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들이 대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납치범에게 신뢰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법이야!’소미의 눈가가 뜨거워졌고,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갑자기 뚱뚱한 남자가 차 문을 열었다.운전하고 있는 마른 남자를 흘끗 보며 물었다. “던질까?”“응.” 마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뚱뚱한 남자가 소미를 묶고 있는 밧줄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소미는 온몸이 굳어버렸다.‘고속도로에서 이 속도로 달리는 차에서 나를 던진다고?’‘죽지 않더라도 크게 다칠 게 분명해!’‘게다가 사방에서 차들이 오가니, 잘못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어!’“자! 꺼져라!”“으윽...”예상했던 대로, 소미는 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낡은 헝겊 조각처럼 아무런 힘도 없이, 단숨에 멀리 튕겨 나갔다.차 안에서 뚱뚱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아! 생각도 못 했네. 고유건 같은 영리한 놈이 여자한테 속다니!”“아무리 영리해도 인간인걸. 사람이라면 다 약점이 있는 법이지.”...땅에 부딪히는 순간, 소미는 온몸으로 고통을 느꼈다. 땅에 쓸린 피부가 화끈거리고, 뼈마디는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으흑...”그녀는 온몸이 묶인 데다 입까지 막혀 있어서,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낼 수 없었다.이게 과연 다행일까, 불행일까?도로에 차가 많지 않았지만, 가끔 지나가는 차량은 소미를 피해 지나칠 뿐이었다.‘누가 좀 나를 도와줄 수 없을까?’그때, 전방에서 두 개의 강한 불빛이 다가왔다.자동차 전조등이었다.소미는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차가 멈춰 섰고,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렸다.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윤이 나는 남성용 비즈니스 구두, 정교한 마감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소미는 천천히 눈을 떴다.노은범이었다.은범은 소미를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장소미 씨?”‘시연이의 이복언니?’두 사람은 서로 친하지 않지만,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다.“왜 이 모양이에요?”“으윽, 으윽...”그제야 은범은 소미의 입이
장미리가 말하기를 꺼리니, 은범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별거 아니라는 듯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시간,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서 고상훈을 문병하고 있었다.이호민도 함께 있었고, 고상훈은 손에 달력을 들고 날짜를 살피며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둘이 도착하자 고상훈이 손짓했다.“잘 왔다. 결혼 날짜를 보는 중인데, 이 집사도 점을 쳐봤다더라. 다음 달 9일로 정하자꾸나.”순간, 시연은 눈이 동그래졌다.유건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다음 달 9일? 고작 2주 후인데?’“이렇게 빨리요?” 시연은 난색을 보였다.“빨라?”고상훈과 이호민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전혀 안 빠르단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2주면 충분하지. 걱정하지 마라.”고상훈은 달력을 이호민에게 건네며 시연의 배를 흘끗 보았다.“내 증손자가 아직 티가 나기 전에 서둘러야 해. 더 미루면 배가 불러올 테니까.”그 이유 앞에서 시연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그것뿐만이 아니야. 결혼식은 체력이 많이 드는 행사라, 배가 많이 나오면 네가 힘들까 봐서 걱정이구나.”여기까지 왔는데, 시연이 거절할 수 있을까?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할게요.”“역시 내 손녀 며느리가 가장 착하지.”고상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호민에게 당부했다. “바로 준비 시작해라.”“걱정 마세요, 어르신.”“다만...”고상훈은 한숨을 쉬었다.“내 몸 상태 때문에 시연이에게 미안하구나. 결혼식은 G시에서 해야 하고, 신혼여행도 당장은 힘들 테니.”“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너희 둘은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괜찮겠니?”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어차피 지금은 고유건이랑 어색하니까...’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무심코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유건은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정확히는, 시연이 돌아온 후로 줄곧 이런 태도였다.차갑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유건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가야 해.”그리고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너한테 말하는 건,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야.” ‘할아버지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한다고 믿고 있으실 테니까.’ “기환이가 너랑 동행할 거야.”시연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이 사람이 떠나는 걸 막을 수 없어.’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무 말 없이, 그것이 곧 동의라는 듯.유건은 이를 악물었다. “고마워.”그는 차문을 열고 타더니, 곧바로 떠나버렸다.시연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형수님.”기환이 그녀의 뒤에 섰다. “차에 타세요.”“네.” 시연은 조용히 차에 올랐다.기환이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어디로? 본가로 돌아갈 수는 없고...’‘혼자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고유건이 나를 버렸다는 걸 알리는 거나 다름없잖아.’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데나, 그냥 드라이브나 하고 싶어요.”“네, 알겠습니다.”기환은 룸미러로 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저렇게 연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병원.유건이 도착하기 전에, 노은범은 이미 떠나 있었다.그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장소미는 이미 병실로 옮겨져 있었고, 장미리가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소미야, 많이 아프지? 아프면 참지 말고 울어도 돼.”“엄마, 으흑...”그 광경을 본 순간, 유건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고,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듯했다. “소미 씨.”소미가 고개를 들었다. 유건을 보는 순간, 눈물이 더 쏟아졌다.“유건 씨! 으아아...”유건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소미의 손을 꼭 잡았다.“유건 씨, 아기, 우리 아기...”소미는 흐느껴 울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결국, 장미리가 울면서 대신 말했다.“고 대표님, 소미가 아이를... 잃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유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가장 걱정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어버렸다.납치,
유건의 눈빛이 깊고 어두웠다. ‘내가 반드시 답을 얻어야 해!’소미는 목이 메었다. “엄마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고상훈 어르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장미리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분 말고 또 누가 네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 “엄마...”언성이 높아졌다.유건은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미 씨, 푹 쉬어.”그는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지금 당장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확인해야 해!’유건이 나가자, 장미리는 긴장한 얼굴로 소미의 손을 잡았다.“이래도 괜찮겠지?”소미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건 벼랑 끝에서 내딛는 한 걸음이었다.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고유건일 거예요.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평생 저를 잊지 못할 거라고요.” 그 말을 듣고 장미리마저도 가슴이 떨렸다....이호민은 고상훈의 발을 씻기고 있는데, 유건이 다시 돌아왔다.게다가 유건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고상훈은 힐끗 손자를 보더니 흥미로운 듯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할아버지.”유건은 빠르게 다가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소미 씨의 아이... 할아버지가 시킨 겁니까?”“뭐?”고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리고 이내, 노인은 피식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장소미가 그렇게 말하던가?”“할아버지!”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는 대답을 듣고 싶어요. 맞습니까, 아닙니까?”“도련님...”이호민은 당황하며 중재하려 했다. “어르신께 그렇게 따지듯이 묻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유건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아이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장소미와 그 아이는 모두 내 가족인데, 할아버지가 대체 왜!!’“후후.”고상훈은 미소를 거두고 손을 흔들었다.“이 집사, 정말 눈치가 없구나. 내 목숨 따윈, 그 연예인보다 하찮지 않겠나?” 이 말은 유건의 가슴
유건은 서재에 들어가, 대형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순식간에 연기가 피어오르며, 남자의 또렷한 이목구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유건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새벽 세 시.기환은 뒷좌석에 앉은 시연을 힐끗 보았다. “형수님, 계속 드라이브하실 건가요?”드라이브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목적 없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시연은 창에 기대어 멍하니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아니면...” 기환이 제안했다. “이만 들어가시고, 형님한테 전화해 보실래요?”혹시 유건이 집에 돌아왔는지 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밤새도록 이러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나는 남자라 괜찮지만, 형수님은 임산부니까...’“아니에요.”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그녀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유건이 소미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건 한두 번이 아니라, 항상 그랬다.“여긴 어디죠?”“곧 G시를 벗어나, 옆 도시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기환 씨도 가끔은 바보처럼 귀엽다니까? G시 안에서만 맴돌면 될 것을, 굳이 여기까지 왔다니.’“다시 돌아가요.”어차피 돌아가는 길도 머니까.“알겠습니다.”기환은 바로 차를 돌려 시내로 향했다.심심했던 시연은 기환과 대화를 나누었다.“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가끔 친척 동생들이 유건 씨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는 걸 들은 적 있어요.”시연은 원래 G시에서 제일 유명한 네 명의 명문가 도련님 중에서 유건이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부지하, 주정빈, 그리고 유강석 중 누구도 유건을 ‘형님’이라 부르지 않았다.즉, ‘둘째 오빠’라는 호칭은 오직 고씨 가문에서만 쓰이는 듯했다.“그건... 사실 유건 형님에게 친형이 한 명 더 있어요.”“뭐라고요?”시연은 더욱 궁금해졌다.“진짜 친형이에요?”“네.”“그런데 저는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죠?”“그게...”기환은 깊은
방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건은 2초간 기다렸다. 그리고 여자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들었다. ‘화난 건가?’ 그도 밤새 잠을 못 자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고 자.” “네?” 시연이 눈을 떴다. 놀란 표정이었다. “아직 안 갔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나 안 먹어요. 그냥 잘 거예요.” 차 안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었던 그 허리와 등의 뻐근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물며 그녀는 임산부였다. ‘화났네.’ 유건은 확신했다. 시연은 원래 그랬다. 화가 나도 히스테리컬하게 소리 지르는 법이 없었다. ‘왜 화가 난 거지?’ ‘어젯밤, 나한테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가 끝내 떠나서 그런 걸까?’ 사정이 있었고, 유건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연을 혼자 남겨둔 건, 확실히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다시 한번 참고 말했다. “한 번 더 말할게. 일어나서 뭐라도 먹어. 빈속으로 있으면 속 상해.”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숙여 이불을 들추고, 여자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시연이 앉자, 긴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먹는다니까요...!” “지시연!” 유건도 더는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어젯밤에 네 곁을 지키지 않긴 했지만, 너한테 사실을 숨기진 않았잖아. 그런데 고작 그것 때문에 밥도 안 먹고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오해예요. 화 안 났고,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을 뿐이라고요.”“그럼 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데?” 유건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난 바람난 것도 아니고, 어젯밤에 서재에서 잤어.” ‘뭐라고?’침착했던 시연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 시연은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어디 가?” 유건이 바로 따라붙었다. “신발도 안 신었잖아!”아까 유건이 시연이를 안아서 내려왔으니, 그녀는 신발은커녕 양말도 없었다.결국, 시연이 변기를 붙잡고 토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유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된 거지? 요 며칠 동안은 멀쩡했는데?’유건은 말없이 웅크린 채로 시연에게 입을 헹굴 물을 준비해 주었다.곧이어 휴지도 건넸다. 시연은 그것을 받아서 들었다. “고마워요.”그리고 입을 닦은 후 또다시 말했다. “근데, 나 진짜 못 먹겠어요. 제발 억지로 먹이려 하지 마세요.”‘내가 강요했다고? 다 널 위해서였는데?’‘뭐야, 나한테 반항하려던 게 아니었나?’ “도련님...”왕성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임신하면 원래 그래요. 먹고 싶지 않을 땐, 그냥 안 먹는 게 좋아요.”“들었죠?”시연이 유건을 힐끗 쳐다보고 일어섰다.그러자마자, 다시 유건에게 번쩍 안겼다.“나도 발 있어요. 걸을 수 있다고요!”“신발 안 신었잖아. 내가 안아줄게.”시연은 눈이 붉어졌다. ‘어쩜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남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잖아!’ 침실로 돌아오자, 유건은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시연은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까지 덮어버렸다. 지금은 유건을 보고 싶지 않았다.기분이 상한 유건은 풀이 죽은 채 방을 나섰다.왕성애가 유건을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이요, 밤새 못 자서 입맛이 없는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밤새 못 잤다고요?”“네.”왕성애는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침에 제가 일어났을 때, 그제야 들어오더라고요. 병원 일이 있었나 했죠. 도련님은 모르셨어요?”의사가 야간 근무를 하는 건 흔한 일이니 왕성애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보니, 유건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도련님, 이번엔 좀 너무하셨어요. 사모님께서 밤새 안 들어왔는데 모르셨다고요?
시연이 푹 자고 나니 오후 두 시가 되어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배고픔이었다. 정말 허기가 져서 배가 등에 붙을 것 같았다.왕성애는 이미 음식을 준비해 놓고 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시연이 요즘 입맛이 좋지 않아 다양한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았다. 하나라도 더 먹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시연은 이번 잠으로 뭔가 체력이 회복된 듯했다. 입맛이 확 돌아와 무엇이든 맛있게 먹었다.“어머,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네요.”왕성애는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천천히 드세요. 목 막히시겠어요. 갑자기 너무 많이 먹으면 또 토하는 거 아니에요?”“괜찮아요. 왠지 이제 다 나은 것 같아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넣었다.임신한 몸은 예민한 법이었지만, 시연은 정말로 토하지 않았다.왕성애는 몹시 기뻤다.“이제야 좀 나아진 것 같네요. 앞으로는 잘 먹고 잘 마셔야죠! 배도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를 거예요. 아주 좋아요!”그때 초인종이 울렸다.왕성애가 나가서 문을 열고 돌아왔을 때, 손에는 상자가 들려 있었다.“뭐죠?”“케이크예요.”왕성애는 상자를 내려놓으며 물었다.“사모님, 제가 열어볼까요? 지한이 주문했다고 하는데, 아마 도련님께서 보내신 모양이에요. 지금 드시겠어요?” “지금은 도저히 못 먹겠어요.”시연은 둥글게 부푼 배를 문질렀다.“이모님, 좋아하시면 드세요.”“아니에요. 제가 왜 먹어요? 못 드시겠으면 그냥 놔둘게요. 밤에 간식으로 드시면 되잖아요.”“그것도 괜찮네요.”배부르게 먹고 나서, 시연은 서재로 갔다.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필요한 자료를 가방에 챙겨왔으니, 집에서 정리하면 됐다.오후 다섯 시쯤, 유건은 집에 들렀다. 저녁에 연회가 있어 옷을 갈아입으러 온 것이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다이닝 룸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남자의 눈에 띈 것은
“느낌이 안 좋네요...!”이호민은 다급히 벽 쪽 스위치를 눌렀다.불이 켜지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 안은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책상과 의자는 비뚤게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엔 깨진 유리 조각과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공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이 냄새는 또 뭐예요...?” 왕성애는 인상을 구기며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문부터 열어야겠어요!못 견디겠어요!”“전 유건 도련님부터 볼게요.” 이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구겨진 채 누워 있는 유건이 보였다. 셔츠도 그대로, 신발도 그대로. 온몸이 술과 담배에 절여져 있었다.“도련님.” 이호민이 조심스럽게 부르며 다가갔다.“유건 도련님, 일어나보세요.”숨소리는 있었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이 정도로 취했다고?’조심스레 어깨를 두드리려던 찰나, 갑자기 유건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윽...!”‘진짜 토하네...’이호민은 욕실로 다가가 보니, 유건은 변기에 몸을 웅크리고 술을 게워 내고 있었다.곧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세수하며 거울 앞에 섰다.“유건 도련님...”이호민이 수건을 건넸다.“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아무리 젊어도, 이렇게 몸 상하면 어르신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할아버지한텐 말하지 마세요.”유건은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고, 그대로 빨래통에 던졌다. 이어서 욕실을 나서며 배 쪽을 살짝 짚었다.“배... 괜찮으세요?”이호민이 걱정스레 다가오며 말했다.“이럴 때일수록... 사모님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전 두 분 사이에 큰 오해가 있다고 봐요. 얘기만 잘하면...”“지시연 얘기는 하지 마세요.”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게 가라앉았다.“앞으로 그 여자 이름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끝을 세게 눌렀다.“진정한 고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이럴
‘말도 안 돼!!’강수희는 숨을 들이켰다. 놀라움, 당혹, 불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시연아, 넌 우리 은범이를 그렇게 아꼈잖아. 은범이 곁을 밤새워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아무 감정이 없다고?”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제가 은범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이었어요.”“그렇게 말하지 마.” 강수희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아냐... 날 원망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너희 사이 갈라놓았던 거, 다 인정할게.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절대 방해 안 할게. 아니다... 아예 안 보이게 사라질게. 너만 은범이 옆에 있어 준다면...”“사모님.”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막아섰다. “그만 말씀하세요. 저는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젠, 정말로... 아니에요.”강수희는 마치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희 둘, 그렇게 사랑했는데...”“그건 과거일 뿐이에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요.”그 말에, 강수희는 말문이 막혀 굳어버렸다. 시연은 한 박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사모님의 부탁으로 잠시 은범이 곁에 있어 줄 순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일시적인 거예요. 제가 다시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 또 무너지면, 은범이는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은범이는 스스로 일어나야 해요. 온 세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떠나도 견딜 수 있어야... 그게 진짜 회복이에요.”시연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가방을 메고, 마지막으로 강수희를 바라봤다.“사모님, 전 오늘 은범이 병실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제 존재가 지금 은범이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니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지하철에서 내리자, 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할아버지의 전화
“그 말...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시연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교수님한테...” 강수희는 급히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우주 진료 보던 그 정신과 교수님. 그분이 직접 말했어, 네가 은범이한테 도움이 된다고.”“맞아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천천히 손을 빼냈다.“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원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거지, 제가 원치 않음에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아이... 너무 똑똑하네.’맞는 말이었다. 심재규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시연이 원할 경우에만’이라고.하지만 아들이 스스로 생을 끊으려 했던 그날 밤은 겪은 순간부터, 강수희의 모든 이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앞으로 치료받는 동안 은범이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이번엔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까?또 그다음엔? 그땐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강수희는 더 이상 아들의 생명을 ‘확률’에 걸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결국 시연이 곁에 있는 것이었다.“시연아... 너랑 은범이, 한때 사랑했던 사이잖니. 정말... 정말 이렇게 외면할 수 있어?”그 한마디로, 시연을 ‘사람 생명을 외면한 냉혈한’으로 몰아붙였다.‘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이 감정에, 죄책감에, 죄의식에.’하지만 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을 조용히 쥐며 입을 열었다.“제가 은범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은범이의 상태가 좋아지고, 나아지게 된다면... 좋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다음...?”“네, 제가 언젠가 자리를 뜨게 되면요?”급격히 표정이 굳은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엔, 안타까움도, 체념도 섞여 있었다.“사모님,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은범이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요.”“그... 그건...”강수희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려
지하는 여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걸음을 천천히 맞추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진아는 입을 벌렸다.‘세상에...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저 양반.’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좋았어, 이거 한 장만 박제해 두자. 다음에 또 장난치면 바로 보여줘야지.”그녀는 그 장면을 확대하여 정확히 프레임에 넣었다.찰칵- 사진을 찍고는 핸드폰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여자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나, 저 여자 어디서 봤지?’...그 시각, 시연의 집.시연은 느지막이 일어나, 진아가 남겨두고 간 국을 데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시연아! 은범이가 깨어났어!]“정말요?”시연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정말 다행이에요. 어때요? 상태는?”[훨씬 나아졌대. 교수님도 그러시더라, 기적 같다고.]‘진짜로... 다행이다.’그 순간, 시연의 가슴 깊이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무거웠던 짐 하나가 내려간 듯했다.[시연아, 시간 괜찮으면 병원에 들러줄래? 은범이가 널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시연은 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확인할 건 해야지.’“네, 오늘 쉬는 날이라 금방 갈게요.”[정말? 정말 고맙다!]강수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우리 기다리고 있을게.]“네.”...병원.병실 앞. 강수희는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시연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얼굴이었다.“시연아!”그리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친근하게 웃으며, 팔짱까지 끼는 모습. 이전과는 딴판이었다.“어제 일은 잘 해결됐지? 고 대표님이랑도... 잘 풀었어?”너무도 티 나는, 의도된 질문.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문제없어요.”“그렇구나...” 강수희의 눈빛에 실망이 그대로 비쳤다. ‘생각보다... 잘 안됐구나’하는 반응이었다“그럼 들어가자. 은범이는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