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변호사님도 모셔 왔습니다. 한성의 기밀이 제 아버지에게 누설되어 그것으로 이익을 얻었을 경우, 제가 한성 그룹이 그로 인해 입은 손해의 3배를 보상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지겠습니다. 제 명의의 부동산과 자동차를 이미 관련 기관에 동결시켰습니다. 제가 방금 말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재산을 바로 은행 담보로 잡고 귀사에 손해배상을 진행할 겁니다.”박부자가 말을 보탰다. “동결시킨 재산 총액은 2400억 정도입니다.”그 말에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다. 2400억은 한성과 같은 회사엔 당연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송씨 가문 전체를 걸고 맹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한현진을 향한 의심도 자연스레 수그러들었다. 한현진이 강단해를 쳐다보았다. “강단해 대표님, 제가 이젠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을까요?”강단해는 얼굴을 굳힌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도 나름의 대답이었다. 한현진은 외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더니 몸을 숙여 자리에 앉았다. 박부자와 함께 온 중년 남성도 민경하 옆으로 가 앉았다. 사람이 다 모이자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회의 시작 후 첫 30분 동안은 각 부서의 일주일간의 업무 보고였다. 보고를 마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몇 명의 대표들이 번갈아 가며 강한서 사고 이후 알렉스의 연구 개발 지연, 소극적 업무 태도 등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나라든 집이든 주인이 있어야 한다.”며 팀을 끌어 나갈 리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알렉스에 새로운 팀장을 지정해 전의 연구 진행 상황에 따라 개발을 이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몇 명의 대표의 제안을 들은 강단해가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 씨 생각은 어때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죠.”이렇게 쿨하게 동의할 줄 몰랐던 강단해는 멍해졌고 순간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다만.”한현진이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주호현의 발표는 시간을 끌려는 수단이 아니라 강한서 팀의 연구 개발 진척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알렉스가 리소그래피의 핵심 기술 연구에 성공한 것이다. 이건 전체 업계에서도 그야말로 선세이셔널한 성과였다. 일단 테스트를 통과하기만 하면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곧 해외 기술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리소그래피의 핵심 기술의 상업 가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방금까지 강단해 편에서 구경하듯 서 있던 임원들은 지금 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리젠테이션을 마친 주호현은 발표의 마지막에 얘기했다. “여러분, 연구 개발은 이미 마지막 테스트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팀장 교체는 절대 있어서는 안 돼요. 만약 이 테스트 결과가 누설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같은 업계의 사람들이었으니 모두가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강단해가 한성 그룹을 장악하려는 것은 그의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 욕심으로 인해 주주들의 이익에 손해가 가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었다. 새로운 기술의 혁신이 그들에게 재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은 너무 분명한 일이었다.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단해 대표님, 전 주 대표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시기에 새로운 팀장을 지정했다고 문제라도 생기면 아무도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죠.”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맞장구쳤다. “황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지금 시기에 새로운 팀장을 넣는다는 건 리스크가 있어요. 차라리 테스트가 끝난 후 팀장을 선임하죠.”“강단해 대표님, 모든 건 테스트가 우선입니다.”... 차가운 얼굴을 한 강단해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절대 우호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리소그래피의 핵심 기술 연구가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강한서는 회사에 알린 적이 없었다. 만약 그에게 사고가 나지 않았고 회장 선거 주주 총회에서 이 히
강현우를 무시한 한현진을 그를 피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강현우가 바로 한현진 앞을 가로막았다. “한현진 씨는 저희 형한테 정말 마음이 깊으신가 봐요. 자신의 모든 걸 걸어서 형의 팀을 지키려고 하다니. 이미 죽은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저 시간이나 조금 뒤로 미루는 것 말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얘기 끝났어요?”한현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얘기 끝났으면 비켜요.”강현우가 씩 웃었다. “형수님. 우리 형은 죽었고, 한성은 언젠가 저희 아버지 것이 될 거예요. 전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한성은 제 것이 되겠죠. 전 사실 여자의 이혼 경력은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아요. 저희 두 집안도 서로에게 걸맞은 집안이니 절 남편감으로 고민해 보시는 건 어때요. 저와 결혼하면 앞으로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수 있어요.”강현우의 정말이지 한현진의 외모에 푹 빠져있었다. 한현진의 신혼 첫날밤 취기가 올라 보여줬던 매혹적인 모습은 줄곧 강현우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전엔 강한서가 두려웠기에 뒤에서 몰래 한현진에게 찝쩍거렸지만 이젠 강한서도 없으니 당연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한현진을 바라보는 강현우의 눈빛은 더 이상 아무런 숨김도 없었다. 한현진은 강현우의 말에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곧 진정한 그녀는 눈앞에 있는 뇌가 맑은 트러블메이커를 훑어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현우 씨는 괜찮아도 강현우 씨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으시겠죠.”강현우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희만 마음을 정한다면 아버지가 동의하지 않을 것도 없죠. 송씨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한현진은 돼지 족발에서 손을 빼내며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살펴보았다. “아버지께서 꽤 건강하신 것 같던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한성을 물려받으면 전 아마 늙은 할망구가 되도록 기다려야 하겠네요. 왜 현우 씨가 직접 후계자 선거에 나서지 않는 거예요? 선거 되기만 하면 누구와 결혼하고 싶
한현진이 뭔가를 인식했을 땐 그 차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막 차를 따라가려는데 마침 민경하의 차가 한현진에 눈앞에 멈춰 섰다. 민경하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현진을 불렀다. “사모님, 차에 타세요.”한현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저 앞에 있는 차 빨리 따라잡아요.”멈칫하던 민경하가 말했다. “무슨 차요?”“하얀색 차요. 얼른.”한현진이 잔뜩 흥분한 채 말했다. “저 강한서 봤어요.”움찔하던 민경하가 자세히 물을 새도 없이 바로 차에 시동걸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연됐던 터라 민경하는 그 차량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한현진의 지시에 따라 두 블록을 쫓아갔다. 결국엔 신호등에 걸려 발목이 잡혔고 파란불이 켜졌을 땐 그 차량은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민경하도 어느 쪽으로 쫓아가야 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민경하가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사모님,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잘못 봤을 리가 없어요.”한현진이 흥분하며 말했다. “강한서가 맞아요. 제가 그 눈을 봤어요. 맞다. CCTV 확인해 봐요. 차량 번호 조회하고 차만 찾을 수 있으면 강한서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민경하도 지체없이 곧장 신우에게 연락해 사람을 통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쪽의 피드백은 민경하의 차가 도착하기 전 하얀색 차량 같은 건 전혀 찍힌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돼요. 제가 분명히 봤다고요.”한현진은 믿을 수 없었다. “CCTV 영상 보내라고 해요.”민경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모님, 경찰 측 영상은 이미 확인한 것만으로도 최선이라 복사할 순 없어요. 신우 씨가 거짓말할 리도 없고요. 아마 사모님께서 너무 피곤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최대한 쉬시는 게 좋겠어요.”“제가 잘못 보지 않았어요.”한현진이 고집스레 그 말을 내뱉었다. 민경하도 마음이 아팠던 터라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먼저 집으로 모셔다드릴게요.”“
칵테일을 맛만 본 한현진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멍때렸다. 사실 바텐더는 한현진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현진의 예쁜 외모도 한몫했지만 술에 취해 내 남편이 한주에서 자산이 제일 많은 재벌이라고 떠드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건 허풍도 아니었다. 정말로 부가티를 운전한 남편이 그녀를 데리러 왔었다. 하루 사이 여러 번 놀라움을 자아냈으니 기억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였다. 아직 저녁이 되기 전에라 바에는 사람도 몇 명 없었다. 바텐더는 칵테일을 만드는 술잔을 씻으며 한현진과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분께 좀 이따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시는 게 어떠세요?”한현진이 멈칫했다. “제 남편을 아세요?”“전에 여기서 술에 취하셨을 때 제가 남편분께 데리러 오라고 전화드렸거든요.”물론 전화번호는 한현진이 직접 알려준 것이었다. 한현진의 기억은 진작 흐릿해져 있었다. 그녀는 단지 자기가 그때 취해 주사를 부린 흑역사를 강한서에게 촬영 당해 “협박”당한 사실만 기억했다. 비록 강한서는 계속 그 동영상은 한현진 스스로 촬영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줄곧 강한서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현진은 늘 자신은 술버릇이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 전엔 별로 취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날 저녁 일은 정말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한현진은 갑자기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져 바텐더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이가... 언제 데리러 왔어요?”“제가 전화 드리고 몇분도 안 돼 도착하셨어요. 손님께서 너무 취하셔서 헛소리도 계속하시고 다이아몬드 반지로 술을 바꾸겠다고 하셔서 남편분께서 굉장히 불쾌해하셨어요. 그런데도 손님께 화를 내지 않으시더라고요. 무서워 보이는 분이셨지만 성격이 좋은 것 같았어요.”‘성격이 좋다라...’누군가 강한서를 이렇게 묘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다만 한현진도 바텐더의 말을 대충 이해했다.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해대는 인간에게 화도 내지 않고 질책도 하지 않은 채 돈
바텐더가 한현진에게 계산서를 보여주었다. 결제를 마친 한현진은 마스크를 쓰고 외투를 든 채 밖으로 나왔다. 칵테일은 알코올 향은 강하지 않았지만 알코올 함량이 낮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몇 잔이나 들이킨 한현진은 앉아있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일어나 몇 걸음 걷다 보니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발이 삐끗한 한현진의 몸이 옆으로 기울며 술을 들고 있는 젊은 남자와 부딪혔다. 술로 샤워를 한 남자가 한현진의 팔을 잡고 따지려 했다. 한현진은 지갑을 열어 안에서 현금 한 장을 꺼내 남자에게 쥐여주었다. “드라이 값으로 충분해요?”한현진은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세탁비로 충분한지 묻었다. 돈이 바닥에 떨어지자 한현진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남자가 화를 냈다. 그는 한현진의 팔은 잡은 채 분노했다. “누가 그깟 돈 달래? 젠장, 사과해.”잡힌 팔이 아팠던 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발버둥 쳤다. “이거 놔.”상대방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돈을 누구 얼굴에 던지는 거야? 얘기 똑바로 해!”“안 던졌어. 지가 떨어진 거야.”상대방은 한현진의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마스크를 벗기려 했다. “사람이 얘기하는 데 마스크나 씨고 있고, 존중 뭔지 알긴 해요?”상대방의 손이 막 한현진의 마스크에 닿으려는데, 누군가에 의해 손목이 잡혀 뒤로 확 꺾어졌다. 얼굴이 창백해진 남자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젊은 남자의 손목을 잡고 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젊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친구, 남자가 여자와 뭘 따지고 그래. 술에 취해서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거야.”말하며 남자는 돈을 젊은 남자의 주머니에 넣어뒀다. “옷도 별로 더러워지지 않았네요. 씻으면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그는 말하며 힘을 더 주자 젊은 남자는 고통에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제야 손목을 놓아주며 씩 웃었다. “고마워요, 친구.”젊은 남자
정명석의 질문에 언짢아진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러면 뭐? 이렇게 나에게 질척거리는 거, 강한서 대신이라도 되어주려고 이러는 거야?”정명석이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내가 미쳤어?”“미친 게 아닌데 왜 따라다녀?”“...”정명석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난... 난 그저 네 꼴 좀 보려고 그런다, 왜?”정명석은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찾았다. “그때는 네가 날 차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널 차버렸으니 역시 인생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한현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정명석은 그제야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참, 네가 정 강한서가 보고 싶으면 나에게 사정 해봐. 내가 큰마음 먹고 강한서인 척해줄 테니까.”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됐어. 사정 안 해도 돼. 나에게 그때 날 차는 게 아니었다고 사과만 하면 돼.”앞에 보이는 길에 고인 물을 빤히 쳐다보던 한현진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여기 와 봐.”한현진이 굴복한 줄 안 정명석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는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애초부터 태도가 좋았으면 내가 굳이 네 탓을 했— 젠장.”정명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은 그를 인행도로 아래로 밀어버렸다. 마침 차 한 대가 물웅덩이를 지나쳤고 뛰어오른 물방울은 그대로 정명석의 얼굴을 적셨다 그의 새햐안 옷은 흙탕물이 튀어 물에 젖은 걸레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정명석이 막 화를 내려는데 웃고 있는 한현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정명석은 멈칫하고 말았다. 불쾌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정명석도 한현진을 따라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몇 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이렇게 유치하네.”웃음을 거둔 한현진이 표정 관리를 했다. 정명석은 다시 한현진 앞에 다가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너 그때 왜 나와 헤어지려 했던 거야?”한현진이 정명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네 아버지께서 찾아오셨었어.”
정명석의 그 말은 헛소리 같았지만 한현진은 그 말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현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티가 나도록 변했다. 정명석은 뚫어버릴 듯 쳐다보는 한현진의 눈빛에 불편해졌다. 그는 자기 속셈을 들킨 줄 알고 감히 한현진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정명석이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생각해 봐. 내가... 그때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정명석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이 이미 택시에 탄 후였다. 상황 파악을 끝낸 정명석이 쫓아갔지만 한현진은 이미 차 문을 닫았고 택시는 쌩하니 가버렸다. 정명석의 입술이 분노로 씰룩였다. 그는 이를 갈며 욕을 지껄였다. “양심 없는 X.”한현진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9시였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송병천은 송민준과 함께 사람을 데리고 한현진을 찾으러 가려 했다. 집으로 돌아온 한현진에게서 술 냄새가 나자, 송병천과 송민준은 부자는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한현진은 태연했고 오히려 송병천에게 물었다. “아빠, 가람 언니 돌아왔어요?”“왔어. 밥 먹고 방에 들어갔어. 가람이에게 볼 일 있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 언니와 친구분 데리고 놀러 가기로 약속했거든요. 내일 언제 출발할지 물어보려고요.”송병천과 송민준이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지금 한현진의 상태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쁘다고 하기엔 난리를 치지도 않았고 제때 잠을 자고 때맞춰 밥을 먹었다. 그러나 좋다고 하기엔 확실히 너무 빨리 괜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고작 얼마 전만 해도 실종되기도 했으니까. 이상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전보단 나아 보였다. 송병천과 송민준이 입을 열기 전에 송가람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9시에 나가요. 만약 너무 이른 것 같으면 10시도 괜찮아요. 애들에게 얘기하면 돼요.”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9시로 해요.”두 사람이 약속을 잡는 모습을 본 송병천이 말했다.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