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가 전에 저에게 했었던 말을 현진 씨에게 해드릴게요.”“한서가 그랬어요. 내가 있으니까, 넌 나약해져도 괜찮다고.”주강운의 목소리가 바람을 따라 귀에 들어왔다. 한현진은 어렴풋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 본능적 선택이 자구책이라 하더라도, 난 너와 생사를 함께 할 각오가 되어있어.”‘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한현진은 드디어 억누르고 있던 고통을 억제하지 못하고 통곡하듯 울어버렸다. 그 울음소리가 바람 따라, 산골짜기 따라, 쏟아져 내리는 샘물 따라 강한서의 귓가에 전해져 그가 이생에 조금의 미련이라도 남기게 할 수 있을까. 한현진은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억울함과 원망의 마음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왜 경찰을 데리고 왔어요?”“난 왜 강운 씨를 구한 거죠?”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뱉는 질문이 주강운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힌 채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마음껏 울분을 토해낸 한현진은 목이 쉬도록 울어버렸다. 점차 잦아들던 한현진의 울음소리가 멈추자 주강운은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내려가요. 내일도 쓰고 싶으면 저와 같이 와요.”“아뇨.”한현진이 짐을 정리하며 고개를 숙인 채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서 기다릴 거예요.”그러더니 가방을 들고 몸을 일으켜 산 아래로 향했다. 주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현진을 뒤따랐다. 잔도를 지나며 다리에 힘이 빠진 한현진이 휘청거리자 주강운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긴장한 채 한현진을 잡았다. “괜찮아요?”한현진은 그의 손을 떼어냈다. “괜찮아요.”한현진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잔도를 지나고 한현진의 눈앞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주강운이 뭔가 얘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한현진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휘청휘청 어둠 속으로 빠져버렸다…산꼭대기에서 돌아온 한현진은 바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주강운은 한현진을 데리고 진료소로 향했다. 그러나 진료소의
한현진은 강아지가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주위엔 온통 신문이 붙여진 벽이 보였다. 머리 위엔 옛날식 전구가 보였는데 하도 오래되어 유리가 거뭇거뭇해져 있었다. 주변엔 전부 낡은 골동품들뿐이었다. 한현진이 덮고 있던 이불은 새로 만든 것인 듯 폭신폭신하면서 따뜻했고 햇빛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었다. 순간 한현진은 자신이 어느 소설의 여자 주인공처럼 8, 90년대로 타임슬립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강한서 역시 이 시대로 타임슬립 되지 않았을까?’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한현진의 상상을 완전히 깨뜨렸다. 그녀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열은 내렸지만 한 번 아프고 나니 한현진은 수척해졌다. 몸은 여전히 축 처진 듯 기운이 없었고 저녁 내내 고열에 시달렸던 탓에 온몸이 끈적끈적했다. 게다가 며칠 전까지 산에서 지냈었기에 불쾌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방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한 바퀴 둘러보던 한현진은 옷을 여미며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자 한현진은 자기가 있었던 곳이 옛날식 기와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그녀가 잔 곳은 안방이었고 동서 양쪽으로 사랑채가 있었다. 마당에는 검은색 강아지 한 마리가 길가의 사람을 향해 짖고 있었다. 마당엔 큰 대문도 없었고 문 어구의 동쪽엔 산사나무가 심겨 있었다. 마침 겨울이라 잎은 졌고 산사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어 예쁘기도 쓸쓸하기도 했다. 한현진은 어렴풋이 어렸을 적 이 산사나무 아래에서 산사를 따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뒤에서 누군가 멍하니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깼어요?”한현진이 몸이 돌리니 그곳엔 낡은 코트를 걸치고 있는 주강운이 서쪽 사랑채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주강운은 한현진이 자기가 입고 있는 낡은 코트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웃으며 설명했다. “할아버님께서 제가 너무 얇게 입었다고 굳이 옷을 꺼내주셨는데 따뜻하네요.”한현진은 주강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요?”
한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럼 넌 돌아가. 어차피 널 부른 적도 없잖아.”말문이 턱 막힌 강한서는 결국 코웃음쳤다. “넌 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난 그저 사람들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나올까 봐 그런 거야.”‘입만 살아서는. 이러니 할아버지가 괜히 괴롭히시지.’주강운이 끝내 손을 대지 못하자 어르신은 어쩔 수 없이 이웃집 젊은이에게 도움을 구했다. 가위질 한 번에 하나씩, 이웃은 깔끔하게 십여 마리 새끼 돼지의 꼬리 자르기를 끝냈다. 주강운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지막이 물었다. “저러면... 안 아파요?”어르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면 얘들에게 물어보지 그래?”“...”어르신은 말하며 제일 토실토실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잡아 흥미진진한 태도로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아, 이놈 어떠냐? 아니면 네가 직접 골라봐. 네 마음에 드는 놈으로 할아버지가 잡아주마.”뒷덜미가 잡힌 새끼 돼지는 뒷발을 차며 마구 울어댔다. 한현진은 손을 뻗어 어르신 손에서 돼지를 구해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기는 먹고 싶지 않아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서 구워주셨던 고구마가 먹고 싶어요.”어르신은 입이 귀에 걸릴 듯 웃었다. “그건 쉽지. 할아버지가 얼른 불을 피워 구워주마.”그러더니 주강운을 보며 말했다. “자네는 현진이를 씻는 데로 데려다주게. 돌아오는 길에 장작 좀 패고.”알겠다고 대답한 주강운이 일어서며 한현진에게 말했다.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정부에서 어르신들이 지내실 집을 지어주었지만 어르신과 마을의 다른 분들도 이미 자신의 기와집에서 사는 것에 적응되어 아파트를 오히려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니 아직도 이사를 가지 않고 이곳에 지내시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마련해 준 집에 샤워실은 물론 물, 난방, 전기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한현진이 씻고 나오자 주강운은 통화 중이었다. 한현진이 나오자 주강운은 스피커를 감싸며 말했다. “민준이 전화예요. 받을래요? 받고 싶지 않으면 제가 얘기할게요.
한현진이 멈칫하더니 곧 고개를 숙였다. 침묵을 지키던 한현진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운 씨, 한서는 강운 씨를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했어요. 저도 그렇고요.”“알아요.”주강운이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한 번도 감히 한서를 대신하겠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요. 전 단지 현진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는 것 뿐이에요.”“그럴게요.”한현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강한서는 제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걸 제가 아니까요.”주강운은 가볍게 전화를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호촌의 생활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몇 년 전, 정부에서는 유호촌에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적지 않은 땅을 점용했다. 그 덕에 많은 주민들이 재개발 보상금을 지원받았고 조금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유호촌에는 그렇다 할 산업도 없고 교육도 따라가지 못해 젊은이를 유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르신 집에 예쁘고 기품 있는 젊은이 두 명이 왔다는 소식은 곧 마을 사돈의 팔촌까지 알게 되었다. 작은 마을의 좋은 점은 바로 집마다 모두 가깝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루 사이 십수 명의 “친척”들이 물건을 주러 왔다거나 지나가다 들렀다는 핑계로 구경하러 왔다. 어르신은 마을에서 꽤 유명한 분이었다. 젊었을 적에 요리사였던 그는 마을에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불려 갔다. 이웃집 할머니는 어르신의 요리가 너무 맛있어 그릇까지 핥아먹을 정도라 설거지할 필요도 없다고 묘사했다. 나중엔 나이가 들어 직접 요리할 수는 없었지만 어르신은 자신이 직접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어느 집 돼지가 살이 찌지 않거나 강아지가 배탈 나거나 혹은 소의 배에 가스가 차면 치료하기도 했다. 다만 어르신은 자신은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 지식이라는 걸 알기에 한 번도 돈을 받지 않았고 그저 병을 보이러 오면 조금 도움을 주거나 얼른 시내로 보내곤 했다. 유상수의 일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은 마치 모르는 일인 듯 아무도 그 일을 입 밖
어르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얘기했다. “그럼 장미 담배 좀 사다 주게.”주강운은 그런 담배 브랜드는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대답했다. “알겠어요.”외투를 집어 든 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 씨는 뭐 필요한 거 없어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한현진은 정중한 말투로 거리를 두듯 말했다. 주강운은 조금 서운한 눈빛을 띠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네.”한현진이 대답했다. 주강운이 가자 어르신은 그제야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그만하고 여기 할아버지 옆에 와서 앉으렴.”한현진이 손을 닦으며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어르신에게 다가갔다. 어르신이 옆의 문지방을 툭툭 털었다. “자, 앉아.”한현진은 어르신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서 그 자식에게 무슨 일 있는 거냐? 너희 싸웠어?”한현진은 어르신이 유상수의 일에 대해 물을 줄 알았다. 강한서에 대해 물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오고부터 한현진은 줄곧 마음을 잘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어르신의 관심어린 질문에 그녀는 갑자기 완전히 무너지며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정도 연세가 되니 어르신은 이제 눈치가 백단이었다. 주강운이 열이 펄펄 끓는 한현진을 데리고 왔을 때 어르신은 이미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르신이 손을 뻗어 다정하게 한현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 거라. 울어야 속이 시원해지지.”그러나 한현진은 너무 오래 울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 내일이면 돌아갈 거예요. 한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제가 한서 대신 한서가 피땀 흘려 이룬 회사와 가족을 지켜야 해요. 여기 너무 오래 있을 수 없어요.”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 “내일 할아버지가 데려다주마.”한현진이 고개를 숙이고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대답했다. “할아버지, 전 유
어르신은 글도 몰랐고 편지도 쓸 수 없어서 입대 후 증조할머니와는 3년 동안 연락이 끊겼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이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사람처럼 곧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르신은 중매인을 통해 증조할머니에게 청혼했고 곧 결혼 날짜를 잡게 되었다. 두 분은 곧 생길 새로운 가족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기대로 부푼 나날 속 불행이 들이닥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마을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행 후 살해했다. 6개월 사이 네 건의 인명 사건이 일어나 순식간에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여자, 특히 젊은 여자가 있는 집에선 감히 여자 혼자 집밖에 내보내지도 못했다. 당시 방직공장에 근무하셨던 증조할머니는 어르신이 매일 출퇴근을 함께 해줬다. 결혼식이 다가오자 증조할머니 집안에서 갑자기 말을 바꿔 예물을 더 많이 달라고 했다. 알고 보니 증조할머니의 동생이 어느 집 규수를 마음에 품었는데 여자 쪽에서 예물을 많이 요구했고 도무지 그것을 마련할 방법이 없자 증조할머니 댁에서는 말을 바꿨던 것이다. 그 일로 증조할머니는 창피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온순하기만 했던 증조할머니는 가족들과 대판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결혼은 여자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르신이 요구에 맞춰 예물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증조할머니 댁에서는 곧바로 새로운 혼처를 알아보고 더 많은 예물을 주겠다는 집에 시집보낼 수도 있었다. 물론 어르신도 화가 났지만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그 집안 사람들이 증조할머니를 불구덩이로 밀어버리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새집을 장만하면서 남은 돈이 많지 않았고 여기저기 돈을 빌렸지만 그래도 조금 부족했다. 당시 어르신이 계시던 현에는
그러나 그 사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증조할머니는 사건의 범인을 지목해 존경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날 수모를 당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이 주변 사람에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증조할머니가 죽지 않은 이유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범인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며 전에 죽은 여인들처럼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공장 동료들마저도 증조할머니가 멋 부리기를 좋아했던 탓에 범인의 범죄 대상이 된 것이라며 전부 증조할머니가 흘리고 다닌 탓이라고 얘기했다. 여성의 정조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대에 피해자는 그렇게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 증조할머니의 가족들도 그녀를 창피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물을 더 많이 요구하려고 하더니 사건이 터진 후 어르신이 증조할머니를 싫어하기라도 할까 봐 자진해 그렇게 많은 예물은 필요 없다고 얘기했다. 올곧은 성격의 증조할머니는 그런 억울함을 견딜 수가 없어 홧김에 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제때 증조할머니를 구조했다. 증조할머니는 어르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에 먼저 파혼을 요구했다. 그런 모습에 어르신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계기로 마을 사람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똑똑히 알게 된 어르신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증조할머니를 데리고 고향을 영원히 떠나 그곳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유호촌에 정착했다. 두 분이 결혼한 후 어르신도 취직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2개월 후, 증조할머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어르신의 아이가 아니었다. 증조할머니는 아이를 지우려고 했지만 먹고 사는 것부터가 문제였던 그 시절에 병원에 갈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르신은 아이를 낳자고 했지만 증조할머니는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어르신 몰래 온갖 방법으로 자기 몸을 괴롭히고 심지어 깨진 도자기 물을 마시는 민간요법을 시도해 보려고도 했다. 다행히 어르신이 발견해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한현진은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배려할 줄 알았기에 어르신은 그녀를 특별히 아꼈다. 그 사랑은 처음부터 혈연관계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어르신은 한현진이 유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어르신은 강한서의 세심한 모습에 그가 다르게 보였다. 강한서는 단 한 번도 한현진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어르신을 마주해야 할까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 강한서는 이미 묵묵히 그녀를 위해 길을 닦아주고 있었다. 어르신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곧 설이구나.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거야.”벽에 기대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강운도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엔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주강운과 한현진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사실 정리할 물건도 별로 없었다. 애초부터 가져온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리할 거라곤 어르신이 준비해 주신 특산품이 전부였다. 아마 한현진과 강한서에게 오라고 했을 때부터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호두, 곶감, 배와 직접 만든 육포 그리고 말린 자연산 버섯을 비롯해 5kg의 토종란까지. 어르신은 심지어 새끼 돼지 두 마리를 묶더니 두 사람에게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한현진은 산처럼 쌓인 어르신의 감동적인 사랑에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새끼 돼지는 당연히 가져갈 수 없었다. 다른 물건 중에서도 한현진은 몇 가지만 골랐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건 어르신의 정성을 무시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는 길 한현진은 말이 별로 없었다. 주강운은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좀 자요. 도착하면 깨울게요.”한현진은 그 외투를 받지 않았다. “안 졸려요.”주강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젯밤에도 늦게 자고 아침엔 또 그렇게 빨리 일어났으면서 어떻게 안 졸려요? 돌아가면 아직 할 일이 많아요. 미리 자둬요.”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