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제안했다.“아니면, 절차를 문서로 정리해서 달라고 하세요. 그대로 따르면 실수할 일도 없을 거예요.” “지시연.”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게 끊겼다.유건의 냉랭한 얼굴이 보였다.시연은 침을 삼켰다.“안 돼요?”“하...”유건은 냉소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더 대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결혼식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 건 어때?” 이 말에는 날카로운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시연은 그걸 알아차렸고,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반박했다.“고유건 씨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 아니에요?”유건은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난 대충하고 싶어요.” 시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너무 이기적으로 굴지 마세요.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이 결혼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걸...”“서로 원치 않는 결혼이잖아요. 그냥 형식적인 거고, 난 이미 동의했으니까 협조할 거예요.”“그냥 번거로워서 제안한 거였어요. 당신이 싫다면 철회할게요.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요.”여자의 말에 유건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시연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결혼은 유건에게도 단순한 절차일 뿐이었다.시연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일정은 내가 조정하면 되고요.”유건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몇 초 동안 서 있다가,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갔다....제남도 방문 날짜는 모레로 정해졌다.출발 전에, 유건과 시연은 오후 4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점심시간, 시연은 임진아와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요즘 식욕이 아주 좋아졌지만, 이날은 예상외로 입맛이 없었다.“왜 그래?”진아가 시연의 안색을 살폈다.“어디 아파?”“응.”시연은 숨기지 않았다. 아침부터 아랫배가 은근히 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전 내내 나아지지 않았다.“진아야, 나 병원에 좀 가야 할 것 같아.”진아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밥이고 뭐고 필
시연이 제남도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진아는 몹시 걱정했다.“고유건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안 돼?”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내 아이야. 그 사람에게 사실을 알릴 의무는 없어.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게 좋겠어.”“시연아...”진아는 시연을 꼭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만약 몸이 안 좋으면 바로 전화해! 무슨 일이 있어도 꼭!”“응, 알겠어.”...오후 4시, 유건이 도착했다.시연은 병원 앞에서 정확히 기다리고 있었고, 차가 멈추자마자 스스로 문을 열고 올라탔다.차에 타자마자 아무 말 없이 구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유건은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피곤해?”“네.”시연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무리하면 안 돼. 일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고... 몸부터 챙겨야지. 프로젝트팀은 잠시 쉬는 게 어때?”이 말을 듣자마자 시연은 즉시 눈을 떴다.“괜찮아요. 그냥 오늘 좀 피곤할 뿐이에요.”그녀는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기회 자체는 유건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고, 지금은 ‘고유건 아내’라는 타이틀 덕에 팀원들이 별말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고유건의 아내’일 수 있을까?’‘내가 지금 프로젝트팀에서 빠진다면, 나중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그만둘 수 없었다.유건은 단순한 제안이었을 뿐이었다. 시연이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상대방이 거절하자, 유건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네 몸이니까, 네가 제일 잘 알겠지.”시연은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두 사람은 배를 타고 제남도로 향했다.제남도는 G시에 속한 해안 관광지로, 결혼식은 섬 내 최고급 호텔인 소관 호텔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호텔 측에서는 미리 일정을 비워, 호텔 전체를 고씨 가문의 결혼식 장소로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요트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호텔에서 준비한 차량이
유건은 손을 흔들어 매니저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대표님, 사모님. 두 분이 먼저 상의하세요.”매니저는 눈치 있게 자리를 떴다.유건은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임진아 말고 친한 친구 또 있어? 같은 과에서 친한 사람 있었던 것 같은데.”몇 초 동안 고민하던 시연은, 남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설마, 나한테 들러리를 세우겠다는 거예요?”“당연한 거 아니야?”유건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네가 들러리 수를 정하면, 나는 거기에 맞춰서 진행할 거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아까 말했잖아요. 들러리는 필요 없다고요.”‘들러리가 왜 필요하지?’‘진아 같은 성격이면, 와서 울기만 할 텐데.’유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지난번엔 내가 형식적으로 결혼식을 치르는 걸 비난하더니.’‘지금 보니까 나보다 더 무심하잖아?’ ‘결혼식을 해야 한다면 최소한의 절차는 따르는 게 일반적이야. 하지만 지시연은 그것조차 대충 넘어가려고...’‘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어.’“알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유건은 결혼식 진행표를 두드리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우주는 어떻게 할 거야?”“네?”시연은 놀라며 유건을 바라봤다. 그가 우주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예상 밖이었다.‘진아도 초대하고 싶지 않은데, 우주도 당연히 안 부르겠지!’ 시연이 생각하기에 우주는 이제야 점점 세상을 이해하는 나이였다. 결혼식에서 불필요한 말을 듣거나 상처를 받으면, 지금까지 진행한 치료가 모두 헛수고가 될 수도 있었다.그녀의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유건은 이를 눈치채고 냉소를 지었다.“우주를 결혼식에 초대할 생각조차 안 했다고?”시연은 차분하게 대답했다.“네, 난 우주를 부를 생각이 없어요.”그녀가 직접 인정하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대체 뭐지?’그는 우주가 시연의 유일한 가족이니, 결혼식 날 우주가 누나를 업고 웨딩카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 내지 마!”“알았어요.”시연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너, 고유건의 아내지?”“네.”시연은 인정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고유건 때문인가?’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아, 고유건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아이! 몇 개월이야?”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사람, 고유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 내가 임신한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4개월이에요.”오늘까지 정확히.“좋아!”청소부는 흡족한 듯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시연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그리고 손바닥에는 한 장의 수건이 있었다.하지만, 청소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시연은 이미 냄새를 맡았다.그녀가 의사로서, 냄새에 민감했다. ‘수건에서 강한 에테르 냄새가 나!’그 수건이 얼굴에 닿는 순간, 시연은 숨을 참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힘없이 쓰러졌다.청소부는 시연을 받아서 들고 신속하게 그녀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이어서 준비한 밧줄로 그녀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었다.그리고 시연이 들고 있던 가방을 구석에 내던졌다.마지막으로, 시연을 청소용 카트 아래의 수납공간에 밀어 넣고 커튼으로 덮었다.모든 과정이 계획된 듯 매끄럽게 진행됐다....시연은 눈을 떴다. 하지만 사방이 깜깜했다. 몸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그녀는 조금 전 숨을 참아 마취제를 들이마시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척한 건 도망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이 청소부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아이에 관해서 물었는데, 그렇다면 목표는 아이인가?’‘하지만 왜?’스스로 답을 찾기 어려웠다.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다.‘도망쳐야 해. 무조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해. 침착하자. 당황하면 안 돼.’...그 시각, 화장실에 도착한 유건은 텅 빈 공간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직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사모님께서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계신 걸지도...?”매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순식간에 소란이 일었다.청소부로 위장한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뭐야? 저 여자는 분명 에테르를 마셨을 텐데? 어떻게 뛰어내릴 수 있었지?’‘마취제도 안 통한다고?’“빨리 보안팀 불러!”누군가 다가와 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 납치범은 어디 있죠?”그때, 유건이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이 소란을 한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연을 발견했다.호텔 보안팀도 즉시 현장에 도착했다.“고 대표님!”유건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차갑게 명령했다.“멍하니 서 있을 시간 없어. 당장 잡아!”“네!”“도망가지 마!!”청소부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숨어 있을 때는 유리했지만, 대놓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멈춰!”유건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곧장 시연에게 다가갔다.사람들을 밀어내며 시연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단숨에 찢어냈다.“이봐, 당신은 누구야?”한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제 아내입니다.”아주머니는 순간 멈칫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잘 좀 챙겨요! 아내가 납치당할 뻔했잖아요!”유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는 묵묵히 시연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조금만 더 늦었다면...조금만 더 늦었다면, 유건은 숨이 멎을 뻔했다.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유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어디 다친 데 없어?”이 자세 때문에, 시연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야 했다.“안 다쳤어요. 근데...”“근데 뭐?”유건은 긴장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어디 안 좋아?”그는 조금 전 시연이 청소 카트에서 구르며 떨어지는 걸 직접 보았다.시연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갔다.“너무 피곤해요... 잠이 와요.”잠시 후, 유건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조
유건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상훈은 아직 쉬지 않고 있었다. 손자를 보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너, 지금쯤 제남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시연이랑 같이.”“시연이는 잠들었어요.”유건은 시연을 언급할 때, 무심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조금 있다가 다시 가서 함께 있을 겁니다.”“무슨 일로 온 거야?”“할아버지, 시연이가 납치될 뻔했습니다.”유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연이가 똑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고상훈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노련한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대담하네. 저질스러운 수법도 끝이 없고.”그 반응에, 유건은 확신했다. 지난번 장소미 사건은 고상훈의 소행이 아니었다.“할아버지, 그런데 왜 장소미 씨 사건을 인정하신 거예요? 혹시 아시는 게 있는 거예요?” 고상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손자는 어릴 적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다신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은데...’유건도 뭔가를 알아챘다.‘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계셔. 로얄호텔 사건부터, 칼에 찔린 일까지...’‘할아버지는 분명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할아버지.”그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그 사람들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CA국에서는 폭탄 테러를 당할 뻔했습니다! 이젠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지금까지 유건은 CA국 폭탄 사건을 일부러 고상훈에게 알리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고상훈은 그 말을 듣자, 매우 놀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놈들이 감히... 이럴 수가! 그 사람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그놈들이 누구입니까, 할아버지?”“그놈들은...”고상훈은 손자를 바라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런 추악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추악한 인간들...’유건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어렴풋이 감이 왔지만, 믿고 싶지 않
유건은 병원을 떠나 급히 제남도로 돌아갔다.가는 내내, 유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기환은 느낄 수 있었다. 유건이 뭔가 깊이 상처받았다는 것을.유건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아버지가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어린 유건은 울며 필사적으로 쫓아갔다.“아빠, 제발 가지 마세요!”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렇게 떠났고, 곧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그 후, 그는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차가운 겨울날 대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을 뿐이었다.겨우 나타난 건 가정부였다.아버지는 끝까지 만나 주지 않았다. 같은 핏줄인데도, 낯선 사람보다 더 차가웠다.어린 유건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조금만 움직여도 얼음이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리고 지금, 다시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차갑고, 서늘하고, 깊숙이 스며드는 한기.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따뜻하게 해주길 바랐다....시연은 배고픔에 잠에서 깼다.배의 통증은 사라졌기에, 시연은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우리 아기, 정말 착하네.”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카디건을 걸치고,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섰다. 너무 배고파서 뭐라도 먹어야 했다....방에 돌아온 유건은 시연이 보이지 않자, 더욱 굳은 표정을 지었다.“사람은 어디 갔지?”기환이 재빨리 답했다.“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한 형이 같이 있어요. 형수님은 무사합니다.”그는 곧바로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 형, 형수님은 어디 있어요? 형님이 사람 없다고 화내고 있어요!”[형수님? 지금 식사하고 계셔.]“아, 다행이네.”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아남았다고 느꼈다.유건 앞에서 시연이 사라진다면, 마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기분을 느낄 터였다.지금 그는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다.“형님, 형수님은 지금 식사 중입니다.”유건은 더 이상 말없이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넓은 연회장, 여러 개의 테이
다음 날, 시연은 늦잠을 잤다. 창밖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고, 시간을 보니 벌써 오전 10시였다.‘어제 그렇게 오래 잤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피곤하지?’서둘러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유건은 주지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시연이 나오자, 그는 자연스럽게 식탁을 가리켰다.“뭐라도 먹으면서 조금만 기다려. 곧 끝나.”“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잠을 잤는데도, 오히려 그가 기다리라고 하니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유건도 일을 끝냈다.그는 다가와 시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성애 이모님이 요즘 네 식욕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진짜였네?”어제저녁도, 오늘 아침도 제법 많이 먹었다.시연은 입에 넣은 꼬마 호빵을 씹으며 물었다.“언제 돌아가요? 지금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유건은 그녀에게 새우 딤섬을 하나 집어 주며 말했다.“우리 요트인데,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 없잖아.”‘그건 그렇지만, 고유건은 바쁘지 않나?’시연은 어제 납치 사건 이후 유건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전까지는 유건이 자신에게 잘 대해준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어딘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라 느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유건은 예전처럼 젠틀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결국 핵심은 ‘납치’ 사건이었을까?’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어제 나를 납치하려던 사람들... 누구예요?”유건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신경 쓰지 마. 그냥 잘 먹고 잘 쉬면서 신부 역할이나 해.”그는 시연에게 사실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말하기 싫어하는 걸 알기에, 시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호텔을 떠나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요트에 올랐다.아침을 든든히 먹은 탓인지, 요트에 타자마자 시연은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객실에서 유건과 나란히 앉아 있던 그녀는 어느새 몸을 기울여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사모님?”짐을 정리하던 시연의 방에 왕성애가 들어섰다. 뒤이어, 이호민도 들어왔다.요즘 병원 쪽에 매달려 있던 이호민은 부부 사이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줄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호민은 바닥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유건 도련님이 또 사모님을 속상하게 했나요? 괜찮아요, 사모님. 속상한 게 있으면 어르신께 말씀드리세요.”“어르신은 누구보다 사모님을 아끼시잖아요. 원래 부부는 조금씩 다투기도 해요. 집까지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캐리어를 대신 들려 했다.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저었고,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집사님, 그게 아니에요. 유건 씨가 저를 속상하게 한 게 아니라... 제가 유건 씨 속을 뒤집어놨어요. 지금은... 절 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이호민과 왕성애는 동시에 얼어붙었다.‘어떻게 된 거지...? 저런 말까지 나올 정도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시연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백팩을 둘러맸다. “이모님, 집사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그 말에, 왕성애와 이호민은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는 시연을 서둘러 붙잡았다.“사모님, 잠시만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유건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 “맞아요. 도련님 성격 급한 거 사모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홧김에 한 말일 수도 있어요.”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단호하게 말했다.“유건 씨가 돌아와서 저를 보면 더 화가 날 거예요. 전... 그걸 더 보고 싶지 않아요.”‘그 사람한테 더 미운 존재가 되기 전에 조용히 사라지는 게, 내가 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야.’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도련님이 그렇게까지...’고씨 가문 본가 대문 앞. 그 순간, 정기환이 막 대문에 들어서고 있었다.“형수님?”그는 시연이 캐리어를 끌고
유건의 분노는, 무너지는 파도처럼 쏟아졌다.하지만, 시연은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자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 보며 조용히 말했다.“지금... 많이 화났어요?”그 말에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뭐?!! 이 여자,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 상황에서 ‘많이 화났냐’고 묻는다고?’시연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조금은 멍한 목소리에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톤이었다.“잘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당신을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그게 네 진실한 마음이라고?’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니면...” 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동자에 짙은 의문을 담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짜 의문이었다.“당신은 고씨 가문의 도련님이고, 당연히 모든 걸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법적으로 당신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있으니까...”“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더라도, 나는 무조건 당신을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냐고?’ 시연의 말이 유건의 가슴을 도려냈다.‘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우린 대체 뭐였지?’ “혼인 중에 외도라니, 네 진심이 그거였어?” 유건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가라앉았지만, 안에 담긴 분노는 더 짙었다.“내 진심이... 그거였냐고요?”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그리고 문득, 아까 자신이 본 그 나비난 화분이 떠올랐다. 유건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 바로 장소미가 있는 곳. 시연은 아내였지만, 유건의 ‘첫 번째’가 아니었다. 늘 ‘두 번째’, 늘 ‘장소미의 다음’이었다.시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서로서로... 똑같지 뭐...”“뭐라고?” 유건이 날카롭게 물었다.“아...” 시연은 힘없이 웃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이젠 굳이
유건은 분명히 봤다. 두 눈으로, 직접.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무언가 기대하고 있었다.‘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그게 정말... 단순한 우연이었을지도 몰라.’‘아니면, 어쩌면... 진짜로, 오해일 수도 있잖아.’되뇔수록, 마음은 더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고유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자존심은? 너답던 원칙은 다 어디로 갔어?’유건의 감정은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그러는 사이 문밖의 시연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그러다 유건의 시선이 책상 위 어딘가에 멈췄다. 작은 노트 하나.그 작은 책상은 시연의 것이었다. 평소에 시연이 쓰던 전공 서적과 자료들이 정리돼 있었고, 그 위에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무심코 들춰본 노트 속. 글자와 숫자들이 정돈된 필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이건... 가계부?’두 페이지를 더 넘긴 순간,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장난해?’4000만 원, 우주의 첫 치료비. 그 뒤엔 우주의 식중독 입원비,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 비용... 그녀가 ‘고씨 가문'에, 아니, 유건에게 ‘빚진’ 항목들만 정리된... ‘일종의 청구 리스트’였다.‘이게... 뭐야?!’순간, 유건의 심장이 ‘툭’하고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분노가 밀물처럼 되살아났다.그중 한 줄에서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바로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비였다. ‘묘지 이전?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땐 우린 이미 결혼했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어!’‘저 여자는 단 한 마디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아니, 말하기조차 싫었던 거겠지. 나란 존재가 그 정도였다는 거잖아.’그러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똑- 똑-유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문 안 잠겼어.”밖에 있던 시연은 그 말에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 말투가...?’‘기분이 상했나, 저 정도로?’ 속으로 작게 숨을 내쉬며, 시연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유건은 작은 책상
‘정말... 그냥 가버린 거야?’시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유건이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연의 온몸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정말... 끝난 걸까?’ 무기력한 체념이 밀려오고, 그녀의 마음속은 새까맣게 비어버린 듯했다. 시연은 마침 잘못을 저지르고 버림받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웠고, 무서웠다. “형수님!”지한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멍하니 계시면 어떡해요! 형님 진짜 화나셨어요!”“지금 안 따라가면... 후회할지도 몰라요!”“아... 네!” 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바로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발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천천히요.” 지한이 팔을 내밀었다. 시연은 지한의 손을 잡고 균형을 잡으며 슬리퍼를 신었다.그때, 시연의 시선이 강수희에게 향했다. ‘왜... 내가 침대에 있었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수희는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연아, 어서 가보렴. 고 대표님한테 잘 설명해. 오해일 뿐이잖니?”“네...” 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유건이 먼저니까 무조건 그를 잡아야 했다.하지만 병실을 나서자 유건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형님, 본가로 가셨어요. 형수님도 어서 타세요.”“알겠어요.”...본가에 도착하자, 왕성애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사모님, 도련님이랑 싸우셨어요? 도련님 얼굴이... 귀신 본 사람보다 더 창백하더라고요. 도련님의 그렇게 화난 얼굴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몰라요.”시연은 말없이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다른 남자랑 침대에 있던 걸 들켰다’라고 할 수도 없잖아.’유건이 화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을 터.“이모님,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얼른 가봐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얘기만 잘하면 다 풀릴 거예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마주 내려오던 가사도우미들의 손에 익숙한 화분이 들려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