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잔뜩 신이 나 방을 소개하는 송병천의 말을 들으며 핑크로 도배된 방이 점점 귀엽게 보였다. 인테리어 자체는 유현진의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이 방에는 그녀를 향한 송병천의 사랑으로 가득했다. 송병천이 커튼을 치며 말했다. “이 방은 볕이 잘 들어.”유현진이 통유리 창문 앞에 서자, 더 크고 시야도 좋아 보이는 옆 방의 발코니가 눈에 들어왔다. 유현진의 시선을 느낀 송가람이 입을 열었다. “그 방은 3층 안방이고 제 침실이에요. 그 방은 발코니가 조금 더 커요. 현진 씨가 그 방이 더 좋으면 바꿔요. 다만 그 방은 아빠가 제 취향대로 꾸며준 거라, 현진 씨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유현진이 멈칫했다. “아빠가요? 저도 궁금한데, 가서 봐도 돼요?”송가람이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말했다.“당연하죠.”옆 방에 도착한 유현진은 드디어 송가람 말투에서 느껴지는 우월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송가람의 방은 유현진의 방보다 훨씬 더 컸다. 방에는 책장뿐만 아니라 드레스 룸까지 있었다. 발코니는 심지어 배드민턴을 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방에 있는 모든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들은 한눈에 봐도 공을 들여 하나하나 고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유현진의 얼굴에는 비록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하나하나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송병천이 유현진에게 준 것들도 당연히 송가람 방에 있는 것과 비슷했고 송가람의 방보다 더 공을 들였다. 하지만 송가람은 이미 이 방에서 6개월이 넘게 지냈던 터라 방은 이미 송가람의 개인 물품으로 가득 찼다. 비싼 인테리어 소품과 드레스 룸의 한정판 옷과 가방이 방의 고급스러움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현진 씨, 이 방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면 저희 둘이 바꿔요.”유현진이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그 말에 송병천이 실망했다. 그는 유현진이 방을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송가람의 방은 비록 크긴 하지만 송병천의 손길이 닿은 곳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유현진의 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이
“이것도 마음에 들어요. 아빠, 저랑 가람 언니는 정말 인연이 깊은 것 같아요. 안목까지 똑같잖아요.”송병천이 기뻐하며 말했다. “안 그러면 우리가 왜 가족이겠니.”송가람은 오붓한 부녀 사이를 보며 마음이 저렸다. 그녀의 방에 있는 인테리어 소품들은 송가람이 많은 돈을 들인 것은 물론 인맥을 총동원해 귀국하는 친구를 통해 어렵게 구한 것들이었다. 몇 년간 겨우 30개 정도밖에 모으지 못했다. 그러나 유현진은 단번에 절반 이상을 가져갔다. 송가람은 유현진이 말하는 “안목이 비슷하다”는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번득 생일 파티에서 팔찌를 보며 유현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송가람이 유현진에게 말했었다. “저희는 취향이 비슷한 것 같네요.”유현진이 자꾸 그 말을 하는 건, 아마 고의인 것 같았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유현진 덕에, 텅 빈손으로 송가람의 방을 들어왔던 유현진과 송민준은 두 손 무겁게 송가람의 방을 나섰다. 심지어 송병천의 손에도 2개가 들려있었다. 송병천은 심지어 유현진이 들지 못할까 봐 송가람 방에 걸려있던 에코백을 들고 송가람에게 물었다. “가람아, 현진이 물건 담게 이거 좀 쓸게.”고개를 돌려 가방을 확인하니, 모 브랜드의 신상에 심지어 아직 한 번도 들고 나간 적이 없는 가방이었다. 송가람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빠, 제가 봉투 드릴게요.”송병천은 이미 그 가방에 물건을 담고 있었다. “봉투는 쉽게 찢어지잖니. 떨어뜨려 깨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아까워.”그러더니 송병천이 유현진을 향해 말했다. “현진아, 여기. 여기 담아서 조심히 가져가.”유현진은 마치 그게 어떤 가방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물건들을 와르르 쏟아 넣으며 칭찬했다. “언니 이 가방 진짜 많이 넣을 수 있어요.”송가람은 아직 자신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명품백이 유현진에 의해 쇼핑백처럼 사용되는 걸 보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서해금은 빨갛게 달아오르는 송가람의 눈을 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현진아, 이젠 집에서 지낼 텐데, 그
유현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람 시켜서 정리 좀 해두라고 하세요. 계속 청소가 되어있지 않으면 오빠가 집에서 지내고 싶어도 방이 없잖아요. 오빠가 자고 가겠다고 해야 청소할 수는 없으니까요. 손님도 아니고 집에 방이 없다뇨.”송병천은 전엔 그 문제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송민준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셌다. 성인이 되자 함께 살고 싶지 않아 했고 송병천도 여러 번 말했지만 말을 듣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 하지만 유현진이 그 말을 꺼내니, 송병천은 유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강아지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개집 정도는 마련해줘야 했다. 게다가 나중에 결혼할 여자가 생기면 집으로 데려와 소개도 받아야 할 텐데, 며느리가 집에 와서야 방을 정리한다면 괜히 자기가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송병천이 고개를 돌려 서해금에게 말했다. “현진이 말에 일리가 있어. 나중에 도우미에게 민준이 방 정리 좀 하라고 해. 매일 청소도 좀 하고. 민준이가 집에 오든 아니든, 방은 깨끗해야지.”서해금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시선을 떨군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제가 말해둘게요.”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사모님. 식사하세요.”송병천이 유현진을 이끌며 말했다. “현진아, 내려가서 밥부터 먹자. 식사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아빠에게 말하렴.”유현진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부녀가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송민준이 그 뒤를 따르려는데 송가람이 그를 불러세웠다. “오빠도 집에 자주 와. 나도 오빠 보고 싶어.”“그래.”짧게 대답한 송민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옷 갈아입고 내려와서 밥 먹어.”송민준이 내려가자, 송가람의 얼굴이 그제야 어두워졌다. “유씨 집안에서 저따위로 교육했는데, 아빠와 오빠는 대체 왜 쟬 좋아하는 거야?”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쟨 네 아빠 친딸이야. 그저 진흙 덩어리일 뿐이
서해금이 말했다. “가람이도 입원하고 회사도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며칠 미뤘어요.”그러더니 유현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현진이가 급해서 먼저 얘기를 꺼냈네.”서해금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유현진도 씩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저도 급한 건 아니에요. 서 여사님이 하도 바쁘셔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고, 저도 촬영팀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달려가야 해서 시간 내기가 어렵거든요. 오늘 겨우 휴가받은 거라, 바로 일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른을 계속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젓가락을 쥔 서해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현진을 보는 그녀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있었다. “현진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밥 먹고 조금 쉬다가 가자.”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서해금이 따뜻하게 말했다. “가족끼리 그런 얘기는 안 해도 돼.”유현진이 웃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참는 연습을 하는 게 분명해.’‘이렇게까지 기어오르는데 화도 내지 않고 참다니.’만약 다른 사람이 감히 이렇게 대놓고 자신에게 엿을 먹인다면, 유현진은 아마 눈앞에 있는 해물탕을 그 사람 머리에 쏟아버렸을 것이다. 이 여자는 겉으로는 따뜻한 척 착한 척하지만 사실은 방 하나도 송민준에게 내어주기를 꺼렸다. 이렇게까지 송민준 유현진 남매를 견제하는 건, 설마 송가람 몫의 재산을 뺏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건가?식사를 마치고 유현진이 송병천과 장기를 뒀다. 잠시 후 서해금이 먼저 변경 절차를 마무리하러 가자고 하자 송민준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 차로 가시죠. 절차가 마무리되면 어차피 제가 현진이를 집까지 데려다줘야 하니까요.”멈칫하던 서해금은 송민준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현진은 바로 송가람 방에서 털어 온 비싼 인테리어 소품들을 들고 차에 올라탔다. 경영권 변경은 수속 절차가 조금 번거로웠다. 하지만 돈을 버는 일이라면 유현진은 전혀 번거롭다고
‘내 동생이 날 걱정하네.’그런 생각은 고작 십여 분 동안만 유지되었다. 송민준이 운전한 차가 한성 그룹을 지나칠 때, 유현진은 자신을 내려달라고 했다. 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퇴근 시간에 여긴 왜?”“오늘 야근이거든요.”유현진이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손에는 송가람 방에서 털어 온 물건을 들고 고개를 돌렸다. “강한서 사무실에 몇 개 놓고 올게요. 걔 사무실은 너무 단조롭거든요.”송민준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내 사무실에 놓을 생각은 안 한 거야?”유현진이 말했다. “오빠 사무실에 뒀다가 가람 언니가 보고 다시 가져가면 어떡해요? 가람 언니는 오빠 동생이기도 하잖아요. 같이 자라기도 했고. 달라고 하면 안 줄 수 있어요?”“...”만약 유현진이 사준 물건이라면 당연히 송가람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물건들은 유현진이 “부당한” 수단으로 뺏어 온 것이니 돌려달라는 송가람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래도 불쾌해!’‘방금까지 날 걱정해 줘서 감동이었는데, 현진이 마음속엔 돈 말고도 강한서 그 자식이 있잖아!’송민준은 마음이 아파졌다. ‘애초부터 조금 더 고집을 썼어야 했어. 그렇게 빨리 허락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유현진이 차 문을 열고 송민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빠, 운전 조심해요. 갈게요.”말을 마친 유현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성 그룹으로 들어갔다. 송민준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살가운 동생은 무슨! 팔이 밖으로 굽는 동생이잖아.’강한서가 준 VIP 카드로 유현진은 쉽게 회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카드를 확인한 경비가 유현진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탄 유현진이 강한서 사무실이 있는 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멈춰 섰다. 유현진이 멈칫했다. 이 엘리베이터는 고층에서만 멈추도록 설정되어 있던 터라 이 시간에 엘리베이터가 다른 층에서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러니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던 유현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개를 들
강현우는 유현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현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 “사무실에 거울 없으면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오면서라도 거울 좀 봐요. 그쪽이 강한서와 닮은 곳이라곤 성별밖에 없으니까. 강한서가 그쪽처럼 생겼으면 전 쳐다도 보지 않았을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유현진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강현우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기분 좋게 왔는데 괜히 저 개자식을 만나서 기분 다 망쳤잖아.’엘리베이터 안의 강현우는 굳은 얼굴로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유현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기술팀에서 야근 중이었고 유현진은 익숙하게 그의 사무실에 강한서를 기다렸다.유현진은 가방을 열어 송가람 방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그중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두 개 골랐다. 그녀는 그것을 사무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내려놓고 강한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강한서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은 인테리어 소품을 쿡쿡 찌르고 있는 여자친구를 발견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공허하던 눈동자가 순간 반짝거렸다. “얼른 와. 선물 있어.”멈칫하던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사무실 문을 잠갔다.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 “문은 왜 잠가?”강한서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셔츠의 단추고 풀며 고개를 들었다. “선물 준다며?”유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자식이! 누가 그런 선물이래? 난 이거 말하는 거야.”테이블에 놓인 물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와서 봐.”가까이 다가온 강한서는 유현진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유현진은 잔뜩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다른 건 다 별로인데, 이 두 개는 꽤 괜찮아. 네 책장에 두면 딱일 것 같은데, 마음에 들어?”유현진이 말한 물건을 확인하던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디서 가져온 거야?”유현진은 그제야 오늘 본가에서 있었던 일을 강한서에게 말해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강한서의 눈이 씰룩거렸다. “송가람
‘아니면 새로운 상황극인가?’강한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유현진에게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현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녀의 말투를 따라 했다. “갑자기 차는 왜? 내가 잘 모셔줘서 보너스라도 챙겨주려는 거야?”“...”‘왜 어디서 들어 본 말 같지?’강한서의 말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현진이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대체 누가 누굴 모셨다는 거야? 넌 가만히 누워서 움직이기나 했어?”말을 내뱉은 유현진의 머릿속에 드디어 번뜩 뭔가가 떠올랐다. ‘이건 강한서가 어떤 목걸이가 갖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가 했던 대사잖아.’유현진의 말에 강한서는 멍해졌다. 아마 유현진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강한서는 당연히 당시 유현진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멈칫거리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 신음 소리는 진심이지 않을까?”“...”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다. 유현진은 애초의 대사를 바꿔 속삭였다. “그럼 신음 소리 좀 내봐. 들어보게.”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민경하가 그 말을 듣고 움찔하더니 손에 들린 서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민경하가 헛기침하더니 뻘쭘함을 무릅쓰고 나지막이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유현진이 이를 악물고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문 잠근 거 아니었어?”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장난이었어.”일부러 유현진을 놀리려고 문을 잠그는 척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현진이 정말 문을 잠갔다고 믿었을 줄이야. 차라리 문을 잠갔어야 했다. 민경하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정리하고 막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강한서가 말했다. “들어와요. 먼저 일부터 하죠.”민경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사무실로 들어왔다. 유현진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강한서와 민경하는 유현진이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잔뜩 흥분된 민경하의 말투에서 유현진도 조금 눈치챘다. 강한서의 연구개발팀은 아마 어떤 기술의 새로운
유현진이 돌아본 곳은 텅 비어있었고 아무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사람은 없었지만 유현진은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누군가 몰래 지켜보고 있는 그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설마 파파라치?’ 촬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 인기도 이제 한풀 죽어가고 있었다. 비록 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그 정도로 뜬 건 아니었다. 파파라치도 그녀를 따라다니다간 굶어 죽을지도 몰랐다. 생각에 잠겨 있는 유현진 앞으로 강한서의 차가 멈춰 섰다. “타.”생각을 멈춘 유현진이 먼저 차에 올라탔다. 유현진은 차에 타서도 계속 창밖을 관찰했다. 차가 주차장을 벗어나서야 강한서가 물었다.“뭘 보는 거야?”유현진이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아까 너 기다릴 때 주변에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거든. 하지만 사람이 안 보였어.”멈칫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민 실장에게 CCTV 확인하라고 할게.”유현진은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난 네가 내가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할 줄 알았는데.”강한서는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나도 네가 예민하게 생각한 거였으면 좋겠어.”아무래도 그편이 스토킹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무나 한성 그룹을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강한서도 100% 장담할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조심하는 편이 나았다. 강한서는 유현진을 한 별장으로 향했다. 유현진은 강한서가 밥 먹는 김에 친구라도 만나려는 건 줄 알았는데 별장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은 개인 밥집이었다. 조용한 환경이라 사생활이 보장되었다. 특히나 음식이 너무 맛있는 곳이었다. 식사를 하며 강한서가 물었다. “이름은 변경했어?”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머니 성을 따르기로 했어.”강한서가 멈칫했다. “아저씨가 동의하셨어?”유현진이 말했다. “아빠가 먼저 얘기 꺼내셨어. 어머니와 전부터 얘기하셨던 거라고.”딸바보인 송병천이 유현진이 한씨 성으로 따르도록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