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축의금 내는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로 유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축의금 내는 곳은 이쪽이에요.”유현진이 입은 짙은 아보카도 색의 한복은 어두운 밤 조명 아래서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무용을 전공했었기에 몸매도 아주 좋았고 뒷모습만 봐도 기품이 흘러넘쳤다.유현아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느 재벌가 사모님으로 오해하며 부드럽고 예의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제가 안내해 드릴게요.”유현진이 서서히 몸을 틀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유현아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다. 유현진은 머리를 흩날리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고마워요.”그러자 유현아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유현진? 네가 여길 왜 와?”유현진은 손에든 축의금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보면 몰라? 축의금 내러 온 거잖아.”유현아는 하마터면 옆에 있던 샴페인을 유현진에게 뿌릴 뻔했다.그녀는 유현진을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었다. 발표회 그날, 그녀는 유현진에게 이것저것 지적당했고 그 덕에 그녀는 한성에 입사할 기회는 물론이고 많은 재벌가 규수들과 만날 기회조차 잃게 되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유현진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유현진이 강한서와 이혼하고 다시 출신 불명의 혼외자식이 된 걸 생각하니 그녀는 하늘도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순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네가 호의를 품고 축의금 내러 왔다고? 내가 알기론 강한서와 이혼할 때 위자료 한 푼도 못 받았다고 하던데, 설마 밥 한 끼 먹기도 힘들어서 여기까지 찾아와 밥이나 얻어먹고 가려는 건 아니지?”다소 컸던 유현아의 목소리에 이내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강씨 가문의 며느리였던 유현진은 아직도 이 바닥에서 화젯거리가 되어있었다.그녀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저 반짝 빛났던 리즈 시절과 추락, 그리고 추락만 보였다...예전엔 많은 사람이 그녀를 질투했지만, 추락한 지금은 많은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되어있었다.“어머나, 유현진 씨 맞죠
유현아는 담담하게 웃었다.“에이, 호칭뿐인데 뭘. 언니만 괜찮다면 계속 그 성을 써도 난 상관없어.”그녀의 몇 마디 덕에 유현진이 혼외자식이었다는 출신이 드러나게 되었고 다시 한번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게 되었다.“진짜 재벌가 딸이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로 되다니, 드라마도 이렇게 안 찍겠네요.”“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인데 유현진이 대체 뻔뻔하게 여길 왜 온 걸까요?”“지금 저 모습도 보세요. 딱 봐도 동정을 사려고 온 것이거나, 돈을 얻어내려고 온 거겠죠. 유 대표님이 옛정을 생각해 친딸이 아닌데도 계속 남몰래 도와주고 있었다잖아요.”“유 대표님도 정말 선한 사람이네요. 만약 저한테도 저런 바람피우고 혼외자식을 데리고 온 아내가 있었다면, 저도 다른 여자 찾아 바람을 피웠을 거예요.”...유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녀는 드디어 유상수가 전에 갑자기 왜 뜬금없이 그녀에게 천만 원을 주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미지 세탁을 하려는 것이었다.‘좋은 아빠, 좋은 사람 코스프레 하려고 나한테 돈을 준 거였어?'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던 유현진의 표정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고 사람들은 오히려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유현아와 안하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유현진 씨, 이혼하고 너무 힘들게 살았나 봐요? 이 옷도 인터넷에서 싸게 몇천 원 주고 산 거죠? 기품이 하나도 없네요. 결혼식에 참석할 제대로 된 드레스 한 벌도 없는 거예요? 정 안 되면 현아한테 한 벌 빌려달라고 해요. 어릴 때 현아가 현진 씨 옷을 많이 입었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가 좋았잖아요. 현아 옷 빌려 입어도 괜찮죠?”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리저리 언어 공격을 받는 유현진의 모습에 강한서는 바로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민경하가 그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대표님, 진정하세요. 사모님께서는 그렇게 쉽게 당할 분이 아니시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은 사모님께서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실 거예요. 대표님께서는 사모님께서 시키신 대로만 하시면 된다고요.”
유현아는 기가 찼다.‘하! 뭐 이렇게 뻔뻔해!'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도 알아. 이런 브랜드들이 언니 성에 안 찬다는 거. 예전에 언니는 Elie Saab에서 만든 옷만 입었잖아.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랑 많이 달라졌고 언니 동생인 나는 아직 그걸 살 여유가 되지 않아. 그래서 이런 급의 브랜드밖에 살 수가 없어. 비록 그 브랜드보다는 못해도 언니가 지금 입고 있는 옷보다는 낫지 않겠어?”그녀의 말 속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제를 알라는 것이었다.유현아는 유현진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머리카락이 쏠려있는 어깨 한쪽을 발견하게 되었다.한복은 여성의 우아함을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의상이었다. 그리고 유현진이 입고 있는 한복 어깨 끝에는 특별한 재료로 수놓은 것 같은 봉황 한 마리가 있었고 불빛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여성의 우아함과 기품을 은은하게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이 한복에 있는 자수가 왜 이렇게 어디서 본 것 같죠?”“저게 자수라고요? 기계로 도안을 찍어낸 게 아니라?”“저도요. 이 한복,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네요.”“이렇게 촌스러운 한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요? 장난하시는 거죠? 이런 한복은 시장 같은 곳에 나가면 수두룩 널렸어요.”바로 이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한복의 장인이신 손성하 선생님께서 올해 초에 전통 자수 전시에 내놓은 그 봉황 자수가 아닌가요?”사람들은 전부 놀란 표정을 지었다.손성하는 전통 자수를 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그녀는 궁중 자수를 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자수 실력은 신의 경지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었다. 점점 역사 속에 사라져가는 바느질 수법 또한 그녀가 전부 완벽하게 재현 해냈고 어떤 작품은 국가문화유산으로 등극 되기도 했다.그녀는 국가를 대표하여 해외에 나가 전통 자수를 알리기도 했다. 그녀가 자수한 작품 는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그리고 올해 열린 전통 자수 전시에서도 그녀
안하윤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요한 장소에서는, 일반 브랜드의 드레스를 입는 것이 이미테이션을 입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람들에게 지금의 유현진은 확실히 고급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수준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유현진이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을 잃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미테이션을 입어서라도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손성하의 자수는 직접 본 사람이 몇 없을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현진이 이미테이션을 입어야 할 수준이 되었다니. 강씨 집안 사모님이었을 땐, 전부 주문 제작한 드레스만 골라 입었잖아요.”“하지만 정말 비슷하게 만든 것 같긴 해요. 물론 자세히 보면 다르긴 하지만요. 봉황의 날개를 살펴보면 인터넷의 사진과 좀 다른 것 같아요.”“아무리 이미테이션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눈치챌 수 없는 것으로 입었어야죠. 저 디자인은 이미 인터넷에 많이 퍼졌는데, 저걸 입고 오다니. 너무 멍청한 것 같아요.”“멍청한 게 아니라 머리를 쓴 거죠. 저 옷을 입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유현진에게 신경이나 썼겠어요? 이젠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이 없으니, 어떻게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방법을 생각했겠죠.”...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유현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의 유현진이라면, 어떤 디자이너의 옷이든 마음껏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위자료 한 푼 없이 강한서와 이혼했고 연예계에서도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 배우였다. 그런 그녀가 저런 고급 드레스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현아 역시 유현진이 이미테이션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언니도 손성하 선생님의 한복을 좋아하나 봐. 특별히 선생님의 디자인을 똑같이 따라 한 걸 보면 말이야. 내가 눈썰미가 없어서 못 알아봤네.”유현진이 유현아를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럴 수 있어. 보는 눈이 없으니,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해.”유현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유현진은 강한서와 이혼 후,
“성안나 선생님이요? 세계 패션 디자인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신 그 성안나 말씀하시는 거예요?”“진혜연 디자이너가 만든 옷은 우리도 살 수 있지만, 성안나 선생님의 작품은, 주문 제작을 하려고 해도 이미 예약이 넘칠 지경이라고요. 매년 패션쇼마다 성안나 선생님의 작품은 대박을 쳤었고요. 성안나 선생님은 국내 패션 디자인계에서는 넘사벽이라고요.”“성안나 디자이너가 진짜라고 했으니, 절대 가짜일 리가 없어요. 성안나 디자이너는 손성하 선생님과 절친한 사이에요. 그러니 절대 손성하 선생님께서 만드신 옷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안하윤이 방금 성안나 선생님이 패션에 대해 뭘 아냐고 했잖아요. 정말 우습네요. 패션계의 대모 같은 성안나 선생님의 겸손한 발언을 그대로 믿다니 말이에요.”“방금 성안나 디자이너님이 하신 얘기 못 들었어요? 저 옷은 손성하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거라잖아요. 유현진이 바로 그 선물 받은 사람이라는 건가요?”“저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거잖아요.”“어쩐지 유현진 씨가 이런 장소에 이미테이션을 입고 온다고 했어요. 아무리 궁해도 왜 굳이 와서 웃음거리가 되려고 하겠어요?”“그러니 유현진 씨가 유현아를 보는 눈이 없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진품을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봤잖아요.”...사진을 찍은 후 성안나는 다시 유현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손성하 선생님께서 디자인하실 때, 저한테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승객에게서 영감을 받으셨다고요. 당시 그 분께서 한복을 입고 한복 패션쇼에 가셨는데, 마침 손성하 선생님 옆자리에 앉으셨다고요. 선녀를 만난 것 같으셨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돌어오셔서 바로 디자인 초안을 그리셨죠. 그러고는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선물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유현진 씨가 바로 손성하 선생님께서 비행기에서 만났던 그 분이시죠?”성안나의 말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유현진이 현재 입고 있는 한복의 창작 스토리는, 전통 자수 전시에 참석했던 사람이라
전통 자수 전시는 유현진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매회 그녀는 늘 본방 사수해 왔다. 강한서는 그런 프로그램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바쁘지 않을 때면 늘 유현진과 함께 프로그램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건 강한서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유현진은 강한서가 단지 자신과 TV 리모컨을 뺏으려고 옆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드라마나 예능 방영 중 잠깐 광고가 나오는 틈을 타 그녀가 화장실에 갈 때면, 강한서는 늘 뉴스나 스포츠 중계로 채널을 돌리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일부러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있었고, 유현진은 늘 온 힘을 다해 그에게서 리모컨을 뺏어야 했다. 그것이 강한서만의 장난임을 유현진은 알지 못했다. 유튜브나 쇼츠가 성행하는 요즘도, 유현진은 본방사수하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휴대폰을 보면 시력이 나빠질 것이라며, 배우는 눈빛으로 감정 표현을 해야 하기에 눈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TV를 보다가도 광고가 나오는 틈을 타 눈을 슬쩍 감고 휴식했다. 강한서 역시 그런 유현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절대 리모컨 쟁탈전에서 항복을 선언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만약 강한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유현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속 TV를 볼 테고, 그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그녀도 먼저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리모컨을 가져가면, 유현진의 입은 스스로 열렸다. 위협이든 유혹이든, 그것도 아니면 어르고 달래는 것이든 강한서는 전부 받아주었다. 이번엔 유현진이 처음으로 예능을 보면서 먼저 강한서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고 싶어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한서도 어쩌다 유현진의 장단에 맞춰주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설마 너야?”“축하해, 정답이야.”강한서는 유현진은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닌 것 같은데.”유현진이 콧방귀 뀌었다. “그건 내가 그 옷
유현진, 강한서와 손성하는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할 때, 손성하는 유현진에게 한복을 선물했다. 유현진은 한복을 선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잔뜩 들떠 자랑했다. “역시 손성하 선생님께서 보는 눈이 있으셔.”“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강한서는 유현진의 말을 들으며 눈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고 그는 곧 과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우연”인 줄 알고 있는 그 만남은 사실, 강한서가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당시 유현진은 송민영의 존재로 인해 강한서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니 강한서가 준비한 것이 분명한 일임에도 그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현진은 무의식적으로 강한서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잘해주지도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가 자신의 일을 신경 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강한서를 호구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좋은 일은 자기가 다 하고, 결국 욕도 본인이 다 들었다. 유현진과 성안나는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니 성안나가 유현진의 편을 들어준 것은 강한서의 의도임이 뻔했다. 예전 유현진의 옷장에는 성안나가 디자인한 옷이 많았다. 주문 제작한 옷이든, 백화점에서 구매한 옷이든, 전부 강한서가 민경하를 통해 보낸 것이었다. 강한서는 옷을 잘 고르지는 못했지만, 그는 유현진의 안목을 믿지 않았다. 제일 좋은 것보다 제일 비싼 것을 고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인 성안나는, 당연히 강한서의 최선책이었다. 그런 고객을 위해 성안나도 당연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업계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성안나가 나서서 얘기했으니, 유현진의 한복이 진짜인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토론할 가치가 없었다. “유현진이 송성하 선생님과 그런 인연이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그래도 한때는 강씨 집안 사람이라 보고 들은 게 많을 테니, 저런 소장 가치가 충분한 옷을 몸에 걸치고도 태연한 거겠죠.
역시.강한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이혼한 부부가 전 장인어른의 결혼식에 왔고, 심지어 전남편이 전와이프 대신 축의금을 내려고 한다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유현진이 덤덤한 표정으로 강한서를 훑어보았다. “강 대표님, 이혼 서류에 도장 찍은 그 순간부터 저희 사이는 이미 끝이 난 것 같은데요. 남들 오해할 만한 행동은 하지 마시죠.”유현진이 말을 이었다. “유 대표님께서 저를 키우셨으니, 제가 축의금을 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강 대표님은 무슨 명분으로...?”‘그것도 이렇게 많이!’강한서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 “난 네가 올 줄 알고 온 거야. 이건 내 마음이야.”그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저러니 유상수가 강한서를 부를 수 있는 거였구나.’‘유현진 때문이었다니.’유상수와 유현진이 다시 연락을 주고 받는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사람들은 비록 유현진이 친딸은 아니지만 키운 정이 있으니, 유현진이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상한 것은 오히려 강한서의 참석이었다. 하지만 유현진과 강한서의 태도를 보니, 사람들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당시 두 사람은 평화롭게 이혼한 것이 아니었고 유현진은 위자료도 받지 않았으니, 누가 봐도 두 사람 사이는 완전히 끝난 것이었다. 반년 후, 두 사람이 동시에 유상수의 결혼식에 나타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강한서의 시선은 처음부터 유현진만을 향하고 있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모습은 평소 시크하던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신분으로는, 이미 이혼한 전와이프에게 이렇게 목을 맬 필요는 없었다. 미련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유현진의 태도는 강한서와 전혀 달랐다. 그녀는 강한서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유현진은 덤덤하게 강한서를 한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강 대표님 마음은 미래의 사모님을 위해 남겨두시죠. 이곳에 대표님 마음을 표현할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