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건은 2초간 기다렸다. 그리고 여자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들었다. ‘화난 건가?’ 그도 밤새 잠을 못 자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고 자.” “네?” 시연이 눈을 떴다. 놀란 표정이었다. “아직 안 갔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나 안 먹어요. 그냥 잘 거예요.” 차 안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었던 그 허리와 등의 뻐근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물며 그녀는 임산부였다. ‘화났네.’ 유건은 확신했다. 시연은 원래 그랬다. 화가 나도 히스테리컬하게 소리 지르는 법이 없었다. ‘왜 화가 난 거지?’ ‘어젯밤, 나한테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가 끝내 떠나서 그런 걸까?’ 사정이 있었고, 유건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연을 혼자 남겨둔 건, 확실히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다시 한번 참고 말했다. “한 번 더 말할게. 일어나서 뭐라도 먹어. 빈속으로 있으면 속 상해.”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숙여 이불을 들추고, 여자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시연이 앉자, 긴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먹는다니까요...!” “지시연!” 유건도 더는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어젯밤에 네 곁을 지키지 않긴 했지만, 너한테 사실을 숨기진 않았잖아. 그런데 고작 그것 때문에 밥도 안 먹고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오해예요. 화 안 났고,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을 뿐이라고요.”“그럼 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데?” 유건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난 바람난 것도 아니고, 어젯밤에 서재에서 잤어.” ‘뭐라고?’침착했던 시연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 시연은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어디 가?” 유건이 바로 따라붙었다. “신발도 안 신었잖아!”아까 유건이 시연이를 안아서 내려왔으니, 그녀는 신발은커녕 양말도 없었다.결국, 시연이 변기를 붙잡고 토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유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된 거지? 요 며칠 동안은 멀쩡했는데?’유건은 말없이 웅크린 채로 시연에게 입을 헹굴 물을 준비해 주었다.곧이어 휴지도 건넸다. 시연은 그것을 받아서 들었다. “고마워요.”그리고 입을 닦은 후 또다시 말했다. “근데, 나 진짜 못 먹겠어요. 제발 억지로 먹이려 하지 마세요.”‘내가 강요했다고? 다 널 위해서였는데?’‘뭐야, 나한테 반항하려던 게 아니었나?’ “도련님...”왕성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임신하면 원래 그래요. 먹고 싶지 않을 땐, 그냥 안 먹는 게 좋아요.”“들었죠?”시연이 유건을 힐끗 쳐다보고 일어섰다.그러자마자, 다시 유건에게 번쩍 안겼다.“나도 발 있어요. 걸을 수 있다고요!”“신발 안 신었잖아. 내가 안아줄게.”시연은 눈이 붉어졌다. ‘어쩜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남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잖아!’ 침실로 돌아오자, 유건은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시연은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까지 덮어버렸다. 지금은 유건을 보고 싶지 않았다.기분이 상한 유건은 풀이 죽은 채 방을 나섰다.왕성애가 유건을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이요, 밤새 못 자서 입맛이 없는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밤새 못 잤다고요?”“네.”왕성애는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침에 제가 일어났을 때, 그제야 들어오더라고요. 병원 일이 있었나 했죠. 도련님은 모르셨어요?”의사가 야간 근무를 하는 건 흔한 일이니 왕성애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보니, 유건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도련님, 이번엔 좀 너무하셨어요. 사모님께서 밤새 안 들어왔는데 모르셨다고요?
시연이 푹 자고 나니 오후 두 시가 되어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배고픔이었다. 정말 허기가 져서 배가 등에 붙을 것 같았다.왕성애는 이미 음식을 준비해 놓고 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시연이 요즘 입맛이 좋지 않아 다양한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았다. 하나라도 더 먹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시연은 이번 잠으로 뭔가 체력이 회복된 듯했다. 입맛이 확 돌아와 무엇이든 맛있게 먹었다.“어머,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네요.”왕성애는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천천히 드세요. 목 막히시겠어요. 갑자기 너무 많이 먹으면 또 토하는 거 아니에요?”“괜찮아요. 왠지 이제 다 나은 것 같아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넣었다.임신한 몸은 예민한 법이었지만, 시연은 정말로 토하지 않았다.왕성애는 몹시 기뻤다.“이제야 좀 나아진 것 같네요. 앞으로는 잘 먹고 잘 마셔야죠! 배도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를 거예요. 아주 좋아요!”그때 초인종이 울렸다.왕성애가 나가서 문을 열고 돌아왔을 때, 손에는 상자가 들려 있었다.“뭐죠?”“케이크예요.”왕성애는 상자를 내려놓으며 물었다.“사모님, 제가 열어볼까요? 지한이 주문했다고 하는데, 아마 도련님께서 보내신 모양이에요. 지금 드시겠어요?” “지금은 도저히 못 먹겠어요.”시연은 둥글게 부푼 배를 문질렀다.“이모님, 좋아하시면 드세요.”“아니에요. 제가 왜 먹어요? 못 드시겠으면 그냥 놔둘게요. 밤에 간식으로 드시면 되잖아요.”“그것도 괜찮네요.”배부르게 먹고 나서, 시연은 서재로 갔다.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필요한 자료를 가방에 챙겨왔으니, 집에서 정리하면 됐다.오후 다섯 시쯤, 유건은 집에 들렀다. 저녁에 연회가 있어 옷을 갈아입으러 온 것이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다이닝 룸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남자의 눈에 띈 것은
집으로 돌아온 이후, 시연은 유건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한 번도 마음 편할 때가 없었다.그는 매번 냉랭한 태도를 보이거나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당신도 기분 나쁘겠지만, 나도 똑같아요!”어떤 여자가 남자의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머물고 싶겠는가?“나도 당신이 장소미랑 잘 되길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놓아줘요. 날 해방시켜 달라고요!”‘해방, 놓아주기...’유건의 숨이 잠시 멎었다.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다.“그렇게 힘들다면, 대체 왜 내 곁으로 돌아온 거야?”“흥.” 시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왜 날 내쫓지 않는 거예요?”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말이 없었다.유건은 불효자가 될 수 없었다.그리고 시연은, 은인을 저버릴 수 없었다.둘 다 어쩔 수 없었다. 선택지가 없었다.말없이, 유건은 조용히 서재를 떠났다.시연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로 돌아가 자료 정리에 몰입했다.이 결혼 생활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오직 내 미래뿐이야.’‘이런 의미도 없는 결혼생활에 신경을 쓸 시간 따윈 없어!’...밤 10시, 시연은 자료 정리를 마치고 욕실로 가 씻고 자려고 했다. 옷을 챙기던 중,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시연 씨.]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다.[저는 부지하예요. 유건이 친구죠.]“안녕하세요.”시연은 기억했다. ‘부지하? G시에서 아주 유명한 부씨 가문의 도련님이자, 고유건의 죽마고우잖아!’ “무슨 일이시죠?”[다름이 아니라, 유건이가 많이 취했어요. 혹시 오셔서 데려갈 수 있나요?]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하필 나야? 지한 씨는 어디 있고, 기환 씨는?’[그리고요...]지하는 먼저 설명을 덧붙였다.[유건이가 토했어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저희는 다 남자라 어쩌질 못하겠어요.]이는 시연이 거절할 수 없는
차가운 얼음물이 닿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넓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또렷한 시야 속에 시연의 단정한 이목구비가 들어왔다.“깼어요?”시연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말했다.유건은 머리가 아파 어리둥절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마치 순진한 아이 같았다.“가만히 있어요.”시연은 경고했다.“움직이면 또 물 뿌릴 거예요.”마치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유건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시연은 손을 뻗어 남자의 젖은 외투를 벗기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속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기다려요.”그녀는 욕실로 가서 수건을 적셔 돌아와 간단히 물기를 닦아주었다.“일단 이렇게 하고, 집에 가서 씻어요.”그리고 준비해 온 옷을 하나하나 입혔다.어릴 때부터 키 180cm인 남동생을 챙기며 익숙해진 덕분에, 그녀는 유건을 돌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다 됐어요.”시연은 남자의 양복 깃을 정리하며 툭툭 털었다.“일어날 수 있어요? 집으로 가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를 허리에 감싸 안았다.시연은 굳어버렸다. 한순간도 움직이지 못했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건의 짙은 갈색 머리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올라가,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힘들어. 너무 힘들어.”남자의 목소리는 흐릿하고 나른했다.“알아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본인이 지금 누구를 안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혹시 나를 장소미로 착각한 건 아닐까?’‘뭐, 상관없어.’그녀는 천천히 유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도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본 적 있어요. 나도 어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적이 있다고요. 그 마음, 잘 알아요.”생이별의 아픔은,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시연은 그저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유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맑았다.“네가 말하는 사람, 노은범이지?”
정기환은 대표실에서 시연을 보자, 놀란 듯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형수님, 어쩐 일이에요? 지금 막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는데요.”“괜찮아요.”시연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가방을 내려놓았다.“기환 씨도 바쁘잖아요. 난 애도 아니고, 혼자 올 수 있어요.”그리고 물었다.“유건 씨는 아직 회의 중이죠?”“네.” 기환이 옆방을 가리켰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알겠어요.”시연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그럼 난 공부하면서 기다릴게요.”“그래요.”기환은 그녀가 펼친 의학서를 흘깃 보았다.책이 꽤 두꺼웠다. 게다가 자신이 모르는 단어들도 빼곡했다. ‘형수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회의실 쪽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중간에 주지한이 자료를 가지러 들렀다. 시연은 사업적 이야기를 잘 모르지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잠시 후, 유건이 지한과 함께 돌아왔다. 걸어오면서도 바삐 대화를 나눴다.“최대한 빠른 항공편으로 준비해. 직항이 없으면 경유라도 좋아.”“알겠습니다.”두 사람 모두 빠른 걸음이었다. 불필요한 말은 없었다.유건은 사무실로 들어서다가 시연을 발견하고 멈칫하며 이마를 찌푸렸다.‘아, 웨딩드레스 피팅.’“저기, 나...”“들었어요.”시연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분위기를 보고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괜히 유건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 혼자 가도 돼요. 웨딩드레스 피팅, 별거 아니잖아요.”그녀의 배려심에, 유건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미안해. 정말 일이 있어서 그런데, 이틀만 기다려 줄 수 있어?”“괜찮아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이틀 후엔 나도 수술 일정이 있어서 못 가요.”그녀 역시 바빴다. 일도 해야 하고, 시험 준비도 해야 했다.더 나은 방법이 없었고, 유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피팅하면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꼭 얘기해줘. 불편하거나 싫은 건 참지 말고.”“네.”유건 일행은 시간이 촉박해 서둘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바로 노은범이었다.그는 이곳에서 고객을 만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생각해 보면, 은범과 시연도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은범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시연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야.”“오랜만이네.”은범의 가슴이 저릿했다.그날 이후, 은범이 아무리 찾아도 시연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답이 없었다.은범은 오늘 마주쳤을 때도, 그녀가 외면할 거라 생각했다.은범이 카운터를 가리켰다.“저 팔찌, 마음에 들어? 내가 사줄게.”“아니, 필요 없어.”시연은 당연하다는 듯 남자의 팔을 붙잡고 거절했다.은범이 미간을 좁혔다.그가 말하기도 전에,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 오늘 웨딩드레스 피팅하러 왔어.”은범은 충격을 받은 듯 굳어버렸다.‘내가 잘못 들은 걸까? 웨딩드레스?’‘시연이가 결혼한다고?’그는 간신히 물었다.“누구랑?”시연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유건 씨...”“그 사람이랑?”은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그 사람은... 장소미와...”‘만나고 있지 않을까?’은범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라도 시연이 상처받을까 봐...그러나 시연은 차분했다. 상처받은 기색도 없었다.“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런 결혼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으니까.”‘무슨 말이야? 체념인가? 아니면 단순한 현실 수용?’갑자기, 은범은 깨달았다.“혹시 우주 때문이야?”‘웰스’로 가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내 도움을 거부한 이상, 시연이한테 남은 선택지는 고씨 가문뿐이잖아.’‘결국,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시간이 됐네. 난 먼저 갈게.”가볍고도 덤덤한 인사였다.은범은
“시연아.”진아는 간식을 먹을 생각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시연 앞에 내밀었다.“이 사람, 너 맞아?”“뭐?”시연은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또다시 실시간 검색어에 ‘폭탄’이 터졌다.그리고, 그녀가 그 주인공이었다.[GP그룹 대표, 결혼 공식 발표.]시연이 기사를 열어보니, 사진은 없었다.단순히 유건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며, 신부는 어릴 적 정혼한 상대인 시연이라는 내용뿐이었다.딱 고씨 가문의 스타일이었다.고상훈이 언급했던 일이었기에, 시연은 놀라지 않았다.그래서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웃었다.“기사에 나온 그대로야. 나 맞아.”“그런데도 웃음이 나와?”진아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노은범을 두고, 고유건 때문에 이러는 거야?”“응.”하은도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유건이 재력가인 건 맞지만, 장소미와 얽힌 일을 듣고 난 후로는 그를 응원할 수 없었다.“시연아, 진지하게 생각해 봐. 괜히 부잣집에 시집가서 고생하는 거 아니야?”‘고생?’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아마 나보다는 고유건이 더 힘들 거야.’ ‘나는 ‘혜택’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어.’ ‘그런 입장에서 ‘고생’이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지...’‘내가 감히 ‘고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위선자가 되는 거 아닐까?’ 그래서 친구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했다.“나는 고상훈 어르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그에 대한 보답이 필요해.”이제 진아와 하은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우주의 일과 빚을 지기 싫어하는 시연의 성격도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은 시연이 결혼으로 그 은혜를 갚는 것이 방법 중 한 가지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의 침묵을 보고, 시연은 웃음을 지었다.“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들이야? 나는 지금 큰 집에서 살고, 차도 있고, 가정부까지 있어. 나쁘지 않아.”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고씨 가문으로 들어가면서 생활비 부담이 사라졌고, 수입도 온전히 저축할 수 있었다.“점심 같이 먹자. 내가 살게.”하은은 단순한 성격이었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안 좋네요...!”이호민은 다급히 벽 쪽 스위치를 눌렀다.불이 켜지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 안은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책상과 의자는 비뚤게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엔 깨진 유리 조각과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공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이 냄새는 또 뭐예요...?” 왕성애는 인상을 구기며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문부터 열어야겠어요!못 견디겠어요!”“전 유건 도련님부터 볼게요.” 이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구겨진 채 누워 있는 유건이 보였다. 셔츠도 그대로, 신발도 그대로. 온몸이 술과 담배에 절여져 있었다.“도련님.” 이호민이 조심스럽게 부르며 다가갔다.“유건 도련님, 일어나보세요.”숨소리는 있었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이 정도로 취했다고?’조심스레 어깨를 두드리려던 찰나, 갑자기 유건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윽...!”‘진짜 토하네...’이호민은 욕실로 다가가 보니, 유건은 변기에 몸을 웅크리고 술을 게워 내고 있었다.곧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세수하며 거울 앞에 섰다.“유건 도련님...”이호민이 수건을 건넸다.“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아무리 젊어도, 이렇게 몸 상하면 어르신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할아버지한텐 말하지 마세요.”유건은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고, 그대로 빨래통에 던졌다. 이어서 욕실을 나서며 배 쪽을 살짝 짚었다.“배... 괜찮으세요?”이호민이 걱정스레 다가오며 말했다.“이럴 때일수록... 사모님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전 두 분 사이에 큰 오해가 있다고 봐요. 얘기만 잘하면...”“지시연 얘기는 하지 마세요.”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게 가라앉았다.“앞으로 그 여자 이름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끝을 세게 눌렀다.“진정한 고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이럴
‘말도 안 돼!!’강수희는 숨을 들이켰다. 놀라움, 당혹, 불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시연아, 넌 우리 은범이를 그렇게 아꼈잖아. 은범이 곁을 밤새워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아무 감정이 없다고?”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제가 은범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이었어요.”“그렇게 말하지 마.” 강수희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아냐... 날 원망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너희 사이 갈라놓았던 거, 다 인정할게.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절대 방해 안 할게. 아니다... 아예 안 보이게 사라질게. 너만 은범이 옆에 있어 준다면...”“사모님.”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막아섰다. “그만 말씀하세요. 저는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젠, 정말로... 아니에요.”강수희는 마치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희 둘, 그렇게 사랑했는데...”“그건 과거일 뿐이에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요.”그 말에, 강수희는 말문이 막혀 굳어버렸다. 시연은 한 박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사모님의 부탁으로 잠시 은범이 곁에 있어 줄 순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일시적인 거예요. 제가 다시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 또 무너지면, 은범이는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은범이는 스스로 일어나야 해요. 온 세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떠나도 견딜 수 있어야... 그게 진짜 회복이에요.”시연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가방을 메고, 마지막으로 강수희를 바라봤다.“사모님, 전 오늘 은범이 병실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제 존재가 지금 은범이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니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지하철에서 내리자, 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할아버지의 전화
“그 말...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시연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교수님한테...” 강수희는 급히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우주 진료 보던 그 정신과 교수님. 그분이 직접 말했어, 네가 은범이한테 도움이 된다고.”“맞아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천천히 손을 빼냈다.“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원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거지, 제가 원치 않음에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아이... 너무 똑똑하네.’맞는 말이었다. 심재규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시연이 원할 경우에만’이라고.하지만 아들이 스스로 생을 끊으려 했던 그날 밤은 겪은 순간부터, 강수희의 모든 이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앞으로 치료받는 동안 은범이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이번엔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까?또 그다음엔? 그땐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강수희는 더 이상 아들의 생명을 ‘확률’에 걸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결국 시연이 곁에 있는 것이었다.“시연아... 너랑 은범이, 한때 사랑했던 사이잖니. 정말... 정말 이렇게 외면할 수 있어?”그 한마디로, 시연을 ‘사람 생명을 외면한 냉혈한’으로 몰아붙였다.‘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이 감정에, 죄책감에, 죄의식에.’하지만 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을 조용히 쥐며 입을 열었다.“제가 은범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은범이의 상태가 좋아지고, 나아지게 된다면... 좋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다음...?”“네, 제가 언젠가 자리를 뜨게 되면요?”급격히 표정이 굳은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엔, 안타까움도, 체념도 섞여 있었다.“사모님,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은범이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요.”“그... 그건...”강수희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려
지하는 여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걸음을 천천히 맞추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진아는 입을 벌렸다.‘세상에...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저 양반.’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좋았어, 이거 한 장만 박제해 두자. 다음에 또 장난치면 바로 보여줘야지.”그녀는 그 장면을 확대하여 정확히 프레임에 넣었다.찰칵- 사진을 찍고는 핸드폰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여자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나, 저 여자 어디서 봤지?’...그 시각, 시연의 집.시연은 느지막이 일어나, 진아가 남겨두고 간 국을 데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시연아! 은범이가 깨어났어!]“정말요?”시연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정말 다행이에요. 어때요? 상태는?”[훨씬 나아졌대. 교수님도 그러시더라, 기적 같다고.]‘진짜로... 다행이다.’그 순간, 시연의 가슴 깊이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무거웠던 짐 하나가 내려간 듯했다.[시연아, 시간 괜찮으면 병원에 들러줄래? 은범이가 널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시연은 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확인할 건 해야지.’“네, 오늘 쉬는 날이라 금방 갈게요.”[정말? 정말 고맙다!]강수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우리 기다리고 있을게.]“네.”...병원.병실 앞. 강수희는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시연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얼굴이었다.“시연아!”그리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친근하게 웃으며, 팔짱까지 끼는 모습. 이전과는 딴판이었다.“어제 일은 잘 해결됐지? 고 대표님이랑도... 잘 풀었어?”너무도 티 나는, 의도된 질문.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문제없어요.”“그렇구나...” 강수희의 눈빛에 실망이 그대로 비쳤다. ‘생각보다... 잘 안됐구나’하는 반응이었다“그럼 들어가자. 은범이는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