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획 고삐를 잡아당기자 준이가 바로 속도를 줄이더니 곧 멈춰 섰다. 준이의 고삐를 잡아 방향을 튼 한현진은 신미정을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얘기했다. “할머니 어디 계세요? 할머니를 만나야겠어요.”조금 야윈 한현진의 이목구비가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신미정 앞에서 고분고분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한현진에게선 천성적으로 타고난 귀티가 흘러넘쳤다. 예전의 신미정은 한현진의 출신 때문에 그녀를 눈에 차지 않아 했고 나중엔 그녀가 송씨 가문의 친딸이라 불편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강한서가 한현진을 제1 상속인으로 지목해 그녀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현진의 말을 들은 신미정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너 때문에 한서가 죽었어.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길 와? 네가 무슨 낯으로 어머님을 뵈러 오냐고. 당장 꺼져.”한현진은 신미정과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고삐를 당겨 신미정을 피해 가려 했다. 그러자 한현진의 태도에 화나 난 신미정이 옆에 있던 경비원에게 호통쳤다. “멍하니 서서 뭐 해? 쟤 막아.”경비원들은 그제야 한현진와 준이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준이는 너무도 민첩했고 경비원들은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준이를 막지 못했다. 신미정이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 “쓸모없는 것들. 짐승 하나도 못 막아?”준이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신미정을 달래 달려갔다. 깜짝 놀란 신미정은 사모님의 이미지고 뭐고 신경 쓸 겨를없이 그대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다 휘청이며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철푸덕 바닥에 나자빠졌다. 곧 말이 이쪽으로 달려올 것 같아 신미정은 두려움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그 장면을 목격한 강민서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한현진이 제때 고삐를 잡아당겼고 준이는 앞다리를 하늘 위로 치켜들더니 방향을 틀었다. 신미정은 볼품없는 모양새로 바닥에 앉아있었고 일어서지도 못했다. 강민서가 얼른 달려와 신미정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는 고개를 돌려 한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신탁 기금에 예치한 돈은 신미정이 죽은 뒤 강민서에게 상속되어야 했다. 그 말은 즉 유언장의 효력이 발생하기만 하면 신미정을 매년 얼마밖에 안 되는 이자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한서의 대부분의 돈을 한현진에게 남겨주었고 자기를 낳아준 친엄마에게는 쥐꼬리만 한 이자가 전부였다. 신미정은 그야말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신미정은 한현진이 강한서를 부추겨 이런 유언장을 작성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 모자의 사이가 아무리 안 좋아도 전에는 자기를 존경해 줬었고 사이가 틀어진 것은 바로 한현진 때문이라고 여겼다. ‘한서가 날 강씨 가문에서 내쫓은 것도 한현진 때문이야. 그러니 한서가 유언으로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도 당연히 한현진 탓이야.’미움에 미움이 더해지자 한현진에 대한 신미정의 증오는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한서가 왜 유언장을 작성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제야 알겠네. 그 유언장, 네가 한서를 부추겨서 작성한 거지?”“아직 젊은 나이에 멀쩡한 애가 왜 유언장을 작성하겠어? 게다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아무 상관도 없는 전 와이프에게 남기다니. 유언장을 작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했잖아. 그것도 너와 함께.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 내가 보기에 한서 사고는 네가 한서 재산을 노리고 꾸민 짓이야.”여기 오기 전 한현진은 아무와도 다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신미정의 말은 한현진의 상처를 쿡 찔렀고 그녀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 “유언 말씀하시니까 말인데요. 강한서가 사고를 당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구조인원을 감축하셨더라고요. 그건 누구 뜻이었어요? 경찰 측에서도 생사를 확인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사망신고부터 하시다니요. 고작 2주일이에요. 강한서가 살아있을까 봐, 그렇게 두려우세요?”“강한서가 물어 빠지기 전 얼마나 다쳤는지 아세요? 한서 수영 못하는 거 아시죠? 왜 못하는지 알아요? 한서가 어머님께 잘해주지 않는다고요? 한서는 심장이라도 꺼내줄 정도로 어
미간을 찌푸린 한현진이 뭔가 말을 하려 하자 진씨가 돌아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진씨를 뒤쫓았지만 또 경비원에게 길을 막히고 말았다. 신미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꺼져. 지금 네가 송씨 가문 친딸이라고 해서 내가 널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걸음을 멈춘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신미정을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신미정은 한현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재수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강민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금은 낯선 표정으로 신미정을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엄마, 정말 오빠 사망신고 했어요?”멈칫하던 신미정이 이내 화를 냈다. “넌 쟤 말은 믿고 내 말은 안 믿는 거야?”강민서가 시선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젠 도무지 신미정을 믿는 것이 맞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전에도 신미정은 할머니가 일을 커져 회사에 피해가 가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는 핑계로 수색 인원을 감소했었다. 아직 강한서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시점에, 그렇게 강한서를 아끼던 정인월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을까?강민서가 말이 없자 신미정의 날 선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나도 당연히 한서에게 아무 일이 없길 바라. 한서는 내 아들이야. 내가 어떻게 마음이 아프지 않겠지. 하지만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고 인양팀도 살아 돌아 올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떡해? 네 오빠는 없고, 넌 아직 결혼도 하지 못했으니 내가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와 우리 모녀의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워야 할 거 아냐.”강민서가 자신에게 등을 돌릴까 봐 신미정이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한현진에게 속지 마. 걘 네 오빠가 어떻게 되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네 오빠가 실종된 와중에 강운이와 꽁냥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이렇게 헤픈 여자에게 무슨 진심이 있겠어? 네 오빠도, 강운이도 걔한테 정신이 팔려서 자기 엄마는 신경도 안 쓰잖아. 한현진만 아니면 넌 진작 강운이와 이어졌을 거야.”멍해진 강민서는 한참 동안 신미정을 쳐
어린 시절 여행 중 강민서가 길을 잃어 뜨거운 태양 아래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그녀를 찾아 헤매던 강한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모습. 실험실 화재에서 구출되었을 때 강한서가 그녀를 안고 괜찮다며 되뇌던 모습. 생일에 어떤 선물을 원하든 전부 만족시켜 주던 강한서의 모습. 강민서의 강한서의 모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강한서가 어쩌면 아직도 차가운 강물에 잠겨 있을지도 모르는데 신미정은 유언장만 생각하고 있으니 강민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을 수가 없어 핑계를 둘러대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3일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인양팀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한현진은 하루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또 안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한현진에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한현진은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마침 밖에서 돌아온 송가람을 마주쳤다. 송가람은 저녁 내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요칠 동안은 집에 있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해금은 해외에서 돌아온 친구를 만나러 갔다고 했지만 한현진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마도 송가람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시기라 서로가 애틋해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마음이 변하다니, 정말이지...’한현진이 흠칫했다. 좋아하는 사람은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송가람은 슬퍼하는 모습 따위는 전혀 없었고 심지어 친구와 놀러 다닐 여력도 있었다. 이게 정상적인 걸까?그런 생각이 든 한현진은 송가람을 보는 눈빛에 의심이 드리웠다. 피곤한 얼굴로 한현진애게 인사를 한 송가람이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가람 언니.”한현진이 갑자기 송가람을 불러세웠다. “친구분 아직도 안 갔어요?”송가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2주 정도 더 있을 거래요. 어쩌다 왔는데, 실컷 놀다 가야죠.“”제가 안내 도
민경하의 맞은 쪽에 앉은 나이 지긋한 대표가 말했다. “민 실장님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인양팀 쪽에서 소식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요.”민경하가 태연하게 말했다. “강한서 대표님이 아니라, 대표님께서 직접 지정한 대리인입니다.”그 나이 지긋한 대표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한 번도 강한서 대표가 누굴 대리인으로 지정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사고가 난 지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민 실장님도 한 번도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더니 하필 회사에서 대리 대리인을 지정하려고 하니까 그 말을 꺼내시네요. 그 대리인은 대체 강한서 대표가 직접 지정한 사람이에요, 아니면 민 실장님이 본인 마음대로 지정한 사람이죠?”민경하는 그 대표를 슥 훑어보더니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모든 상황에 대한 대책을 미리 세우는 게 습관인 분이세요. 유언장을 작성할 생각을 하신 분이 왜 대리인을 지정할 생각은 못 하셨겠어요. 대리 대리는 대표님께서 변호사에게 의뢰해 계약서를 작성했고, 대표님께서 현장에 도착하지 못할 시 그분이 대신 회사의 중요 회의에 참석하실 수 있어요. 대리 대리인가 한 모든 결정은 전부 강한서 대표님의 뜻을 대표하는 거예요. 엄 대표님, 무슨 문제 있을까요?”민경하에게 말문이 막힌 엄 대표의 표정이 분노로 휩싸였다. 강현우는 민경하를 힐끔 쳐다보더니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이사회 동의도 거치지 않고 대리인을 지정했으니 이사회에서는 승인 안 해줘도 되는 거죠?”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 도련님 정도의 직급이라면 당연히 그럴 순 없습니다. 하지만 강한서 대표님이 회사에서의 위치는 이사회에 알리지 않으시고 회사에 일정한 자산을 담보로 하면 대리인을 지정할 수 있으시죠.”민경하는 말하며 앞에 놓인 서류를 들춰보았다. “이건 대표님의 담보계약서예요. 현우 도련님께서 한 번 확인해 보세요.”강현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한 명은 대표님, 다른 한 명은 도련님. 호칭에서만 보아도 민경하가 강현우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변호사님도 모셔 왔습니다. 한성의 기밀이 제 아버지에게 누설되어 그것으로 이익을 얻었을 경우, 제가 한성 그룹이 그로 인해 입은 손해의 3배를 보상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지겠습니다. 제 명의의 부동산과 자동차를 이미 관련 기관에 동결시켰습니다. 제가 방금 말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재산을 바로 은행 담보로 잡고 귀사에 손해배상을 진행할 겁니다.”박부자가 말을 보탰다. “동결시킨 재산 총액은 2400억 정도입니다.”그 말에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다. 2400억은 한성과 같은 회사엔 당연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송씨 가문 전체를 걸고 맹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한현진을 향한 의심도 자연스레 수그러들었다. 한현진이 강단해를 쳐다보았다. “강단해 대표님, 제가 이젠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을까요?”강단해는 얼굴을 굳힌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도 나름의 대답이었다. 한현진은 외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더니 몸을 숙여 자리에 앉았다. 박부자와 함께 온 중년 남성도 민경하 옆으로 가 앉았다. 사람이 다 모이자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회의 시작 후 첫 30분 동안은 각 부서의 일주일간의 업무 보고였다. 보고를 마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몇 명의 대표들이 번갈아 가며 강한서 사고 이후 알렉스의 연구 개발 지연, 소극적 업무 태도 등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나라든 집이든 주인이 있어야 한다.”며 팀을 끌어 나갈 리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알렉스에 새로운 팀장을 지정해 전의 연구 진행 상황에 따라 개발을 이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몇 명의 대표의 제안을 들은 강단해가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 씨 생각은 어때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죠.”이렇게 쿨하게 동의할 줄 몰랐던 강단해는 멍해졌고 순간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다만.”한현진이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주호현의 발표는 시간을 끌려는 수단이 아니라 강한서 팀의 연구 개발 진척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알렉스가 리소그래피의 핵심 기술 연구에 성공한 것이다. 이건 전체 업계에서도 그야말로 선세이셔널한 성과였다. 일단 테스트를 통과하기만 하면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곧 해외 기술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리소그래피의 핵심 기술의 상업 가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방금까지 강단해 편에서 구경하듯 서 있던 임원들은 지금 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리젠테이션을 마친 주호현은 발표의 마지막에 얘기했다. “여러분, 연구 개발은 이미 마지막 테스트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팀장 교체는 절대 있어서는 안 돼요. 만약 이 테스트 결과가 누설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같은 업계의 사람들이었으니 모두가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강단해가 한성 그룹을 장악하려는 것은 그의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 욕심으로 인해 주주들의 이익에 손해가 가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었다. 새로운 기술의 혁신이 그들에게 재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은 너무 분명한 일이었다.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단해 대표님, 전 주 대표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시기에 새로운 팀장을 지정했다고 문제라도 생기면 아무도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죠.”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맞장구쳤다. “황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지금 시기에 새로운 팀장을 넣는다는 건 리스크가 있어요. 차라리 테스트가 끝난 후 팀장을 선임하죠.”“강단해 대표님, 모든 건 테스트가 우선입니다.”... 차가운 얼굴을 한 강단해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절대 우호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리소그래피의 핵심 기술 연구가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강한서는 회사에 알린 적이 없었다. 만약 그에게 사고가 나지 않았고 회장 선거 주주 총회에서 이 히
강현우를 무시한 한현진을 그를 피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강현우가 바로 한현진 앞을 가로막았다. “한현진 씨는 저희 형한테 정말 마음이 깊으신가 봐요. 자신의 모든 걸 걸어서 형의 팀을 지키려고 하다니. 이미 죽은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저 시간이나 조금 뒤로 미루는 것 말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얘기 끝났어요?”한현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얘기 끝났으면 비켜요.”강현우가 씩 웃었다. “형수님. 우리 형은 죽었고, 한성은 언젠가 저희 아버지 것이 될 거예요. 전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한성은 제 것이 되겠죠. 전 사실 여자의 이혼 경력은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아요. 저희 두 집안도 서로에게 걸맞은 집안이니 절 남편감으로 고민해 보시는 건 어때요. 저와 결혼하면 앞으로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수 있어요.”강현우의 정말이지 한현진의 외모에 푹 빠져있었다. 한현진의 신혼 첫날밤 취기가 올라 보여줬던 매혹적인 모습은 줄곧 강현우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전엔 강한서가 두려웠기에 뒤에서 몰래 한현진에게 찝쩍거렸지만 이젠 강한서도 없으니 당연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한현진을 바라보는 강현우의 눈빛은 더 이상 아무런 숨김도 없었다. 한현진은 강현우의 말에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곧 진정한 그녀는 눈앞에 있는 뇌가 맑은 트러블메이커를 훑어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현우 씨는 괜찮아도 강현우 씨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으시겠죠.”강현우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희만 마음을 정한다면 아버지가 동의하지 않을 것도 없죠. 송씨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한현진은 돼지 족발에서 손을 빼내며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살펴보았다. “아버지께서 꽤 건강하신 것 같던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한성을 물려받으면 전 아마 늙은 할망구가 되도록 기다려야 하겠네요. 왜 현우 씨가 직접 후계자 선거에 나서지 않는 거예요? 선거 되기만 하면 누구와 결혼하고 싶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