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한 것뿐인데 이렇게 죽을 위기를 겪다니, 내 인생은 참 험했다.장겨울 등은 위에서 초조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난 귓가가 윙윙거려서 잘 듣지 못했다. 난 모든 신경을 줄기에 집중했다. 부디 그 줄기가 충분히 질기기를, 절대 나와 같이 추락하지 않기를 바랐다.너무 무서웠다. 이렇게 죽는다면 엄마, 아빠가 충격을 받고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이곳은 관광지라서 근처에 구급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곧 도착했다.내가 두 남자에게 구해졌을 때, 유신우는 김현주의 손을 잡고 나에게로 달려왔다.“수진아,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어이가 없었다.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다치지 않을 수가 있을까?나는 등산을 위해 편한 티셔츠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밖으로 드러나 팔과 두 다리에 모두 상처가 남았다. 온몸에서 피가 흘러서 나조차도 섬뜩할 정도였다.상처는 무척 아렸고 완전히 두려움에 빠진 난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김현주는 나와 그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날 향해 뻗어진 그의 팔을 잡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신우야, 걱정하지 마. 수진이는 분명 괜찮을 거야.”이제 막 죽을 뻔한 위험에서 벗어난 나는 여전히 큰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난 그들이 내 앞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친구들은 내가 덜덜 떨자 안색이 달라져서는 이것저것 물었다.구급대원들이 날 산 아래로 옮겼을 때 구급차는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친구들은 나와 함께 차에 구급차에 타서 병원으로 향했다.하산하고부터 구급차에 오를 때까지 유신우는 김현주를 지키면서 우리 뒤를 따라왔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 내 친구들뿐이었다.그 순간 내 마음은 완전히 차게 식었다.유신우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날 여동생으로 여기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함께 한 19년의 세월이 있는데, 내가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에도
유신우는 내가 다친 걸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날 보러 오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난 언젠가 내가 눈을 떴을 때, 유신우가 조용히 내 침대 옆에 앉아서 사과를 깎아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때 따뜻한 햇빛이 그의 위로 드리워지면 난 그를 신처럼 여겼을 것이다.입원한 셋째 날 점심, 낮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 문밖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유신우와 김현주였는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그들의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유신우가 병문안하러 왔는데 김현주가 그걸 동의하지 않아서 싸우는 듯했다.내일이면 퇴원하니 날 보러 올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그가 날 보러온 것 때문에 김현주가 괜한 생각을 한다면, 그래서 내게 성가신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안 오는 편이 훨씬 나았다.내 마음은 그가 오기를 바랐지만 내 이성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난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또 잠이 들었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이번 일로 난 매우 놀랐다. 의사는 내게 계속 수면제를 투여했고 그로 인해 난 아주 오래 잠을 잤다.병실은 예전과 다름없었고 유신우는 결국 날 보러 오지 않았다.엄마가 내게 왜 표정이 좋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난 웃으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저녁때쯤, 병실 안으로 들어온 자줏빛 노을이 내 얼굴 위로 드리워져 눈이 조금 시렸다.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팔이 곧 축축해졌다.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난 겨우 19살 소녀였다. 난 아직 내 마음을 감쪽같이 숨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엄마는 내가 운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난 묵묵히 생각했다. 내게 실망하지 말라고,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분명 좋아질 거라고.퇴원할 때 두 집안 사람들 모두 병실에 있었다.아줌마와 아저씨는 짐 정리를 도와줬고 우리 엄마는 옷 입는 걸 도와줬으면 아빠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신발 끈을 묶어 주었
난 엄마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흥분에 겨워 집 안에서 몇 바퀴 달렸다.십여 일 넘게 누워있었더니 더 움직이지 않으면 다리가 퇴화할 것 같았다.재밌게 놀고 있는데 유신우에게서 연락이 왔다.나는 냉정을 되찾고 미간을 찌푸린 채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유신우가 내 생사에 크게 관심이 없는 걸 확인한 뒤로 나는 그에게 더 실망했다.내가 다쳤던 날, 나한테는 냉담했으면서 김현주는 살뜰히 챙기는 걸 보니 아주 괴로웠다.내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 날 여동생으로 여긴다고 했으니 오빠가 여동생을 챙기듯 날 조금만 걱정해 주어도 좋았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김현주는 그의 여자 친구였고 난 그저 이웃집 여동생이었다. 여자 친구에게 잘해주는 건 너무 당연했다. 내가 슬퍼하는 것도 결국은 일종의 질투였다.난 며칠간 집에서 쉬었고 유신우는 몇 번이나 음식을 가져왔다. 아줌마가 몸보신하라고 만들어준 음식들이었다. 엄마는 그걸 다 받았지만 난 거의 먹지 않았다.유신우는 몇 번이나 내 방으로 들어와 날 보려고 했지만 엄마는 내가 자고 있다면서 그를 말렸다.유신우는 엄마에게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한 번만 보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 같이 잔 적도 있고 정말 나를 여동생처럼 아낀다고 말하면서 말이다.우리 엄마는 시선조차 들지 않고 말했다. 둘 다 어릴 때라 철이 없어서 괜찮았지만 이젠 둘 다 컸고, 그에게는 여자 친구도 있으니 그러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말이다.난 집으로 돌아온 날 엄마에게 얘기했다. 유신우가 날 보러 병원에 온 것 때문에 김현주가 불쾌해했고, 유신우가 내 방에 들어와 날 본 걸 김현주가 안다면 둘 사이에 또 갈등이 생길 거라고 말이다. 난 나 때문에 둘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사실 난 그저 그들을 멀리하고 싶었다.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엄마와 아줌마의 사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몇 번이고 유신우를 향한 마음을 접으라고 내게 암시했다. 엄마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게 수
망설이고 있는데 실수로 휴대전화 잠금을 풀었다. 유신우의 목소리가 전화 건너편에서 선명히 들려왔다.“나수진, 문 열어.”그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약간의 오만함이 담겨 있고 지시하는 듯한 어투였다.난 예전에 그를 우러러보았기에 날 대하는 유신우의 태도가 좋지 못하다는 걸 몰랐다. 오히려 유신우가 차갑고 도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내게 신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불편해졌다.“왜?”난 그의 말투에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너 보려고. 걱정돼서. 나 몇 번이나 왔었는데 아줌마가 널 못 만나게 했어. 나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고. 아줌마 방금 나간 거 봤어. 그러니까 문 열어.”“나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사실 난 바로 문 앞에 서서 현관문 렌즈로 그의 준수한 얼굴을 보고 있었다. 유신우는 꽤 짜증 난 표정이었다.‘짜증 나면 가면 되지, 내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천천히 일어나며 되지. 안 급해. 문 앞에서 기다릴게. 너 문 열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고집스럽긴.’고집스러운 그의 태도를 보니 내가 문을 열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문을 열어줄 생각이었다.난 천천히 다가가서 문을 열었고, 그 순간 곧바로 후회했다.난 유신우 혼자인 줄 알았다.그런데 유신우가 문 앞에 서 있고 김현주가 유신우의 허리를 안고 그의 뒤에 숨어서 눈을 끔벅이며 날 바라보는 게 보였다.연약해 보이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은 날 불편하게 했다.그녀의 눈빛은 순수하지 않았고, 강한 질투심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주 아리송한 눈빛이었다.난 아주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그녀와 친구가 될 리가 없으니 그녀를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보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비록 후회되긴 했지만 문까지 연 마당에 그들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내 점잖은 성격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들어와.”나는 짧게 말했다.유신우는 나를 힐끔 보더니
유신우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난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과일도 맛이 없어졌다.“뭘 봐, 기분 나쁘게.”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내 건? 나수진, 너 오빠한테 이럴 거야?”난 어이가 없었다.손이 있으면 알아서 챙겨야지, 내가 예전처럼 먹여주기를 바랐던 걸까? ‘미안하지만 네가 내 마음을 사정없이 짓밟았던 그때부터 많은 게 달라졌어.’“네가 알아서 해. 우리 집 통장이 어디 있는지도 알면서 왜 갑자기 손님인 척 구는 거야?”난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다. 그저 단순히 대화한 것뿐이지, 다른 의도는 절대 없었다.그러나 김현주의 안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녀는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내키지 않는 것 같기도, 또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다.“수진아, 너희 집 돈 많아? 남에게 통장이 어디 있는지도 알려주다니. 누가 훔치면 어쩌려고?”난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저 유신우가 그만큼 우리 집에 익숙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예를 든 것뿐이다. 우리 집 통장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랐으니 유신우는 더욱더 모를 것이다.그러나 김현주의 말은 아주 의미심장했다. 그녀는 우리 집에 돈이 많은지 아닌지를 신경 쓰고 있었고, 동시에 유신우의 인성을 의심하고 있었다.김현주의 사고방식은 정말 이상했다.“우리 아빠는 중학교 교사고 엄마는 디자이너라서 수입이 나쁘지 않아.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지만 뭐 그럭저럭 사는 편이야.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상태지.”내 말은 사실이었다. 과장은 전혀 없었다. 그냥 수다를 떠는 것뿐이니 솔직히 얘기했다.김현주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그녀는 유신우의 팔을 꽉 쥐면서 여전히 유약한 모습으로 낮게 중얼댔다.“사실 돈이 없는 것도 괜찮아. 집이 잘살면 다들 행복하지 않다고 하더라고. 형제자매끼리 재산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언젠가는 이혼한다고 하더라고.”‘우리 아빠와 엄마가 언젠가는 이혼할 거라고 암시하는 건가
난 절대 먼저 남을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물렁물렁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날 괴롭히려 했으니 참아 줄 이유가 없었다.“네가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나랑 신우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면서 십여 년을 함께 했어.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지. 난 우리 집에서 가끔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껴. 우리 엄마, 아빠가 금슬이 아주 좋거든. 절대 한쪽이 어려움에 부닥쳐서 다른 한쪽이 그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상대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우리 집에는 자식이 나 한 명뿐이라 엄마, 아빠는 모든 좋은 걸 다 내게 주려 해. 내걸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얄밉게 구는 걸 누가 못해?’“수진아, 네가 오해한 거야. 난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니었어. 난 단지 신우가 널 걱정해서 신우와 함께 널 보러온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었어. 네가 오해한 거야.”내 말에 아픈 곳을 찔린 건지 김현주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억울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난 집에서 편하게 몸조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날 보고 싶지 않다면 안 오면 그만 아닌가?날 질투하는 그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유신우가 어떤 사이였는지 전교생들이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김현주가 우리 집이 꽤 여유롭게 사는 걸 못마땅해하는 것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집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남 잘 사는 꼴을 못 보는 것도 정상이었다.하지만 우리 엄마, 아빠를 들먹여서는 안 됐다. 난 절대 날 키워주신 부모님을 헐뜯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어머, 올케, 내가 무슨 얘기를 했다고 그래? 우리 그냥 수다 떨고 있었던 것뿐이잖아. 왜 우는 거야? 울지 마. 내가 휴지 가져다줄게. 다른 사람이 봤으면 내가 올케를 괴롭힌 줄로 알겠다. 어머, 올케 정말 미인이네. 우는 것도 이렇게 예쁘다니.”난 휴지 몇 장을 뽑아 유신우의 손에 쥐여주면서 어서 눈물을 닦아주라고 눈치를 줬다.“신우야, 올케
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김현주는 이렇게도 날 싫어하는 걸까? 심지어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내 신경을 긁다니.김현주는 유신우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자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신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로 처량하게 울었다.“수진아, 이러지 마. 우리 아빠가 감옥에 가서 우리 집안 사정이 너보다 못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난 정말로 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네가 괜찮은지 한 번 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내가 그렇게 밉다면, 지금 당장 갈게. 앞으로는 절대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내가 뭘 어쨌다고 이렇게 우는 건지. 김현주는 눈물을 너무 잘 흘렸다. 저 정도면 연기를 안 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점점 더 짜증이 치솟았다. 난 김현주의 연기가 너무 싫었다.“유신우, 나 보러 와줘서 고마워. 인제 그만 가 봐. 난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난 덤덤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법이다.내 오후가 두 사람 때문에 망가진 걸 생각하면 아까웠다.유신우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눈빛은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를 쫓아내는 것에 몹시 화가 난 건지 굳은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유신우는 흐느끼고 있는 김현주를 보더니 마음 아픈 얼굴로 김현주를 품 안에 앉으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착하지, 울지 마. 자꾸 울면 눈 아파. 수진아, 우리는 네가 걱정돼서 병문안을 온 건데 왜 이러는 거야? 현주가 그렇게 미우면 앞으로 우리 둘 다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그렇지만 이렇게 현주를 모욕할 필요는 없잖아.”앞말은 김현주 들으라고 한 소리였고 뒷말은 내게 하는 소리였다.나는 화가 났다. 나는 이 순간 유신우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다.유신우가 옛날에 왕으로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어리석은 왕이었을 것이다. 아끼는 비가 말 몇 마디 하면 나라까지 말아먹었을 것이다.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김
난 그의 말에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났다. 저 사람이 과연 내가 19년을 알고 온 유신우가 맞을까? 옳고 그름 따위 안중에도 없고 인성까지 쓰레기였다.내가 김현주를 자극했다니? 내가 언제 김현주에게 눈치를 줬길래 나한테 또 누명을 씌운단 말인가?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유신우, 나도 이젠 더 할 말 없다. 너도 머리가 있으니까 돌아가서 잘 되짚어 봐. 됐고 난 너희랑 계속 얘기할 마음 없어. 나 피곤하니까 인제 그만 돌아가. 보러와 준 건 고맙지만 앞으로는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 봐.”유신우는 김현주의 손을 잡고 씩씩대면서 떠났고 나는 혼자 텅 빈 거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우리 집에서 나가기 전 김현주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우쭐함에 나는 웃음이 났다.유신우가 편애해 주니 김현주는 자꾸만 선을 넘었다.하지만 난 김현주와 싸울 생각도, 그녀에게서 유신우를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 굳이 유신우여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왜 우쭐해하는 걸까?그들이 떠난 뒤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고, 이불을 끌어당겨서 소리 없이 울었다.유신우는 변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김현주의 편을 들었다.그는 더 이상 내가 좋아하던 소년이 아니었다.나는 유신우를 완전히 잊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맹세했다.이틀 뒤, 장겨울과 이세영이 날 찾아왔고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내보냈다.내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엄마는 날 따라 나왔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서 잔소리를 해댔다. 난 장겨울과 이세영을 데리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머리 위에는 흰 구름이 떠 있는 새파란 하늘이 있었고 뒤에서는 못 말린다는 듯이 날 나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있었다.난 저녁쯤에 돌아왔다. 석양이 드리워진 세상은 그림 같았다.우리 두 집은 모두 1층에 있었고 각자 작은 마당이 있었다.마당 면적은 크지 않았다. 엄마와 아줌마는 그곳에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꽃을 심었는데 너무 잘 자라서 무성한 잎이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