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김현주는 이렇게도 날 싫어하는 걸까? 심지어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내 신경을 긁다니.김현주는 유신우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자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신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로 처량하게 울었다.“수진아, 이러지 마. 우리 아빠가 감옥에 가서 우리 집안 사정이 너보다 못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난 정말로 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네가 괜찮은지 한 번 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내가 그렇게 밉다면, 지금 당장 갈게. 앞으로는 절대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내가 뭘 어쨌다고 이렇게 우는 건지. 김현주는 눈물을 너무 잘 흘렸다. 저 정도면 연기를 안 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점점 더 짜증이 치솟았다. 난 김현주의 연기가 너무 싫었다.“유신우, 나 보러 와줘서 고마워. 인제 그만 가 봐. 난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난 덤덤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법이다.내 오후가 두 사람 때문에 망가진 걸 생각하면 아까웠다.유신우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눈빛은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를 쫓아내는 것에 몹시 화가 난 건지 굳은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유신우는 흐느끼고 있는 김현주를 보더니 마음 아픈 얼굴로 김현주를 품 안에 앉으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착하지, 울지 마. 자꾸 울면 눈 아파. 수진아, 우리는 네가 걱정돼서 병문안을 온 건데 왜 이러는 거야? 현주가 그렇게 미우면 앞으로 우리 둘 다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그렇지만 이렇게 현주를 모욕할 필요는 없잖아.”앞말은 김현주 들으라고 한 소리였고 뒷말은 내게 하는 소리였다.나는 화가 났다. 나는 이 순간 유신우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다.유신우가 옛날에 왕으로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어리석은 왕이었을 것이다. 아끼는 비가 말 몇 마디 하면 나라까지 말아먹었을 것이다.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김
난 그의 말에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났다. 저 사람이 과연 내가 19년을 알고 온 유신우가 맞을까? 옳고 그름 따위 안중에도 없고 인성까지 쓰레기였다.내가 김현주를 자극했다니? 내가 언제 김현주에게 눈치를 줬길래 나한테 또 누명을 씌운단 말인가?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유신우, 나도 이젠 더 할 말 없다. 너도 머리가 있으니까 돌아가서 잘 되짚어 봐. 됐고 난 너희랑 계속 얘기할 마음 없어. 나 피곤하니까 인제 그만 돌아가. 보러와 준 건 고맙지만 앞으로는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 봐.”유신우는 김현주의 손을 잡고 씩씩대면서 떠났고 나는 혼자 텅 빈 거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우리 집에서 나가기 전 김현주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우쭐함에 나는 웃음이 났다.유신우가 편애해 주니 김현주는 자꾸만 선을 넘었다.하지만 난 김현주와 싸울 생각도, 그녀에게서 유신우를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 굳이 유신우여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왜 우쭐해하는 걸까?그들이 떠난 뒤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고, 이불을 끌어당겨서 소리 없이 울었다.유신우는 변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김현주의 편을 들었다.그는 더 이상 내가 좋아하던 소년이 아니었다.나는 유신우를 완전히 잊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맹세했다.이틀 뒤, 장겨울과 이세영이 날 찾아왔고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내보냈다.내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엄마는 날 따라 나왔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서 잔소리를 해댔다. 난 장겨울과 이세영을 데리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머리 위에는 흰 구름이 떠 있는 새파란 하늘이 있었고 뒤에서는 못 말린다는 듯이 날 나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있었다.난 저녁쯤에 돌아왔다. 석양이 드리워진 세상은 그림 같았다.우리 두 집은 모두 1층에 있었고 각자 작은 마당이 있었다.마당 면적은 크지 않았다. 엄마와 아줌마는 그곳에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꽃을 심었는데 너무 잘 자라서 무성한 잎이 정원
고3 추석 때, 날씨는 쌀쌀했다.유신우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우리 집에 들렀고, 우리 가족을 포함한 총 스무여 명의 사람이 함께 식사를 했다.술이 몇 잔 들어가니 분위기가 더욱 달아올랐다.그날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함께 술을 마셨고 여자들은 수다를 떨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어쩌다 보니 나와 유신우의 이야기가 나왔고 다들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웠다.이런 상황은 거의 매번 외식 때마다 벌어졌다. 처음엔 솔직히 쑥스럽기도 했지만 매번 그러니 이젠 면역이 생겼다.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난 그들을 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신우의 어머니가 옆에서 새우 껍질을 까면서 말했다.“우리 애가 이렇게 빨리 클 줄은 몰랐어. 수능 끝나면 집을 떠날 거로 생각하니 시간이 참 빨리 지나는 것 같네.”“그러니까. 가까운 대학교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먼 곳으로 가는 건지. 수진이 곁에 챙겨줄 사람이 없을 걸 생각하니 걱정이 되네. 얘가 좀 많이 덜렁대잖아.”“수진이도 신우랑 같은 대학교에 가면 되지. 우리 신우가 수진이 잘 챙겨줄 거야.”간단한 말 몇 마디로 두 사람은 날 어느 대학교로 보낼 건지 결정했다. 내 의견을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은 날 없는 사람 취급했다.유신우의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장남 유신혁은 24살로 성문대 한국화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데 1년에 겨우 한 번쯤 돌아왔다. 난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작은아들 유신우는 나보다 1살 연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서 그런지 난 나와 유신우의 사이가 꽤 좋다고 생각했다.난 걸음마를 뗀 뒤부터 그를 졸졸 쫓아다녔고, 말을 떼고 나서는 유신우의 이름을 제일 많이 불렀다. 그리고 연애 감정을 깨우치기 시작할 때쯤부터, 그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되어 내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다.난 그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그와 같은 대학교에 갈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화를 배워
엄마는 아주 호탕한 성격으로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통이 컸다.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신우의 큰아버지가 벌게진 얼굴로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는 말이에요. 애들이 참 빨리 커요. 참, 해윤 씨라고 했죠? 애들 결혼할 때 우리를 꼭 불러줘요. 집안 경사인데 우리가 빠지면 섭섭하죠!”“다른 분은 몰라도 아주버님은 꼭 불러야죠. 아주버님은 신우 큰아버지니까 상석에 앉으셔야죠.”화제는 이내 어느 대학교에 갈 것이냐에서 시작해 어떻게 결혼을 준비할지로 넘어갔다. 내일 당장 결혼하는 것처럼 다들 이 화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은 서로 화동이 되겠다며 아우성치면서 열의를 불태웠다.난 의식의 흐름에 따른 그들의 대화를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었다. 난 반박하지도, 제지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못 들은 척했다. 그래서 그들은 열띠게 토론했고 난 그릇 안에 수북이 쌓인 새우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내가 유신우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래서 아직은 결혼 얘기를 꺼내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식은 우리가 결정할 일이지, 어른들이 모든 걸 결정하게 하는 건 옳지 않았다. 나도 인권이 있으니 말이다.난 진심으로 유신우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와 나의 결혼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준비하고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물론 이건 나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어렸던 나는, 사랑은 두 사람의 일이라는 걸 몰랐다.내가 그 점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랑 때문에 크게 상처 입은 상태였었다. 어리고 진실되었던 마음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다친 뒤에야 말이다.그날 유신우가 한 행동은 너무도 뜻밖이었고 나는 그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그는 자신의 상처와 피로 나에게 그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밥을 먹고 있던 유신우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힘을 너무 쓴 탓에 의자가 멀리 날아가서 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아주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밥을 먹는 데 여념이 없던 나는 그의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제 인생을 결정하려는 거죠? 쟤는 쟤고 저는 저예요. 각자 알아서 살 거라고요. 그런데 왜 항상 저희를 엮으려고 하세요? 전 쟤랑 같은 학교에 다닐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다들 그런 생각은 버리세요.”유신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짙은 혐오가 날 너무 부끄럽게 했다.소란스럽던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화동을 하겠다던 어린 남자아이는 엄마에게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엄마, 삼촌 화 났어요.”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안고 밖에 있는 베란다로 나가서 아이를 달랬다.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나는 너무나 수치스럽고 또 괴로웠다. 난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기절한다면 이렇게 많은 동정을 받을 필요도, 안타까워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 하는 눈빛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나와 유신우는 18년을 함께 했다. 유신우는 내 전부였고, 난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내가 돌려받은 거라고는 뻔뻔하다는 말뿐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신우는 내 체면과 존엄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유신우는 정말 지독했다.아빠는 중학교 교사라 항상 온화하고 점잖아 화를 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유신우의 말 몇 마디에 아빠는 안색이 확 어두워지면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집안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아빠는 틀림없이 날 괴롭힌 유신우를 주먹으로 때렸을 것이다. 엄마 또한 몹시 노여워했다. 엄마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신우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본 엄마였기에, 그가 사람들 많은 곳에서 자기 딸을 이렇게 모욕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유신우의 아빠가 가장 처음 정신을 차렸다. 내가 난감해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자 아저씨는 서둘러 유신우를 혼냈다.“입 다물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제가 뭐 못할 말 했나요? 수진이는 제게 이웃일 뿐이에요. 여동생으로 여길 수는 있어도 수진이와 결
엄마는 아빠를 힐끔 보았고 아빠는 눈치를 채고 119에 신고하려고 했다.유신우는 우리 아빠의 움직임을 보더니 상처를 살피던 아줌마의 손을 힘껏 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아빠의 휴대전화를 빼앗으려 했다.아줌마는 그의 손짓에 뒷걸음치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줌마는 허우적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고 그녀의 얼굴 근육은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유신우도 몸을 과하게 움직인 탓에 중심을 잃었다. 그는 테이블 변두리를 내리누르면서 미끄러졌고 곧 와르륵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그릇들이 전부 바닥에 쏟아져서 산산이 조각났다. 아줌마와 엄마가 수고스럽게 만든 음식들은 전부 엎어졌고, 국물이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방 안은 흡사 내 마음처럼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아저씨도, 다른 사람들도 전부 당황했다.즐거웠던 식사 자리가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유신우는 더러워진 몸으로 바닥에서 일어났다. 오른 주먹을 쥔 그의 손에서 빨간 피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릇 파편 때문에 다친 게 틀림없었다.유신우는 날 죽일 듯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수진, 이제 만족해?”난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물 때문에 눈앞이 흐릿해져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내가 뭘 만족해한다는 거야? 내가 뭘 했길래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난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몇 마디 하지 않았어.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어떻게 나 때문이란 말이야? 내가 널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모든 걸 다 내 잘못으로 돌리는 거야? 그래서 네 멋대로 날 괴롭히고 모욕하는 거야?’난 정말로 슬펐다.유신우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난 유신우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존엄이 없지는 않았다.‘날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내가 널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내게 상처를 주면 안 되지. 유신우, 나도 사람이야. 내게도 마음이 있어. 나도 상처받고 마음 아파한
“신우야, 미안해. 난 네가 이렇게 난감해하는 줄 몰랐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네 말대로 앞으로는 절대 널 따라다니지 않을게. 그리고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아줌마, 아저씨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할게. 날 용서해 줘.”난 굴욕감을 참으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맹세할게요. 앞으로는 절대 유신우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진짜 내가 잘못한 듯했다.유신우와 평생 함께하겠다던 내 다짐은, 그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결국엔 나 혼자만의 일이었고,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나는 입술을 힘껏 짓씹었다. 피비린내가 입안에서 퍼져 나갔다.‘유신우, 이게 네가 원하는 거지?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결국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툭툭 떨어져서 흔적을 남겼다.“신우야, 너 대체 왜 이러는 거야?”아줌마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말했다.“수진아, 일어나. 넌 아무 잘못 없어.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엄마랑 같이 집에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가자.”엄마는 울먹거리면서 날 일으켜 세웠다. 엄마의 따뜻한 손가락이 내 볼을 잔뜩 적신 눈물을 닦았다.“우리 아가, 울지 마. 엄마 마음 아파.”“여보, 수진이가 옳은 일 한 거야. 수진이 때문에 신우가 부담이 컸나 봐. 그러니까 수진이가 사과해야 지. 수진아, 잘못한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절대 그러면 안 돼. 알겠지? 우리 집안 사람이라면 잘못을 반성할 줄 알고 자기 말에 책임질 줄 알아야지.”아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서 나와 엄마를 품에 안고 토닥토닥 달래주었다.난 아빠의 눈동자가 빨간 걸 보았다.“아빠, 엄마. 우리 아줌마 도와서 정리 좀 해요. 방 안이 어지럽혀졌네요. 전부 제 탓이에요.”난 꿋꿋하게 눈물을 닦으면서 웃음을 쥐어 짜냈다.“그래, 같이 정리하자.”엄마는 안쓰러운 얼굴로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난 주방으로 가서 쓰레기통을 가져왔고, 아빠는 부서진 그릇 파편들을 주워서 안에 넣었으며 엄마는 키친 타월로 바닥을 치웠다.
그러니 이젠 달라질 것이다....나와 유신우의 악연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아줌마와 우리 엄마는 아주 친한 친구였는데 우연히도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에 살게 되어 한 가족처럼 지냈다.우리 엄마가 날 임신했을 때, 유신우는 기저귀를 차고 걷는 연습을 하던 아기였다.아줌마는 나무 그늘에서 그림자로 놀고 있던 아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해윤아, 네가 혹시 딸을 갖게 된다면 우리 아들이랑 결혼시키자. 그게 좋을 것 같지 않아?”우리 엄마는 동의하지 않았다.“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 아이가 태어난 뒤에 스스로 정하게 하자.”“아가, 이리 와 봐. 우리 아들, 아줌마 배 속에 있는 여동생을 아내로 삼는 거 어때?”유신우는 엄마의 다리 위에 엎드려서 엄지를 쪽쪽 빨면서 생글거렸다. 그러면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아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우리 엄마와 아줌마는 크게 웃었고 두 엄마는 그 자리에서 내 결혼 상대를 정했다. 내가 겨우 단추만큼 컸을 때 말이다.내가 아내라는 말을 이해했을 때는 거절하기에 너무 늦은 상태였다.게다가 나는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나는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항상 자신을 다그쳤고, 언제나 유신우를 첫 번째로 두었다.과자를 먹더라도 난 하나만 먹고 나머지 하나는 호주머니 안에 넣어 유신우의 것을 남겨두었다. 그러다 유신우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과자를 먹어주면 난 무척 기뻐했다.조금 더 큰 후엔 유신우가 학교 뒷마당에서 다른 사람과 주먹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 둘의 가방을 안고 옆에서 관전하며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욕먹을 위험을 무릅쓰고 내 용돈으로 약을 사서 그의 상처에 발라줬었다.유신우가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때, 난 멍하니 화단 옆에 앉아 그의 가방을 봐주고, 그에게 물과 타월을 가져다주고, 가끔은 그를 응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유신우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날 향해 눈을 흘겼다.난 유신우를 나의 신처럼 생각하며 그를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