를 불러세웠다. “주 변호사님. 사과해야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물뿌리개를 가져가서야 한현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왔어?”한현진의 곁에 앉은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강한서, 너 하우스클럽 간 적 있어?”강한서는 오히려 평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설희 씨 사건과 내가 연관이 있는 건지 묻고 싶은 거야?”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넌 그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걸 알아. 난 단지 네가 그때 그곳에 왜 간 건지, 그게 궁금한 거야. 너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해. 그래야 대책을 세울 수가 있어.”오후 사이 한현진은 모든 생각을 정리했다. 강한서가 정설희가 눈에 익다고 했었던 건 아마 그때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저 한 번 본 것이 전부이니 바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한현진이 걱정되는 건 정설희의 사건에 강한서가 연루되는 것이었다. 그 사진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설사 강한서가 그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사진 한 장으로 충분히 연루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초조해하는 한현진의 얼굴을 보며 강한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후 내내 걱정하더니, 그 이유 때문이었어?”잡힌 손을 빼내며 한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가볍게 장난처럼 웃어넘기지 마. 지금 이거 심각한 상황이야. 만약 정설희가 정말 그날 그 파티에서 누군가에게 속아 마약을 한 거라면 그 자리에 있었던 넌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이 일이 밝혀지면 네가 아무리 결백해도 다른 사람 눈엔 그저 가해자와 다름이 없는 거라고.”이제 겨우 강단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만약 이 일이 밝혀진다면 그건 강단해가 강한서를 찍어 누를 칼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한현진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주강운이 대체 너에게 뭘 보여준 거야?”“사진. 네가 하우스클럽에서 정설희와 같은
한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서희 언니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서희 씨가 꾸민 알이 아닐 수도 있어. 난 왠지 정서희 씨를 강운에게로 인도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만약 주강운이 이 일을 이용해 강한서를 공격하려는 거라면, 그건 너무 주강운스럽지 않은 방식이었다. “왜 서희 언니를 끌어들여 주 변호사님이 이 사건을 맡게 한 거야? 서희 언니를 끌어들인 사람은 누구고 그 사람 목적이 뭐지?”강한서의 분석에 한현진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강운이는 다른 변호사와는 달라. 강운이 뒤에는 주씨 가문이 있잖아.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감히 받지 못하는 사건을 강운이는 받을 수 있어. 그 사람은 어쩌면 그 점을 노렸을 지도 몰라.”혹여 주강운이 이 사건을 거절할까 그 사진을 미끼로 던진 것도 꽤 합리적인 추측이 될 수 있었다. “아, 맞다. 너 방금 그날 밤 있었던 추락사고 기사를 덮은 이유가 장준 때문이라고 했잖아. 주 변호사님이 보여준 설희 사진에 장준 씨와 찍은 사진도 있었어. 혹시 설희가 마약에 중독된 거 장준 씨와 관련되어 있는 거 아닐까?”“그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강한서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네 친구를 돕고 싶어서 내가 뭐라도 해주길 바라는 거야?”잠시 침묵하던 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난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바라지 않아.”소변 검사도 조용히 덮을 수 있다는 건 장씨 가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런 사람들을 건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큰 모험이었고 그녀는 그 정도로 고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어깨를 꼭 감싸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췄다. “네 말대로 할게.”강한서의 품에 안겨 한참을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우리 그때 장준이 하우스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해 보는 건 어때
“넌 시간도 안 보고 전화하는 거냐?”신우가 욱, 화를 냈다. “넌 와이프가 없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아니야.”강한서가 생각했다. ‘나도 있어. 난 아이도 있다고. 그것도 두 명이나!’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누른 강한서가 마친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미안해, 신우야. 이 시간에 전화한 건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신우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예의 있게 말을 해?’입술을 짓이긴 신우가 물었다. “무슨 부탁?”“너 네 와이프가 사용하는 업무 시스템 해킹해서 뭐 좀 알아—”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우가 뚝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휴대폰이 꺼진 상태였다. ...신우는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더 이상 휴대폰에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다. 욕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신우는 얼른 위쪽 단추를 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가져오더니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고여정이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를 털며 이불을 걷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그녀는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누가 보낸 문자인 건지 고여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장하고 있었다. 가끔은 생각에 잠기고 또 가끔은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춤추듯 빠르게 움직였다. 옆에서 누워 있는 신우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소외당하고 있던 신우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서에서 온 문자야?”고여정이 상대방의 답장을 기다리는 틈에 대답했다. “아니, 강한서 씨 문자야. 최근에 일이 생겨서 나한테 물어볼게 있대.”신우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는 티 나지 않게 고여정을 떠보았다. “무슨 일인데?”고여정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친구 분 지인이 모함으로 자살했대. 그 분은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동생을 위해 진범을 찾고 싶다나 봐. 하지만 인맥도 없고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동생인 척 연기하면서 동생이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
신우가 미간을 꾹 눌렀다. “강한서. 너 이 개자식, 나한테 제발 좀 합법적인 일을 시킬 수는 없어? 내가 언젠가 너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개 같은 자식. 자긴 사람들 앞에서 성인군자인 척, 선량한 시민인 척 하면서. 법 아주 잘 지키시네, 위법 행위는 전부 나한테 시켰잖아.’강한서가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네가 아니면 아무도 조사 못해.”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대놓고 서버를 해킹할 수 있고 해킹했던 참에 버그도 해결해주잖아. 얼마나 많은 사기 사이트를 해킹해 사기 집단 검거에 도움을 줬는데. 이것도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법률이 아직도 개선할 부분이 있다는 거야.”강한서의 아부에 전혀 낚이지 않은 신우가 사나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닥쳐. 지금 네 놈이 하는 말은 전혀 듣고 싶지 않으니까.”신우에게 부탁을 해야 했던 강한서는 그의 말에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신우가 씩씩거리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여정이에게 했던 말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우리 와이프 친구가 실제로 겪은 일이라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난 그런 건 전혀 모르잖아. 여정 씨는 법의관이시니까 알 것 같아서 물어봤어.”‘그냥 물어본 거라고?’신우가 냉소 지었다. ‘방귀도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하고 뀔 것 같은 자식이 그냥 물어본 거라고?’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기억 잃었다며. 한현진 씨와 파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한현진 씨 일이 너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러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부부였던 것도 인연인데, 굳이 얼굴 붉히며 헤어질 필요는 없잖아.”“허.”신우는 헛웃음을 뱉으며 컴퓨터를 켰다. “부부였던 것도 인연이라 돌아오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파혼하려 했던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화제를 좀 바꿀 수 없어?”“왜? 네가 그렇게 행동할 땐 언제고 이젠 나더러 얘기도 하지 말라는 거야?”신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
신우의 표정을 살피던 고여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비켜.”신우는 모니터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냐. 여보 먼저 들어가.”고여정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여보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시민에겐 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어. 조사에 응하지 않다가 덜미가 잡히면 감형 받을 자격이 없는 거야.”신우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서려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고여정이 신우의 옷을 꼭 잡았다. “저리 비켜.”말하며 고여정이 신우를 잡아당기자 모니터 속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흘러나오는 장면을 확인한 고여정은 그대로 자리에 굳어졌다. 스피커에서는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로 뒤엉킨 몸은 살색의 향연이었다. 야하기가 이루 말할 것 없었다. 고여정의 얼굴이 점차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우는 고여정의 등 뒤로 다가오며 빨간 그녀의 귓불에 입 맞추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 형사님, 퍼뜨리지 않고 저만 보는 건 불법 아니죠?”고여정이 이를 악물었다. “배고파서 뭐 좀 먹어야겠다며?”“그랬지. 배도 채우고 인강으로 공부도 하고.”고여정이 신우의 손을 탁 쳐냈다. “지워.”신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힘들게 강한서한테서 받은 거야. 아직 다 못 봤는데, 다 보고 지우면 안 돼?”수화기 너머로 부부의 야한 농담을 듣고 있던 강한서가 침묵했다. 부끄러운 듯 고여정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른 지워. 남자들은 같이 모였다 하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신우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말하며 그는 고여정이 보는 앞에서 영상을 지웠다. 영상이 삭제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고여정이 말했다. “컴퓨터도 꺼. 내가라면 끓여줄게. 같이 먹어.”신우가 고여정을 품에 꽉 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여보~”고여정이 방을 나서자 신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자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망연자실한 눈빛의 그가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진아, 은서 이젠 아빠 없어. 내가 은서에게 했던 약속 다신 지킬 수 없게 됐어.”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뭐?”강한서의 눈빛이 처량하게 빛났다. 그는 한현진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6년 전, 하우스클럽에서 추락해서 사망한 사람이 바로 은서 아빠야.”한현진이 중얼거렸다. “은서는 정말 주 변호사님 딸이 아니었던 거야?”그 말에 강한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넌 대체 무슨 허황된 생각을 한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주강운 씨와 잠입 수사 중인 형사가 서로 죽고 못살 다가 같이 교통사고를 당해 간민혜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은서를 부탁한 거 아냐?”강한서는 한현진의 상상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언제 은서가 강운이 딸이라고 했어?”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은서는 주강운 씨와 함께 사고 났던 전 여자 친구 사이에서 낳은 아이 아니야?”대답하려던 강한서가 갑자기 멈칫했다. “네가 간민혜 씨를 어떻게 알아?”한현진이 모른 척 눈을 깜빡였다. “내가 간민혜라고 했어?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강한서가 냉정하게 말했다. “너 분명 얘기했어. 분명 간민혜가 나에게 은서를 부탁했다고 했잖아. 누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하하. 누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해?”한현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나한테 무슨 얘기한 적 없어.”한현진을 살펴보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한성우, 그 방정맞은 자식이지?”한현진이 강한서의 시선을 피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낮게 욕을 읊조린 강한서가 물었다. “한성우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지어낸 거야?”“성우 씨는 별 얘기 안 했어. 그때 성우 씨는 한주에 없어서 아는게 많지 않다며 간민혜 씨와 강운 씨가 헤어진 일만 얘기해줬어. 그리고 나중에 두 사람이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나머지는 전부 내 추측이야.”말을 마친 한현진이 화제를 바꾸었다.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