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수에게 아들은 돈보다 중요했고 돈은 딸보다 중요했다. 그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유현아의 처지를 매정한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내가 왜 있지도 않은 부성애에 목을 매야 해?’유현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그렇다고 최연서를 100% 믿을 수는 없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목적이 뭐야? 내가 왜 널 믿어야 하는데?”그 말을 들은 최연서는 유현아가 거의 넘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전혀 목적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랬다면 저도 이 문 열어드리지 않았을 거예요.”최연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유현아 씨에게 증거를 보내드릴게요. 유상수의 재산을 상속하시면 저에게 집 한 채와 10억을 주세요. 어때요?”유현아가 냉소 지었다. “본인이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최연서가 태연하게 웃었다. “유상수에게 들었는데 회사는 2000억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200억 정도는 되겠죠. 게다가 부동산도 여러 개 있으니 제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만약 유현아 씨가 그 정도도 아깝다고 생각하시면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을 것 같네요.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최연서가 말을 이었다. “현관에는 CCTV가 많아요.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유현아 씨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거예요.”유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X이 감히 날 협박해?’하지만 최연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혜주가 바람이 나서 유서훈을 낳기까지 했는데 유상수는 그저 백혜주를 집에서 내쫓았을 뿐 이혼하지는 않았다. 만약 두 사람이 협력해 하현주를 살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해가 가능했다. 함께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헤어지게 되면 당연히 상대방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심보로 자백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백혜주가 감옥에 가면 유상수는 아마 더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유상수의 말에 현장에 있던 경찰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들은 단지 신고를 받고 조사를 진행하려던 참이었다.‘아직 아무런 심문도 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흥분한 거야?’볼수록 의심스러웠다.경찰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맞든 아니든 저희가 다 조사할 겁니다. 그러니 함께 서로 가시죠.”그렇게, 유상수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경찰에게 끌려갔다.병원.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의사가 최연서 목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가느다란 목에 몇 개의 바늘 자국이 더 생겨 유독 눈에 띄었다.유현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사에게 부탁했다.“치료 잘 부탁드릴게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괜찮아요. 최대한 흉터가 안 남게 해주세요.”의사가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상처가 너무 깊지는 않아 시간이 지나면 흉터가 거의 티 나지 않을 거예요.”최연서가 말했다.“흉터 생겨도 괜찮아요. 전 카메라 앞에 서지 않으니까요.”유현진이 말했다.“여자라면 아무도 몸에 흉터가 남는 걸 원하지 않아요.”그 말에 최연서는 조금 감동한 것 같았다.의사가 자리를 비우자 유현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너무 충동적이었어요. 유현아가 멍청한 데다 욕심이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만약 끝까지 연서 씨 말을 믿지 않고 연서 씨를 데리고 유상수를 찾았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최연서가 나지막이 말했다.“유현아의 욕망에 도박 한 번 걸어본 거죠. 게다가 전 예약 문자까지 설정해 둬서 만약 제가 연락이 안되면 동생이 바로 신고할 거예요. 기껏해야 제가 개고생 좀 했겠네요. 하지만 현진 씨를 도와 그 인간들을 감옥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너무 위험했다고요.”유현진은 그저 돈을 조금 썼을 뿐이다. 이 정도로 큰 리스크까지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그러나 최연서는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현진 씨에게는 그저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는 작은
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나 열심히 촬영해서 상도 많이 받고 제일 돈 잘 버는 배우가 될게. 나중에 우리가 결혼하면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집에서 집안일만 해도 내가 너 먹여 살릴 수 있어.”“...”강한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그게 네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집에서 집안일이나 하라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너만 할 수 있을 거야.’유현진은 손을 뻗어 강한서의 볼을 꼬집었다.“어쩔 수 없잖아. 네가 밖에서 다니면 여자들이 너무 꼬여. 아무래도 숨기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강한서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정도 돈을 벌어서는 나 먹여 살리기 힘들걸.”유현진이 눈을 깜박였다.“그래? 우리가 결혼했던 그 몇 년 동안, 넌 돈도 별로 안 썼던 것 같은데. 내가 너에게 사준 옷들, 옷장 하나 다 합쳐도 내 가방보다 쌀 걸?”“...”“넌 대체 무슨 염치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유현진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내가 너에게 싸구려를 사준 걸 알면서도 왜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거야?”강한서가 입을 삐죽였다.“내가 널 몰라? 내가 조금만 안 좋게 말하면 넌 영원히 뭘 사주지 않을 거잖아. 다시는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던 것처럼. 사주기라도 하니 다행인 거지, 또 뭘 고르기까지 하겠어.”유현진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그녀는 단 한 번도 강한서가 그런 마음으로 자신이 사준 옷에 까다롭게 굴지 않은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사실 그게 전부의 이유는 아니었다.유현진이 산 옷들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할 때 입을 수는 없었지만 평소에 입고 다니기에는 충분했다.그녀가 산 옷들은 전부 가성비가 높았고 편하기도 했다. 유현진은 꽤 세심한 편이라 강한서가 자주 입는 옷을 기억해 그가 어떤 브랜드와 스타일 그리고 옷감을 좋아하는지 판단했다.강한서는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유현진의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유현진이 남들은 모르는 작인 디테일까지 캐치할 정도로 자기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가자
김수철이 말했다.“그건 몇 년 전 상황이었겠죠? 그때 현진 씨 몸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전 알 수 없지만 지금 상태로 정말 임신이 된다면 관리만 잘하면 아마 큰 문제 없을 거예요.”그러더니 김수철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임신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습관성 유산이거나 선천적으로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면, 일단 임신에 성공했고 관리도 잘 받는다면 그렇게 쉽게 유산되지 않아요. 현진 씨 워낙 건강한 체질이고 몇 달간 열심히 관리도 받았으니 그렇게 피임하실 필요는 없어요.”강한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꽉 짓누르고 있던 큰 돌덩이가 드디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김수철이 유현진의 건강을 회복시켜 줄 새로운 처방을 내리며 몇 마디 더 당부했다. 강한서는 학교에서 제일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 같았다. 당장이라도 연필로 선생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노트에 적고 달달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열정적이었다.유현진은 김수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강한서를 향해 있었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고 강한서를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유현진의 불임에 강한서는 그녀보다 더 마음 졸였다.아이가 없을까 봐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라, 불임이 유현진이 결국 자신을 떠나는 이유가 되어버릴까 무서웠다.사실 강한서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유현진은 그의 생각처럼 그렇게 관대한 사람은 아니었다.유현진은 자신이 이제껏 길들인 애인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넓은 아량은 없었다.말을 마친 김수철이 또 강한서에게 말했다.“대표님도 시간 내셔서 얼른 수술하세요. 순리에 따르다 보면 또 뜻밖의 서프라이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알겠다고 대답한 강한서가 진료실을 나서려는데 유현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넌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난 교수님께 물어볼 게 있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뭘 물으려고? 난 들으면 안 돼?”유현진이 그를 노려보았다.“산부인과에서 네가 들을 말이 뭐가 있어? 나가, 나가.”그러더니 유현진은
유현진은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일단 처방은 가졌으니 차미주가 물어보면 바로 가져다줄 수 있었다.물론 가까이에서 차미주와 한성우의 일을 구경할 수도 있어서 일석이조였다.진료실을 나서기 전, 유현진은 또 한 가지 일을 떠올리고 김수철에서 물었다.“교수님, 술을 마셨을 때 안 서는 건 그것도 병인가요?”김수철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대부분 사람은 술 마시면 원래 잘 안 돼요. 된다는 건 완전히 취하지 않았다는 거겠죠.”유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병이 아니면 됐어.’강한서가 한참을 기다려서야 유현진이 나왔다.그는 유현진에게 다가가 물었다.“다 물어봤어?”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뭐 물어봤어?”유현진이 가방을 꼭 쥐며 말했다.“너무 궁금해하지 마.”강한서는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말했다.“어쩐지 찔려하는 거 같은데?”“...”유현진은 찔리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고역이었다.그녀는 강한서와 한성우의 일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아냈다.‘됐어. 성우 씨에게 마지막 자존심은 남겨줘야지.’강한서는 유현진을 촬영장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돌아갔다.회사에 거의 도착했을 때 휴대폰이 울려 확인하니 김수철의 전화였다.당부할 것이 또 있는 줄 알고 강한서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교수님.”김수철이 말했다.“대표님, 현진 씨 좀 바꿔주시겠어요? 처방을 잘못 적어줘서요.”강한서가 말했다.“저한테 말씀하시면 전해줄게요.”김수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그럼 현진 씨 전화번호 좀 보내주세요.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현진 씨가 대표님이 아시는 걸 원하지 않으셔서요.”김수철의 말이 오히려 강한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나에게까지 숨기고 비밀스럽게 구는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기더니 말했다.“교수님. 현진이 혹시 다른 증상도 있는 건가요? 숨기지 마시고 전부 말씀해 주세요. 제가 감당할 수 있어요.”“..
“현진 씨에게 음식으로 보신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개 적어드렸어요. 한동안 드셔보시고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다시 진찰하러 오시죠. 검사를 받아야 정확한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요.”말을 마친 김수철은 유현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강한서를 위로했다.“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은 직장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이런 증상을 겪는 분들이 꽤 있어요. 너무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제때 진료를 받아야 건강한 아이도 갖죠.”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 교수님 말씀대로 하죠.”민경하는 핸들을 꽉 움켜쥐고 전방을 주시했다.강한서가 너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대표님은 건강하시니, 사모님께서 받은 처방은 절대 대표님을 위한 것이 아닐 거야.’‘대체 어떤 사이길래 사모님께서 저런 처방을 대신 받아주신 거지?’민경하가 몰래 강한서의 표정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아기든 뭐든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질투에 사로잡힌 다 큰 어른 아이의 분노가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사모님, 꼭 살아남으세요.’유현진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오늘 그녀는 신하리와 첫 촬영이었다. 전에 송민영과 촬영했었던 장면이었다. 전반 촬영에서 대화가 제일 많은 신이라 연기력이 많이 필요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당시 송민영과 촬영할 때, 유현진의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송민영은 연기력이 별로라 유현진과의 합이 잘 맞지 않았다. 게다가 긴 대사에 송민영은 실수를 연발했고 결국 대사를 많이 삭제하고 나서야 겨우 오케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촬영본도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신하리로 배우를 바꾼 후, 안창수는 다시 원래대로 대본을 수정했다. 그리고 스태프를 총동원해 원테이크 촬영을 시작했다.유현진은 사실 신하리와의 촬영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촬영은 상대 연기자의 연기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좋은 시너지를 냈다. 그리고 좋은 상대 배우를 만나야 본인의 연기력도 늘 수 있었다.그리고 현장은 유
신하리는 화장을 고치면서 계속 유현진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곧 긴장이 풀리는 유현진을 보며 중얼거렸다.“꽤 하네.”매니저가 얼른 신하리 앞에 서서 유현진에게로 향한 시선을 가로막으며 경고했다.“연기에나 집중해. 딴생각하지 말고.”“...”“현진 씨에게 관심 없거든?”신하리가 매니저를 노려보았다.“조금 의외라서 그래. 내 연기를 받다니.”전해지는 소문만 듣고 신하리 역시 강한서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여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했다.‘저게 어딜 봐서 온실 속 화초라는 거야. 강한서에게 가려진 보물이었구먼.’이때, 한열이 신하리 옆을 지나쳤다. 신하리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리를 내밀었다.역시나 한열은 예외 없이 신하리의 다리에 걸렸고 하마터면 멍청한 모습으로 넘어질 뻔했다.“하하하하하하...”신하리가 소리 내 크게 웃었다.한열이 똑바로 일어선 뒤,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신하리를 노려보았다.“미쳤어요?”신하리가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네가 길도 제대로 보지 않고는 왜 내 탓이야? 너 때문에 다리가 부딪혀서 아프잖아.”그러더니 새하얀 다리를 내밀어 보여주며 입꼬리를 씩 올려 한열을 놀렸다.“설마 누나 다리가 예뻐서 일부러 부딪힌 거야?”한열이 실소를 터뜨렸다.“해골 위에 가죽을 씌운 게 뭐가 예쁘다는 거예요? 제 눈이 그 정도로 낮진 않거든요?”신하리가 멈칫하더니 일어나 한열 앞에 섰다.“누가 가죽 씌운 해골이라는 거야?”한열은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신하리 씨요.”신하리가 입술을 짓이기더니 갑자기 한열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가슴 위에 올렸다. 그녀의 빨간 입술이 위로 씩 올라가더니 천천히 열렸다.“말해 봐. 살이 만져지는지 아니면 해골인지?”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느낌에 한열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는 매너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신하리를 밀어내며 씩씩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한열이 한참 만에야 이를 악물고 말했다.“부끄러운 줄도 몰라요?”다행히 실내라 팬들이
유현진이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 수프를, 다른 한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찌나 집중했던지 뒤에 사람이 온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돌솥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한약 냄새는 바로 그 돌솥에서 풍겨오는 것이었다.‘심지어 집에 가져와서 끓이다니.’‘직접 다려서 가져다주려는 거야?’강한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유현진 뒤에 다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턱을 유현진의 어깨에 내려놓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뭐 끓이는 거야?”깜짝 놀랐던 유현진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유현진은 원래 처방으로 바로 차미주에게 건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만약 차미주가 이 약을 먹고 어떤 반응이 있는지 물어본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먼저 강한서에게 먹여볼 생각이었다.강한서의 반응을 살펴본 뒤 차미주에게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교수님께서 처방을 주셨는데, 기력을 보충하는 거래. 내가 교수님 말씀대로 먼저 끓여봤어. 너 요즘 자주 밤새우고 야근도 많잖아. 다 되면 기력 보충하게 좀 먹어.”“그래.”강한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안에 뭐가 들어간 거야?”유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기력보충에 좋은 약재들이야. 상당, 당귀, 아교... 뭐 그런 거.”강한서는 약재가 담긴 봉투를 보더니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봉투를 들어 안을 확인했다.유현진은 괜히 마음에 찔려 얼른 봉투를 가져갔다.“손 씻었어? 함부로 건드리지 마.”강한서가 말했다.“안엔 뭐야?”유현진이 태연하게 머리를 끄덕였다.“당귀. 최상급 당귀야. 두께 좀 봐.”“...”‘설마 내가 녹용과 당귀를 구분 못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두껍네.”강한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비싸지 않아?”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그의 볼에 입 맞추었다.“네가 건강하기만 한다면 그깟 돈이 대수겠어?”그녀가 자신 몰래 다른 남자를 위해 약 처방을 받은 사실을 몰랐다
한열은 신하리가 그 의사를 회사에서 보낸 사람이라 오해하고 있음에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하리가 그 의사가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서 빛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비도덕적이고,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졌다.상처를 치료하던 중, 한현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녀는 한열의 상황을 걱정하며 계속 라이브 방송을 지켜보다가 하리가 다친 걸 보곤 놀라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자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큰 걱정 안 하셔도 돼요.”한열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같이 응급처치 중이에요.”“넌 다친 데 없지? 진짜 괜찮은 거야?”“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한현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외숙모께서 나한테 전화하셨어. 너 걱정하시느라 많이 물어보시지도 못하고, 나더러 가서 너 좀 보라고 하시더라. 지금 어디야? 강한서랑 같이 갈게.”“아니에요, 누나. 정말 괜찮아요.” 한열은 급히 말을 막았다. 누나는 지금 만삭인데,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전부 감당해야 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과 사촌 형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원래 걱정이 많으신 분이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따로 전화할게요.”하지만 한현진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너희 집 앞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다더라. 오늘 밤 머물 곳은 있니? 없다면 내가 사람을 보낼게. 며칠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어때?”그 순간, 한열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누나, 한주시에 호텔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잘 데가 없을까 봐요?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현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하
한열은 신하리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열애를 인정했을 당시, 신하리는 할 얘기가 있어 한열을 찾아갔고 우연히 그의 가족들과 마주쳤다. 한현진과 송민준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한열과 신하리의 연애가 가짜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 신하리를 만난 그들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기어코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비록 신하리는 한열 앞에선 막무가내였지만 어른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친근한 호칭으로 어른들 마음에 꽃을 피웠다. 심지어 줄곧 연예인을 싫어하던 그의 아버지조차도 눈빛으로 얘기했다. ‘너 이 자식, 어디서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난 거야?’그날 신하리의 모습에 심지어 한열 스스로도 그동안 자신이 너무 복수심 어린 눈빛으로 신하리를 바라보고 있어 너무 극단적으로 사람을 판단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사 자리가 끝난 후 차에 올라탄 신하리가 그에게 물었다. “마마보이인 줄은 몰랐네. 생선도 아주머니께서 일일이 가시를 발라줘야 하다니.”한열이 평생 제일 혐오하는 단어가 바로 마마보이였다. 그 일은 중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아침,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우유를 가져다주면서 시작되었다.그날 아침 한열은 낮잠을 잔 탓에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다급하게 등교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배고플 아들이 걱정되어 일부러 학교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하연희는 160cm로 그리 큰 키는 아니었다. 남편인 한준웅이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아이의 키는 엄마의 유전자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이유로 하연희는 늘 한열이 키가 크지 않을까 걱정이었고 한열을 위해 준비한 식단 중 우유는 언제나 필수였다. 하지만 한열은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고 하연희는 한열이 우유를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번 그가 다 마실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침을 가져다 준 날도 마찬가지였다. 우유를 깨끗하게 비운 한열을 본 하연희는 습관처럼 아들을 품에 안았고 그 모습을 마침 입이 가벼운 친구가 보게 된 것이다.
‘아...’한열은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 미친 여자가 왜 날 좋아해?’문자에 답장하는 신하리를 쳐다보던 한열은 고개를 들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재빨리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에 비춘 심각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멍해진 한열은 순간 어쩌면 신하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씨 가문 유전자가 대단하긴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든 한열이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하고 턱을 살짝 들었다. 신하리 쪽에서 보면 그의 옆라인은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화보를 찍고 수많은 무대에 오르면 그는 자신이 어떤 각도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가장 멋지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자를 마친 신하리는 휴대폰을 한쪽에 놓고 고개를 돌려 한열을 쳐다보았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그를 본 신하리가 멈칫 하더니 물었다. “허리에 줄자라도 넣은 거야? 안 굽혀져?”윤명훈이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열은 윤명훈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그러니 윤명훈에게 한열은 그저 유치한 아이 같았다. 도도한 척 하고 허세를 부리는 건 그 또래 남자아이들에겐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한열처럼 잘생기기까지 한 사람이라면 나르시시즘이 있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윤명훈 역시 신하리처럼 한열에게 불평하고 싶을 때가 있긴 했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한열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하리 씨, 그야말로 용사시네요.’한열이 움찔하며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신하리를 노려보았다. “연예계에 이렇게 오래 몸담고 있으면서 신하리 씨를 때린 사람이 없었어요?”신하리가 전혀 타격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너 대신 맞았잖아.”그 말 한 마디는 또다시 한열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는 입을 꾹 닫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열을 신하리를 데리고 자신의 담당 주치의에게 찾아갔다. 주치의의 이름은 서동훈이었다. 그는 신하리를 데리고 온 한열을 의외라는
한열은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못생긴 표정 연기니, 연예인병이니 하더니 이 미친 여자가 그냥 날 놀리려고 하는 얘기였어.’한열은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신하리의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요리조리 피하던 신하리가 조심하지 않아 뒤통수를 유리에 부딪쳤다. 몰려오는 아픔에 신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한열은 재빨리 휴대폰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하리의 신음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신하리의 휴대폰을 손에 쥔 한열은 창백해진 신하리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신하리가 조금 전 저지른 악행을 떠올리고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장난 좀 그만해요. 제가 또 당할 것 같아요?”신하리는 말없이 티슈로 상처를 꾹 눌렀다. 그녀가 손을 떼자 티슈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한열이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왜 피가 이렇게 많이...”신하리가 상처를 누르며 한열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납게 굴 땐 언제고, 이제야 무서워?”한열: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조용히 좀 해요.”‘이 미친 여자는 아프지도 않은 거야?’한열이 속도를 올리라며 윤명훈을 재촉했다. 심각한 표정의 한열을 본 신하리가 참지 못하고 또 그를 놀렸다. “내가 그렇게 걱정돼?”한열이 신하리를 노려보았다.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요! 전 신하리 씨가 제 차에서 죽을까 봐 이러는 거예요.”신하리가 피식 소리 내 웃었다. 눈을 감은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걱정 마. 원래 나쁜 놈들이 더 오래 사는 법이야. 난 아직 900년쯤은 더 살 수 있어.”나른한 신하리의 모습을 보던 한열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쩐 일인지 신하리의 말에 반박하지 않은 한열은 그저 계속 그녀의 뒤통수를 힐끔거렸다. 그의 눈빛에 담긴 걱정스러운 마음은 쉽게 감춰지지도 않았다. “대체 지울 거야, 말 거야?”신하리가 나지막이 물었다. “안 지울 거면 휴대폰 돌려줘.”생각에 잠겼던 한열이 불퉁하게 말했다. “비밀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지워요.”
“결국 사람들이 혐오하는 건 자격 없는 배우뿐이거든요. 만약 여전히 그걸 모른 채 그저 학력으로 시청자들의 입을 막을 생각이라면 아무리 고학력자라고 해도 시청자의 눈엔 그저 학력만 높은 무능력한 인간일 뿐이에요.”“배우는 아이돌과 달라. 팬들이 널 좋아할지 아닐지는 80%는 네 얼굴에 달렸어. 외모가 마음에 들어야 너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 테니까. 많은 드라마에 아이돌을 캐스팅하는 것도 너희가 잘생겼거나 예쁘기 때문이야. 그래야 팬들의 환상을 만족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배우는 굳이 잘생기거나 예쁠 필요가 없어. 배우는 그저 캐릭터를 위해 있는 사람에 불과하니까. 심지어 어떤 작품에서는 시청자에게 네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을 때도 있어. 하지만 넌 그럼에도 여전히 네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이 널 기억하게 해야 해. 그게 바로 배우이라는 직업의 매력이야.”“너에게 유명한 감독님들 소개해줄 순 있어. 하지만 네가 여전히 아이돌 때처럼 팬들 눈에 비친 네 모습이나 이미지를 신경 쓰면서 연예인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내가 떠먹여줘도 넌 받아먹지도 못할 거야. 내 말 이해했어?”신하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수많은 신인 배우들과 작업을 했었다. 연기력이 안 좋은 건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신하리도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땐 카메라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아마추어였었고 감독에게 욕을 먹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누구든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법이니까.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선 신하리의 뒤에는 그 누구 못지않게 고생하고 견뎌온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부분 신인 배우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건 바로 연기를 간단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연출과 대본에 많은 정력을 쏟는 것보다 오히려 카메라에 비춰지는 자신의 외모에 더 신경을 썼다. 아직 인기가 없는 배우도 그랬고, 인기가 있는 배우는 심지어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팬들을 위한 드라마에서는 그런대로 봐줄 수는 있어도 정극에선 그 정도 연기력
멈칫하던 한열이 신하리와 눈이 마주치자 발끈하며 귓불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구더러 멍텅구리라는 거예요! 저도 되갚아 인 거 알아요.”신하리가 눈을 깜박이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너 조금 전엔 분명 되갑아라고 했어.”한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적 없어요.”“그랬어.”“아니라고요!”“맞다니까! 매니저님도 옆에서 들으셨어.”신하리가 말하며 윤명훈을 향해 살짝 턱짓을 했다. “그렇죠, 매니저님?”유치한 두 사람 사이의 언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윤명훈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얘길 하시는 거예요? 잘 못 들었어요.”신하리가 쯧, 혀를 찼다. “어쩐지 요즘 신인들 중에 멍텅구리가 많더라니. 전부 매니저님들께서 오냐오냐 해주셔서 그래요.”한열은 순간 신하리를 차 밖으로 차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윤명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열이가 국어에 좀 약해요. 다른 건 꽤 잘했어요.”한열 대신 변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씨 가문은 공부를 잘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공영선은 퇴직 전엔 선생님이었다. 아들인 한준웅과 딸 한아람 모두 타고난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송씨 가문의 남매 역시 학창시절부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한열의 동생은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계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한열은 그의 사촌형이나 사촌 누나, 심지어 동생에게 비교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 가족 몰래 연극영화과에 지원했고 일단 합격한 뒤 가족들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열은 시도조차 하기 전에 한준웅에게 그 계획을 들키고 말았고 그의 핍박에 어쩔 수 없이 고담의대에 원서를 넣어야 했다. 국내 TOP 5에 의대 중 하나인 고담의대에 합격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열의 성적으론 충분했다. 국어 성적은 겨우 1등급을 받은 정도였음에도 10등이라는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른 영역의 성적이 얼마나 높았을 지는 보지
남자의 말에 신하리가 대답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사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젠 어린 나이 아니잖아. 아버지와 아주머니께서도 계속 네 결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특히 아주머니는 흰머리까지 많아지셨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빨이 집에 데려와 인사 드려야지. 그래야 아주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야.”입술을 짓이기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요리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아직 한창 일에 집중해야 되는 시기라 저희는 최근 몇 년 사이엔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일찍 집에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후 열이도 배우로 자리 잡고 저희도 여전히 좋은 감정으로 잘 만나고 있어서 열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땐 얘기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먼저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신하리는 남자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 열이가 요즘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요즘엔 또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 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주 가족 모임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두 분께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신하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신하리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신하리는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수없이도 봐왔었다. 전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힘들었던 일도,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생각에 잠겼던 신하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열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하리는 조금 전 자신이 꼬집었던 한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어?’‘사랑하긴 개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안 도와주면 죽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하지만 않았어도 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라고.’신하리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은 한열도,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심지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볼멘소리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온 가족이 다 알아.”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신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휴대폰을 꽉 움켜쥔 건지 손톱마저도 조금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내린 신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도 시간이 오래 되어서 잊으셨나보네요.”“뭘?”신하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첫사랑은 남자였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남자였고요.”신하리의 옆에 앉아있던 한열은 그녀의 통화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지, 그럼 여자겠어?’하지만 한열과 달리 윤명훈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설마 신하리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거야?’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풋, 소리 내 웃었다. “장난하지 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넌 키스신도 한 번 찍은 적 없어. 너희 바닥에서야 그런 널 도도하다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넌 남자와 스킨십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심지어 숨결만 느껴져도 본능적으로 구역질을 하잖아. 그런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이를 악문 신하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연이 얘기 안 해요?”“뭘?”“그날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주연이 보는 앞에서 제 남자친구와 키스한 거.”...상대방이 말이 없자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주연이 안 믿을 것 같아서 보여준 거예요.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살짝 만지는 것도 전 역겨워요. 주연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저도 열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