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준은 아주 얍삽한 사람이었다.예전에 한열이 그에게 사촌 누나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었지만, 그는 보여주지 않았다.미리 한열에게 보여주면 인간 티베탄 마스티프라고 불리는 그가 바로 그에게 달려들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그 자리에서 ‘실연'을 당하게 된 한열은 배로 자극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기에 그는 소란을 피울 수가 없었고 성질을 꾹꾹 참으며 언젠가는 눈앞에 있는 송민준과 한판 붙으리라 다짐했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던 송민준은 한열이 난리를 피울 것을 예상하였지만 한열은 그저 웃기만 했다.그 웃음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묘한 웃음이었다.송민준의 질문에 한열은 웃음기를 지우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평소에도 좋아했던 연예인이 내 사촌 누나였다니 너무 기뻐서.”공영선은 놀란 듯 물었다.“현진이가 네가 좋아했던 연예인이라고?”한열은 공영선과 사이가 아주 좋았다. 공영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열의 목소리가 바로 부드러워졌다.“할머니,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성우가 있다고요. 기억하세요?”공영선은 손자의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네가 전에 말했던 선셋인지, 스타인지 말이냐?”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사촌 누나가 바로 선셋 스타예요. 바로 제가 좋아한다고 말한 그 성우예요.”공영선은 덕후들의 세계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손자의 방에 선셋스타가 더빙한 작품의 건담이나 포스터, 그리고 굿즈 같은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한열이 한때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그녀에게 말해줬기에 그녀는 유현진의 활동명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었다.그녀는 손녀가 이미 예전부터 그녀와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에 순간 기뻐 웃음을 활짝 짓게 되었다.“영감, 내가 부처님한테 기도하면 효과가 있댔죠. 봐봐요, 부처님은 이미 예전부터 우리 현진이를 우리에게 보내려고 시도하고 있었어요. 다만 우리가 눈치를 못 챘을 뿐이죠.”한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이따 돌아
유현진은 바로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한태진이 먼저 말했다.“노갱벼루는 이 할아버지 집에도 아주 많다. 별로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물은 선물 받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야 선물이지 않겠느냐. 내겐 찻잎이 벼루보다 훨씬 낫구나.”유현진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전 노갱벼루를 본 적이 없었어요.”그녀의 뜻은 이렇게 희귀한 물건은 절대 싸구려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태진은 서해금이 가져온 선물 상자를 뜯어버리더니 안에 있던 벼루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자, 자세히 보아라. 이따 돌아갈 때 집에 가져가. 혹시 다른 게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본가 내 서재에 여러 가지 벼루가 가득하니까... 마음대로 골라 가져가. 다 마음에 들면 이 할아버지가 서재까지 한주시로 옮겨다 주마.”“...”유현진은 통이 큰 한태진에 감탄했다.그러나 그녀는 사양했다.“전 서예에 대해 잘 몰라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전 벼루가 필요 없어요, 할아버지.”“네 서예 실력은 아주 뛰어나단다. 전에 민준이가 나한테 네가 쓴 글씨를 보여준 적이 있다. 그냥 보면 의미 좋은 글이고, 거꾸로 보면 초상화더구나.”한태진은 칭찬을 해대기 시작했다.“글도 아주 예쁘고 멋지더구나!”“...”유현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의 실력은 서예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까막눈이의 눈을 가릴 순 있었지만 정말로 서예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들에겐 실력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니 한태진은 그저 무턱대고 그녀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강한서의 서예 실력은 아주 좋았다.그녀는 강한서가 쓴 행서체를 본 적이 있었다. 그의 글씨야말로 진정한 전문가가 쓴 글씨처럼 아름답고 멋졌고 송가람보다 훨씬 몇 배나 뛰어났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와 달리 자랑질을 해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와 친한 사람들 제외하곤 그의 서예 실력을 본 사람은 몇 없었다.그녀의 할아버지는 서예를 아주 좋아한다.
송민준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얘 왜 이래? 충격에 바보가 된 건가?'“너... 너 나한테 다른 할 말은 없어?”여하간에 한열은 그의 동생이었고 비록 하는 짓이 여동생만큼은 예쁘지 않아 어릴 때부터 그에게 맞고 자라긴 했지만 어릴 때의 한열은 아주 귀여웠다. 만약 정말로 충격에 바보가 된 거라면 송민준도 당연히 마음이 아팠다.한열은 그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뭘 더 말해? 형이 강한서한테 누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나를 이용한 거?”찔린 구석이 있었던 송민준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형은 네가 현진이에 대해 진심이니까, 내가 말하면 네가 슬퍼할까 봐 그런 거지.”한열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뻔뻔한 개자식! 뻔뻔한 얼굴 좀 봐!'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슬퍼할 정도는 아니야. 어느 정도 속상하겠지. 하지만 누나는 원래부터 강한서를 좋아하고 있었잖아. 난 어차피 가망이 없었어. 지금이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지. 여하간에 사랑보다는 가족이지 않겠어?”송민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넌 대체 왜 현진이가 강한서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냐? 대체 어느 시점에서? 이혼 전적이 있는 남자가 우리 현진이한테 가당키나 해?”한열은 그를 흘겨보았다.그는 그제야 강한서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리고 강한서가 말한 “현진이한테 너는 동생이니, 나한테도 넌 동생이나 마찬가지야.”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그는 이미 전부터 그에게 은근슬쩍 암시해 주고 있었다. 다만 그는 강한서를 그저 라이벌이라고 여기며 그가 한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그가 투자하고 있는 회사에서 왜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를 도와주겠는가? 당연히 유현진과 그가 가족이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그런데 정작 그의 사촌 형은 그를 위해 무엇을 했지?유현진의 정체를 숨기고 그를 이용해 강한서를 떼어내려고 했다. 심지어 뜻대로 되지 않자 일러바치기까지 했다!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표정은 아주 담담했다
강한서는 민경하에게 주문 제작을 지시할 때 민경하는 그가 무엇을 할지 이미 예상하였다.마음이 선했던 민경하는 직장 상사인 강한서가 미래의 형님이 될 송민준에게 미움을 살까 걱정이 되어 말려보기도 했다.그러자 강한서가 말했다.“민 실장은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오시면 됩니다.”민경하는 대충 강한서가 남의 손을 빌려 그 물건을 쓸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강한서는 겉으로는 송민준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뒤에서는 몰래 골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뒤끝이 있었다.그랬기에 그는 가족들이 모인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고 미래의 형님에게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현진은 핸드백을 들고 한세 한식당에서 나왔다.강한서는 바로 시동을 걸고 그녀의 앞까지 운전해 갔다.유현진은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앉았다.그녀가 분명 들어갈 때 쇼핑백 두 개를 들고 있었지만, 지금은 네 개가 되었다.유현진이 안전벨트를 하고는 바로 가방에서 두둑한 돈 봉투 세 개를 꺼냈다.“이거 봐봐, 봐봐! 부럽지?”그녀의 모습을 보니 식사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알 수 있었다. 강한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할아버지랑 할머니께서 주신 거야?”“응, 그리고 삼촌이랑 송... 아니 우리 아빠.”이미 쓰레기 같은 가짜 아빠 유상수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그녀는 갑자기 새로 생긴 그녀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친아빠에 다소 아빠라고 부르기가 어색했다.강한서는 다시 시동을 걸며 말했다.“드디어 네 진면모를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겠군.”유현진은 상자를 꺼내 들면서 되물었다.“내 진면모라니?”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보다가 말했다.“돈과 남자를 밝히는 모습 말이야.”“...”유현진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역시 강한서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그녀는 상자를 열고 안에 있던 벼루를 꺼냈다.“이거 봐, 내가 널 위해 뭘 가져왔게?”강한서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가 든 것을 보더니 살짝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노갱벼루?”
유현진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녀도 냄새에 예민한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식물에서 나는 냄새에 호기심이 많았고, 그런 이유로 유현진은 꽃과 식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심지어 스스로 향기 제조를 시도해 본 적도 있었다. 전에도 유현진은 자신의 이런 취미가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유전의 힘인 듯했다. “Caline은 왜 오빠가 아니라 아주머니가 관리하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서해금 씨는 센트의 브랜드 파트너였어. 정확하게 얘기하면 두 분이 함께 센트를 설립하셨지. 하지만 센트를 업계에 이름을 알리게 한 미스틱은 어머님이 만드신 거였어.”“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센트는 삼촌께서 관리하셨었는데 향수에 대해 잘 모르시니까 2년도 되지 않아 아저씨한테 돌려주셨어.”사실 송병천도 향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것이니, 그는 센트를 잘 지켜내야만 했다. 그러니 송병천이 센트를 맡게 된 것이다. 서해금도 제향을 배웠었다. 게다가 그녀는 경영에도 일가견이 있어 송병천이 갓 센트를 맡았을 때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모두 배우자를 잃은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정이 들었고 점점 그 마음을 키웠다. 한아람이 떠나간 지 6년이 되던 해, 송병천은 서해금과 혼인신고를 했다. 하지만 그 일은, 한씨 가문 사람의 마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센트는 한아람이 남긴 유산이었다. 하지만 그 유산이 송병천의 재혼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 셈이었다.특히 센트를 설립할 당시, 서해금은 제대로 된 끼니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고 한태진과 공영선이 딸과 사이가 각별한 그녀를 도와주며 자식처럼 대했다. 하지만 딸이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자식처럼 대했던 딸의 친구가 사위였던 남자와 결혼했으니, 당연히 꺼림직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세상에 널린 좋은 남자 중에서 하필, 친구의 남편을 선택해야만 했을까?그 후, 한씨 가문에서는 점차 송병천을 멀리했다.
강한서의 말에 유현진은 당황하고 말았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유현진은 한참 만에야 욕을 내뱉었다. “X신.”...다음 날, 최연서 쪽에서 연락이 왔다. 최연서의 말로는 유상수와 백혜주가 크게 싸웠고, 백혜주는 유씨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유상수가 경찰서에서 유서훈을 데려온 날, 백혜주는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유상수는 백혜주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현아도 병원으로 불러 죽은 태아와 함께 전부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유현아만 유상수의 딸이었고 유서훈도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일로 유상수는 불같이 화를 냈고 병원에서 백혜주와 싸움을 벌였다. 백혜주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내연남이 누군지 얘기하지 않았고, 안 그래도 화가 났던 유상수는 백혜주 모자를 병원에 내버려둔 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유상수는 아침 일찍 최연서의 집으로 가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최연서가 말했다. “유 대표님께서 백혜주 씨를 건드리는 걸 꺼리시는 것 같았어요. 그 지경으로 싸웠는데도 이혼할 생각은 하지 않더라고요.”유현진의 얼굴엔 차가운 비웃음이 걸렸다. 이혼할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백혜주에게 약점이 잡혀 있었기에 내연남이 한 트럭이 찾아와도 유상수는 백혜주와 이혼할 용기가 없을 것이다. 설사 이혼한다고 하더라도, 백혜주의 성격상 유상수의 가죽을 벗겨서라도 이혼에 상응한 보상을 받으려 할 것이다. 유상수는 아까워서라도 백혜주에게 그 돈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유현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이혼하면 오히려 곤란해요.”“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앞으로... 연서 씨 배 속의 아이는 유상수의 희망이 될 거예요. 유상수에게 명분을 달라고 하세요. 만약 유상수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돈이라도 달라고 해요. 만약 유상수와 백혜주가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그만둬야 할 타이밍이에요.”백혜주는 유상수라는 사람을 원하는 것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주강운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요. 그럼 전화로 얘기하죠.”“그래요.”주강운이 말했다. “제가 전에, 저택의 뒷마당에 유치원을 지었다고 했잖아요. 그 유치원, 누가 운영하는 건지 아세요?”유현진은 순간 유상수를 떠올렸다. “유상수가 운영하는 건가요?”주강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혜주요. 그리고 진예원 씨, 그러니까 현진 씨 둘째 작은어머니요. 그 유치원은 두 사람이 함께 투자한 거예요. 백혜주가 자금을 투자하고 수익금을 받고, 유치원의 경영은 진예원이 하고 있어요.”어쩐지 전에 주강운이 진예원 가족이 여전히 이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니, 이제 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제가 가진 자료에 따르면, 그 유치원은 현지에서 잘 운영되고 있어요. 신화구 쪽은 구시가에 속했어요. 지금 신화구에서는 도시 재개발을 진행하고 있고요. 신화구는 주택 건설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어요. 공립 유치원을 제외하면, 이런 규모의 유치원은 그 지역에 하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거기로 모이겠어요.”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는 1000명이 넘었다. 학비도 만만치 않아, 매달 매 아이들은 몇십만 원의 학비를 냈고, 매달 유치원 학비 수입만 억이 넘었다. 게다가 월세가 없으니 유치원 교사의 급여와 식비, 수도, 전기 등 공과금을 제외해도 매달 순수익은 몇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었다. 백혜주가 지금 이렇게 침착한 것은 역시 다른 수입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씨 집안 저택의 땅으로 사업을 벌이다니, 정말 기가 막힌 수단이었다. “그 땅에 건축하려면 관련 부서의 승인이 필요하죠? 유치원을 설립할 때 필요한 많은 자료는, 어떻게 손에 넣은 거예요? 합법적인 자료도 하나 없이 어떻게 그곳에서 경영할 수가 있는 거예요?”주강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면, 합법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절차는 철저히 밟았을 거예요.”유현진은 침묵했다. 오랫동안 유상수의 곁에 있은 백혜주의 인
“너 오후에 회사 임원이랑 회의 있다며? 지난번에 이미 한 번 미뤘는데, 이번에도 미룰 수 있어?”멈칫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그럼, 내일 같이 가.”“그래, 그럼.”강한서는 오늘따라 유난히 고분고분한 유현진에 의구심이 들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가서 하는지 알아? 절차는?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는지는? 그 부서 사람들, 까다롭다고 하던데, 만약 그 사람들이 기분 나쁘게 얘기하면 화내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어?”유현진이 질문을 하나 던질 때마다, 강한서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주강운은 널 도와줄 수 있고, 난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넌 반도체 산업 연구 개발에서는 최고잖아. 인공 지능 로봇이든, 드론이든, 내 남편과 비교가 되겠어?”강한서의 유현진의 아부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특히 “내 남편”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내 능력을 알면서도 주강운을 찾아가겠다?”유현진이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있잖아. 넌 비록 돈 버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만, 인간관계를 처리하는 방면엔, 강운 씨가 더 낫지.”강한서가 불퉁하게 말했다. “내가 어딜 봐서 못하다는 거야?”“이것 봐. 내가 말하자마자 화내잖아. 넌 성격이 너무 세. 회사에서도 제일 애쓰고 수입도 제일 좋은 건 너희 팀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엔, 넌 둘째 삼촌보다 못하잖아.”강한서가 반박하려 하자 유현진이 얼른 말을 이었다. “네가 빌붙으려는 사람 싫어하는 거 알아. 편 가르는 거 싫어하는 것도 알고. 하지만 사회는 원래 정이 있는 곳이잖아. 너무 융통성 없이 정하면 안 돼.”“내가 강운 씨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건, 강운 씨가 발이 넓고 사람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야. 변호사라 이런저런 사람과 많이 만나봤잖아. 특히, 공직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불필요한 번거로움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